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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끼는 것 주님이 아끼시는 것(욘 4:9-11)



 

 

내가 아끼는 것 주님이 아끼시는 것(욘 4:9-11)

  

 

  

우리 삶에 존재하는 견디기 어려운 ‘힘든 상황’과 그로 인해 생겨나는 ‘악한 결과’를 삶 속에서 접하다 보면 우리는 얼른 그 ‘힘든 상황’을 바꾸고 싶어 하고 빨리 그로 인한 ‘악한 결과’를 없애버리고 싶어합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히 그런 방법에 몰두하게 되고 원인에 대한 이해 없이 이것 저것 아무 거나 막 실행하게 됩니다. 그 중의 어떤 것이 효과가 있다면 다행이지만 그런 것이 효과가 없다면 도리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집니다. 왜냐하면 상황은 상황대로 더욱 나빠지고 악한 결과도 결과대로 더욱 악화되기 때문입니다.

  

때로 우리는 인생에서 생기는 문제를 이렇게 해결하곤 합니다.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하기보다는 그냥 현재 상황만 사라지게 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물론 쉽기는 합니다. 하지만 매번 그렇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더 큰 문제가 반드시 찾아올 것입니다. 지금은 억누르고 무시할 수 있지만 언젠가는 도저히 억누르지 못할 그리고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문제로 커져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중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문제의 원인을 이해하는 단계’로 들어서야 합니다. ‘무엇이 문제인지를 인식하는 것’이 ‘힘든 상황과 악한 결과’를 생각해 보는 단계였다면 이제 ‘원인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은 ‘감정과 욕구’를 다루는 단계입니다. 이것은 쉽지는 않지만 결코 손해 보는 것은 아닌 중요한 과정입니다.

  

원인이 무엇인가를 이해할 때 파인애플 껍질을 벗기는 것을 생각하시면 마음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 지를 쉽게 이해하실 것입니다. 맛있는 파인애플은 딱딱한 껍질 속에 있습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표면적인 감정 안에 내면의 욕구가 있습니다. 감정은 거칠고 딱딱하지만 그 속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 감정을 이해하고 벗겨내야 합니다. 그리고 나면 그 안쪽에 있는 욕구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계속 보고 있는 요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그의 ‘악한 열매’를 살펴보았습니다. 그의 ‘악한 열매’는 ‘분노’가 담겨있는 것이었고 그 분노 속에서 스스로 죽고자 하는 것이었으며 자신의 괴로움 속에서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만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변화보다는 하나님의 변화만을 기대했었습니다. 그는 선지자였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선지자 같지 않았고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하나님 사람 같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심판 받음을 불쌍히 여겼어야 했지만 오히려 심판 받지 않음을 억울해 했고 하나님의 용서하심에 대해서 순복 해야 했지만 오히려 그 용서하심에 대해 저항하고 거부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된 것은 그의 마음 속에 감정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 감정이 자신의 말과 행동 속에 그대로 표출이 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도저히 그냥 외면할 수 없는 마음의 문제 속에서 이제 우리는 그의 감정의 근원이 되는 ‘욕구’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가 원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표면적으로야 당연히 니느웨의 멸망을 원하는 것이었지만 내면적으로 그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그리 간단하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 겉 표면의 껍질을 다 벗겨내었을 때에만 그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하나님과 요나의 마지막 대화를 보여줍니다. 요나서는 이 대화로서 끝이 납니다. 그래서 이 대화 이후에 요나가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는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건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대화 속에 요나가 무엇을 원했으며 그것을 왜 원했는지가 잘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짧지만 심오한 이 대화 속에서 그의 욕구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성경적 상담의 관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통해서 그의 마음 속에 감추어진 깊은 의미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이르셨습니다.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욘4:9)”

  

주님께서는 이전에 요나가 왜 니느웨 성을 용서해 주시냐면서 강하게 항의하며 차라리 죽겠다고 했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욘4:4)”

  

그는 이전에 니느웨 성의 용서함을 인하여 성내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박넝쿨의 시듦으로 인하여 성내었습니다. 이전에는 왜 니느웨 성을 용서해 주시냐고 성을 내었고 이번에는 왜 박넝쿨을 시들어 죽게 하시냐고 성을 내었던 것입니다. 이전에도 성을 내면서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다고 하였고 이번에도 역시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죽여달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반복되는 패턴 속에서 그의 욕구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그에게는 니느웨 백성들이 심판받기를 바라고 박넝쿨은 어떻게 해서든지 살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니느웨가 용서될 바에는 차라리 자신을 죽여달라고 하였고 또한 박넝쿨이 죽을 바에는 차라리 자신을 죽여달라고 억지를 부렸습니다. 그는 니느웨로 인하여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고 물으시는 하나님께는 아무 대답도 안하면서 분노하였으며 이 박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고 물으실 때에는 거침없이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찌라도 합당하니이다’라고 외치면서 분노하고 있었습니다.

