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에서는 성경에 대해서 배우고, 교회에서는 그것을 활용하는 것에 대해서 배운다. 성경과 교회를 어떻게 연결시키는가, 창세기와 모세오경을 집중적으로 살펴본다. 역사서에 대한 특별한 관심,
;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부분을 좋아한다. 구약역사서에서는 혼란스럽고 무질서한 상황이 나온다. 구약성경은 모든 것이 이야기 형식으로 쓰여있다. 이는 특별한 방법으로 진리를 충격적으로 전해주는 것이다. 책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에서 한걸음 뒤로 물러가게 하고, 이야기속에서 하나님의 삶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배우게 한다. 이해가 되면서 삶속에서 진리를 가지고 들어가게 만든다. 이러한 이야기 속에서 우리의 주님되신 하나님에 대해서 배우게 된다.
또 다른 점은 재미있고 이야기 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잘 전해줄 수 있다. 성경은 마태복음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신약을 이해하기 위해서 구약이 필요하다. 구원이라는 성화라는 구속이라는 것을 요약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신약이다. 짧은 단어 하나 하나가 구약의 여러 장을 통해서 이해되게 하는 것이 바로 구약이다.
단어 하나 하나가 구약을 통해서 이해하게 된다. 아니면 그 풍성한 의미를 놓치게 된다. 하나님의 구속적 의도가 보여지기 시작한다.
성경을 사람들의 삶에 잘 적용한다면, 자신들의 삶을 이해하게 되고, 하나님의 큰 이야기속에 포함되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 구약성경으로부터 상담을 끌어낼 수 있을까? 대부분 구약은 다루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개인적인 상담 속에서 구약을 사용한 적이 별로 없음을 발견할 수 있다.
왜 구약의 모세 오경을 상담사역에 사용하지 못할까?
모세 오경을 율법책으로만 이해하는 것이 문제이다. 율법책이라고 하면 행동의 원칙, 명령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성경의 내용을 보면 이보다 더 큰 내용이 있다. 해야 할 일들에 대한 명령으로만 생각한다면 인격적인 존재와 매우 분리되어 생각할 때가 있다. 비인격적인 명령이 되고 만다. 하나의 격언 잠언정도로만 알려져 있고 하나님의 인격과는 별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의 계시와 별개의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래서 관계 속에서 이해되지 못한다.
교회가 율법과 은혜의 관계를 정립하기가 매우 어려운 점이 구약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순종에 대한 가르침이 많은 교회를 율법적이라고 하고, 은혜에 대한 가르침에 대한 관심이 많은 교회를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말한다.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 구약의 하나님은 분노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비성경적, 비신학적이다. 율법에 대해서 언어적으로 사회적으로 문제를 가지고 있다.
율법의 세대, 은헤 언약, 세대주의, 언약주의, 은혜주의 이러한 것들을 하나로 융합시키는 데에 매우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
다윗이 앉아서 천국의 율법에 대해서 찬양하는 노래하는 모습이 있고, 바울이 율법에 대해서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고, 야고보는 매우 율법적이고..... 여기에는 긴장이 있다.
하지만 율법과 은혜는 함께 가는 것이고, 이것을 통해서 복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십계명을 받기 전에 3일동안 자신을 정결케 해야 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산 주위에 망을 쳐서 넘어가는 자에게는 처벌이 가해졌다. 율법을 받는 그 날, 검은 구름, 번개, 나팔 소리, 사람들은 이러한 것들로 두려움에 떨고 있다. 사람들은 이 상황 속에서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두려움 속에 있을 때에 모세를 통해 십계명을 받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직접 말하지 않기를 원했다. 모세에게 그 말을 받기를 원했다. 이러한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소개가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두려움을 만들어 내고 있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원인은 두려움이다. 하나님에 대한 건전한 두려움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그들을 동기부여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시기 전, 하나님은 그들에게 주신 자신의 은혜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위해 일하시며 자신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백성들을 위하여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이 구원받은 상황은 매우 두렵고 괴로운 것이었다.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이끌어 내신 것이다. 이후로 나타나는 상황은 구원, 구속이라는 상황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상황을 놓고, 그 다음에 순종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모세가 바로에게 말하기를 자신들이 노예로부터 해방되어야 비로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자유가 있음을 말한다. 구속을 이야기하는 언어들이다. 이전에는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자유가 없었다.
명령은 구원이후에 나타나는 것들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책임이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저들을 구원해 내셨기 때문이다. 애굽에서는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광야에서는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둘 필요가 없다. 노예상태에서는 도저히 안식일을 지킬 수가 없다. 구원받지 않은 한 하나님께 대한 섬김을 보일 수가 없었다.
하나님의 명령은 구속이라는 전제가 있다. 순종이라는 명령은 은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심으로 예전의 죄 속에 계속 있으라고 하시지 않는다. 거룩한 백성이 되기 위해서 구원이 전제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건져내시는 이유는 거룩하게 살게 하시기 위함이다. 은혜와 율법을 분리하고 생각하면 매우 어렵다. 이 두가지는 항상 같이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중요한 다리이다. 구약성경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어디에서 드러나는 가를 보게 된다.
또 하나의 문제는 구약을 시간과 공간, 문화적으로 우리 자신과 전혀 다른 것으로 생각할 때 생긴다. 상황안으로 들어가면 우리와는 다른 것이긴 하다. 우리 현실과는 아주 다른 상황이긴 하다. 시간적인 차이가 있기도 하다. 이것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를 생각하게 된다. 상관없는 것으로 단정짓기도 한다.
하지만 이 둘 가운데 다리를 놓기 위해서는 무엇이 비슷한가를 생각해야 한다. 구약성경을 다룰 때의 문제점을 이야기한다면 구약성경이 개별적이고 분리된 것들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연결시키는 주제에 대해서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다. 한 저자가 이것을 썼다는 것을 믿지만, 단편이야기들을 여러 개 모아놓은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여러 이름들, 죽고 사는 것, 사건들, 이런 일들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예배를 위한 여러 가지 법칙들, 집에 문제가 생길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것, 모세 오경은 그저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만 보게 된다. 그래서 단지 하나씩 쓰게 될 뿐이다. 그래서 아주 다른 각도에서의 해석을 붙이려고 한다.
