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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EF] When People Are Big and God Is Small, 초벌 번역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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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사람들, 작은 하나님

제 1 장               
채워지지 않는 사랑에의 결핍

윌리엄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난 오랫동안 자존감(self-esteem)이란 걸 가져본 적이 없어요. 하지만 가끔 내 자신에 대해 만족스러울 때가 있다면, 그건 100달러 짜리 농구화와 60달러 짜리 운동복을 갖게 되었을 때 뿐이에요. 그게 없었다면 학교에도 가고 싶지 않았을 거에요.”
윌리엄의 다부지고 멋있는 모습 뒤에 신발이나 운동복에 의해 쉽게 좌우되는 자아가 있었다는 것을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그를 싫어하는 학생들이 이것을 몰랐다는 것은 무척 안된 일이다. 아마 그들이 알았다면, 그가 저지른 수많은 폭력의 희생자가 되는 것을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윌리엄이 현대판 삼손이라는 사실을 눈치 챈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삼손처럼 그의 힘의 근원은 신발에 있었다. 신발을 뺏을 수만 있다면, 그를 이길 수 있었다.
하지만, 월리엄에게 있어서 문제는 그의 신발이 아니었다. 문제는 월리엄에 대한 사람들의 시각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윌리암의 신발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그것과 관련해서 윌리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문제였던 것이다. 당신이 그 문제를 무엇이라고 부르든, 예를 들어 평판(reputation)이라고 부르든, 또래 압박감 (peer pressure)이라고 부르든, 기분 맞추기(people-pleasing)나, 공의존(codependency:중독의 일종으로 인간관계에 있어서 중독을 가리키는데 사용되는 단어)이라고 부르든 간에, 분명한 것은 윌리엄의 삶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점에서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었다.