  

일련의 과정을 볼 때 그가 원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는 자기 뜻대로 되기를 바라는 ‘지배’의 욕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무엇이든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자신이 기대하는 대로 되어지기를 원했습니다. 니느웨를 심판할 것인가 말 것인가하는 문제도 박넝쿨을 살릴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도 다 자기 뜻대로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는 정말 ‘지배’라는 욕구로만 가득한 자인지 또 다른 욕구가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의 생각을 좀더 살펴봐야 합니다. 일단은 ‘지배’라는 마음의 욕구를 추측해 볼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에 대해서 그 외에 무엇이라고 더 말씀하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나무에 비유하자면 ‘감정’은 ‘열매’와 같습니다. 또한 ‘욕구’는 나무의 ‘뿌리’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뿌리로부터 열매가 나타나는 것처럼 욕구에서 감정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럴 때 마음의 뿌리는 단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뿌리에는 여러 가지 욕구가 있습니다. 그럴 때 그 중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욕구를 찾습니다. 가장 큰 감정을 일으키고 있고 가장 몰입되어 있는 욕구를 찾아서 그 욕구를 바꿔야만 감정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뿌리에 문제가 있을 때에는 열매가 안좋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럴 때 그 근원에는 뿌리의 문제가 있습니다. 열매가 나빠지는 것은 뿌리가 나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마음도 ‘감정’이 고조되고 과잉 되어 있을 때에는 ‘욕구’가 커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뿌리인 욕구를 찾아서 그 욕구의 문제를 해결할 때에 비로소 그 열매가 되는 감정의 상태도 해소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욕구에 대해서 ‘은혜’를 보여주십니다. 그 은혜 속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십니다.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요나의 마음에 대해서 잘 알고 계셨습니다. 또한 우리가 자신의 자녀들을 아는 것 보다, 우리가 자신의 배우자를 아는 것보다, 우리가 자신의 친구나 이웃을 아는 것보다 그들을 더 잘 아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뜻에 더욱 의지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요나가 가지고 있는 욕구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해 주실까요?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욘4:10)”

  

여기에서 중요한 한 단어가 있습니다. 그 한 단어가 요나의 욕구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하나님께서 한 인간에 대해서 보여주시는 정확한 그의 마음의 상태입니다. 그것은 바로 ‘아꼈거든’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는 박넝쿨을 아꼈습니다. 또한 그는 이스라엘을 아꼈습니다. 그는 자신의 민족을 아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뭐가 문제입니까? 그것은 차라리 좋은 장점이 아닙니까? 아끼지 않는다면 얼마나 허비하며 얼마나 무성의하며 얼마나 무기력하겠습니까? 어떻게 그것이 ‘욕구’가 될 수 있으며 어떻게 그것이 마음의 ‘악한 뿌리’가 될 수 있습니까?

  

이것이 그 자체로는 괜찮은 것 같지만 진짜 문제인 이유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 있습니다. 그 ‘아꼈거든’이라는 말은 다음 구절의 이 말과 대치되고 있습니다. 바로 ‘아끼지 아니하겠느냐’입니다.

  

