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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성경연구법] 하나님이 눈물을 흘리실 때 / When God Weeps- 조니 에릭슨 타다 (번역)

  whengodweep_2.hwp 918.2K 3 10년전
하나님이 눈물을 흘리실 때 / When God Weeps
- 우리의 고난이 왜 하나님에게 중요한가? - 

Joni Eareckson Tada & Steven Estes  /  김 종성 역


1. 나의 심한 상처

A. 이 하나님은 누구신가?

2. 넘쳐흐르는 황홀함
3. 고난의 하나님
4. 그분은 실제로 내가 고난 겪기를 기대하시는가?
5. 크고 작은 모든 시련들
6. 하늘의 세탁소

B. 그분이 꼭 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7. 작은 이유들
8. 우리에게 있는 가장 좋은 대답
9. 고난을 이해하는 것

C. 내가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10. 영혼을 위한 울부짖음
11. 만족함을 얻음
12. 악성전의 고통
13. 고통이 가버리다.

에필로그 / 당신이 이 책을 내려놓기 전에,..


D. 부록

 a. 우리의 고난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손길에 대한 성구
 b. 우리의 고난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성구
 c. 하나님은 슬픔을 경험하실 수 있는가?




1. 나의 심한 상처

 아프리카의 밤은 냄새가 나고, 마치 내던져진 것같이 보인다. 전등 불빛만이 우리의 길을 안내할 뿐이다. 나는 썩은 냄새나는 쓰레기통의 메스꺼움을 몸서리치며,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나의 친구는 앞에서 아무 생각 없이 큰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그는 길게 내려쳐진 거죽천막을 들어올리고, 불빛을 어두운 곳에 비치며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휠체어를 끌고 따라 들어갔다.
 내 뒤에 있는 거죽천막이 다시 내려질 때, 슬럼가의 한바탕 소리가 잠잠해 졌다. 나의 눈은 지금 생생한 교육을 받고 있는 것이다. 친구는 불빛을 높이 쳐들고 그림자만큼이나 검은 피부와 머리를 가진 젊은 여자를 비취고 있었다. 그녀는 손이 없었다. 밀짚침대 위에 널부러져 있는 그녀의 다리는 막대기같이 가늘었다. 나는 더 이상 쳐다볼 수 없었다. 나는 소아마비환자나 다리를 절단한 자들과, 잘라진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접합한 사람들의 모임을 많이 본 적이 있었다. 그들 모두는 가정이 없었다. 나처럼 사지가 마비인 사람이 서부 아프리카 적도에 있는 가나(Ghana)의 수도 아크라(Accra)의 비참한 전염병지역에서 홀로 길을 간다면 생존하기 힘들다. 이 아크라에서는 자기 자신을 강건하게 방어할 수 있는 사람들도 불구자로 만들어 버린다. 이곳의 길거리들은 황폐와 부패한 쓰레기들로 더러워져있었다.
 친구의 전등불은 작고 쓰러져 가는 집을 밝게 비춰주고 있었다. 그때 그 젊은 여인은 나를 바라보고 있으면서, 아프리칸 스타일로 이를 다 드러내놓고 웃고 있었다. 그녀의 검은 눈은 불빛으로부터 밝게 빛나고 있었으며, 전등을 켜고 있는 친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이 아프리카 목사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소경들과 절름발이들을 결성시켜 활동하도록 하는 사역을 하고 있었다.
 그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아마(Ama)”라고 부르면서, 영국식 발음과 악센트로 말하기를 “내 미국친구 조니(Joni)를 너에게 매우 기쁘게 소개하고 싶다.” 그녀는 자기 종족의 언어로 인사를 하였다. 나는 이전에 영국통치를 받으며 살았기 때문에 영어를 이해하고 있는 아마(Ama)에게 말을 했다. 그리고 우리들의 대화는 차를 마시면서 계속 되었다. 정말 나는 길에서 만난 그녀와 그녀의 친구들을 기뻐했다. 정말 우리의 여행은 길었지만, 기뻤다. 조니와 친구들(Joni And Friends: JAF 봉사회)에서 온 우리모임은 그녀와 그녀친구들을 위해 여기에 휠체어 몇 개를 가지고 왔다. 길거리에서 그녀는 우리와 만나는 것을 조심스러워하지 않았던가? 사실 그녀는 그랬다. 그 문제에 관해서는 내가 저녁시간 내내 그것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조심스럽지만 분명하게 미소를 보냈다. 우리는 웃었고, 그녀도 그랬다.