이 문제에 대한 나의 개인적인 자각(awakening)은 내가 고등학교 졸업반이었을 때 일어났다. 친구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라는 생각 때문에 나는 항상 소극적이고 자의식이 강했다. 그렇지만 졸업식이 있기 전까지는 그것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졸업식에서 나는 상을 받게 되리라고 기대하고 있었지만, 사실 다른 한편으론 정말 상을 받게 될까봐 무서워 죽을 지경이었다. 
그 날, 강당은 2천 명이 넘는 고등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앉았던 뒷자리에서 단상까지는 족히 2, 3 킬로미터는 되는 듯 했다. 그 때 내가 가까스로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상을 받으러 연단 앞으로 걸어나가는 동안 같은 반 친구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것이었다. 걷는 모양이 우습게 보이지 않을까? 계단을 오르며 발을 헛딛지는 않을까? 바보같이 보이는 것은 아닐까? 설사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내가 좋아하고 있던 여자애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를 기도했다. 수상 후보였던 사람들이나 자기가 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날 어떻게 생각할까? 그들 대신에 내가 상을 받게 된 것에 대해 날 어떻게 생각할까? 수상 소감으로 짤막하게 뭐라고 말해야 할까?
나는 속으로 ‘오 하나님, 제발 상을 받지 않게 해주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여러 가지 상들이 발표된 후에, 교감 선생님이 최우수 수상자를 소개하기 위해 단상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 수상자에 대해서 간단하긴 하지만 다소 모호한 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정확하게 나에 관한 것이라 할 수는 없었지만, 일반적으로 내게도 해당되는 내용이었다. 나는 조바심이 나서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 받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누군가 눈치 챌까 봐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마침내 수상자의 이름이 발표되었다. “올해의 졸업반 수상자는........릭 윌슨입니다!”
릭 윌슨이라고?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가 수상자가 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아마도 당신은 내 반응을 상상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안도감이라고?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철저한 실패자라는 생각을 했다. 이제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사람들은 내가 상 받기를 바라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결국엔 다른 사람이 받고 말았다.  아아, 나는 얼마나 형편없는 패배자인가!
곧바로 나는 내 자신을 정당화시킬 변명거리를 찾기 위해 고심하기 시작했다. ‘올해 내내 공부를 열심히 했더라면 상을 받을 수 있었을 거야. 나는 확실히 능력은 있지만 단지 상 받기를 원하지 않았을 뿐이야. 또 나는 대기만성형이지 않은가? 대학에 들어가서 그 사실을 보여주고 말겠어...’ 하지만, 나는 여전히 교실로 돌아가기가 부끄러웠다. 참으로 딱하지 않은가!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 날의 일들은 계속 내 마음속에 떠올랐다. 그 때 나는 얼마나 엉망진창이었던가! 스스로를 돌이켜 보았다. 지금까지 나는 겁에 질린 것처럼 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또는 그들이 혹시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것에 크게 지배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것이 나의 문제였다. 하지만 나는 앞으로 어찌해야 할 바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내 자신에 관하여 발견한 것에 대해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 충분한 성경적 자료들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그 때 내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이런 일에 해결책이란 전혀 없다는 것뿐이었다. 이것이 내가 처한 상황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관점에 의해 지배되는 이러한 자의식(self-consciousness)은, 그것을 뭐라고 부르든지 간에 다소 조절될 수 있었을지는 몰라도 완전히 치료될 수는 없었다. 어쩌면 ‘다음번에는 잘 할 수 있을거야’라는 생각이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또한, 나는 이것을 아주 영리한 것이었다고 생각했는데, 내 마음에 떠올랐던 그 날의 여러 변명들 중의 하나에다가 교묘하게 살을 붙여서 그럴듯하게 꾸몄던 것이다. 난 잘 해낼 수 있었지만 원래 어떤 특별한 일을 위해 전적으로 노력한 적이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일에 성공하지 못해 자존심이 형편없이 구겨질 때면, ‘내가 정말 열심히 했다면 최고가 될 수 있었을 거야’ 라고 합리화를 하고는 했었다. 어쨌든 최소한 긍정적인 부분을 생각하면서 괜찮다고 스스로를 위로하곤 했다. 
전혀 해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그 날의 사건은 내 마음속에 한 문제를 던져 주었다. 그것은 자각(awakening)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 후, 나는 대학을 다니면서 학업과 운동 분야에서 약간의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내 마음속에 있는 괴물과 싸웠다. ‘만약 정말로 노력했다면 더 잘할 수 있었어‘ 라는 전략을 사용했지만, 이 괴물은 없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리스도인이었지만, 그 사실도 이 싸움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여전히 내 마음에는 이 괴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모든 거부당함과 실패함에 대해 너무나 뼈저리게 괴로워하는 것, 그리고 내게 주목하지 않던 사람이 나를 주목해주기를 바라는 생각들은 나라는 존재가 여전히 그 고등학교 강당 뒤편에 앉아 있던 실패자일 뿐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고 있었다.