이를 통해서 주님께서는 요나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네가 네 것을 아끼는 것처럼 나도 내 것을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요나는 자신의 것은 아깝다는 것을 생각하면서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것을 아까워하시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박넝쿨이 죽는 것은 아까워하면서 하나님께서 아끼시던 니느웨가 죽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소유는 챙기면서 하나님의 소유는 어떻게 되든지 상관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 망가지길 바랬습니다. 이는 마치 자기 자식은 잘되기를 바라면서 하나님의 자녀는 망하기를 바랬던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근본적으로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유익보다 더 자신의 유익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요나의 마음 속에 있던 또 다른 욕구는 이러한 ‘유익’이었습니다. 박넝쿨이 있어 유익한 것이 더 좋았고 자신의 민족을 공격하였던 니느웨가 심판을 받고 멸망하여서 마음 속의 원한이 풀리게 되는 것이 더 좋았습니다. 그 유익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하나님의 뜻도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나 그분의 사랑을 바라보는 것보다 그분의 희생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를 아는 것보다 그는 자신의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자신의 유익이 중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의 유익이 하나님의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소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하나님이 니느웨를 아끼는 것은 합당치 않고 자신이 니느웨를 미워하는 것은 합당했습니다. 하나님과 이렇게 생각이 다르니 그는 죽고 싶었고 살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결국 그의 마음의 뿌리는 자기 자신의 욕구에 충실한 ‘악한 뿌리’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나님의 생각과 다른 그가 왜 바다 한가운데서 빠졌지만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살 수 있었고 왜 니느웨로 가서 그곳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었고 왜 지금도 초막을 짓고 나서 언제 니느웨가 무너지는가를 기다리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죽고 싶다는 그를 죽게 내버려 두시지 않는 것일까요? 왜 그를 여전히 견디고 인내하시면서 그의 모든 불평과 불만을 다 참고 계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니느웨도 아끼고 사랑하시지만 요나도 아끼고 사랑하십니다. 주님은 아무도 죽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사탄은 이런 갈등 속에서 니느웨가 죽게 되기를 바라고 요나도 죽게 되기를 바라고 모두가 죽게 되기를 바라지만 하나님은 아무도 죽게 되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이 대신 죽으십니다. 하나님 자신이 니느웨를 대신해서 죽으시고 거역하며 거세게 반항하는 요나를 위해 대신 죽으십니다. 그들에게 심판을 내리시지 않으시고 그에게 천벌을 내리시지 않으시고 다시 기회를 주시면서 얼르고 달래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런 분입니다. 그렇게 인간을 아끼시는 분입니다. 바로 그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사랑으로 대하셨듯이 우리들도 기다려주시고 기회를 주시며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문제가 있는 그 어떤 사람이 자기 마음 속의 악한 욕구를 깨닫고 그것을 버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아무도 자신의 욕구로 인한 결과인 심판의 죽음에 이르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욘4:11)”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고 주님이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와 그들의 가축을 아끼시는 것이 얼마나 합당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를 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 속의 욕구를 버리고 주님의 은혜로 나아가야 합니다. 자신의 분노함은 합당치 않고 하나님의 용서하심은 합당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을 시인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욕구’를 버리고 ‘은혜’로 나아가게 됩니다. ‘분노’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를 통해서 진정한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러한 마음의 변화를 통해서 삶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 자신의 변화뿐만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도와주고자 할 때에도 역시 이점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이해하고 분석한 다음에 그것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버리게 하고 그것을 은혜로 바꾸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원하는 것은 욕구이고 그 욕구가 커지면 죄가 됩니다. 바로 그러한 욕구 때문에 신체가 건강했던 사람이 죽어갑니다. 아무 병에 걸리지 않았던 사람이 시름시름 앓게 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의아스럽지만 모든 의술과 모든 처치법과 모든 치료약을 무색하게 하는 것이 바로 이 마음의 병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는 마음의 악한 뿌리가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보다 더 커질 때 문제가 시작됩니다. 이 마음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그를 잡고 있는 악한 생각이 무엇인지를 알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버리게 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새로운 생각을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악한 생각을 아시고 요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주님께서는 진정으로 그의 마음이 바뀌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마음 속에 오셔서 그 마음에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그러한 하나님의 손길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아끼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아끼시는 것이 더 중요함을 알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얼마나 더 큰지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더 큰지 하나님의 희생이 얼마나 더 큰지를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그의 마음이 변화되고 악한 마음의 뿌리가 은혜로 변화됩니다. 진정한 치료와 변화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시작됩니다. 내가 아끼는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아끼시는 것을 자신도 아끼고자 할 때 이 모든 변화의 일이 시작됩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어떠한 자들입니까? 우리가 혹시 요나같은 자들은 아닙니까? 내가 아끼는 것보다 주님의 아끼시는 것을 더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욕심으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욕심이 가져오는 죄의 심판으로부터도 해방됩니다. 우리가 아는 어떤 사람이 요나와 같은 상황에 있습니까? 그의 마음이 변화되도록 도와주십시오. 그가 자신이 아끼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아끼시는 바로 그 자신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십시오. 그래서 자신의 삶을 파멸시키지 말고 주님의 계획과 능력과 희생을 통해 새로워지고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이 아끼시는 또 한 사람의 생명을 구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은 우리가 천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가장 귀한 하나님의 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놀라운 변화의 도구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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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소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20-10-13 (화) 20:49 3년전
감사합니다^^
요나의 지배 욕구가 얼마나 큰 죄인가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와  계획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깨닫습니다.  더하여 마음을 다루는 상담에 중요성을 깨닫고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큰지  부족하지만 주님의 좋은 도구가 되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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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21-01-23 (토) 10:14 3년전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보다는 내 욕구를 먼저 채우려고 하는 우리의 마음으로 인해 열매 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요나와 같은 어리석음의 길을 다시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며...아직도 이런 어리석음으로 열매맺지 못하는 사람들을 돕는 지혜로운 상담사가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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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스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22-02-25 (금) 22:34 2년전
얼마전 상자모델을 동일한 구절로 적용해보다가 요나의 내면에 의문이 많았는데, 마침 이 글을 읽고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또한 이 공부를 잘 활용하여 '우리교회, 우리가족'만 제대로 유익해보자라는 마음이 들었던것도 고백합니다.
그리고 피상담자에게서 표출되는 거부나 저항에 제가 불편했던 이유는, 결국 제가 제일 아끼는 것은 저의 보호하고자 하는(내 마음을 지키고자하는) 욕구였습니다. 그래서 더 지배로, 회피로 표현했던것을 고백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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