 불구의 도시인 아크라의 기독교인들로 내게 보여졌던 이 아프리카 자매들에 의해 그리고 지상의 쓰레기 같은 일들을 위해 자신을 봉사하는 이 아프리카 목사에 의해 정말 나는 마음이 빼앗겼다. 길거리에는 썩는 악취가 물씬 풍기지만, 아마(Ama)와 함께 한 짧은 시간은 삶의 향기를 만들어냈다.       
 내가 길게 내려쳐진 거죽천막을 나오자, 곧 어둠에 묻혔다. 나는 아스팔트 콘크리트가 들쭉날쭉한 먼지 나는 거리를 가로질러 전등불을 따라갔다. 나의 JAF 봉사회 친구들 - 목발과 휠체어를 가지고 온 사람들 - 은 나를 길 건너편으로 들어 올렸다.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그 전등불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어두운 곳으로부터 다리들이 뒤틀린 두 떼의 젊은 십대들이 다리를 질질 끌며 모여오고 있었다. 소아마비환자들이었다. 나는 그들이 우리 모임과 함께 하기를 원했다. 우리는 어떤 아프리카 종족 옷을 입고 그녀의 부서질 것 같은 휠체어를 조금씩 움직이며 가는 여인을 따라붙었다. 그때 키가 3피트도 안돼 보이며, 다리가 없는 80세 가량의 노인이 커브를 따라 뛰어오르며 나에게 미소를 보였다. 나는 멈춰 섰다. 그는 뒤뚱걸음으로 다가와 부러진 팔을 뻗으며, 내게 악수를 청했다. 나는 나의 불구된 손가락으로 그의 부러진 팔을 잡으려고 애썼으며, 우리는 우리의 이상한 악수모습을 보면서 히죽 웃었다. 우리는 길거리에서 박수치며 노래부르며 서로를 지지했다. 우리의 모임회원들이 오는 동안 고아들과 행려자(집 없는 이들)들은 밝은 네온불빛아래서 우리들을 환영하려고 모여들었다. 우리는 이미 길거리 예배의 중심에 들어선 것이다.
 우리 서방인들은 서민들의 모임을 바라보면서 벤치에 앉아 있었다. “에, 크리스천 형제자매들이여, 여기 우리에게 휠체어와 성경을 건네주려고 먼 곳으로부터 온 미국의 가장 은혜로운 친구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환영합시다!”라고 목사가 외쳤다.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으며, 환영의 노래가 흘러 나왔다. 아프리카風의 단조롭고 낮지만 풍요로운 하모니가 내 마음을 흔들었고, 불구자들이 서로 다른 이들의 간증과 성경말씀을 읽는 것에 환영하고 박수 보내는 것을 보고 우리는 눈물을 흘렸다. 약 반시간 넘게 계속적인 찬양이 있은 후에, 나는 車들이 없는 步道위에서 휠체어를 탄 채  말했다.
 “감사합니다. 형제들이여, 우리를 이렇게 환영해주니,..” 나의 JAF 봉사회 친구들은 휠체어를 선물하려고 나를 따라 왔다. 어떤 이가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소리치면서 먼저 그것을 받아 앉아  보았다. 다른 의자들도 다른 불구자들에게 제공되었다. 목발들과 휠체어들이 우리에게서 다른 이들에게로 마치 흐름을 타듯, 손에서 손으로 옮겨졌다. 박수소리대신에 점점 열정과 활기가 넘쳐 났다. 자기 차례가 된 아마(Ama)는 머리로 가볍게 인사하며, 그녀 의자의 가죽팔걸이에 자신의 잘려진 팔을 문지름으로써 기쁨에 넘친 미소를 보냈다. 소아마비 십대소년들은 자유롭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나는 봉사회 회원 한 사람에게 말했다. “보라, 사람들은 휠체어를 모두 갖지 못했을지라도, 그것을 가진 사람들 때문에 모두 기뻐하고 있다.”
 달은 밤의 동쪽 끝에서 밝게 빛나고 있었다. 우리가 그 슬럼가를 떠나려고 준비하고 있을 때, 아프리카 친구들은 아름다운 노래로 우리를 전송하고 있었다.

그가 살아있기 때문에, 우리는 내일을 볼 수 있다네,
그가 살아있기 때문에, 모든 두려움은 사라진다네.
내가 알기 때문에, 그가 미래를 가지고 있음을 내가 안다네,
그리고 삶은 바로 그가 살아있기 때문에 살아야할 가치가 있다네!

