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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EF] Age of Opportunity 초벌번역본

  age.hwp 240.2K 0 7년전
기회의 세대

십대를 양육하기 위한 성경적 안내


by Paul David Tripp
김 종성 역




< 목 차 >


 서언

1부 - 파편들을 치우다

 1.  생존을 위한 시기 또는 기회의 세대
 2.  누구의 우상들이 거기에 있는가?
 3.  가족이란 무엇인가? 정의
 4.  가족이란 무엇인가? 사역묘사
 5.  부모들이여, 당신의 십대들을 만나라

2부 - 경건 목표들을 세우다

 6.  목표들, 영광 그리고 은총
 7.  전쟁이 시작되다
 8.  확신들과 지혜
 9.  현실적 세상에서의 삶
 10. 하나님을 향한 마음
 11. 가정을 떠남

3부 - 십대양육을 위한 실제적 전략

 12. 십대양육을 위한 세 가지 전략
 13. 큰 변화에 대한 작은 발걸음들
 1부 - 파편들을 치우다

1.  생존을 위한 시기 또는 기회의 세대 ?

 그것은 우리들 주변 어디에나 - TV의 시트콤에서, 수퍼마켓의 잡지판매대에서, 동네책방의 선반 위에도, TV나 라디오 토크쇼에서도, 그리고 심지어 가족에 대한 크리스천 서적회원에서도 있다. 부모들은 그들의 십대들을 두려워한다. 도리어 그들의 유년시절을 즐거워하고, 자신들의 어깨 위에서 무서워 떠는 가장 험한 모습을 보기 원하면서도 그저 몇 년간의 이 귀여운 자녀가 하룻밤 새 갑자기 괴물로 바뀌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앞에 놓여있는 위험들을 알며 십대 시기의 어두운 골짜기를 지나 온 부모들로부터 많은 이야기들을 들었다. 그들은 가장 최악을 예상하며, 만약 그들이 골짜기를 무사히 잘 지나게 되고 그들의 십대들과 같이 그리고 그들의 가정이 손상되지 않게 된다면 감사하다고 말했다.
 나는 최근에 결혼에 관한 세미나에서 십대들이 이런 모습을 만나게 되었다. 그때는 모든 일 가운데 놀라운 주말이 되었다. 교육은 약속하는 것, 범죄, 용기를 주는 것 등이다. 음식과 숙박시설은 최고였고, 세미나 장소는 아름다운 해변에 위치해 있었다. 주말이 끝나갈 즈음에 나는 해변 수면 위에 반짝거리는 해를 보려고 나갔을 때 한 남녀가 같이 근처에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매우 불행해 보였다.
 나는 호기심이 일어났고 그래서 그들에게 주말을 즐겁게 보내기를 원하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모든 것은 좋다고 했다. 나는 그들에게 매우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여자가 말하기를, “우리는 둘 다 십대인데 집에 가기가 무섭다. 우리는 이 주말이 영원한 마지막이기를 바란다.” “당신은 지금 막 당신의 십대가 반항자가 되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모두가 그렇다.” 그녀의 남편이 덧붙이기를, “당신은 지금 그것을 극복해야한다.”“게다가”, 그러자 여자가 꿍꿍거리며 말하기를, “당신은 성질(hormones)로만 말하지 마라.”
 나는 자녀들이 살고 있는 이 시대에 대해 우리가 생각하는 방법에 근본적으로 어떤 것이 잘못되었는지 깊은 인상을 받으며 길을 걸어갔다. 어떤 것은 우리의 십대들에 대한 냉소와 두려움에 관한 문화적 유행으로 본래적인 잘못이 있다. 어떤 것은 부모의 높은 목표가 생존일 때 잘못이 된다. 우리는 다른 시각을 가져야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아이들의 삶의 시기에 대한 성경적 안목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양육(돌봄)과 성경적 소망에 대해 성경적 전략으로 인도하지 않느냐?
 우리는 십대들에 대한 냉소주의로 잘못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문화 속에 있는 유행은 무엇인지 검증할 필요가 있다.

십대에 대한 성경적 안목
 우리는 자주 십대들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마치 그들이 성장하는 피부 속에 격함과 반항의 호르몬(기질)을 모으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으로 여긴다. 우리는 십대가 이십대가 될 때까지 우리가 살아있기 위해서는 이 호르몬들을 어떻게 감출 것인가에 우리의 목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최근에 어떤 부모는 그녀의 아들이 이십대가 되었다고 기쁘게 내게 왔다. 마치 그 아들은 어떤 마술 동굴을 잘 통과하여 위험에서 안전하게 된 것처럼 그녀는 “우리가 그것을 해냈다.”라고 했다.
 이 생존심리는 십대에 대한 빈약한 안목을 드러내고 있다. 많은 부모들은 자신들의 십대자녀들이 소망 없이-그들은 그들을 미치게 만드는 호르몬의 희생자들같이 - 말한다고 내게 말했다. 비록 그들이 이것을 결코 말하지 않았을지라도 이 관점 뒤에 있는 성경의 진리요, 복음의 능력이요, 성경적 전달수단이며, 그리고 경건한 교제가 되는 실천신학은 십대들과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 있고, 효과적이라는 것을 믿는다. 만약 어떤 미숙한 사람이 그것을 13살과 19살 사이에 있는 아이들에게 적용하려고 애쓰는 것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우리는 지금 심지어 “십대前(pre-teen)”이라고 불리우는 범주까지도 다루어야할 판이다. 이들은 그들의 추한 머리를 곧추 세우며, 성장하기 시작하는 십대들의 괴물의 캐릭터를 갖는 시기이다.
 우리는 의미심장한 신체적 변화 때문에 그들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그러나 본질적으로 도달할 수 없는 십대들을 그들이 말하는 관점으로 위로할 수 있을까? 자신들을 신체적 강제의 희생양이 되게하면서도, 자신들의 선택과 행동에 대한 책임에서는 벗어나고 싶은 십대들한테 우리는 그들 기질의 안목으로 위로를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정말 믿는 자에게 생명과 소망을 주는 그 진리들을 믿는 우리들이 십대들의 관점을 가지고 그들에게 접근할 수 없는가?

특별한 희생과 고통
 딤후2:22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라”고 타일렀다. 이 재미있는 작은 구절이 우리가 십대에 관해 생각하고, 우리가 이런 삶의 시간을 정의하는 것에 균형을 준다. 한편, 성경은 이 삶의 시기에 대해 고지식하지 않도록 도전을 준다. 이 시기에는 젊은이들을 유별나게 미치게 하는 욕망들, 독특한 힘을 가진 유혹들이 있다. 이것들은 만나지 않으면 안된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전략적이 되라고 명령하고 있으며, “이런 삶을 사는 동안 사람을 꽉 잡고 있는 악한 정욕들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묻도록 한다.
 같은 시기에 바울은 “청년”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왜냐하면 삶의 각 단계는 그에 맞는 유혹을 가지고 있다. 유년 때, 청년의 때, 노년 때의 유혹 등은 동일하지 않다. 십대들의 유혹들은 특별하게 야만적이거나 엄한 것이 아니다. 각 시대 각 사람의 인생이 만약 그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한다면, 바라보고, 기도하고, 바르게 서고, 그리고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싸워야 한다. 십대 때는 젊은이들 특징의 유혹들에 대항하는 안내를 받아야하며, 반면에 어른들은 어른에 해당하는 유혹들에 대해 안내를 받아야한다. 그 시대의 각 사람들은 이 타락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써 각 시대의 전쟁터를 받아들여야한다.