 그리스도안에서 인정받음

신학교 시절에 몇 가지 변화가 있었는데, 첫 번째 변화는 신학교 첫해에 로마서 성경 공부를 인도할 때 일어났다. 나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로마서의 주제를 넘어서서, ‘다른 사람들의 시각에 대한 나의 의존성‘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 사이의 관계를 살펴보려고 했다. 그래서 이 로마서 성경공부는 특히 나의 상황에 적절한 것이었다. 내 생각은 (독창적인 생각은 물론 아니었지만) ‘나에 대한 하나님의 시각이 예수님의 완성된 구원 사역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나 자신을 다른 사람들의 시각의 기준에 맞출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죄인이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그분이 자신의 목전에서 나를 의롭다고 여기셨는데, 도대체 다른 사람들의 나에 대한 시각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내가 필요로 했던 자유인 것 같았다. 나는 마치 내가 다시 회심한 것처럼 느꼈다. 나는 다른 사람의 시선에 대해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나는 단지 나에 대한 하나님의 시각에만 관심을 가지면 되었다. 그럴 때, 나는 사랑 받는 아들이었다. 거룩한 성도였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모든 것이 인정받았다.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하지만, 그 후로도 몇 년간 나는 여전히 다른 사람들의 시각에 대해 과민 반응을 보였다. 그렇지만 그럴 때마다 재빨리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굳이 나 자신을 맞출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상기시키곤 했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든 그것이 무슨 상관인가? 나는 내 자신을 설득하려고 무척 애를 썼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단한 존재로 생각하지 않으면 어떤가? 예수님이 이루신 것 때문에 나는 이미 인정을 받았는데..... 예수님이 나를 훌륭하다고 생각하신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닌가?
나는 정말 내 방법이 효과가 있다고 생각했다. 의심이 들 때는 단지 몇 번 뿐이었다. 그러면서 때때로 이렇게 생각하곤 했다. ‘나는 정말 그리스도 위에 서 있는걸까, 아니면 나의 성공과 다른 사람들의 호의적인 시각 위에 서 있는걸까?’ 어쨌든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내게 긍정적이었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비교적 좋게 생각했기 때문에, 나도 내 자신에 대해 좋게 생각했던 것 같다. 아니면,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운동을 잘 하고 학업 성적도 좋았기 때문에 내 자신을 좋게 생각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또한, 다른 사람들의 낮아 보이는 영적 목표들을 내 자신의 목표들과 비교하면서 그 원대한 사역의 포부에 대해 자부심을 느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제일 좋은‘ 사람이 되거나 아니면 최소한 내가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에서 나의 정체성을 찾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잘 대해주어서 그들의 기분을 맞추는 사람(people-pleaser)들 모두가 반드시 좋은 사람들은 아니지 않은가?  결국, 나는 여전히 다른 사람들의 시각에 지배를 받고 있는 듯 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별 어려움이 없었기 때문에, 스스로를 더 돌아 볼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이것에 대해서 다른 어느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누지 않으려고 했다. 이런 것들에 대해 말하는 자체가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나는 결혼을 하게 되었다.


대각성(Great Awakening)

결혼생활은 내게 있어서 축복이자 특권이었다. 또한 그것은 놀라운 깨달음의 상황을 제공해 주었는데. 즉,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받고 있음(being okay in Christ)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었다. 처음 결혼했을 때, 나는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내도 역시 나만을 절대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사랑하길 원했다. 나는 그녀의 사랑을 ‘필요로’ 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거부하는 것은 견딜 수 있었지만, 내가 필요로 하는 사랑을 그녀로부터 받지 못할 때에는, 완전히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나는 무조건적인 사랑 (unconditional love)을 원했다. 만약 내 아내가 나를 훌륭한 남편으로 생각해 주지 않았다면, 아마 나는 지금쯤 비참하게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고, 늘 화를 내는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결혼의 상황은 나를 두 번째 자각(awakening)으로 인도했다. 갑자기 나는 끊임없이 나를 채워줄 사랑을 찾는 사람, 즉 걸어다니는 사랑을 담는 통(walking love tank)으로 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 내 아내는 내게 사랑을 어느 정도 줄 수 있는 능력은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나를 가득 채워줄 수는 없었다. 나는 ‘사랑을 담는 밑빠진 통(a love tank with a leak)’ 이었던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결혼 전에 효력을 발휘했던 과거의 성경적 해답들을 찾아 보았다. 그러나 별 소용이 없었다. 그 해답들은 충분치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실생활에서 그것들은 거의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그렇게도 해답을 찾고자 했던 노력들은 예전에 내가 어떤 여학생에게 정중하게 채인 뒤에 부모님이 ‘그래도 우리는 널 항상 사랑한단다‘라는 말로 실의에 빠진 나를 위로하려고 애쓰시던 때를 생각나게 했다. 항상 그분들의 노력에 감사한다. 그러나 모든 부모와 자녀들이 익히 알고 있듯이, 그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를 않았다. 분명히 부모님이 나를 사랑해준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리고 그분들이 나를 사랑해주지 않았다면 상황은 훨씬 더 비참해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를 사랑해줄 수 있는 그 누군가를 계속해서 원하고 있었다.
그 후, 나는 같은 처지에 놓인 수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사랑을 필요로 한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어떤 다른 것을 필요로 한다. 그 결과, 그들은 타인에 의해 속박되고 조정을 받게되며 공허함을 느끼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을 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또는 그 무엇에게 지배를 받게되는 것이다.
분명, 당신도 자신이 필요로 하는 사람 또는 그런 물건에 의해 지배를 받게 된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에 직면하게 됨