; 식품에 대한 법들, 성막과 광야에서의 방황과 연결시키지 못하고, 하나님의 성품과도 연결시키지 못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에만 생각한다. 하나님께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당장 잊어버리는 것은 부정한 것 정결한 것에 대한 분리라는 원칙을 놓치고 그저 자신을 위해서만 생각한다.
; 우리들 생각에 모세 오경을 주신 주된 목적은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면 항상 잘못된 일을 할 것이다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좀더 깊이 있는 내용을 전달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내용이 어렵고 연결이 어렵기 때문에 설교 예화로 생각하기 쉽다. 어린이들에게 가르칠 때, 어린아이들을 위하여 반복적으로 전해지는 메시지는 기도하면 잘될 것이다라는 내용뿐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도록 만들지 않는다. 인생으로 하여금 어떤 상황에서나 그리스도를 따르게 하지 못한다.
-우리는 어떤 것들을 기억하며 성경을 사용해야 하는가?
1. 창세기로부터 계시록까지 하나님은 백성들을 화목케 하시는 작업을 하신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관여하신다. 특별히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창조사건들을 생각해 볼 때 그렇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노예로 삼으신 것이 아니다. 자녀로 만드시고, 대하시고, 필요를 채워주시고, 찾아와 주시고, 말씀하시고, 관계를 사모하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가운데 죄라는 것이 개입되어 관계를 해친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망가진다. 하나님의 피조물들은 속임수에 넘어갔고 반항하는 존재들이 되어졌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반대하고 거부하는 자들과 연합되었다.
하나님의 좋으시고 은혜로우신 계획에 대한 인간의 실수, 실패.... 하나님께서는 뱀에게 이야기하신다.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은 원수가 되게 하신다. 너희들이 나를 대항해서 악한 연합을 이루었지만 그러나 그런 악한 연합을 그대로 두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 반항하도록 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뱀에게 내리는 저주이다. 그러나 인간들에게는 은혜이다.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백성들과 관계를 다시 만들어 가시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비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타나시는 가를 보여준다. 하나님의 자기계시가 나타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어디서 나타나는가를 살펴보면, 하나님이 뚜렷하게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관계를 원하시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때에는 하나님을 만나도 깨닫지 못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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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을 확실하게 나타내신다. 임재가 피조물에 좀더 편만하게 나타나시게 된다. 하나님의 임재가 지형적으로 넓어지고 인격적으로 더욱 깊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구속 역사를 보아야 한다.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을 흥분하도록 되어야 한다. 이러한 것 뿐 아니라 더 분명한 계시가 나타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 뿐 아니라, 우리 자신들이 서로 연결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교회에서 장차 이루어질 완성에 대한 부분적인 맛을 보고 있다.
단지 그 맛을 보는 것보다도 더 깊은 교제를 나누게 되는 것을 깨닫게 되어야 한다. 이러한 일들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일에 대한 흥분을 느끼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모세 오경은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것을 나타내심을 알아야 한다.
모세오경은 하나님과 교제하심을 가르친다. 하나님과 함께 할 땅으로 우리를 이끄신다. 이러한 구절들을 읽으면서 항상 가져야 하는 원리가 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기를 원하시는가. 이것을 이해하고 회중들에게 말씀을 전달하는 것이다.
-성경의 배경과 상황에 대해서 이해해야 한다.
이야기의 결론을 우리가 다 알고 있다. 모든 구약의 이야기들은 장차 그리스도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알고 있다.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는 모든 부분이 발견되게 된다. 구원, 구속, 성화 등의 주제가 발견되어야 한다. 그것은 그림자, 화살표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것을 찾지는 못한다. 어떤 때에는 한부분을 더 강조하실 때가 있는데, 모든 것을 이속에서 다 찾고자 한다면 어려움에 봉착할 것이다.
; 여리고성이 멸망할 때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를 정복하셔서 다 멸망시키시든지 다 구원하시든지 하신다. 아간의 죄가 후에 발견되고 나중에 멸망된다. 우리에게 이 말씀이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가? 아간이 자신이 욕심을 낸 것을 숨긴 것이 죄였고 우리도 그러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죄가 있을 때 가지고 나와야 한다? 이 구절을 통해 죄를 고백해야 한다? 그것이 그 구절에서 나와야 하는 진정한 뜻을 옳게 전달하는 것인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본다.
;하나님의 백성이 당연히 가져야 하는 어려움을 갖게 된다. 여리고 성이 다 무너져서 돌멩이가 싸이고 불이 일어나고 있고, 아간과 그의 가정도 여리고와 동일한 결과를 맞게 된다. 언약의 공동체의 일원됨을 상실당하고 있다. 이 내용은 숨겨진 죄악에 대한 내용이라기 보다는 언약의 공동체 안에서 일원이 되지 못하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신앙고백에도 참여하지만 그들의 목적은 다른 것에 있다. 무서운 경계이다. 자신의 문제를 살펴보고 어느 공동체에 참여하고 있는지를 발견하라.
; 라합- 이방인들 중에서 멸망당할 운명이었지만, 하나님의 일원이 되었다. 정탐군을 숨김으로서 실제적인 정체가 드러나게 되었다. 물건들을 숨김으로서 아간의 정체가 드러나게 된다. 적당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경고로 주시는 말씀. 저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신뢰와 사랑이 드러나지 않는 경우에, 죄에 대한 고백을 유도하는 말이 아니다.
구절을 보면서 잘못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이 나에게 어떻게 연결되는가?’ 결과적인 질문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는가’에 더 1차적인 관심이 주어져야 한다. 이것을 먼저 이해하고 나서 이것이 어떻게 나에게 연결될 것인가를 이해해야 한다. 내용의 상황에 대해서 실제적인 상황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야 한다.
한가지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은 백성에게 말씀하시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나님의 노하심에 대해서, 가인, 홍수, 바벨탑, 바로, 가나안 땅의 사람들,....이러한 내용들은 로마서1장의 바울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하나님의 심판이 하나님을 모르고 멀어져 있는 자들에게 임하고 있다. 자신들의 악함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억압하는 자들이다.