신체 또는 마음의 싸움?
 디모데후서 본문은 또한 그것을 청년의 싸움이라고 지정하고 정의한 것으로 유용하다. 거기에는 젊은이들의 삶 속에 격한 싸움이 있지만 신체적 싸움은 아니다. 그것은 강한 영적 전쟁이며, 마음의 싸움이다. 이것은 엄밀하게 바울이 우리로 하여금 그가 권한 것같이 알기를 원한 것이다. 디모데는 그의 마음을 악한 정욕에 의해 지배되도록 두지를 않았다. 이 전쟁은 특별히 십대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것은 모든 죄인들이 갖는 싸움이다.   
 그 시대가 어떻든지 모든 죄인들의 성향은 바울이 롬1:25에 언급한대로 잡혀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는데서 피조물을 경배하려는 섬김의 대상을 바꾸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자기 동년배들에 대한 자기 신념을 잊어버린 십대들의 삶 속에 있고, 또한 그것은 전문적인 성공의 영적 우선 순위와 가정을 타협하는 어른들 속에도 강하게 상존하고 있다. 싸움, 바울이 그것을 이해한대로 그것은 마음의 싸움이며, 삶을 이끄는 마음을 지배하는 것이기 때문에 극적으로 중요하다.
 거기에는 십대들을 환영하는 마음의 의미심장한 유혹들이 있으며, 그것들은 십대들에게 어떤 피조물의 상태 없이는 한 순간도 살 수 없다는 확신을 심어주고 있다. 이 소리들은 십대들을 창조자보다 오히려 피조물 속에서 발견되는 본성, 의미, 목적 등을 믿도록 부르고 있다. 거기에 바뀌어진 삶이 십대들의 아귀다툼으로 혼잡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신체적 두려움과 생존심리 때문에 감히 그들을 놓치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 각 사람들을 우리가 주님만을 섬기도록 하기 위해 우리의 죄된 욕망들로부터 해방시키려고 오셨음을 믿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우리의 십대들을 포함하고 있다.

 부모들의 갈등
 십대들의 소란은 그들의 행동과 태도뿐 아니라 그 만큼 부모들의 사고, 욕망, 태도와 행동 속에도 있다. 십대들이 우리에게 힘겨운 것은 그들이 우리 안에서 가장 나쁜 것을 내놓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이 말한 것을 그들이 결코 생각하지 못하면서 그들 스스로 말한 것을 부모들이 듣는 시기이다. 부모들은 십대들 스스로가 비난들에 대해 되 받아치며, 조작하는 범죄, 최종의 말들, 그리고 상상할 수 없는 분노로 반응하는 것들을 발견한다. 이들의 시기에 부모들은 자녀로써 그리고 자존심과 환희의 커다란 자원으로써의 십대들과 관계하고 있을 때에 당황함으로 고민하게된다. 십대들에 대한 고민이 오직 십대의 신체와 십대의 반역에 관한 것만은 아니다라는 고백이 우리를 위해서는 중요하다. 이 시기가 우리에게 어려운 것은 그들이 우리가 가진 마음들의 나쁜 생각과 욕망들을 노출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우리가 인식해야할 원리들이 있다. 나의 어머니는 그것을 이렇게 말했다. “술로부터는 나오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거기에는 처음부터 없다.” 이 시기가 우리에게 힘든 것은 그들이 우리를 노출시키고 커텐을 벗겨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왜 시련이 어려운 것인지를 말하는 것이며, 아직도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것이 그렇게 유용한 것이다. 우리는 시련의 순간에 급진적으로 변화하지는 않는다. 그렇다. 시련은 언제나 우리가 무엇하고 있었는지를 드러낸다. 시련은 우리가 어떤 다른 면에 소경(맹목적:無知)이 되었는지 밝혀낸다. 그래서 역시 십대들도 우리의 자기공로, 조바심, 용서하지 않는 영, 사랑의 봉사결핍, 믿음의 연약함, 그리고 편안함과 위안에 대한 갈망 등을 접하게된다. 
   
왜 우리는 기회를 놓치는가
 나는 최근에 내 사무실에서 아들을 둔 아버지와 같이 앉아 있었는데 그는 자기아들 때문에 너무 화가 나있으므로 그가 행한 것은 아주 정중한 것이었다. 그는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만나시려고 특별한 환경에 둔 그의 아들 안에 있는 중대한 영적 필요들을 보지 못하였다. 그들 사이에는 애정이 없었고 심지어 따뜻한 우정도 없었다. 하나를 지적하자면, 아버지는 그의 기록카드에 자기 아들에게 말하면서 얼굴을 붉혔다. 그는 그의 아들이 있는 의자에 가서 실패기록카드를 그의 얼굴에 던지면서, “결국은 내가 너를 위해 해야할 일을 어떻게 감히 네가 나에게 할 수 있는가!” 그에게는 실패된 나쁜 점수가 개인적인 모욕이었다. 그는 그가 그렇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그 일을 했다; 지금 그의 아들은 자기의 일을 잘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런 아들 때문에 그는 화가 나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하나님을 대항한 죄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화난 것은 그의 아들이 그를 매우 큰 가치로 여긴 아버지로부터 일들(평판들)을 없애 버렸기 때문이다. 그의 평판은 존경받기에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크리스천 아버지로써, 그리고 그가 어른으로 훌륭하게 될 것을 안심하며 생각하였다.
 거기에는 사역의 자세가 없고, 기회의 감각도 없고, 그의 아들에 삶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부분적인 탐색도 없었다. 대신에 그는 약4:2절“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에 있는 것처럼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가 논의한 바 있는 문화적 냉소주의는 우리가 ‘십대는 누구냐’라고 생각한 것과 ‘그들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생각에 기초되어 있다. 우리는 거기에서 우리가 이 세대들을 위해 좀 더 생산적인 것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도리어 그 문화는 말하기를, 우리는 부모들의 온전함과 결혼의 안정을 보호하고, 그리고 自虐의 위험만큼 또한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부터 십대를 보호하는 생존에 대한 적극적 전략을 제안해야한다고 한다.
 그러나 내 경험은 부모들이 인식하고, 자립하고, 고백하고 그리고 그들의 고집 센 잘못된 마음자세, 그들에게서 나온 나쁜 행동을 고치면 그 결과는 그들이 그들의 십대와의 관계 속에서와 그리고 그들이 십대의 고민들을 본 것에서 특징적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십대들을 향한 시각으로 볼 때, 우리는 그들이 오직 우리들의 아이들뿐 아니라 또한 우리들 자신들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겸손하게 기꺼이 변화할 의지가 있는 부모들은 그들 스스로가 변화를 위한 하나님의 도구들이 된다.

