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마20;20-28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_2
2011.1.9. 주일오후, ‘상담학교’
신년은 우리들에게 여러가지를 새롭게 만들어 줍니다. 해가 바뀌고 새날이 오면서 우리들은 기본적으로 일년씩 더 나이를 먹습니다. 나이든 것을 실감하게 되기도 하고 실감하지 못하기도 하지만 여러모로 우리는 작년과는 다른 새로운 신체적인 환경에 들어섰습니다. 또한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은 완연한 변화를 느낍니다. 새로운 반과, 새로운 선생님과 새로운 학교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도 새해 시무식을 하면서 올해의 여러가지 새로운 환경에 직면하게 됩니다. 군복무를 하고 있는 사람은 제대가 가까워져 오기에 더욱 설레기도 할 것입니다. 가정이 있는 사람은 올해 뭔가 가정적으로 새로운 일이 있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많은 변화들 속에서 우리는 이런 저런 소원을 가집니다. 변화들이 단순히 변화로만 그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 변화가 좋은 것으로 나타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것이 우리 민족의 근본적인 종교성이기도 하고 특별히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다고 해보십시오.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을 괴로우시게 하는지 모릅니다.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 자녀를 두신 부모님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재미가 없겠습니까? 원하는 것을 주는 즐거움이 있는데 그러면서 더욱 부모님이 있음을 감사하게 될텐데, 이런 저런 것을 구하지 않고 아무 것도 요청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실 마음 속에 거부감이 있기 때문이며 신세진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불편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혹은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여러 가지를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이번 주에 저도 기도할 것이 있어서 잠시 기도원에 갔다 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기도하며 부르짖고 있더군요. 신년에 하나님께 기대하는 것이 있고 간구하는 것이 많아 보였습니다. 그리고 보기에 좋아보였습니다. 그것이 정상적인 것이지요. 기도원이 아니더라도 새벽에 특별새벽기도회를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특별축복집회를 개최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합니다.
왜 한나가 아이를 낳지 못한다고 해서 성전에 나아와 기도했겠습니까? 왜 솔로몬이 왕이 된 다음에 천번 번제를 드렸겠습니까? 왜 다니엘이 왕이 금지하는 것을 알면서도 목숨을 걸면서 하루 세 번씩 고국인 예루살렘을 향해서 기도했겠습니까? 그들이 미쳤나요? 그들이 정신이 나갔나요? 그들이 비이성적인 사람들입니까?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이 정상이 아닌 것이지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정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럴 때 기뻐하시고 그 기도를 들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나가 아들을 낳았고, 솔로몬이 지혜와 및 모든 풍요로움을 얻었으며, 다니엘이 죽을 때까지 안정적인 지위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지 않으면 잘되는 것이 무의미합니다. 평안한 것이 자랑이 됩니다. 형통한 것이 거만한 이유가 됩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어려움을 겪게 하시고 형통하지 못하게 하시고 문제가 생기게 하시고 그래서 하나님께 다시 기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기도를 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어려움과 슬픔과 고통을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이며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간구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모습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간구가 다 용납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간구하지 않는 모습이 당연하지 않는 모습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것과 동일한 이유입니다. 다시 말하면 간구하지 않음이 하나님께 미치지 못함 같이 잘못 간구하는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간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간구가 아니라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하나님을 부끄럽게 하는 간구가 됩니다. 그렇다면 어떤 간구가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간구일까요?
오늘 본문에는 세배대의 아들의 어미가 나옵니다. 그녀는 특별히 자신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을 위해 간구하기 위해서 그들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께 나아와 절하였습니다. 축복성회에 아들들을 데리고 나오는 어머니처럼 그렇게 예수님앞에 나온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호의적인 태도에 이 어머니는 기쁘고 기대가 넘쳤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 속에 숨겨둔 가장 은밀한 것을 주님께 말씀드렸습니다. 21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이 소원을 예수님께 말씀드렸을 때 예수님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녀의 소원은 거절당한 것입니다.
세배대의 아들의 어머니는 당당하게 요구를 한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무례하게 부탁을 한 것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을 원했습니다. 그의 간구의 자세나 태도가 문제가 아니라 내용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별로 고민하지 않은 채 소원과 기도를 드립니다. 물론 그런 간구 중에는 정말 순수하고 거룩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간구 중에는 너무나 원색적이고 이기적이며 하나님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지 않습니다. 기도의 모습과 태도는 받으시지만 기도의 내용을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에는 어떻게 기도할 지라도 들으시지 않습니다. 그 기도의 내용이 하나님을 부끄럽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그 기도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렇게 기도해서는 절대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그 기도를 약간만 바꾸면 그럼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기도를 전혀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기도를 하되 기도를 하면서 그 기도 내용을 조금씩 변화시키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배대의 아들의 어머니의 기도는 어떻게 바꾸면 좋을까요?
세배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런 간구를 했다는 것이 소문이 난 다음에 제자들은 분개했습니다. 그들이 분개한 이유는 좋은 자리는 자기들이 다 차지하려고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상대적인 박탈감과 자기 마음 속에서도 예수님의 옆자리에 앉고 싶다는 생각이 분노를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여전히 세배대의 아들의 어머니처럼 그렇게 똑같이 생각하고 있는 제자들을 불러다 놓고 그 소원이 변할 수 있도록 가르치셨습니다. 27절입니다.