이스라엘에게 성내시는 모습이 있다. 금송아지 사건, 광야의 여러 가지 이야기들, 열왕기상 상하의 여러 가지 이야기들.... 노하시는 대상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 하나님은 노하면 노한다는 것은 당연히 두려움으로 이어지고 있다. 하나님이 죄에 범죄한 자들에게 노하시는 것이 당연하다면, 나에게는 어떻게 행하실 것인가? 다시 말씀을 읽어보아야 할 것 같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노하실 때와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 노하실 때와의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
;슬로브핫의 딸들이 모세에게 유업을 받아야 할 것을 요구하는 장면-그들이 고라의 반역에 참여하지는 않은 자의 자손들. 딸들도 아버지의 이름으로 유업을 받아야 함을 판결하시는 하나님. 아간은 완전히 멸망했지만, 아간에 죄에 참여하지 않은 자의 자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
; 시내산- 광야에서도 당연하다. 우리가 하나님의 공동체의 일원이라면 하나님의 노를 대하는 방법들이 있다. 구분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과 행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과 세상의 백성들과 혼합되어 있어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과 어떻게 화목시키시는가, 어떠한 역사를 베푸시는가를 깨달아야 한다.
2. c.
-매우 다른 환경이기는 하지만, 동일한 반응을 보이게 된다.
;하나님께서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약속하실 때, 사라처럼 비웃을 수 있고, 야곱처럼 더 많은 것을 갖고자 속임수를 쓸수도 있다.
구약성경의 상황과 현실의 상황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두 현실은 비슷한 부분이 있다. 우리는 예배하는 대상에 따라 움직이게 되어 있다. 편안하고 성공적이고 안정된 삶을 원한다면, 하나님의 창조하신 현실을 대할 때에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 괴롭고 불평하게 된다. 우리의 상황은 바뀔 수가 있다. 구약의 상황과 오늘의 상황은 다르지만, 마음의 예배의 상황은 동일하다. 이것은 인간의 동질적인 문제이다.
도표 . 6pg.
1.
2.
3.
4. 하나님의 백성들을 회복시키는 일의 성취,
5. 하나님의 역사를 볼 때 어떤 믿음, 행위의 표현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창세기-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이야기. 이것은 13장부터 시작됨. 그 이전은 사람들과 상대하시는 배경을 설명하시는 것.
-하나님의 창조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 창조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게 하는 것. 파도를 볼 때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의 신성과 영원한 성품들이 피조물을 통해 드러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는 인간의 형상. 별, 하늘의 영광, 그러나 그보다 더한 하나님의 영광. 영원한 하나님의 그 무엇이 우리들 속에서 드러난다. 그 영광의 절정인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게 되었고, 도리어 죄악의 선포가 나타난다. 창조주를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사탄을 선포하게 되었다. 결국, 우주 공간에 전파되는 내용은 불신과 미움과 같은 것들이다. 이러한 악한 형상은 더욱 퍼져나가고 있다.
아름다운 조각품에 망치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전염병이 퍼지듯이 악은 퍼져나가고 있다. 강도면에서 더욱 깊어진다.
;가인은 형제를 죽인다. 라멕은 자신에게 해를 입힌 자를 죽인다. 죄악의 극심함을 보시고 창세기 6:5에서 인간의 생각이 악하기만 한 상태가 됨을 깨달으신다. 하나님의 이름이 전파되는 것에서 완전히 멀어지는 것이다. 인간의 이름이 뭉쳐져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광채가 나는 지구가 아니라 시궁창이 되고 말았다. 악한 범죄의 현장이 확장되는 가운데 먼지같은 것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 특별한 것이 없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도 별다른 특별한 점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과 묶여져 있었다. 그들은 나와 별 다른 차이가 없다. 고독, 홀로 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문제이다. 군중속의 고독을 평생동안 설명하기도 한다. 이러한 경험은 모두의 경험이다.
그런데, 이들의 특별함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 성경에 나오는 이들과 다른 사람들의 문제는 소명의 문제이다. 하나님이 저들을 불러내셔서 특별하게 하시고, 피조물에 대한 의도를 펼쳐나간다는 것. 하나님의 피조물, 형상인 인간을 통해서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심은 그 영광을 더욱 드러내게 된다. 그들이 꼭 기억해야 하는 내용은 저들에게는 평범하지 않은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것.
하나님의 목적과 연결되면서 그들의 삶도 목적을 갖게 된다. 이를 통해서 성도를 성경과 연결시킨다. 그들의 삶의 문제, 관심을 통해서 그들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한다. 저들이 자신들의 굉장함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여전히 연약하지만, 하나님은 굉장하다는 것, 하나님의 크심을 나타내는 것.
이 세상에서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 이외에 그들의 반응을 보면서 별로 특별한 자들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알 수 있다. 야곱의 인생을 통해서 거짓말과 사랑을 알게 된다.
; 유다자손들에서 왕이 나오지만 여전히 별로 좋아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이러한 일들을 이해할 수 있을까?
신실하지 못함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이 다 없어졌을까?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질까? 하나님의 약속하심보다 더 약한 것으로 만족하지 않을까?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의 언약을 다시한번 기억해야 한다. 물론 아브라함을 보면 별 것 아니지만, 그러한 삶 뒤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하나님의 약속이 이어지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 굉장히 긴 시간동안 잊어버리고 살던 하나님의 약속. 나의 이야기를 쓰시는 하나님의 약속, 속이는 자라는 이름을 바꾸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 하나님께서 대하시는 모습 속에서 나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이 나를 다시 사용하실 수 있을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다.
; 아론은 미약한 별 의미없는 사람은 아니다. 아론의 역할은 무궁무진하다. 아론에 대한 임직식, 그런데 아론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간음으로 인도한다. 방종으로 몰고간다. 인간에 대한 두려움, 사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는 것보다 반항과 언약을 파괴하는 쪽으로 몰고 갔다. 전혀 아론에게 줄 소망이 없었다. 철저한 책망밖에 없었다.