더 나은 방법
 우리들의 사춘기로 간주되는 문화에서 대대적인 냉소주의를 거절하는 것은 우리를 위한 기회이다. 목표 없거나 열매 없는 고민의 시대보다 도리어 이들은 새로운 기회의 시대인 것이다. 그것들은 양육의 황금시기이며, 당신이 그들의 삶에 씨를 뿌려 모든 열매를 거두기 시작할 때, 진리를 습득하고 열매를 위해 자신을 준비시키는 당신의 십대를 도울 수 있을 때, 어른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사는 것이다. 이것들은 식견 있는 질문의 시기이며, 전에는 결코 있을 수 없는 놀라운 토론의 시대이다. 이것들은 십대들의 진실한 마음이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실패와 고민의 시기이다. 이것들은 매일의 사역과 위대한 기회가 되는 시기이다.
 이것들은 단지 생존하려고 있는 시기가 아니다. 그것들은 소망의 감각으로 그리고 임무(해야할 일:mission)의 감각으로 접근될 수 있는 것이다. 거의 모든 날들이 당신의 십대를 소망과 도움과 진리의 삶으로 들어서게 하는 새로운 기회를 가져온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포기하여 관계가 더 멀어지게 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이전에 전혀 없었던 우리자녀들과 연결하는 때이다. 이것들은 위대한 기회의 때이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이 말하고자하는 내용이다. 이것은 기회와 소망의 책이다. 그것은 냉소와 두려움의 벙커에서 나와 빛으로, 또한 우리가 우리자녀를 양육하듯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가지신 계획들을 찾는 것으로써 우리를 위한 때이기도 하다. 이것은 행위, 목표 그리고 실천적 전략에 관한 책이다. 이것은 성경의 진리들이 십대들에게 강하게 적용할 뿐 아니라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적용할 수 있음을 믿게 하는 책이다. 
 동시에 이 책은 단순할 수 없다. 십대들은 자주 다툼, 고민, 우울의 냉소적인 이들이다. 그들의 때는 새로운 유혹의 시기이며, 시련과 시험의 시기이다. 아직도 많은 갈등들과 다툼과 시련과 시험들이 그런 놀라운 양육의 기회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변화의 때를 인식하는 것
 때는 겨울의 화요저녁이었다. 나는 종일 상담 약속들을 마치고 그 저녁에는 세 시간 동안 가르치기도 했다. 나는 저녁 10시 즈음에 집을 향해 운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 시간 가량 꿈속에 있었는지, 혹은 잠에서 깨기 전 긴장이 풀렸든지 했다. 나는 몇 가지 설명할 수 없는 이유들로 인해 묵상하며 소망하였고, 식구들은 이미 저녁 9시경에 잠이 들었다. 만약 그들이 잠이 들지 않았다면, 나는 그들이 내가 피곤하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고 나를 방해하지 않기를 바랬다. 나는 그 날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겼다고 판단했다. 확실히 하나님은 내가 삶으로부터 펀치를 잘 날렸다고 동의하신 것 같다. 나는 시원한 다이어트 콜라 한 잔, 신문, 그리고 리모콘 등이 있는 빈 거실에서 꿈을 꾸고 있었다. 나는 (모든 것을)속속들이 규명했고, 나는 편히 쉴 수 있었다.(당신은 내가 사역의 욕심 없는 자세로 집에 돌아 온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내가 부주의한 가운데 살금살금 기어오는 헛된 소망을 위해 조용히 문을 열었다. 거실에는 불빛이 있었고, 집안은 조용했다. 나는 소망으로 가득했다. 아마도 나의 꿈들이 사실로 찾아 온 것처럼 내 전신에 긴장이 풀렸다! 내가 화난 큰 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門안에 한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나의 마음은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마치 내가 그 소리를 안 들은 것처럼 행동하기를 원했다. 그 소리는 내 십대 아들 에단(Ethan)의 소리였다. 나의 실망은 순간 분노로 변해 버렸다. 나는 그를 움켜잡고 말하려고 했다. “오늘 나의 하루가 좋았던 것을 너는 알지 못하느냐? 내가 지금 얼마나 피곤한지 알지 못하느냐? 내가 지금 필요했던 지난 일은 너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너는 이것을 스스로 풀어야할 것이다. 나는 네가 네 자신 옆에 누군가 있음에 대해 한 번 생각하기를 바란다. 나는 너를 위하여 행하고 또 했으며, 이것은 내가 얻은 감사이다. 너는 나를 이 밤에 가만히 놔둘 수 없느냐?”
 이 모든 것들이 내 안에서 격분케 했지만 나는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나는 에단(Ethan)의 내뱉는 불평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는 항상 그의 형한테 한 것처럼 화가 나있었다. 그는 “인생이 폐물”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는 듯한 그의 형을 가진 것에 대해 악담을 하고 있었다. 시간은 저녁 10시를 넘었다. 일이 이슈화 된 것은 사소한 것이었다. 나는 그를 움켜잡고 그 일을 처리하려고 그에게 말을 하려는 유혹을 받았지만 다른 역할이 나를 끌어 당겼다. 여기에 예기치 못한 기회의 순간들 가운데 하나인 그것은 사랑과 구원의 하나님에 의해 정해진 흔히 있는 일들 중의 하나인데 거기서 나의 십대를 향한 마음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때는 좀 더 에단과 아버지의 시간이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때이며, 구속의 역동적인 순간인데, 그곳에서 하나님은 내 아들 안에서 지나간 시절부터 시작하신 구원의 사역을 계속하고 계신 것이다. 그 순간의 유일한 질문은 내가 하나님의 역할을 따를 것이냐 아니면 나의 역할을 할 것이냐 였다. 내가 그 때에 복음을 믿고, 내 아들이 인생 속에서 그가 나를 부르사 하게 하실 일을 위해 필요한 나를 주신 하나님을 믿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에단에게 거실 탁자에 앉게 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도록 하였다. 그는 미워했고 화나 있었다. 그의 마음은 탁자 위에 있었다. 우리는 그의 분노 전반을 이야기로 주고받는 동안 그는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의 형과의 사소한 말다툼이 사소한 것에서 멀리 있는 것까지 토론하도록 문을 열어 주었다. 하나님은 내게 힘과 인내를 주셨다. 그는 내 입에 올바른 말로 채워 주셨다. 에단은 그 밤에 새로운 자기를 보았고, 그가 전에 결코 인정하지 않은 일들을 고백하였다.
 내가 에단에게  잘 자라고 말할 때가 한 밤중이었다. 우리는 꼭 껴안고 침대로 갔다. 분명히 사소한 이슈를 넘어 맨 먼저 신경질이 나타나는 순간이 되는 것은 실제로 사역의 놀라운 기회이며, 사랑의 하나님에 의해 정해진 것이다. 그때는 에단을 변화시키시려는 유일한 하나님의 사역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는 먼저 나를 변화시키셨다. 내 마음의 육신적 기질은 그 저녁에 드러났고, 같은 시간에 육신적 기질은 그것들을 원하는 모든 십대들을 향하여 분노로 맹렬히 부모들에게 일어났다. 그리스도에 대한 나의 필요 역시 드러나 있었다. 나는 그의 능력이 없이는 그의 도구로써 일을 할 수 없음을 안다.

짧은 순간들, 거룩한 부르심
 나는 이 순간에 관한 기록을 하기로 했는데 그것은 평범한 일 중의 하나이지만 그것은 매일 일어나는 것뿐 아니라 어떤 날은 여러 번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순간들의 각자는 기회로 가득 찬 것들이다. 거기에는 많은, 사춘기의 극적인 순간들보다 더 많은 기회들이 마치 함축적으로, 약에 중독된 듯, 맹렬하게 그렇게 많은 압박들이 있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의미심장한 결정의 중요한 순간들로 끊임없이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인생에는 그런 것들이 많이 없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믿기지 않는 현재의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여기에서 우리가 두려움과 무서움의 시각보다 오히려 기회의 시각을 가지고 십대들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방금까지 신랄하게 불거져 나온 대화는 학교 가기 前 반시간 내내 아무 소리가 없었고, 그 리포트카드는 닦는데 쓰려고 청바지 주머니에 꾸겨 넣었으며, 부모의 “안돼”라는 토라진 얼굴이며, 한 달만에 세 번째 자동차 사고, 계속적인 불평의 소리, “모든 사람들도 하는데” 그리고 “나는 그들의 부모인데,..”  모든 것은 그밖에 다른 즐거운 삶의 방법에서 얻은 것보다 더 어떤 좋은 것처럼 보여져야한다. 이것들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려고 부모들을 만들어 가는 순간들이다. 당신은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할 하나님의 대리인이다. 당신은 놀라운 부르심을 입은 자이다. 당신은 이 자녀들이 하나님의 세계 안에서와 집으로부터 자신의 최종 인생을 살도록 준비와 도움이 돼야하는 하나님의 도구이다. 이 순간들은 당신의 삶을 가치 있는 시간으로 만들 것이다. 여기에 당신은 어떤 인생경력과 경제적 획득보다 더 대단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공헌을 하게 된것이다.

