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지] 2020년 11월<34호>:주제- 통제불능
소원상담센터<소식지>
2020년 11월 <34호>
주제: 통제불능
<1>성경적상담의 용어설명 : “통제불능”에 대한 성경적 이해
감정조절의 문제는 종종 '통제불능'이라는 표현으로 묘사됩니다. 그래서 감정이 통제되지 못하는 상태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됩니다. 이렇게 감정이 통제되지 못하는 상태는 다양한 문제상황을 만들어 냅니다. 심한 거부감으로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하기도 하고 격한 분노로 여러 가지 안좋은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며 극도의 절망감으로 생명의 위협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모든 상황들은 자신의 감정을 잘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나며 그러한 안좋은 상태는 어려서부터의 익숙한 감정대처방법이기도 합니다.
https://swcounsel.org/b/research2-2
<2>이 달의 학생인터뷰: 이문숙 상담사
1.지금 어떤 일을 하시며 현재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세종살림교회를 섬기고 있으며 상담과 관련된 일에 시간을 많이 보내는 편이고, 일주에 한 두 번은 손주들 하원시켜 돌보아 주는 일을 기쁨으로 하고 있습니다.
2.어떠한 계기로 이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셨나요? 남편 목회 초창기때 어떻게 하면 남편을 도와 하나님의 일을 잘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 남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을 내가 맡아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상담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3.공부하는 부분에 있어 어려운 점은 없는지요? 지금은 6학기까지 다 마친 상태입니다. 학업 중에는 과제에 대한 어려움이 있었는데.... 그때는 누군가에게 물어보아야 할지 몰라 혼자서 끙끙거리며 어려워했습니다. 그러다 어떤 때는 몇일이고 책을 덮고 뜸을 들인 다음 다시 들여다보면 조금씩 풀리기도 하여 그 이후는 안 풀리면 뜸 들이기를 통해 해결해 나갔습니다. 과제로 인해 힘은 들었지만 과제로 인해 얻은 유익이 더 큰 것 같습니다.
4.성경적 상담을 공부한 후 삶 속에서 활용하고 계신 부분이 있으시다면? 제일 먼저는 제 자신에게 활용하고 있습니다. 94세 시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데 유익 편안 지배의 욕구로 인해 악순환되는 부분을 하나님의 계획과 동행의 소원을 갖고 선순환의 삶을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상담사로 활동하며 교회와 주변 사람들을 상담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5.앞으로의 목표는 무엇인가요? 세종시에 상담실을 개설하여 고통중에 있는 사람들 돕기 선교사 가족, 목회자 가족들에게 상담을 통해 힘이 되어 주기
6.기도제목을 말씀해주세요^^ 경제적 자유로 선교, 구제, 장학사역하며 빛과 소금 되는 삶을 살게 하소서. 지혜로운 상담사로 귀한 영혼들을 옳은 길로 인도하게 하소서
https://swcounsel.org/b/letter-211
<3>인터넷 상담글과 답변
A: 폭식증일까요 제가 갑자기 폭식증인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원래 밥을 조금 먹는 타입이였어요 갑자기 계속 먹게되고 배불러도 먹을걸 찾고 있고 계속 먹어요 가족들 있으면 참기라도 하는데 혼자이면 더 먹을걸 찾아서 먹는거 같아요 그런데 먹을수록 허기져요 먼가 다 맛없어요그러다가 갑자기 살이 너무 찐거 같아서 갑자기 정신차려져서 2주만에 5키로를 뺐는데 다시 폭식증 도져서 체하고 먹고 탈나고 먹고 있는 저를 발견했어요처음엔 요요증상인가 했는데 기분도 너무 좋았다가 힘들다가를 반복해서 엄마가 조을증이냐고 장난식으로 그랬는데저 나름대로 힘들어서 질문해보아요만약 제가 폭식증이면 어쩌죠
B: 안녕하세요, 소원상담센터 윤에스더 상담사입니다. 식욕을 조절하지 못하는 폭식증은 위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뇌에서 작용하는 신경전달물질의 불균형으로 생깁니다. 그래서 이 불균형적인 상태는 신체의 약한 부분에 이상증상으로 나타나게됩니다. 이런 뇌를 처음 자극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마음으로부터 추구하는 욕구가 채워지지 않을 때 불만족 스트레스가 나타나며, 이러한 요소들은 계속해서 부정적인 감정들을 만들어냅니다. 이러한 싸이클이 반복되어 악순환되므로 폭식증이 더 가중되는 것입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런 폭식증이 시작된 이유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떠한 생각을 할 때 폭식이 오는지 그리고 그 생각들은 무슨 이유때문에 불만족과 스트레스가 되는지를 살펴보아야합니다. 이렇게 살펴볼 때 마음으로부터 추구하는 욕구가 무엇이지를 알게됩니다. 이때 이렇게 추구하는 것들을 내려놓고 올바른 방향성을 가지고 좀 더 가치있는 것들로 전환해서 추구해 나간다면 폭식증이 사라지게되고 업다운되는 감정도 평안하게됩니다.