 내가 그들의 미소를 잠깐 보는 동안 그것은 네온불빛이 아니라, 그것은 바로 세상의 기쁨이었다.
 우리가 길 건너편으로 우르르 몰려가는 동안 내 친구 목사는 그 빛을 모임의 주동자에게 비추었고, 나는 많은 생각에 휩싸였다. 비참가운데 있어도 저렇게 많은 기쁨이 있었다. 그 기쁨은 마치 기름진 땅에서 나온 훌륭한 것이었다.
“비가 올 때 아마(Ama)에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누가 그녀를 돌보았습니까?”라고 나는 물었다. 큰 전등불은 그의 미소에 광채를 주었다. “하나님이 그녀를 돌보았습니다.”

날씨는 무덥고 사람들은 무일푼이며, 손이 없고, 다리가 없는 소녀가 길을 걷고 있네, 침대도 없고, 심지어 든든한 집도, 선풍기도 없네. 그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매우 좋은 일 같아 보이지 않네.
 라는 어떤 소리를 나는 들었다. 그리고 쓰레기 더미 상자 속에 사는 어떤 소년이 말하기를, “당신 서방인들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이들이다. 하나님은 당신들에게 그렇게 많이 주었는데, 당신들은 그렇게 소경이라니,... 당신네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왜 그렇게 불행한지,..?”

세상에서

우리는 목장 같은 집을 가지고 있으며, 실업수당을 받으며, 매일의 식탁에서는 하루 세끼 밥을 먹을 수 있고, 수퍼에서 쿠폰을 가지고 물건을 사며, 또 그 음식 쿠폰을 가지고 다른 것을 살수도 있지 않은가? 만약 우리가 혼자라면 결혼을 할 수도 있고, 만약 우리가 결혼을 원한다면, 완벽한 배우자를 원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완벽한 배우자를 가졌다면, 우리는 즐거운 삶의 시간들을 보낼 것이다.
 다른 면에서도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병원비가 매우 비싼 마요(Mayo)병원과 8개의 외과병원을 14번 다녀야 했고, 한번의 심장발작으로 남편은 말을 하지 못하거나 또는 염색체들이 손자들의 발육을 저해하거나 했다. 장례식은 어제 있었고,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미망인들이 있을까 염려된다. 우리는 많은 삶의 짐으로 허덕이며, 이 풍요로운 삶에서 왜 허우적거리며 살아야하는지 그리고 타인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되었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우리가 가질 수 없고,
 우리는 원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있네,
 그리고 우리는 불행하다네,..