기회들을 인식하는 것
 더욱 나는 나의 십대아이들과 살았고, 그들의 또래들을 보았으며, 십대들을 가진 부모들에게 상호영향을 미쳤다. 더욱 확신하는 것은 이것이 굴레를 벗겨주는 기회의 때라는 것이다. 이 섬세하고, 겁 많고, 서투르고, 흥분하기 쉬운 때에 생기는 문제들은 기회를 가득 만드는 시기이다. 그것은 벙커를 향하여 머리를 틀어박는 때가 아니며, 가정 전체를 혼란으로 빠트리려는 가장 무서운 시나리오를 가진 시기도 아니다. 그것은 문화적으로 규정한 “세대차이”를 받아들이는 시기도 아니다. 이것은 당신의 십대를 향하여 몸짓하고 싸움에 뛰어드는 시기이다. 그것은 약속하고 상호영향을 미치고, 토론하고 그리고 관계를 수용하기 위한 시기이다. 이것은 십대들의 의심이나 두려움이나 실패들을 숨기려는 것을 용인하는 때가 아니고, 도리어 추구, 사랑, 용기, 가르침, 용서, 고백, 용인하는 등의 시기이다. 그것은 놀라운 때이다.
 내가 이것을 기록하는 동안 내 아내와 나는 세 명의 십대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부르심에 대한 감각을 전혀 갖지 못했다. 우리는 우리 아이들과 함께 웃고, 울고, 토론하고 기도했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그리고 그들을 위해 갈등했다. 우리는 기회로써 실패와 시련을 만났다. 우리는 언제나 믿음에 의존한 것은 아니며, 우리의 죄를 고백해야할 필요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에게 말하기를 이것은 가정생활의 놀라운 기회라고 하였다. 우리는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함으로 매우 행복했다. 우리는 심지어 미약한 노력과 연약한 믿음 가운데서도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거기에는 모든 십대를 가진 부모들이 쉽게 할 수 있는 기회에 대한 세 가지 근본적인 문들이 있었다. 이 문제들의 각각은 수년동안 십대들에게 나타난 진리들을 흡수한 그들을 돕는 방법들이다. 십대들의 문제는 불안정하다. 십대의 반항, 그리고 십대들의 넓어진 세상들은 실제로 하나님의 기회의 문들인데 거기서 부모들은 그 십대들의 삶에 있는 중심 주제들을 특별하게 입력해야한다.

십대들의 불안정
 십대들은 안정적인 사람들이 아니다! 십대들은 아침에는 안정적이다가 저녁에는 그것이 쉽게 허물어진다. 십대들은 침대에 가면서 아침 식사 전에 거울에서 보았던 자기를 보고, 고치고, 됐다 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의 머리가 그들의 몸보다 너무 크다고 확신한다. 십대가 안전하다는 것은 그가 마침내 일반적인 성인과 조금 유사한 자신이, 파티 때 당황해한 순간 때문에 그가 결국 사교적으로는 맞지 않는다고 확신하고, 생각한 룰(rules)들에 대해 충분한 이해가 되었다고 그가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 아들 에단(Ethan)이 15살 되었을 때 그는 오후에 낙담이 되어 왔다. 나는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그는 내게 매일의 일이며, 학교나 길에서 자기를 웃긴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는 “나는 나를 보고 웃으며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았다.”고 말했다. 그때는 그에게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 그는 빠르게 성장했다. 그는 그 자신과 그의 몸, 그의 모습에 대해 불확실했다. 그는 어른과 아이의 중간사이였다. 그는 자기 주변의 사람들에게서 자신의 불안전을 보호하려했다. 신체적 불안전의 이 시기는 복음과 사랑과 용기에 대해 많이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때는 그 십대가 질문을 홍수같이 하는 시기이다. 나는 누구인가? 지금 내가 괜찮아 보이는가? 삶은 왜 그렇게 혼란스러운가? 내가 항상 규율들을 잘 기억하고 있나? 무엇이 옳고 그른가?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내 몸에 무슨 일이 있는가?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가? 내가 성공할까 아니면 실패할까? 사람들은 정말 나를 좋아하는 것일까? 내가 지금 정상인가? 내 가족은 정상일까? 정말 하나님은 계실까?
 신체적 변화의 세계, 관계의 세계, 아이디어의 세계, 책임의 세계, 미래의 세계 등등은 두렵고 불확실한 것이다. 이때가 그러한 기회의 시기인 것은 틀림없다. 이런 질문들과 중요한 성경적 주제들인 창조의 교리, 인간의 두려움, 하나님의 주권, 진리의 근본, 그리스도의 본질, 그리고 영적 전쟁과 유혹 등은 몇 가지 예를 들어 토론할 수 있다. 매일의 불안정한 범위 내에서 우리들은 십대들에게 간단한 신학의 개념들과 삶을 이끄는 신학을 만들어 돕는 기회를 주어야한다. 이 질문들의 각각은 토론, 시험, 경험, 적용하는 기회를 제공하며, 내면화된 중요한 성경적 진리들을 제공하게된다.

십대의 반항
 거칠고 악명 높은 반항에 대한 이야기들은 부모들이 십대들을 두려워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귀여운 아이가 난폭한 갱의 두목으로 바뀔 것이라는 생각은 부모들이 가장 싫어하는 악몽 같은 것이다. 우리는 자동적인 십대들의 반항에 대해 재평가를 해야한다. 동시에 우리는 이때가 아이들이 범주를 벗어나가려는 때이며, 유혹이 많은 때이며, 같은 또래 사이에서 언제나 용기 있는 옳은 행동을 하지 않는 때라는 것이다.
 우리는 어느 주일오후에 두려운 전화를 받았다. 그는 우리교회에 다니는 여성도인데 우리가 생각한대로 우리 아들이 그녀의 집에서 밤새 있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녀는 우리아이가 자기 아들에게 자신을 숨겨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두렵고 낙심했다. 잠시동안 우리는 가장나쁜 시나리오를 생각했다. 얼마나 많은 거짓말이 거기에 있었을까?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아들이 아닌 아들과 살고있는 것이 아닌가? 동시에 우리는 주님의 도우시는 자비에 대해 깊이 감사하는 기도를 간절히 드렸다. 우리는 우리 아들에게 물었고 그는 고백했다. 그때는 그가 섬겨야할 자를 택해야하는 분기점의 순간이었다. 우리는 우리가 예상했던 사건이 터지지 않고 하나님의 자비로운 계획아래 원상회복 된 것에 많은 감사를 드리며 그 방을 떠났다.
 거기에는 십대들이 반항하고 싶은 유혹을 만드는 욕망이 있었다. 그것은 개인적이며, 이기적 사고이며, 또한 자유에 대한 욕망이며, 새로운 것을 하고 싶은 욕망이며, 범위를 벗어나려고 테스트해보는 욕망이며, 자제에 대한 욕망이며, 자기결정을 하고 싶은 욕망이며, 다른 것이 되고 싶은 욕망이며, 받아들이고 싶은 욕망이다. 이것들은 또 다른 많은 욕망들과 더불어 모두 죄성의 자율과 자기 중심의 연료들이며, 틀림없이 십대들을 타락으로 이끌 것이다.
 동시에 반항과 굴복의 이 고민들은 중요한 성경적 이슈들이 토론과 적용과 습득될 수 있는 또 다른 場의 배경이 된다. 성경적 진리들은 뿌림과 거둠, 진리와 거짓, 지혜와 우매, 율법과 은총, 고백, 회개, 용서 그리고 반항과 복종의 혹독한 순간들 가운데서, 탁자 위에 마음의 모든 성질들과 마음에 작용한 것들을 올려놓게 하는 권위가 있다. 기회를 향한 시각을 가진 부모들은 그들의 십대들의 삶 속에 성경적 믿음의 중심이슈들을 많이 다루어야 한다.