마음속으로 무엇을 추구하는 것은 나쁜것은 아니지만 올바른 방향성이 아닐때는 문제가 야기됩니다. 이를테면 지나치게 유익을 원하는 마음이라든지, 편안한 것을 택하고 그 길을 고집하는 마음이라든지, 쾌락적인 것을 끊지 못하는 상태를 지속하고 있다든지 혹은 존경이나 인정을 극도로 추구할 때 뇌에서는 도파민, 세라토닌 그리고 아드레날린과 같은 신경전달물질이 과다하게 분비되어 몸의 조절기능이 약해지게됩니다.
상담을 통해서 폭식의 원인을 알아나갈 때 현재의 고민하는 문제들이 하나하나 해결될 것입니다. 소원상담센터에서는 이런 고민을 가진 분들과 함께 이야기 나누는 온라인 상담센터입니다. 방문하셔서 문제를 해결받으시길 권해드립니다.
https://swcounsel.org/b/ask-11216
<4> 상담설교
[56충만] 42눅 6; 39-42 온전하게 된 자는 선생과 같으리라
42눅 6; 39-42 온전하게 된 자는 선생과 같으리라_1
2020. 5. 24. 주. 주일오전. *개요: 누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마음, 56충만, 2관점, 4조직, 5복음서 [눅]6:39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눅]6:40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하게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눅]6:41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눅]6:42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5월 가정의 달에 가정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의미를 잘 받아들이고자 할 때 가정의 가치와 유익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그 의미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면 당장 가정의 가치와 유익이 떨어지고 그로 인해서 커다란 괴로움을 겪게 됩니다. 그 하나님의 뜻과 의미를 잘 받아들이게 하는 역할이 있는데 그 역할이 바로 교사입니다. 교사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로 인해서 열매를 거두고 누리며 혜택을 보는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사를 통해서 얻는 하나님의 뜻을 결코 소홀히 여겨서는 안됩니다. 그 뜻을 소홀히 여기고 저버리면 괴로움을 당하지만 그 중요성을 잘 받아들이고 순종하면 그로 인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하나님의 축복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이 교사의 역할을 핵심적으로 살펴보면 ‘먼저 알고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 ‘배움과 교육’이 중요합니다. 가정 내에서 배움의 가치와 가르침의 가치를 잘 이해하고 중요하게 여길 때 가정을 잘 지킬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을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 너무나 중요한 원리입니다. 잘 가르쳐야 하고 잘 배워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축복을 잘 누릴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이룬 가정이 온전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 제일 필수적인 요소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선악과를 먹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누가 가르쳤어야 했을까요? 그것은 아담이 하와에게 가르쳤어야 했던 내용입니다. 아담은 하나님께 직접 들었고 하와는 하나님께 직접 듣지 않고 아담을 통해서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아담은 하와에게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선생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역할을 잘 하지 못했을 때 하와는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뿐만이 아닙니다. 아담도 하와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함께 선악과를 먹어 버렸습니다.
결국 온전히 배우지 못했고 그로 인해서 그들은 모두 함께 에덴동산을 떠나 세상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아담이 하와를 잘 가르쳐서 선악과를 먹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또한 아담이 하와가 선악과를 먹었더라도 자신이라도 온전한 모범을 보여서 선악과를 먹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그들의 삶은 우리가 아는 것이 아닌 전혀 새롭게 변화되었을 것입니다. 배움과 교육의 중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선생에 관해 말씀하시면서 바로 그것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배움과 교육에 대해서 그리고 선생님의 존재와 교사의 역할을 통해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예수님의 뜻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어려움을 피하고 축복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온전하게 지킬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배움에 대한 가장 좋은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39절에서 예수님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습니다.