이제는 아론은 어떻게 될까?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이러한 질문을 생각해 보라. 바로 그상황 속에서도 그 은혜는 더욱 멀리 나아간다. 하나님의 긍휼이 아론의 실패보다 더욱 위대한 것이었다. 온전한 실패를 경험하는 자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된다. 그들의 위에 계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아야 한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그들이 믿음으로 산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 성경속에는 흠이 없는 사람들이 없다. 그 사람들이 흠이 있는 사람들임을 부인한다면 우리와 거리가 멀어질 뿐이다. 우리의 실수에 대해서 마음에 안도감을 갖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 우리가 죄인이라는 두려움이라는 극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갖고 계신 신뢰감이 더 커지는 것을 경험한다. 우리에게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이 또한 가지 있다.
--->이러한 이야기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게 된다.
때로 신앙의 사람들이라는 자들의 실수를 보면서 우리도 실망하게 된다. 이러한 이야기는 우리의 마음을 움직인다. 더 나은 완전한 성취를 위해서 그리스도를 바라보게끔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나아가는 유혹을 버려야 한다. 믿음의 모습들을 닮아야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신실하게 우리의 모든 실수들로 인해서 하나님의 긍휼을 붙들어야 한다. 이럴 때 우리들의 교만한 생각을 포기하게 된다. 하나님의 감격과 감사가 마음속에서 성장하게 된다.
나의 연약함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는다면,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하시려는가에 관심을 갖게 되고 그 속에 뛰어들고자 하는 열심을 갖게 만든다. 내 과거 때문에 절망에 싸이는 것이 아니라 소망 속에 살게 된다.
referance--- 21.1 Fall 2002.
<출애굽기 Exodus>
사람들은 매우 고통당하고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들이 갖게 되는 유혹은 무엇인가? 절망이며, 괴로움이다. 죽음이 드리워져 있는 형태, 전혀 소망이 없는 삶. 하나님의 백성을 건져 내시겠다는 것.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누구도 의심하지 않도록 확실하게 이루신다. 완전하게 구원받았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도록 하신다. 홍해 건너편에 도달했을 때 완전한 자유를 느끼게 하신다. 너무나 극적이고 결정적이기 때문에, 이후에도 홍해를 자꾸만 이야기한다. 시편 기자, 선지자, 자꾸만 상기시키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계속 구원하심을 이야기한다.
기드온을 비롯한 많은 사사들을 볼 때에, 큰 군사가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것. 블레셋 사람들을 이기는 것을 볼 때에도 그렇다. 앗수르 사람들, 예루살렘 사람들도 마찬가지 이다. 바벨론 포로들이 풀려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 출애굽기에서 이러한 구원이 끝까지 가는 것임을 보여준다.
돌비에 새겨진 법이 아니라, 심령에 새겨진 법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죄로부터 단번에 구원해 내실 것을 보여준다. 죄와 악의 노예가 아니라 의의 종된다는 것, 즉 애굽에서 행하시는 것은 구원의 역사이다. 장차 죄로부터 건져내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나타내는 것,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구속사건을 보여주는 것.
새로운 각도는 금송아지 사건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모든 백성을 쓸어 버리겠다. 새롭게 하시겠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신명기 9:26 여호와께 간구하여 가로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위엄으로 속하시고 강한 손으로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 곧 주의 기업을 멸하지 마옵소서
9:27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생각하사 이 백성의 강퍅과 악과 죄를 보지 마옵소서
9:28 주께서 우리를 인도하여 내신 그 땅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허락하신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일 능력도 없고 그들을 미워도 하사 광야에서 죽이려고 인도하여 내셨다 할까 두려워하나이다
9:29 그들은 주의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 곧 주의 기업이로소이다 하였었노라
하나님의 이름이 손상받을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화살표이다. 죄로부터 구원에 냈다고는 하지만 백성을 거룩하게 만들지 못하신 하나님.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과 의도에 대한 도전이 출애굽기를 통해 어떻게 이루셨는지가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진다. 이 책은 누구와 연결되고 있다. 출애굽기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이 누구인가? 죄와 갈등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인가? 불의에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죄에 강한 손아귀에 잡혀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이야기이다.
;연약한, 고생하는,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 자기 자신의 죄가 놀이에 몰입되어 중독된 사람에게 대한 이야기, 자기의 불안감 때문에 안정감에 완전히 몰입되어 있는 경우에 해당하는 이야기이다. 출애굽기는 이러한 자들에게 자유함을 말한다.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 그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게 만드는 것이 사명이다. 피조물이 보이지 않는 영광을 보이게 하는 것처럼, 영적인 영광과 소망을 보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대한 주님의 부르심이다.
하나님이 너를 위해 행하신 일들이 이런 일들인데, 이것을 믿겠느냐고 묻는 것. 죄악된 유혹을 순종하지 않게 된 것을 믿느냐는 것. 죄의 능력으로부터 해방되었음을 믿느냐는 것.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에 의로 다시 사신 것을 믿느냐는 것. 아니면 죄에 대해서 여전히 무기력하게 살고 있다고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 그리스도에게 대한 생각도 하지 못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이 같이 동반되도록 보여줄 수 있다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것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 역시 그러한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속이는 자는 자꾸만 속삭인다. 하지만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레위기>
26:46 이상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모세로 세우신 규례와 법도와 율법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두려움 속에 응답하게 된다. 우리가 들은 모든 것을 순종하겠다고 약속하는 시간이다. 그런데 그 순간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약속을 저버리고 만다. 시내산 밑에 우리들을 초대하고 싶다. 범죄사건 속에 있을 모세가 책망하고 있을 때, 상상을 초월하는 하나님이 한편에 계시고, 전혀 거룩하지 않은 백성들이 있다. 무슨 관계가 있는가? 어떻게 이들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하나님이 함께 계심은 참 좋은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합당하지 못하다면 어떻게 될까? 하나님은 질책하기 위해서 기다리실 뿐이다. 내 문제를 다 해결해야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할 뿐,
레위기는 순종의 기준을 높이 잡는 사람들에게는 /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삶의 기준이 높은 사람에게는 레위기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 결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으로 비통함을 느끼는 사람, 누구를 비방하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려고 애쓰는 사람, ‘어떻게 아내에게 이야기해야 신뢰감을 회복할 수 있을까?’ 결혼의 약속을 깼는데 어떻게 신뢰감을 회복해야 할까? 단지 앞으로는 그러지 않겠다고만 생각한다. 이런 자에게는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는 이해한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자신의 맹세를 자기가 깼는데 어떻게 다시 그 맹세를 받아들이겠는가? 언약을 파기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말씀이 바로 레위기이다. 실패를 어떻게 극복하느냐, 관리하느냐 하는 문제가 레위기에 기록되어 있다.