십대들의 넓은 세상
 부모들을 놀라게 하는 일과 그들 십대자녀들의 불안정한 원인은 십대세계에 대한 갑작스런 또 다른 폭발이다. 갑작스런 모든 것들은 그것이 마치 세상이 자기보다 더 큰 것을 얻은 것인 양 그렇다. 뒤 운동장에서 몇 시간 야구 놀이하는 아이들은 새로운 장소와 새로운 경험과 새 친구들을 위해서 몇 마일 떨어진 곳도 이동을 한다.
 이 세계가 언제나 십대들을 흥분시키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그것은 두렵고 무서운 것같이 보이기도 한다. 거기에는 십대들이 발견의 기쁨을 가지고 사는 시기이며, 거기에는 수줍고 회피하는 또 다른 시기이기도하다. 때때로 그는 십대인 것을 기뻐하고, 반면에 어떤 때는 그가 당한 새로운 경험에 대해 두려워하기도 한다.
 그의 세계가 넓어지는 것에 대해 멈추는 일은 없다. 그것은 새로운 친구, 새로운 장소, 새로운 기회, 그리고 새로운 책임, 새로운 생각들, 새로운 계획들, 새로운 자유들, 새로운 유혹들, 새로운 느낌들, 새로운 경험들, 새로운 발견들이 바로 그 세계이다. 이들의 넓은 세계에 대한 모든 기쁨들과 불안정 함들은 당신의 십대들이 근본적인 진리들을 실제적으로 이해하고 개인적으로 습득하도록 돕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늘 함께 하시는 주님의 도우심, 성경적 관계본질, 영적 전쟁, 제자훈련, 자제, 만족, 신실함, 믿음의 가치, 그리스도의 몸에 대해, 육체, 그리고 악마, 의무와 책임에 대한 원리, 성경적 우선 순위, 은사의 발견과 청지기, 그리고 다른 많은 성경적 진리들과 원칙들을 내포한다. 그것은 중요한 목록이다! 그러나 이 넓은 세상은 십대들이 하나님의 세계에서 효과적이고 열매있는 삶을 살도록 준비시키는 놀라운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을 부모들이 알아야한다.

냉소주의를 거절함
 우리가 우리의 십대를 양육하는 것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세우기 위해 시작할 것은 우리 문화의 냉소적인 어두움과 조짐들을 거절하는 것이다. 그렇다. 십대들은 변화, 불안정, 그리고 소란의 시기이다. 여전히 이것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이들의 눈을 밝은 진리로 이끄시려는 것들이다. 만약 우리가 그의 도구라면, 우리는 우리의 우상숭배를 버려야하며, 매번 흔들리는 순간들을 든든한 성경적 진리로 인도해야하며, 우리를 위해 모든 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잘 가져야한다. 그는 환란 중의 도움이시며, 매사에 그의 구속의 목적을 이루시려고 일하시며, 그리고 그의 말씀은 능력적이며, 효과적이며, 능동적이다.
 우리는 십대들이 불안정과 반항과 넓은 세상에 의한 생존의 벙커 속으로 인도되기를 원치 않는다. 도리어 우리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우리가 우리의 십대들을 위한 하나님의 역할로써 말한 것을 원한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4:2)” 우리는 소망으로 이 중요한 시기에 접근하기를 원한다. 이 소망은 우리의 십대들 안에나 우리 안에는 없고, 늘 우리가 구하고 생각한 그 어떤 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채우시는 하나님 안에 있는 소망이다. 마치 그것은 그가 과거에 두셨던 기회를 우리가 잡으려는 것이다. 우리는 부르심의 감각과 목적의 감각을 가지고 이 시기를 접근하기를 원한다.
 사람들이 당신이 행한 것을 물으며 말하기를, “나는 십대의 부모다. 이 부모의 일은 내가 여지껏 가진 일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 밖의 것은 내가 사는데 있어서 두 번째의 문제다.” 그때 말하기를, “당신은 아는가, 내가 여지껏 이런 놀라운 일을 가져본 적이 없다는 것을! 나는 이렇게 기회로 충만한 일을 가져본 적이 없다. 매일 나는 필요하며, 매일 내가 하는 일은 중요하며, 가치 있고, 최후의 일인 것이다. 나는 그 어떤 것보다 이 부모의 일을 포기할 수 없다.”


2.  누구의 우상들이 거기에 있는가?

 만약 우리가 우리의 십대들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위한 좋은 삶을 살았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있는 우상들에 대해 솔직한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창조자를 예배하고 섬기는 것을 바꾸어 피조물을 섬기고 경배하려는 경향이 있는 그 자리가 우상의 자리이다. 우리가 자주 사춘기의 갈등들을 이해하려고 할 때, 우리는 십대들을 보며 그들의 문제들을 바라본다. 실제로 그것은 내면을 바라보는 우리를 향한 시간인 것이다. 그리고 묻기를, “실제 우리 마음을 지배하는 것이 무엇일까?” 지금, 확실히 모든 크리스천 부모들은 자발적으로 옳은 신학적 답을 준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그는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신다. 그렇지 않은가? 이 말이 신학적인 확언에 관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들의 매일의 섬김에 관한 것이다. 길거리의 고무제품이 어디에나 있듯이 삶의 침실, 거실, 부엌, 현관 등에서 우리의 마음을 실제로 지배하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의 마음으로 출발하라
 먼저 우리 스스로의 검증 없이 십대를 위한 양육전략에 관해 생각하려는 부모들은 헛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만약 우리의 마음들이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것에 대한 기회로써 십대들을 위한 멋진 양육기회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대신에 그들은 자기가 어른도 아니고 아이도 아닌 이상한 자기 중심의 사람이 가져온 자극적 혼란의 계속적인 추세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심지어 우리 삶의 별로 중요치 않은 순간까지도 혼탁하게 만드는 위험한 가능성을 가진 사람이다. 십대를 향한 우리문화의 냉소주의는 십대가 누구인지에 관해 어떤 것을 드러낼 뿐 아니라 또한 우리가 부모로써 무엇을 경배하는지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십대들의 기간동안 우리를 둘러싼 모든 기회들에게서 우리가 소경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 중요한 원칙이 있는데 그것은 모든 성경전체가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곳은 겔14:4이다. “그런즉 너는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 중에 무릇 그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거치는 것을 자기 앞에 두고 선지자에게 나아오는 자에게는 나 여호와가 그 우상의 많은 대로 응답하리니”
 나는 이 본문을 나의 말로 적고 싶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려고 앞에 나왔다. 그러나 그들이 왔을 때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이 우상에 의해 사로잡혀 있는 것을 아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들 마음에 있는 우상 때문에 내가 관심 있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너희의 우상이다. 왜 여기에는 우리에게 주는 작은 실마리가 있는가? 하나님은 사람이 그의 마음에 우상을 두면, 그는 또한 “죄악의 거치는 것을 그 앞에” 두게된다. 여기에 나타난 원리는 그 영향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의 삶을 지배하는 나의 마음을 무엇이 지배하는가? 마음의 우상은 언제나 내 앞에 죄악의 거치는 것을 두는 것이다.
 당신이 상상한 것을 당신 손에 놔두고, 당신 앞에서 정밀하게 손가락으로 나누어 보라. 당신이 당신 손가락 전체를 보려할 때, 당신의 비전은 차단되고 말 것이다. 당신의 손이 당신 앞에 있는 한, 어디서든지 당신은 되돌아 볼 수 있으며, 당신의 비전은 당신 손가락에 의해 달라질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내 마음에 있는 우상과 함께 있게 된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영향을 내 삶 전체에 미치게 된다. 내가 가는 어느 곳이든지, 내가 행하는 무엇이든지, 그 우상은 내가 하는 것과, 할 것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이유이다. “그 어느 것에 관한 이야기로 나를 위해 의미를 만들지 말라, 왜냐하면 내가 어떻게 말하든 어떤 방도로든 너는 너의 마음을 지배하는 우상을 섬기려고 사용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너의 우상을 처리할 것이다. 그것이 나의 우선 순위이다.” 
 우리는 이 중심 이슈를 잊을 수 없다. 나는 우리들의 우상이 우리에게 시련으로써 기회를 보도록 하며, 우리에게 우리의 십대들을 혹독한 심판, 고소, 저주의 말들로 뒤를 공격하며, 편협과 분노로 그들을 향해 행동을 일으킨다고 분명히 확신한다. 반면에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 용납, 용서, 위로로 부르시며, 우리는 종종 좋아질 수 있다.
 어떤 전형적인 부모의 우상들과 그 방법이 십대들에게 주는 우리의 반응이 어떻게 조성되는 지 같이 생각해 보자.