“[눅]6:39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눅]6:40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하게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는 것은 둘 다 구덩이에 빠지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생각해 보면 정말 둘 다 구덩이에 빠진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맹인이 맹인을 인도했기 때문입니다. 하와는 선악과를 먹으면 어떻게 되는가에 대해서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사실은 아담도 역시 이에 대해서 아무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이없이 하와는 뱀이 먹으라고 해서 먹었고 아담은 하와가 먹으라고 해서 먹었습니다. 둘 다 선악에 대해서 맹인과 같았습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선생이 있습니다. 분야별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알고 더 먼저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지식과 정보와 기술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이 하나님에 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것은 영원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정말 빠지지 말아야 하는 가장 중요한 구덩이가 바로 영벌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제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은 하나님 안에서 온전한 선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역시 하나님 안에서 온전한 제자를 키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온전한 선생 밑에 온전한 제자가 모두 하나님 안에 있게 됩니다. 그럴 때 선생과 제자가 모두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담이 온전한 선생이 되려면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요? 자신의 제자이자 사랑하는 아내요, 유일한 가족이었던 하와를 온전하게 이끌려고 한다면 무엇을 했어야 했을까요? 그는 자기 자신이 먼저 하나님 안에 거하여야 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그에게 온전한 선생이 되십니다. 그 선생 안에 거하는 제자가 바로 아담이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께 잘 배웠다면 하나님은 틀림없이 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으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가르쳐 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혜를 구하면 늘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 안에 거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서 하나님의 지혜를 추구하지도 않았으며 하와의 어리석음과 온전하지 못함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자신도 어리석게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온전하게 하는 선생과 교사를 잘 따라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온전하게 하는 선생과 교사를 사모할 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온전하게 되는 것이 목표가 되고 온전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랄 때 온전한 교사와 선생의 중요성을 절감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온전하지 않은 교사를 따르거나 혹은 온전하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온전한 교사를 오히려 거부해 버릴 것입니다. 사실은 온전한 교사가 가장 자신에게 유익했었지만 말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온전한 교사이자 선생이 되시는 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그분을 따르고자 한다면 우리도 역시 온전한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리석은 말에는 결코 격동되거나 미혹되지 않으시고 올바른 말씀으로 가르쳐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 중 두 명이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을 때에 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 한 장면입니다.
“[눅]24:24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눅]24: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눅]24: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눅]24: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보이는 것만으로 낙심하던 그들에게 예수님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에 대해서 알려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던 예수님을 고민하였지만 사실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의 길이 있었습니다. 그 길을 가고 있었기 때문에 담대하게 제자들에게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길이란 바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광에 들어가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도 끝까지 하나님과 함께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따라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내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나이다’라고 하시면 죽으셨습니다. 그 온전한 모습이 하나님의 들으심을 얻었고 하나님께서는 그 영혼을 받아 주셨습니다. 마지막까지 아버지를 따랐기 때문에 아버지의 영광에 들어가실 수 있었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서 자신의 입장을 달리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신다고 생각하면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면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기억하면서 그분을 자신의 온전한 선생으로 받아들일 때에 온전한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전한 선생과 같아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선생과 같은 위치가 된다는 말이 아니라 선생처럼 온전해 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온전한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제 온전한 선생이신 예수님을 따르고자 할 때에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속에 있는 들보를 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에 자신의 들보도 빼고 다른 사람의 티도 뺄 수 있습니다.