십계명에서 실패한 자들을 돌이키는 것이 레위기이다. 신실하다는 것과 완전하다는 것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언약을 파기하는 자라도 다시 하나님께로 나아올 수 있음이 나타나고 있다.
레위기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자신에게로 돌리시기를 원하시는 것을 보여준다. 글자 뒤에 있는 마음을 읽어야 한다.
; 화재경보를 본 사람들의 생각은 화재경보에 나와있는 안내를 사용하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사용하시기를 원하신다. 이 초청장이 사람들 앞에 바로 놓여지기를 원한다.
초청장에 사람들이 반응하고 응답하기를 원하신다. 믿음으로 받기를 원하신다. 자신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면 하나님께로 올 수가 없는 것이다. 처음의 7장에서는 희생의 제사물이 나와 있고, 아론의 제사장됨이 나와 있다. 하나님은 아론을 회복시키고 계신다. 아론이 그토록 실패했는데도 회복될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도 역시 회복될 수 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은혜스러운 성품이 있다. 언약관계를 생각해 볼 때, 약한 자가 깨진 관계에 대한 보상을 치뤄야 한다.
언약을 깨뜨린 자가 더 고통을 당해야 하는 법인데,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수고와 어려움을 감당하고 계신다. 이것이 계속되는 화목의 상황이다. 여기에 구원이라는 것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리시기를 원한다. 출애굽기에 우리가 보지 못하는 그림이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금송아지 사건이후에 계속 회복하고자 하심이 있다. 십계명이라는 돌판이 있다. 모세는 그것을 던져 그것을 깨뜨린다. 그저 가장 보편적으로 하는 대답은 화가나서 던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단지 화가 났기 때문에 돌판을 깨뜨린 것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모세는 사람들의 행동이 언약의 파기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실제로 언약이 깨어졌다. 그러므로 그 언약은 깨어져 버렸고, 돌판은 유지될 필요가 없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셔서 새로운 돌판을 만들어 주셨다. 사람들은 언약을 깨뜨렸지만 하나님은 다시 그것을 세우셨다. 언약을 세우시는 하나님. 사람들은 계속 언약을 깨뜨린다. 하나님은 우리가 언약을 깨뜨린 것을 알고 계신다. 그들이 언약을 깨뜨릴 때에도 끊임없이 하나님은 회복하고자 하신다. 레위기를 볼 때에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만드실 때에 회복하시는 방법을 알리시기를 원한다.
이러한 것을 아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에게 도전을 주는 책이다.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어려운 것을 깨닫지만, 죄의 심각성을 또한 깨달아야 한다. 많은 시간과 노력과 물질이 필요하다. 또 어떻게 보면 피로 범벅이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러한 일을 통해서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된다. 그래서 회복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서 다른 해결방법이 있으셨다면, 예수님께서 죽으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지 않을 때에 하나님을 조롱하는 삶이 되고 말 것이다. 레위기를 계속 묵상할 때에 예수님께 계속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실, 길게 하나님과의 회복을 위해 나아갈 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된다.
디도서 2장 13절에서는 바울은 불경건함에 대해서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말한다. 하나님의 협박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 그 은혜에 대해서 더욱 묵상하도록 도와준다. 레위기에 보면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는데, 될 수 있으면 사람들이 다양한 각도에서 보기를 원한다. 이것은 깨끗함과 부정함의 문제이다. 과연 무엇인 정결하고 부정한 것인가를 구별하는 일이 요구되었다.
;피가 굳으면 부정을 탄다 든지 하는 것들이 부정하게 되는 것이며 정결치 못하게 되며,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다. 정결하게 되기 위해서 사람들은 서로 손을 만질 수가 없다. 부정을 타는 또다른 것이 있는데, 어떤 부정한 사람들이 있는데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하더라도 부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이후에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그래서 이러한 부정과 함께 오는 유혹을 생각해 보라.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고 하지 않으면 선함과 아름다움에 가까이 가지 못한다. 이러한 것들이 좌절을 갖게 한다. 소망이 사라지게 만든다. 하나님으로부터 너무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회복이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시 그때에 그리스도의 회복이 나타나게 된다.
막 5 - 죽은 소녀. 예수님께서 그 소녀의 손을 잡고 소녀야 일어나라’ 죽은 소녀가 있는데 그 손을 잡으면 더럽게 되는 데 어떻게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무언가 부정한 것을 만져서 부정하게 되는 것의 반대를 보게 된다. 정결한 것을 만져서 정결하게 되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정결함과 거룩함과 신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기에 주변의 모든 것을 변화시키고 있다.
막 5:27-30 -> 혈루증으로 12년 고생한 여인이 있는데, 그녀가 예수님을 만지니까 예수님께서 고치셨다. 만짐으로 인해서 부정함이 바뀌었다. 부정하고 전염될 수 있는 병이었지만 예수님께서 만지셨고, 그 병이 낫게 되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이 자신을 통하여 정결함을 받게 되는 분이셨다.
마27:10-11 23:27,28 ->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속에 있는 것이 더럽게 만든다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속에 더러움이 가득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마음속의 부정함은 어떻게 되는가? 군병들에게 침뱉음을 받으셨는데, 이스라엘 사람은 정결하고 부정하다. 회중밖에 있는 존재들, 다시 그러한 존재들이 침을 뱉었다. 예수님께 전달하였다.
마태는 유대인으로서 이러한 말을 우연히 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풍성하게 정결하게 만들만한 것이 없다. 휘장이 찢어지고, 보호받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 부정함을 입은 것이 아니라, 모두를 정결하게 만드셔서 하나님과 우리를 분리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신체적으로 부정한 것만을 다루었는데, 이제는 휘장이 둘로 갈라졌다. 우리 속에 있는 부정함을 변화시켰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었다. 이방인에게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방인은 전에는 멀리 있던 자였지만, 이제는 가까워지게 되었다. 낙심해서 하나님께 접근할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초청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를 정결하게 하셔서 부르신다. 존전에 부르심을 받고 그를 즐거워하고 찬양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라고 부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말씀들이 희망을 잃은 자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레위기를 소홀히 하게 되기도 하는데, 레위기는 개인적으로 많은 희망을 줄 수 있는 말씀이다. 실제로 무엇을 하는가하면 레위기는 그들을 놀라게 해준다.