위로의 우상
 우리 중 많은 이들이 마음 안에서 은밀히 원하는 것은 어떤 의지(resort)가 있는 삶이다. 의지란 그곳에서 당신이 대접받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당신의 필요는 첫째가 되는 것이고,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때에 당신이 하고 싶은 그것을 하는 것이다. 당신이 의지 안에서 다루는 유일한 요구들은 당신이 당신의 삶 위에 올려놓은 요구들이다. 의지가 있는 곳에서 당신은 자격이 있는 감각으로 살게 된다. 당신은 당신의 돈을 지불하며, 그리고 당신은 확실한 일을 기대하는 권리를 갖게된다. 나는 우리 중 많은 이들이 위로를 위한 삶을 살면서, 이 자격심리로 부모역할을 이끌려고 하는 것에 두려움이 있다. 우리는 우리가 안정, 조화, 평화, 존중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일리가 있다. 그리고 그것을 얻지 못할 때 우리는 분노하는 반응을 보인다.
 성경은 우리에게 삶은 의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경고를 준다. 삶은 전쟁이다. 이것은 십대들 속에 아주 분명한 것이다. 나는 나의 십대아이들에게 그들이 집을 떠나려할 때, 여러 번 말했다. “거기에는 전쟁이 있다. 그것은 네 마음의 잔디 위에서 싸울 것이다. 그것은 네 영혼을 지배하려고 싸울 것이다.” 마음의 격동, 혼란, 그리고 십대들의 불안 등은 중요한 성경적 변화들의 결과가 일어날 뿐 아니라 드라마틱한 영적 전쟁으로 그 만큼 더 전진하는 것이다.
 위로, 편안함, 질서, 평화, 여유, 안정, 그리고 조화를 요구하는 부모들은 이 전쟁에 대해서 나쁜 것을 잘 준비한 꼴이 된다. 그것들은 그들의 십대들을 적으로 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그를 위한다기 보다 도리어 그와 싸우는 것이며, 심지어 더 나쁜 것이며, 그것들은 적의 진실한 정체와 전쟁의 참된 본질을 잊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것들은 좌절감으로 행하며, 후회하는 일들을 행하고 말하며, 그리고 하나님이 그것들을 두신 사역의 전략적 순간들 속에서 그것들은 효과적이지 못하고 생산적이지 못할 것이다.
 
존중의 우상
 아버지는 그의 딸의 팝음악이 수록된 콤팩트디스크를 모두 부숴 버렸다. 그는 그녀의 방에 그녀를 매일 밤 가두었으며, 그리고 교회의 기도모임 때에 딸의 죄를 공개하기도 하였다. 그는 그녀의 친구들 앞에서 손바닥으로 그녀의 얼굴을 때리고, 그녀를 복종시키려고 정신적으로 자극하고 얕보았다. 그는 그의 딸로 하여금 그가 십대와 똑같다는 생각을 하도록 만들었다. 내 사무실에서 그는 강한 의지와 결심으로 내게 말했다. “나는 그 아이가 나를 존중하도록 끝까지 만들 것입니다.”
 존중은 그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는 그럴 권리가 있다고 확신하였다. 이처럼, 모든 이슈는 존중이라는 것이 중요 이슈가 되었다. 그는 자기를 경시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보았다. 그의 인생은 그가 딸에게 “F”점수보다 더 좋은 것을 결코 주지 않는 것에서 마지막 시험기간이 되었다. 그는 그의 딸의 모든 성장, 불안정, 다루기 어려운 것들을 마치 개인적인 모욕처럼 보았다. 그의 생각에는 종적(부녀)관계도 없으며, 영적 특질도 없었다. 그는 그의 딸을 그녀와 하나님의 관계에서 보지 않고 딸과 자신과의 관계로 보았다. 그는 생명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그녀를 인도하려고 자신을 대리인으로 세웠음을 알지 못했다. 그의 마음은 그녀가 자기를 두려워하고 마땅히 자기를 존중해 주는 목표가 되도록 이끌어 가고 있었다.
 존중은 좋은 것인가? 물론이다. 부모들은 자기 자녀들에게 서서히 가르쳐야 할 것을 찾아야 할 무엇이 있는가? 그렇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마음을 지배하는 것이 되서는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개인적이지 않은 것을 개인적으로 만들 것이고, 나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써 나의 역할을 보지 못할 것이고, 그리고 나는 하나님이 이루셔야 할 것을 도리어 내가 요구하고, 그것을 위해 싸우게 된다.
 슬프게도 그 아버지의 눈은 자기를 통치하는 우상과 자신의 존중을 추구하려는 사실에 대해 소경이 되었고, 그는 정확하게 그 반대의 반응에 고무되어 있었다.   