나와 대화를 나누었던 대부분의 사람들 역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지배한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에 동일한 자각(awakening)을 하게 되었다. 그들은 성경적인 용어로 ‘사람에 대한 두려움’(fear of man)이라 불리는 마음의 형태가 자기 속에 있음을 깨달았다. 비록 그들이 자신들은 하나님을 진실하게 경배하는 자들이라고 말하지만, 그 내면에서는 다른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것은 (가끔 정말 그런 경우도 있긴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공포감이나 무서움을 느낀다는 말이 아니다. 성경적 의미의 ‘두려움(fear)’은 훨씬 넒은 의미의 말이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뜻하긴 하지만 더 나아가서 사람에 대한 경외감에 사로잡히는 것, 사람에 의해 지배당하거나 종속되는 것, 사람을 숭배하는 것,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의탁하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것까지 포함한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유의할 것은, 성경적으로 ‘두려움(fear)‘이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듯이 ’사람(man)‘이라는 단어 또한 그렇다는 것이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남자, 여자, 그리고 아이들까지도 포함한다. 이 책에서 성경적 표현인 ’사람에 대한 두려움(fear of man)‘이란 말을 사용하는 것은 이 책의 초점이 남성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이 책은 성경에서 나타나듯이, 우리 삶의 모든 사람이 잠재적으로 우리를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에 대한 두려움’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는데, 즉 우리는 하나님 자리에 사람을 올려놓았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대로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물론 ‘사람에 대한 두려움‘은 다른 명칭으로도 사용된다. 이것은 청소년들에게는 ’또래 압박감(peer pressure)‘이라 불리고, 성인들에게는 ’기분 맞추기(people-pleasing)‘라고 불린다. 또한, 최근 들어서는 ’상호 의존성(codenpendency)‘이라고 불려지고 있다. 이와 같은 분류들을 감안할 때, 우리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모든 연령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또래 압박감’에 시달린 적이 있는가? ‘또래 압박감(peer pressure)’은 간단히 말해 ‘사람에 대한 두려움‘의 완곡한 표현이다. 만약 당신이 어렸을 때 이것을 경험했다면 지금도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아마도 좀더 어른스런 방식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아니면 당신의 자랑스러운 이력(다른 사람들에게서 인정받은 사회적인 성공)에 의해 위장되어 있을 수도 있다.

-당신은 지나치게 헌신적인가? 일반적인 통념으로 볼 때 분명히 거절을 해야 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거절하지 못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사람에 대한 두려움’의 또 다른 표현인 ‘사람들의 기분을 맞추는 자(people-pleaser)‘이다.

- 당신의 배우자로부터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는가? 당신의 배우자가 당신의 말을 경청해주기를 원하는가? 혹은 존경해주기를 ‘필요’로 하는가? 여기서 주의 깊게 생각해야 한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배우자간에 좋은 대화와 상호 존경이 있을 때 기뻐하신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런 식의 ‘필요’는 하나님의 형상을 간직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와는 거리가 먼, 전혀 다른 것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당신이 결혼의 헌신에 대한 성경적인 요소들을 분명히 이해하지 않는다면, 당신의 배우자는 당신이 두려워하는 존재가 될 것이다. 당신의 배우자가 당신을 지배하게 되고, 당신의 삶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자리를 소리 없이 차지하게 될 것이다.

- 자존감(self-esteem)이 당신에게 있어서 중요한 관심사인가? 그렇지만, 이 표현도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나타내는 완곡한 표현이다. 만약 이 자존감이 당신에게 반복되어 나타나는 주제라면, 당신의 삶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의 주변을 맴돌 가능성이 높다. 당신은 그들의 의견을 숭상하거나 혹은 두려워하는 것이다. 또한 자기 자신의 편안함과 현상유지를 고수하기 위해 그들을 필요로 한다. 당신은 자기 자신을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 당신은 자신이 뭔가 부족한 자(imposter)처럼 드러나는 것 같다는 느낌을 가질 때가 있는가? 특히 사업가들이나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더 이런 느낌을 갖는다. 적나라하게 노출된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일종의 사람을 두려워한다는 표현이다. 이는 다른 사람들의 시각이, 특히 당신을 실패자라고 부를 수 있는 의견이 당신을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당신은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지 두려워서 항상 이미 내린 결정들을 재고하는가?  다른 사람들에게 망신당하는 실수를 하게 될까봐 늘 두려워하고 있는가?