요3:16 -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이것은 우리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 하지만 레위기의 말씀을 보면 이것이 우리들의 손에 만져진다.
<민수기>
하나님께 사람들은 순종함으로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첫 번째 유월절을 지켰고, 애굽을 떠나 구름기둥을 떠났고, 홍해를 건넜고, 하나님을 예배하였다. 그들은 모든 것을 바르게 만들었다. 하고자 하는 일을 하였다. 그러나 광야를 헤메게 되었다. 약속의 땅을 바라보았지만, 그들이 얻은 것은 사막의 모래였다. 젖과 꿀이 흐르는 대신에 물이 없고 먹을 것도 없었고, 광야에서 그러한 삶은 죽음이었다. 자녀들이 굶어 죽어가는 상황을 생각해 보라. 이것은 전혀 기대했던, 약속받은 삶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의 반응이다.
요셉, 욥, 바울처럼 예수님과 달리 사람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특별한 죄와 연결해서 생각할 수가 없었다. 지적해야할 죄가 존재하지 않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께 원망하고 반역하였을 때, 처음에 배고팠을 때에는 죄를 짓고 있지 않았음을 기억하라. 하나님이 그들을 죽음의 땅에서 해방시키셨을 때, 그 직후에 죽음을 직면하게 하셨다. 죽음에서부터 해방시키셔서 다시 죽음에로 몰고간다는 것,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그들의 삶가운데 들어가서 생각해 보면, 하나님은 선하시고 모든 것을 주관하시지만 삶은 너무나 어렵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사람들에게 뭔가 중요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어떤 때에는 나도 잘 모르겠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뭔가 일을 행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모든 일을 겪고나서 중요한 교훈을 놓친다면 그야말로 비극이다. 하나님께서 활동하고 계시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극이다. 도와주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활동하고 계시다는 것. 우리 삶은 우연한 삶이 아니다. 그분의 행동은 언제나 선을 위해서 이루어진다. 종종 그래서 우리는 이스라엘을 위해서 이야기하시는데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는가를 보아야 한다.
여기서 이상한 것이 있다. 왜 사람들을 이렇게 불러내서 죽게 하는가? 그것이 우리를 사로잡는다.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알 것 같기도 하다. 원하는 것은 가져야 한다는 마음이 있다. 왜 그런 것을 갖지 못할 때 갖고자 할 때 징계하는가? 성경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자 하는 마음을 지적한다. 신명기 8장이 매우 도움이 될 것 같다.
신명기 8:1
8:1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8: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8:3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8:4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
8:5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8:6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일에 대해서 뭔가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은 들어주시지 않는다. 그것이 그 사람들의 삶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그들의 삶에서 고조되고 있는 현상이다. 다음 단계의 말씀으로 들어가고 있다. 두 번째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것은 내게 뭔가를 주고자 하시는 것이 아닐까,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고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그러나 여기에는 내가 원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을 다루시는 하나님을 발견한다. 본문에서 사람들을 시험하시고 겸손케 하실 때에 그 속에 있는 것을 드러나게 하신다. 그들의 삶가운데 의도적으로 어려움을 갖게 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하신다는 것이다. 물과 식량이 없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문제는 믿음이 없는 것이다. 그들이 생각할 때에 자신들의 문제가 드러나게 된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지만,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지 못했다. 그것은 단순히 어려움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다. 그 마음을 애굽으로부터 가지고 나왔다. 어려움이 믿음의 부족함을 드러나게 했다. 그들의 현재 삶의 고난은 마음속에 하나님께 향한 태도를 드러나게 하였다. 만약에 그들에게 별 어려움없이 약속없이 가나안에 갔다면 하나님을 섬겼을 것이다. 그러나 고통을 주는 하나님을 섬기지 못했을 것이다. 광야에서 그들의 마음을 드러나게 하신다. 광야의 삶은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라, 목적을 가지고 일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은 항상 맛있는 것만을 제공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이들과 개인적으로 관계를 맺으신다.
이상적인 시나리오를 통해서 그들의 마음의 문제를 다루게 하신다. 나에게 그렇게 하시고, 나에게 상담받는 자에게 그렇게 하신다. 하나님을 섬기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인가를 깨닫게 하신다. 그것으로 인해 매우 흥분하게 된다. 우리 삶에 접근하는 것을 혁명적으로 바꾸어 준다.
; 한 친구가 말하기를, 이 집은 나의 아름다움과 잘조화됨을 원함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집이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나를 다루어서 그것을 깨닫게 해주신다. 10개월이 걸려서 그렇다.
하나님께서 상황속에서 필요한 것을 준비하신다. 좀더 주님을 닮은 모습을 갖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의 눈은 더 높은 차원에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게 하신다. 그 집에 대해서 불만족하고 연민에 빠지기도 한다. 수리중이라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다. 하나님에 대한 시각이 넓어짐으로서 삶에 대해 정확한 시각을 갖게 되었다.
출애굽기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있음을 기억하라. 약속의 땅에 대해서 히브리서 기자는 동일한 작업을 하고 있다.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휴식을 주지 않았다. 앞에 있는 휴식을 바라보게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죄로부터 해방되었지만, 천국에 도달하지 못했다. 광야에 방황한다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 가르쳐주고 있다. 전체를 설명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삶의 중요한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 사람들에게 일어난 사건은 우리들에게 좋은 교훈으로 보여준다. 그들이 마음을 주는 것에 우리도 마음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기대하는 예상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만들어 준다.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에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어떻게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를 질문한다. 그러나 더 좋은 질문은 이 상황에서 벗어나게 되길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의 마음 속에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죄의 사냥에 대해서만 하나님이 흥미를 갖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때로 부정적인 경험을 주기는 하지만, 처음에 정탐꾼들이 행했던 일이기도 하다.