감사의 우상
 우리는 학교로부터 온 전화를 받았을 때, 우리는 오전의 짧은 시간에 악몽으로 시달렸다. 우리는 한 번 젖었던 침대를 바꿔 버렸고, 잠옷과 슬리퍼를 신은 채 약국으로 가서 약을 받아왔다. 우리는 특별히 스케이트보드 모양의 생일 케이크를 만들었으며, 토사물로 더러워진 침대커버를 청소했다. 우리는 시간에 따라 모임에 앉아 ‘딱종이 유채’ 작업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수천 번의 이벤트 여행을 준비했고, 여러 번의 고통스러운 반복을 계속함으로 앉아 있으며, 수천 번 가진 휴가들을 추억하고 있었다. 우리는 수퍼마켓 안 쪽의 먼길을 걷고 또 걸으며, 입에는 먹을 것을 많이 먹고 배가 불러 있었다. 우리는 “시원한” 옷들을 보면서 매장을 터벅터벅 걸어다녔다. 그리고 우리는 ‘그랜드캐년’같이 되어버린 옷들을 잘 씻어 냈다. 우리는 음악기구들을 사려고 우리들의 꿈을 포기했다. 지금 우리가 어떤 신용을 얻어야 할 때가 아닌가?
 나는 나의 부모로부터 위의 내용들을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당신에게 이야기할 수 없다. 언제나 마지막 장까지 똑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너무 서술적이고, 순진하고, 옳은 것 같아 보였다. 아이들은 그들의 부모에게 감사한다. 여전히 감사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될 수는 없다. 그것이 우리의 습관이 될 때, 우리는 매사에 감사하는 일이 이제는 경계를 넘어 무의식적이 되 버린다.
 십대들은 하루를 마감하는 입구에서 자주 갑자기 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엄마, 오늘 내가 버스타고 집에 오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요? 나는 오면서 지금까지 나를 위해 행하신 엄마 아빠를 많이 생각하며 왔어요. 당신은 내 생애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나와 함께 나와 같이 있었어요. 버스에서 나는 감사로 가득 찼어요. 그리고 그 감사의 말을 하려고 집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어요.”라고 말한다. 만약 이 일이 당신에게 일어난다면 돌을 세워 최고의 기념을 하고, 영원한 불빛으로 빛나게 할 것이다.
 매우 소수의 부모들이 그들의  십대 딸의 침상에서 흐느껴 우는소리를 들으려고 침대에 가까이 가며 이렇게 대화한다. “딸아, 무슨 일이 있었느냐?” “얘야, 지금 너와 나 사이에 내가 잘 못한 것들을 막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너에게 더욱 고맙게 생각 못한 것들을 뉘우친단다. 그리고 나는  매일 너에게 고마운 것들을 많이 생각하기로 작정했단다.” 이와는 반대로, 십대들의 방향은 다른 사람에 대한 감사를 깨닫는 것보다 오히려 자기 본능과 자기관심으로 더욱 가득 찬 곳으로 기울어져 있다.           
 만약 부모들이 그들 십대들을 위한 사역자로써 하나님과의 종적 관계를 잊어버렸거나, 만약 그들이 부모와 자녀 사이의 약속인 “나는 너를 위해 일하니, 너는 감사해야한다.”라는 것만 생각한다면, 그들은 십대를 살아가는 동안 많은 낙심과 분노로 갈등할 것이다. 이렇게 부모들이 그들의 다 큰 아이들이 자라서 자기들에게 무엇인가를 돌려줄 것을 기대할 때 십대들은 이전보다 더 이기적이고 감사가 결여된 모습을 보일 것이다. 모든 부모들은 다시 물어야 할 것이다. “이 일들을 왜 내가 해야 하는가? 내가 누구를 위해 봉사하는가? 내가 기대하고 요구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나의 십대들에게 있는 기회의 순간들은 누구의 요구인가? - 하나님인가 나 자신인가?”


성공의 우상
 어떤 아버지가 자기의 십대아들 앞에서 내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교회를 가는 것이 무엇이며, 그리고 당신의 반항하는 아들을 위해 기도하며, 모든 사람이 그것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당신은 아십니까? 당신은 모든 눈들이 당신을 바라보며 예배를 드리는 장면과, 사람들이 당신과 당신의 아내가 얼마나 닮았을까 궁금해하는 것에 대해 아십니까? 이것은 가정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사 부모노릇 하라고 한 것을 실천하려고 신실하게 애썼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마친 것을 바라봅니다. 나는 내 자신에게 묻습니다. 만약 내가 그것이 모든 것을 되돌려놓는다는 것을 알았다면 우리가 좀 더 일찍이 아이들을 가지려고 결정했겠습니까? 내가 얼마나 당혹하고 실망했는지 묘사할 수 없습니다.” 
 오후에는 그의 아들도 들었다. 아버지는 많은 부모들이 느끼기는 하지만 말로는 표현을 못한다고 하면서 말을 했다. 우리는 마치 우리가 든든하고 신속한 보증을 가진 것처럼 기대를 가지고 양육을 접근하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만약 우리의 임무를 잘 감당한다면 우리의 자녀들은 모범시민이 될 것이다. 여전히 타락한 세계에서는 이 방법이 아니다. 우리는 소유권의 의미를 가지고 이들은 우리의 자녀들이며, 그들의 순종은 우리의 당연한 요구라고 하면서 양육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런 假定들은 우리의 자녀들 안에 감추어보려는 우리의 본질을 위한 길을 포장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녀들로 하여금 우리가 성취와 성공의 감각을 느낄 수 있기 위한 사람이 되어야 함을 그들에게 요구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피조물로 보기 보다 우리들의 트로피(상패)로 보기 시작한다. 우리는 우리의 덮개(부모의 핸디캡: 의역) 위에서 그들이 좋은 직업을 가지므로 남들에게 외적 증거가 되는 표현을 해주기 은밀히 원한다. 그들이 우리가 기대했던 대로 살지 못하면 우리는 스스로 그들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에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분풀이로 싸우는 것이다. 그 실상은 우리자신과 우리의 손실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가 보물로 여기는 것과 우리마음을 지배하는 성공에 대한 명성 같은 것에 상관없는 다른 어떤 것을 가질 때 우리는 분노하게 된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의 모습을 잃어버리기 쉽다. 그들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영광을 안겨주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있는 것이다. 우리의 십대들은 그로부터 왔으며, 그로부터 존재하게 되었고, 그들의 삶의 영광은 그에게 초점되었다. 우리는 단지 그의 계획을 성취하려고 부름 받은 대리인이다. 우리는 단지 그의 손에 있는 도구일 뿐이다. 우리의 본질은 그 안에 있으며, 그가 우리의 자녀 안에서가 아니라, 그들의 활동 안에서 우리를 부르셨다. 우리를 눈물 흘리게 만든 근본적인 거절은 그들이 우리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그를 거부한 것이다.
 부모로써 우리는 이 “수직적 실재들”의 면을 잃어버릴 때마다,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 자녀에 대한 그의 소유권을 잃어버리고, 결과(성장한 자녀의 모습이)야 어떻든 우리로 하여금 신실한 부모의 일을 하라고 하신 그의 부르심을 잊어버릴 때 두려운 것이다. 언제나 부모역할이란 우리의 어려운 일-십대들의 활동, 가족에 대한 명성 등-을 진정시키는 것이며, 우리자녀들이 실패하는 면전에서 이기적이지 않은 성실함으로 반응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인 것이다.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이 정하신 순간들은 판단의 말들로 가득 찬 화난 대립의 순간들이다. 빈곤한 십대들을 그리스도에게로 한번 더 이끄는 대신에 우리는 그를 말로 우선 때리는 것이 된다. 사랑대신에 거절을 하는 것이고, 소망의 말 대신에 저주를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감정은 당황, 분노보다 더 많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선 고집 센 우리아이들에 대한 슬픔보다 미움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소유된 마음들을 점검할 준비가 필요하다. 우리에게 소유권과 권리 주장하는 자세가 있는가? 우리가 명성에 의해 지배된 교활함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 안에 우리의 십대를 사랑하는 고민이 있는가? 갈등의 결과로 우리 사이가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은가? 우리가 타인을 신경 쓰는 생각에 의해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심지어 말씀의 원리들과 왜 그 말씀들이 우리를 위해 “역사”하는지 의심하지는 않았는지? 이런 질문들로 하여금 우리가 여태껏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하신 것들을 이 타락한 세상에서 죄인으로 살고 있는 우리 십대들의 삶 속에서 나타내고 있는지를 바라보게 해야한다.     