- 공허함과 무의미함을 느끼는가? 당신은 스스로를 ‘사랑에 굶주린 자’(love hunger)라고 느끼는가? 여기서 다시 한번 언급하는데, 만약 당신을 채워줄 다른 사람을 늘 필요로 하고 있다면, 그 사람에게 지배당하고 있는 것이다.

- 당신은 쉽게 부끄러움을 타는가? 만약 그렇다면, 사람들의 존재 자체와 그들에게서 나온 의견들이 어떤 식으로든 당신을 결정짓고 있다는 말이다. 혹은, 성경적 언어를 사용하자면, 다른 사람들의 지배를 받게 되는 한계에 이를 때까지 그들의 의견을 너무나 추종하고 있다는 것이다.

- 거짓말을 해본 적이 있는가? 그 중에서도 특히 악의 없는 거짓말을 해본 적이 있는가? 거짓말은 아니지만 교묘하게 ‘은폐(cover-up)’를 해본 적은 있는가? 거짓말하는 것이나 기타 다른 은밀한 일들은 보통 다른 사람들 앞에서 우리를 더 낫게 보이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된다. 또한 이것들은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부끄러움을 숨기기 위해 사용되기도 한다.

- 다른 사람을 질투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그들과 그들의 소유물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것이다.
 
- 다른 사람들이 가끔씩 당신을 화나게 하거나 좌절되게 만드는가? 혹은 미치게 만드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들은 당신의 삶의 중심을 어떤 식으로든 지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당신은 사람들을 피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사람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더라도, 아직 그들에 의해 조정되고 있는 것이다. 숨어사는 사람은 사람에 대한 두려움에 지배당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 분명히 괜찮아 보이는 데도 굳이 다이어트를 하려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다른 사람들에게 돋보이기 위함이 아닐까?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고자 하는 욕망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리 위에 사람을 올리는 모습 중의 하나이다.

- 위의 모든 질문들이 당신에게 전혀 해당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것을 생각해 보라.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할 때, 당신은 기분이 좋은가? 아마 ‘사람에 대한 두려움‘ 중에서 가장 위험스러운 형태는 이러한 비교의식을 성공으로써 이겨내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성공했다고 생각하고 안도한다. 그들은 분명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가진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 자신에 대해서도 만족한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여전히 하나님이 아닌 사람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일반적인 문제

우리들은 이러한 문제들이 부끄러움을 잘 타고 소심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될 것이라 생각해서는 안된다. 화를 잘 내거나 남을 위협하는 스타일의 사람 또한 다른 사람들에 의해 조정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남보다 앞서고 싶어하는 모든 모습에 이 문제가 적용된다. 한 기업의 간부가 그의 부하보다 앞서기 위해 더 필사적으로 일하는 것은 어떤가?  어떤 단체의 이사회에서 나타나는 모습일 수 있는 끝없이 자기 주장을 내세우는 것도 사람을 두려워함으로 나타나는 공격적인 모습이다.  스스로에 대해 만족하고 있을 것 같은 유명 스포츠 스타들은 팬들이나 스포츠 기자들의 반응에 개의치 않는 것 같은가? 내겐 어느 누구도 필요 없다는 강한 확신조차 우리들이 지금까지 살펴본 소심한 사례들과 마찬가지로 결국 사람을 두려워한다는 증거이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은 위의 형태들이나 또는 다른 형태들로 나타난다. 
당신의 모습은 아직까지도 이러한 형태의 범주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전도’라는 한 단어를 생각해 보자. 다른 사람이 당신을 ‘비이성적인 바보’라고 생각할까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을 꺼린 적이 있는가?
이제 당신도 사람을 두려워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은, (만약 누가 이것을 부정한다면 그가 제정신인지 살펴봐야 할 정도로), 인간의 마음에서 부인될 수 없는 분명한 한 부분이다. 우리는 공의존(codependency)에 관한 수많은 책들을 쏟아낸 새로운 혁명 속에 살고 있다. 수년간 ‘공의존’이라는 단어를 가진 모든 책들은 전부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예를 들면, 멜로디 비티 (Melodie Beattie)의 ‘공의존의 종결’(Codependency No More)은 수백만 부가 팔렸다. 멜로디는 분명히 많은 사람들에게 중요한 의미가 될 만한 주제를 다루었다. 그러나 그것은 근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두려움(the fear of man)’이란 주제를 세속적인 시각으로 본 것이다. 멜로디 비티는 자신의 책에서 다른 사람들에 의해 지배되거나 그들에게 의지하는 것을 문제점으로 지적하며, 이에 대한 해결책은 자신을 더 깊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다.