; 그 사람들이 돌아왔을 때, 거대한 포도송이를 본 것도 사실이지만 아낙자손들도 보았다. 현상의 문제를 알게 되었다. 여호수아와 갈렙의 놀라운 반응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거대한 포도송이를 보았지만, 그들은 그보다 더 위대하신 하나님을 보았다. 거대한 믿음을 보게 되었다. 이는 아주 좋은 일이다. 그런 사람들 곁에 함께 하고 싶다.
광야에서 우리가 얻은 교훈은 불신앙을 보여준 사람들과 신앙을 보여준 사람들이 있다. 불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신앙을 갖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신명기는 변화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온역을 보내셨는데, 향을 들고 온역과 사람들 사이에 서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존재였던 아론이 중보자로 서게 하신다. 사람들에게 자기를 예속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서게 하신다. 어려운 상황은 나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의 어려움을 통해서 마음을 다루게 하심을 알게 된다. 이는 우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사역의 일부는 우리의 삶에 준비시키는 것이다. 많은 경우에 성령의 열매는 이러한 어려운 삶에서 많이 맺혀진다. 이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이 고통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다.
; 성령의 열매들, 이러한 열매를 어려운 상황에서만 얻고자 하는 것들이다.
우리의 삶가운데 행하시는 어려움을 대하는 다른 태도가 있다. 어려움을 다루는 다른 시각이 있을뿐만 아니라, 그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시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의 삶도 쉬울 때보다 어려울 때에 더욱 우리에게 매력적으로 보인다.
; 더 이상 나쁜 꿈을 꾸기를 원하지 않는 아들에게 나쁜 일이 때로는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나쁜 꿈을 꿀지라도 예수님께서 너와 함께 하심을 알게 해주기를 원한다고 기도한다. 그 상황을 다루기를 원하신다고 말해주었다. 삶은 결코 좋지만은 않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사실이다. 본문에는 좀 더 그런 것들이 있다.
그냥 광야에 방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더 많은 부분을 이해할 수 있는 기초를 제공해 주고 있다. 본문에 있는 것이 우리에게 좀더 전해주는 것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겸손케 하셨다. 굶주리게 하시고 만나로 먹이신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부터 나오는 것들로부터 사는 것을 가르치게 하시기 위함이다. 예수님이 그 말씀을 하셨을 때 어떤 상황에 있었는가? 광야 어딘가 계셨는가?
=예수님은 사십일 굶주리고 계셨다.
; 사탄은 시험을 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일보다도 그런 일을 행하기를 유혹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수기 말씀을 인용하신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상황과 아주 동일한 것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실패했던 시험을 예수님은 통과하셨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실패했던 것들을 다시 통과하게 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행하셨다. 또한 우리들을 위해서 그런 일들을 하셨다. 종종 이런 일들에 실패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의 의를 주신다.
주님은 우리가 의롭게 하신다. 성령을 동일하게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신다. 우리의 길을 함께 걸어가게 하신다. 우리가 실패할 상황을 주님은 통과하신다. 그래서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 극복할 희망을 갖게 되는 것이다. 종종 상황이 너무 나쁘기 때문에 불구가 되어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상황을 뛰어 넘는 상황이 필요하다.
; 우리의 인생에서도 완전히 압도되는 그런 상황이 있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 알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지는 것을 생각해 보라. 완전히 공포심에 압도되어서 똑같은 일을 계속 반복하는 것이다. 뭔가 다른 것을 시도한다면 문제가 더 악화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에게는 거짓이다. 우리가 실패한 곳에서 예수님은 통과하셨다. 그렇게 압도된 상황에 있는 사람들은 / 예수님께서 다 이루신 구원을 헤칠 수는 없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삶은 결과를 완성해 놓았기 때문에 다른 것을 시도했다고 해서 망가지지 않는다. 광야를 계속 걸어가면서 재창조된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
민수기는 우리들에게 경고를 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들이 하나님을 순종할 믿음이 있기는 있었지만, 그 이상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민수기가 우리에게 경고를 주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가입이 되기는 하지만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찾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더 진행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나 동료들이 죽어야 한다고 했을 때 기분이 어떻겠는가? 그 자녀들조차 들어가도록 허락받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나 하나님의 영광에 짐이 되고 싶지 않다. 그 점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경고를 주는 책이다.
민수기에는 뒤에 가면 땅의 정복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자신들도 실패할 것인가라는 두려움이 보여진다. 믿음을 가지고 그것에 응답해야 하는데 순종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신명기>
이러한 문맥 속에서 신명기는 광야에서 주어지는 말씀이다. 그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그곳에 40년전 그들의 부모가 있었다. 가나안에 들어가야 하는 것에 대해서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 40년동안 그들의 환경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변함없는 소망이다. 부모들은 조상들이 갖지 못했던 믿음을 어떻게 가져야 하는가?
;애굽에 사는 것을 다 보았지만 그들은 믿지 못했다. 과연 그것을 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단지 노예의 후손일 뿐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모세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않는다는 것. 홍해를 가른 사람이 아닌가?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얼굴을 대면했고, 모든 기적의 산 증인이 아닌가? 그 사람 없이 어떻게 이일을 하겠는가? 여기에서 우리에게 주는 시험은 무엇인가? 여기에서 새롭게 주어지는 믿음이 있다.
거듭거듭 말씀하시는 것- 두려워 말라.
이 책을 두려움에 빠져 있는 자들을 위해서 사용할 것이다. 성경공부를 해보자. 성경의 신명기를 찾아서 성경 신명기에 하나님은 누구시며 무엇을 하셨는가를 살펴보자. 얼마나 자주 빈번히 사람들을 돌아오게 하시는가를 확인하라.
1. 하나님께서는 노예상태에서 사람들을 불러 내셨고
2. 과거에 그렇게 하셨음을 상기시킨다.
3. 미래에 대해서 약속하신다.
4. 계속 반복해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깨닫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자신이 누구인가를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신다. 이스라엘 자녀들은 하나님의 일들을 목격하였다. 매일 만나를 먹은 자들이며, 만나를 먹은 것을 상기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심. 목회사역 속에서 하나님이 누구시며 무엇을 하셨는가를 상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에게 하나님이 누구시며 무엇을 하셨는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 여기에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있고, 거기에 반응해야 하는 것이 있다.