지배(control)의 우상
 나는 삶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용기 있게 설득한다.
 ⑴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그의 뜻과 그의 통치를 받으며 사는 것.
 ⑵ 하나님이 되려고 애쓰는 것.
거기에는 작은 차이가 있다. 죄인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전자에 있는 것보다 후자에 있는 것이 더 나아 보인다. 영적 역동성은 양육의 마음에 바르게 적중한다. 성공적인 양육은 당연한 것이며, 지배의 사라짐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다. 양육의 목표는 직업적인 일에서 우리자신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양육의 목표는 자녀들이 우리 가운데서 독립적으로 온전하며, 하나님을 신뢰하며, 크리스천 공동체에서 성숙한 사람이 되어 그들 두 발로 설 수 있도록 세워주는 것이다.
 양육의 초기 시기에는 우리가 모든 것을 조절한다. 그리고 비록 우리가 그 모든 것의 스트레스 때문에 불평할지라도 우리는 그 권세 갖기를 좋아한다. 그런 것은 자발적인 몸 동작과는 달리 어린아이가 택한 작은 행동이다. 우리는 그들의 음식, 휴식시간, 몸의 예절, 그들이 보고 들어야할 것, 그들이 어디서 원하는지, 그들의 친구는 누구인지와 앞으로 할 목록 등을 선택해 준다. 어째든 그날부터 그 아이가 독립적으로 성장하는 것은 사실이다. 협력 없이는 아무 역할도 할 수 없는 이 아이는 지금 당장 부모의 허락 없이 침대에 기어갈 수 있고, 화장지를 사용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 아이가 이제 곧 집을 떠나게 될 것이고, 부모의 역할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이 바로 우리와 같은 것으로 되길 기대한다. 나는 운동을 좋아하고, 학교에서 운동하는 것을 바라보기 좋아한다. 나는 나의 큰 형 져스틴(Justin)이 말한 것을 제일 먼저 기억한다. 그는 나와 같이 축구경기를 보려고 하지 않았다. 뭐?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나는 “그것은 옳지 않아! 나는 형을 운동 팀의 팬이 되기를 바래, 나와 같이 되기가 싫어?”라고 말하고 싶었다.
 또 나는 내 딸 나이콜(Nicole)이 자기는 땅콩버터가 싫다고 제일 먼저 말한 것이 기억난다. 그것은 그녀가 성탄절과 여름휴가를 싫어한다는 말과 거의 같은 것이다. 거기에는 그것과 더불어 어떤 논리적인 오류가 거의 있어 보인다! 나는 그녀에게 땅콩버터가 좋다는 것을 확신시켜줄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러나 그녀가 이 집을 떠나기 전, 그녀는 땅콩들을 부숴 흩어버리는데 계속적인 열심이 있었다!
 얼마나 많은 부모들이 그들 아이들이 사귄 친구들로 고민하고 있는지? 그렇다. 친구의 선택은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그것은 또한 성장하는 아이들에게 우리가 지배(선택)를 넘겨주는 일이 되기도 한다. 양육의 목표는 그들의 안전과 우리들의 건전한 생각을 보증하려는 시도 속에서 우리들의 자녀들에 대해 인색한 지배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은 그런 종류의 지배를 활용하실 수 있다. 목표는 우리 자녀들 안에서 말씀의 원리들을 통하여 늘 성숙시키는 자아절제를 서서히 가르치도록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선택, 자제, 독립의 대단히 넓은 범위를 활용하도록 그들에게 허락하는 것이다.
 나는 정규적으로 시계를 늦추기 원하는 부모들과 같이 일한다. 그들의 단 한가지 소망은 모든 지배의 옛날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십대들을 작은아이와 같이 취급하려고 애쓴다. 그들은 부모보다는 하나 더 올려 감옥의 간수가 되기를 좋아하므로 그들은 이 갈등의 잔혹한 순간들에 있어서 유일한 소망인 복음의 사역을 잊고있는 것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복음의 진리들은 생명력이 있다. 먼저,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지배아래 없는 것이 없으며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엡1:22)”, 둘째, 그 상황이 지배아래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은 그 안에서 일하시는데 그가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기 위해 선을 행하시는 것이다(롬8:28). 그러므로 나는 내 십대들의 매일의 욕망, 생각 그리고 행동을 지배할 필요가 없다. 모든 상황 안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주권적 통치아래 있는 것이며, 그리스도는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다 이루시는 분이시다. 셋째로, 나는 내 양육의 목표가 내 자녀들을 나의 모습으로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고, 그들이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가기 위해서 일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의 목표는 내 아이들 속에 나의 기호, 나의 의견, 나의 취미를 복제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들 안에서 나의 모습을 보기보다는 그리스도의 모습 보기를 나는 심히 원한다.
 부모인 우리가 고민을 가져오는 자신에 대한 진정한 시각 없이 십대들의 소란과 갈등으로 그들을 평가할 수는 없다. 만약 우리의 마음이 위로, 존중, 감사, 성공 그리고 지배에 의해 다스려진다면 우리는 자녀들의 영적 요구에 대한 사역 대신에 우리의 기대감으로만 만나게 될 것이고, 우리의 십대들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빈곤할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기회의 문들로써 갈등의 순간들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좌절과 실망을 자극하는 것으로써 그들을 보게 될 것이다. 결국 우리가 자녀들을 대항함으로써, 그들의 분노가 자라나는 경험을 우리는 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사역하라고 부름 받은 자들이다.



3. 가족이란 무엇인가? 정의

  “가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인간역사 전반에 걸쳐 쟁점화 된 것이며, 오는 세대에 대해서도 토론의 주제가 될 것이다. 각 세대는 가족의 중요성과 그것의 이전 세대가 어떠했느냐에 의해 변모된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한다. 가족의 본질은 “가족의 가치들”이라는 정치적 뜨거운 쟁점아래 오늘날 우리문화에서 격한 토론이 되고 있다.
 여기에서의 우리목적은 가족에게 성경적 이해의 정의를 주려고 애쓰는 것으로 이 문화적 토론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 우리의 목표는 매우 어려운 방법으로 가정을 정의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 질문 “가족이란 무엇인가?”에 기능본위로 답하려는 것(to answer functionally)이다. 우리가 실제로 묻는 “하나님이 가족에게 행하도록 의도하신 것이 무엇인가?”란 무엇인가? 이것은 가족에 대한 직능에 관한 정의로써 자녀들을 향한 목표와 그들을 향한 우리의 행동을 조성하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이 가족에게 행하도록 의도하신 것이 무엇인가?”란 질문은 “하나님이 우리로 우리의 십대들을 위해 행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기초한다. 당신은 당신이 먼저 부모로써의 당신의 일을 묘사하는데 좀 더 일반적으로 이해하지 않는 한, 십대를 양육해야하는 당신의 일에 대한 좀 더 나은 성경적 의미를 결코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나의 많은 크리스천 남녀들이 그들의 휴가 이야기와 그들 가족이 좋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여러 달 동안 상세한 계획을 만들었다는 것을 들었다. 어느 날 내게 문득 생각난 것은 역시 다른 사람으로부터 잘 계획된 올랜도(Orlando) 휴가 패키지에 대해 듣고 있었다. 많은 부모들은 그들이 그들 자녀를 세우려는 것보다 그들의 휴가계획이 좀 더 목표에 맞춰지도록, 좀 더 조직적이고, 좀 더 계획적이며, 잘 조사하려 한다.
 휴가 간다는 의미가, 내가 휴가를 ‘무엇’이라고 가정한 이해의 “그런 종류의”것인지, 나는 정말 완전히 확신할 수 없다. 그것이 내가 가정한 이해의 “그런 종류”로써 내 가족들과 함께 휴가를 어디로 갈지 안다고 할지라도 나는 정말 한 목적에 이르렀다고 할 수 없다. 비록 내가 방향을 한 번 정했지만 갈 곳에 대한 지도공부를 실제로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비록 내가 여행경비를 어느 정도 알지만 실제로 돈을 준비 못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실상, 어떤 휴가를 가지든 내 가족이 함께 할 가능성은 무엇인가, 혼자만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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