“[눅]6:41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눅]6:42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온전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자기가 온전하지 않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한다면 온전하게 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달을 때만이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면서 온전하게 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낼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사람이 바로 온전하게 되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렇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럴 때 그 눈 속의 들보를 빼낼 수 있게 해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진정으로 온전한 선생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님 안에서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뺄 때 비로소 다른 사람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온전한 제자요 온전한 선생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선생과 교사를 주셨습니다. 우리의 온전하지 않음을 깨닫게 하고 온전하신 주님을 의지할 수 있도록 돕는 선생님들과 교사들이 있습니다. 그 가치와 의미를 중요하게 여기고 그 인도함을 따라가고자 할 때 그 끝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 시작에 바로 우리 자신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온전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온전하게 하심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온전한 모습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많은 선생들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사소한 습관을 고쳐주며 안좋은 버릇을 바꿔주는 선생들이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더 좋은 모습과 기술을 얻게 하는 교사들이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앞에 온전함으로 나아가게 하는 신앙의 교사들이 있습니다. 이 모든 온전하게 하는 도움을 잘 받아들여서 이 세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주신 풍성한 열매를 아름답게 거두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상급이 크고 축복과 칭찬이 넘칠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구성 1.가정에서 배움과 교육의 중요성 2.아담과 하와에게서 배움의 의미 3.예수님은 성도들의 스승이시다 4.온전함은 부족함을 깨달을 때 생긴다 https://swchurch.org/b/sermon-1334
<5> 질문답변란
[10상담내용] 역동성 원리, 선순환과 악순환 좌우 변경?
Q질문:역동성은 항상 태양을 중심으로 해서 시계방향으로 설명 되어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인지요? 악순환이 왼쪽이고 선순환을 오른쪽으로 해서 시계 반대 방향으로 설명을 해도 가한 것인가요? 아님 그렇게 되면 역동성 원리를 벗어나게 되는 것인가요? 앞으로 나간다는 의미에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설명하면 어떻게 되는 것인지요? 그렇게 응용해서 적용해도 역동성 원리에 어긋나지 않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제 생각에는 역동성의 원리를 이루는 요소가 중요할 것 같고, 선순환과 악순환의 위치가 좌우로 바뀐다 해서 역동성 의미의 원리가 변형 왜곡 될 것 같지 않은데 맞는지요?
A답변: 역동성의 변화의 과정이 왼쪽에서 오른쪽이 아니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한 것은 오른나사의 법칙, 시계방향의 법칙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변화의 과정이 오른쪽의 악순환에서 왼쪽의 선순환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모든 챠트와 모든 체계가 다 이 위치에 맞춰져 있습니다. 저도 처음 관련 내용을 연구할 때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의 방향수정을 시도했지만 전부 실패(?)했습니다. 신기하게 그게 가능하지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의 순환이 그렇게 이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그러한 방향은 준수해야 하겠습니다. 시간의 진행과정은 왼쪽에서 오른쪽이지만 변화의 과정은 오른쪽에서 왼쪽입니다.
RE재질문: 서서히 그동안 타문화권 선교를 위해 세웠던 이론들을 성경적 상담의 원리에 의해 비춰보고 수정하고 있는데 여기서 부딪히고 있네요. 알겠습니다. 좀 더 연구해보겠습니다.
https://swcounsel.org/b/question-394
<6> 이 달의 학생 소식
<이명선 상담사> : 독일 선교사로서 유럽밀알선교단의 상임총무로 섬기고 있다. 유럽현지인들을 대상으로 선교 사역을 하면서 성경적 상담을 만나게 되었고 이후 단체 운영 및 사역 전반(사역자들, 동역자들, 선교대상자들과 하는 모든 예배와 모임과 각종 선교 프로젝트)에 걸쳐 성경적 상담의 원리를 적용하여 이전보다 더 깊은 수준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가 마음의 욕구를 찾고, 이미 풍성하게 있는 은혜로 안내하며 현장에서 은혜의 열매를 누리며 살 수 있도록 하는 사역을 하고 있다(선순환으로 안내). 현재는 독일에서 현지인 2명과 독일어로, 유학생 1명과 한국어로 상담을 하고 있고, 소원상담센터를 통해서도 한국에 있는 4명의 피상담자들과 온라인으로 상담을 하고 있다.
<7> 11월 후원금 내역
11월 11/3 상담후원비 지출: -200,000 11/8 무명 후원: 1,000,000 11/15 상담후원비 지출: -250,000 11/17 무명 후원: 20,000 11/17 상담후원비 지출: -250,000
잔액: 770,000
https://swcounsel.org/b/letter-155
센터후원금계좌: 국민은행 449901-01-210121 윤홍식(소원상담센터) "소중한 후원..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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