“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예수님은 세상의 집권자들이 임의로 주관하고 권세를 남용하는 것을 보게 하십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구를 그대로 실현하고 있습니다. 적나라하게 원색적으로 노골적으로 요구하며 그렇게 행동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런 모습을 보지 않습니까? 뒷돈을 받고 사람을 억울하게 괴롭히고 불의를 행하는 일들을 우리도 싫어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그렇게 욕구 그자체입니다. 정욕 그 자체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에 비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무엇인가요?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좀 다른 것입니다. 어떻게 다른가 하면 크고자 하는 마음이 있고 그런 욕구가 있는 자는 오히려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그 욕구를 조금 변화시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럴 때 진정으로 큰 자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여기 사람들 중에 으뜸이 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면 사람들 중에서 종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따라서 자신의 으뜸이 되고 싶은 욕구를 약간만 바꾸면 그것이 변화되고 그 변화된 모습은 다른 사람의 종이 되어서 마침내 진실로 으뜸이 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는 욕구를 아예 없애버리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불교나 도교에서는 그런 욕심들을 없애기 위한 수양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중에 팔정도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고통의 원인을 없애고 해탈에 이르기 위해 행하는 8가지 방법으로써 ‘1정견2정사3정어4정업5정명6정근7정념8정정’의 수양방법을 말합니다. 이것은 결국 욕구를 완전히 없애버리려는 시도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함으로써 고통도 같이 사라진다고 본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살려면 산으로 들어가야 하고 그래도 부족해서 마침내 죽으면 해탈에 이르게 된다고 하는 완전히 비인간적인 방법입니다.
예수님은 그 크고자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없애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고 싶으면 예수님의 방법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과 함께 하게 되고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어 예수님을 본받게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 자신도 바로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전도자 무디의 생애를 아시나요? 그는 1837년 매사추세츠 노스필드(North Field)에서 소작농이자 석수인 에드윈 무디(Edwin Moody)와 베시 홀튼(Betsy Holton) 사이에서 여섯 번째 자녀로 태어났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때 아버지가 사고로 별세하면서 빚쟁이들이 와서 가구를 가져갈 정도로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으며, 무디도 더이상 공부를 하지 못하고 어린나이에 농장에서 아동노동을 해야 했습니다.
17세 때인 1854년 시카고에 간 무디는 외삼촌 사무엘 홀튼(Samuel Holton)의 제화점에서 영업사원으로 일했는데, 1855년 주일학교 교사 킴볼의 영향으로 기독교인이 된 그는 시카고 빈민가의 어린이들에게 전도하는 어린이 사역을 하였습니다. 1875년 시카고 빈민가에 교회를 설립했는데, 구두판매원출신다운 쉽고 설득력있는 무디의 설교와 감성을 자극하는 가수 아이라 생키(1870년 무디의 전도사업에 참여)의 성가는 많은 이들이 신앙을 갖게 했습니다.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에서도 전도했는데, 자리가 모자를 정도로 그의 설교는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다.남북전쟁때는 전쟁터에서도 설교했는데 많은 군인들이 무디의 설교를 듣고 회개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설교자로서의 활약상은 청년들이 해외선교 특히, 아시아와 조선선교에 관심을 갖게 하였습니다.
그는 가난했고 볼품없는 제화점 영업사업이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로 사람들을 섬기기 시작했을 때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구두를 파는 욕심으로만 있었다면 아무 의미가 없었겠지만 복음을 전하는 열정으로 바뀌었을 때에 변화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지막 절 28절은 우리가 닮아야 하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보여줍니다.
“28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렇게 사람들을 섬기려 하시고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심으로써 그분은 어떠한 분이 되셨습니까? 가장 큰 분이 되셨고 가장 으뜸이신 분이 되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욕구를 그대로 기도하지 마시고 그것을 약간 바꾸어서 기도해보십시오. 과정에는 상관없이 결과만 요구하지 마시고 과정에 대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해 보십시오. 우리가 정말 섬길 수 있도록, 우리가 정말 우리의 것을 다른 사람의 필요를 위해 내어줄 수 있는 사람들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지금 당장 얻고 누리려고만 하지 마시고 예수님의 뜻을 따라 섬기며 베풀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올 한해 이러한 변화된 기도제목을 통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크고 존귀한 자로 만드시는 은총이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개요 {4서신서} <1적용> <2시점> [0복음]~[3감정], [5-1계획]
1. 많은 사람들이 새해 여러가지 계획을 가지고 기도제목을 마음에 품고 기도를 합니다.
2. 세배대의 아들의 어머니도 자식을 위한 특별한 간구를 가지고 나아와 간구했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3. 예수님은 우리가 주님에게로 나아가고자 기도를 하는지 아니면 주님에게서 멀어지고자 기도를 하는지를 알고 계십니다.
4. 우리는 예수님의 길을 따라나가서 예수님처럼 큰 자가 되고 으뜸이 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