이것이 믿음의 표면상에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를 기쁘시게 하라고 요구하시지 않는다. 자신이 먼저 우리를 위해 일하셨다. 우리가 그 반응을 할 수 있도록 행하셨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과 우리의 반응을 기대하는 것, 우리가 그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시는 것, 광야에서 약속의 땅을 바라보게 하시는 것은 그것을 주시겠다고 하심이다.
그것을 하지 않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의 표현이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나타날 때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한 반응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하신 일을 상기시켜야 한다. 두려움에 싸인 자들에게 하신 일을 상기시키신다. 미래에 대해서 약속하신다. 그 자신을 내주신다. 그들과 약속하시고 그들과 같이 가신다. 그것이 우리를 놀랍게 만든다. 우리의 믿음을 확장하는 가운데에서 알 수 있다. 거인들이 있는 곳에서 그 땅을 차지하는 것이다.
분노하고 고통하게 만드는 자를 이기게 하는 것. 성숙한 목회자와의 상담, 그런 경우에 우리의 실천적인 자원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상황에서 나와 함께 하시겠다고 하신다. 출애굽기 3장에서 그 장면을 보려고 한다.
여기에는 주님의 생각이 나타나고 있다.
3:11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3:12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만약 내가 모세라면 완벽한 무기와 무장을 필요로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하나님 자신이다. 그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 순간의 반응이 내 마음에 무엇이 있는가를 보여준다. 내가 불신앙에 차있는가를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믿음을 갖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이 내게 충분치 않다는 것이 되어버렸다.
;신명기 10장의 레위인에게 주님이 그들의 기업이 된다는 것을 말하신다. 그것은 바라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른 족속에게 준 것보다 더 큰 것을 주신 것이었다. 여기서 마음속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가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믿기지 않는 놀라운 제안에 대한 반응이 내 마음에 무엇이 있는가를 보여준다. 내가 믿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이것이 그리스도안에서 훨씬 더 능력있는 것으로 어떻게 나타나는가?
그들은 모세를 잃었다. 그러나 우리 중보자는 결코 잃지 않는다. 예수님은 우리에게서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시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섬기고 있는 자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것이다. 부르심에 반응하지 못하고 있다. 동시에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장 큰 것은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이다. 이는 그들이 필요한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이 책들이 어떤 도움을 줄 것인가? 이것에 대한 분명한 해답이 책속에 있다.
* 성경은 하나님에 관해서 쓴 책이다. 내겐 항상 그렇지가 않았다. 에베소서를 처음 읽었을 때에 우리가 얼마나 특별한 사람들인가에 대해서 흥분했었다. 우리를 위해 행하신 모든 일들을 생각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기는 하다. 그것이 우리 자신을 동기부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은 이것은 사람이 얼마나 놀라운가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얼마나 놀라운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사실 그 사람들을 위해서 일하시는 그분이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에베소서는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우신 분인가를 나타내는 것 뿐이다. 구원이나 친분의 가능성이 없는 자들에게 행하신 일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놀라우심에 대해서 알게 된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가운데 행하시는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그 일 너머에 있는 일에 대해서 보기를 원한다. 우리를 위해 행하신 구원은 특별한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 뒤에 더 큰 것이 있다.
; 창세기의 롯- 아브라함의 조카, 올바른 혈통을 가졌다. 롯은 아브라함과 가까운 연결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아주 번창했다. 너무나 많은 축복을 받았다. 같은 지역에 살 수가 없었다. 창세기의 문맥속에서 축복받은 사람이다. 그러한 부귀에서 완전히 거지로 내려가게 된다. 그가 아브라함과 같이 살수 없을 만큼 거부였는데 나중엔 완전한 거지가 되어 소돔과 고모라를 떠나 동굴에 살게 되었다. 믿음의 공동체인 아브라함과의 관계에서 떨어져 딸들과 근친상간하는 관계로 떨어져 버렸다.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났는가?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부인은 사망했고, 딸들은 성적으로 타락했다. 그들이 소돔과 고모라에 살다보니까, 소돔과 고모라가 그들의 삶 가운데 존재하게 되었다. 사회 경제적으로 잘 되고 있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시야를 잃지 말아야 하는 많은 이야기가 있는데, 롯이 그 이야기의 중심이 된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참되시다 이외에 더 말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롯과 그 가족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등을 돌리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롯이 곤경에 빠졌을 때 두 번이나 건져주셨다. 하나님의 간접적인 개입을 통해 살려주셨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실 때에는 직접 구원해 주셨다. 두 천사로 멸망시키셨을 때, 직접 구원해 주셨던 것이다. 그들이 롯에게 하려고 하는 일에 대한 경고를 주고 있다. 15절에 새벽에 다시 경고했다.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나가라고 했는데, 롯은 머뭇거리고 있다.
-‘자비를 더하고 계신다’
롯은 거기에 대해서 협상을 제안하고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제안했고, 하나님은 그 말을 들어 주셨다. 롯을 생각하며 읽지 말고, 주님을 생각하며 읽으라. 하나님이 친절하고 자비하심을 볼 수 있다. 고집스러운 인간이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보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이러한 것을 알지 못하는 때가 많은데 이런 것을 알게 되는 것은 매우 필요하다.
; 모압과 암몬 사람들이 생겨난다. 굉장히 좋지 않은 혈통의 사람들이다. 신명기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압과 암몬 자손들을 건드리지 말라고 하신다. 그들의 땅은 롯을 위해 주신 땅이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좋지 않은 가문에 대한 놀라운 은혜를 보여주신다. 왜 그렇게 하시는 가를 말씀해 주신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심정을 보여주신다. 하나님의 행동은 단순한 동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종종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 못한다. 어리석음보다 위대한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보게 된다. 그것이 내 사역에서 하고자 하는 일이다.
;광야에서 그들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나님께서 롯에 대해 반응하신 것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롯에 대해서 어리석음에 대해서 보여주신 것과는 다른 반응이 있다. 창조주의 마음이 있다.
People experience. - 상담, 그들의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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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mptation --> rightly
--> sinfu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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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반응( 1. 자비하심을 보이시고, 2. 대속적인 은혜를 보이신다. )
시험거리를 성경을 통해 비교하는데,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이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 나에게 닥치는 시험거리를 다룰 수가 있게 된다. 그리고 이로서 시험을 통한 소망을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