성경적인 해답을 찾아서

복음주의 입장에서 볼때 멜로디의 방법은 다소 피상적으로 들린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말하기를, 공의존(codependency)에 대한 더 나은 치료법은 당신이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더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라 말한다. 즉,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으로 채우실 수 있기에, 당신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채워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분명 이것은 자신을 더 사랑하라는 권면보다는 낫다. 그러나 이것도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역시 불완전하다. 분명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의 어떤 고난에도 깊이 있는 해답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가끔씩 이러한 깊이 있는 진리를 희석시켜서 사용한다. 예를 들어, 때때로 성경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의 이해부족 때문에, 하나님에게서만 사랑을 더 받으면 된다는 생각은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빌 2:3)라는 성경의 명령을 무시해 버리며, 또한 개인적인 회개도 간과해 버린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자신과 우리의 필요를 이 세상의 중심에 놓게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우리의 자존감을 한층 부풀려주는 일을 맡은 정신적 심부름꾼 정도로 생각한다.
우리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경험하는 이러한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정말로 이해하기 위해서 성경을 더 연구해야 한다. 이 책의 목적은 바로 그 연구 과정을 밟기 위함이다. 이 과정 속에서 우리는 아브라함과 베드로 같은 이들을 만나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수렁에 빠졌으며, 다른 사람들도 그 속에 끌어들였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두려움(fear)이 나타나는 교묘한 방식들을 살펴볼 것이다. 그러고 나면, 이 문제가 ‘전국적으로 퍼지는 유행병‘이라고 말한 ‘공의존’에 관한 저자들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게될 것이다.  그런 다음에 하나님의 해결법을 찾을 것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주제들을 살펴볼 것이다.

- 사람에 대한 두려움의 근원을 정말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질문들을 물어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떻게 하면 나에 대해서 더 좋은 느낌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지배를 받지 않을까?’ 대신에 더 좋은 질문은, ‘나는 왜 자존감(self-esteem)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또는 ‘왜 나는 나를 훌륭하다고 생각해 주길 원하는 다른 사람을(심지어는 예수님까지도) 필요로 하는가?’이다. 이런 것들은 이 책을 통해서 우리가 여러  각도로 살펴볼 주제들이다.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찾는 방법중의 하나는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시간을 더욱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왜?’ 그리고 ‘어떻게?’ 그러한지 알아보게 될 것이다.

- ‘사람에 대한 두려움‘의 가장 근본적인 치료법은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 (the fear of the Lord)이다. 당신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사람들보다 더 커야만 한다. 이 치료법이 효력을 발휘하기까지는 수년이 걸린다. 아니, 사실 어쩌면 우리의 평생이 걸릴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을 공부함으로써 치료의 과정에 가속도가 붙고 더욱 성숙되어지기를 바란다.

- 다른 사람들에 관한 한, 우리의 문제는 그들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랑하기’보다는, 우리 자신을 위해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긴 사명은 우리가 그들을 덜 필요로 하고, 오히려 그들을 더 많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다루기 위한 방법들을 찾기보다는 그들을 향한 우리의 의무가 무엇인지 하나님께 물어 봐야 한다. 이러한 관점이 저절로 생기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완전히 이해하게 되기까지는 여러 각도에서 이 진리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 확신하는 바는 ‘그들을 섬기는 길이 진정한 자유의 길’이라는 진리가 성경에서 말하는 또 하나의 ‘신적 역설 (divine paradox)’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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