 고난 속에서도 기쁨을 지니고있는 고귀한 아프리카에 관한 이야기는 영감을 주는 내용이었다. 이것을 통해 오직 하나님 - 우리가 확신하지만 - 은 우리의 삶이 가나(Ghana)의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한다는 속박을 주시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행복하고, 더욱 의미 있게 하시고, 두려움 없게 하신다.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를 각기 다른 형편으로 다루시기도 한다. 아마도 우리는 청교도 윤리를 가지고 그것을 추구하며 살도록 하신 것 같다. 우리 서방문화 - 그것에 의미를 주신 분은 하나님 - 는 사람들의 고통을 덜기 위해 학교와 병원들을 지었다. 우리는 문명화되었고,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되었다.
 그는 우리의 아버지시며, 그는 말씀 안에 자신을 묘사하셨고, 그리고 아버지는 자녀들을 위하여 가장 좋은 것을 원하셨다 - 사용하지 않은 옷들을 길거리 사람들에게 나누게 하시거나 혹은 극심한 재난아래서도 좌절하지 않도록 하신 것 등이다. 그는 우리의 구세주이시며, 우리가 재난과 슬픔 속에서도 안전케 하셨고, 굶주린 사자의 발 밑에 위험을 당할 때도 평안케 하셨다. 그는 풍성한 삶을 약속하셨다.(그리고 하나님은 언제나 그 약속을 지키셨다.) 그는 우리의 구원자시며, 죄의 사슬과 그것의 영향력에서 우리를 구하셨으며, 진노 중에서도 긍휼을 잊지 않으셨으며, 그 고난을 치료하사 복되게 하셨다.
 나의 이러한 마음의 행로는 1967년 내가 장애를 입고 투신자살을 기도하려했던 그 때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시간에 생기기 시작했다. 나의 머리는 강철막대에 의해 움직이지 못하도록 스트리커(Stryker)틀에 반듯이 눕혀졌고, 나는 오직 위만 바라볼 수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과만 대화하는 자연스러운 위치가 되었다. 나는 하나님이 생각하고 계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내려고 무진 애를 썼다. 만약 하나님이 정말 하나님(나는 그가 전능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분으로 확신한다.)이라면 나를 이 고통 속에서 구하시려는 열망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나의 아빠가 내 곁에 서서 손가락관절 안전대를 보며, 자주 그랬던 것처럼 나를 위해 울어주실 것으로 알았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은 자기 자녀 어느 누구라도 비참해 지기를 결코 원치 않으신다. 주께서 말씀하지 않으셨든가,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눅11:11-13)” 
 이처럼 선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치를 주신다. 그래서 내가 병원에서 나올 때, 나의 친구들은 나를 워싱턴으로 데리고 갔고, 결국 나는 그 유명한 믿음 치유자인 캐더린 쿨만(Kathryn Kuhlman)이 동네에 집회하러 내려올 때마다 맨 앞줄에 있을 수 있었다. 미스 쿨만은 흰 가운을 입고 무대 위에서 급한 걸음으로 움직였고, 나의 마음도 간절한 기도에 몰입되었다. “주여, 성경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당신은 우리의 질병을 고치시지 않습니까? 내가 당신께 간절히 기도하오니 이 휠체어에서 내가 벗어나도록 도우소서, 제발 그렇게 해주십시오!”
 하나님은 대답하셨고, 나는 나의 의자에서 결코 떠날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나는 캐더린 쿨만(Kathryn Kuhlman)진영에서 벗어나게 되었는데, 그 운동장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약 30명의 휠체어 환자들 가운데 나는 15번째 대기자가 되었다. 우리 모두는 나무목발 짚은 사람들 보다 더 빠르게 앞으로 나가기를 열망했다. 나는 당황하며 낙심하는 주변 사람들을 흘낏 쳐다보면서 어떤 나쁜 상황이 이곳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이 오직 이것뿐인가? 고통을 필사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은 이것뿐인가?
 나는 집에 돌아온 후에 거울을 보았는데, 내 등뒤에서 그들의 핼쑥한 모습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엘리베이터 옆에 있던 사람들만큼이나 무척 난처했다.  좋다. 이렇게 이해해보자, 하나님은 선하시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는 전능하시고, 게다가 그분이 지상에 계실 때는 고통에 있는 자들, 혈루병을 앓는 여인으로부터 백부장의 하인까지 모든 사람들을 필사적으로 구하시려고 애쓰셨다. 그런데, 왜 다섯 살 먹은 내 조카 켈리(Kelly)는 뇌종양에 걸린 것인가? 왜 나의 사촌 형은 나의 누나와 그들의 식구들을 포기하였나? 왜 나의 아버지의 관절염은 약물치료에 효과가 없는 것인가?
 하나님은 답하셨다.
 마치 그 답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고, 우리를 방해하는 것처럼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것 같았다. 우리들은 우리에게 없는 것을 가지려하고, 필요 없는 것들을 가지고 싶어하는 열정이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은 냉정하신 것처럼 보이고, 행복은 우리에게서 달아난 것 같고, 우리는 낙심과 피곤함으로 지쳐있다.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치유집회에 참석하려고 엘리베이터 곁에 있는 핼쑥한 모습으로 있는 것을 이상히 여겼다. 그것은 거의 30년 가까이 되었다. 아직도 그들은 그 줄에 서있는 것인가? 아직도 소망이 있는가? “소망이란 마음의 병을 늦추는가보다.” 그리고 마음은 그 많은 시간 속에서 상처를 받을 수 있다.
 만약 하나님이 그 소망을 마치 홍당무처럼 대롱대롱 매달고 있다면, 그것을 낚아채면 될 것이다. 그들에 대한 우리의 욕구-그에 대한 우리의 확신-는 좀 이상하게 일그러져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약할 때 그는 강하시다.

 우리는 그 아프리카의 경험으로 교훈을 받을 수 있었다. 그들은 먹거리들을 나누기 원했다. 아! 대목장 같은 집과 공허한 집이 대비가 된다. 여유 있는 빈곤? 그것은 아마(Ama)의 늘어진 천막집에서 가능할 것이다. 치유? 그들은 잘려진 다리와 발가락이 훈련되기를 원했다! 그들의 고통이란 무저갱같은 구덩이 일뿐이다. 여전히 그들에게는 상처를 가진 자들과 긴 설교를 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절대적인 풍요를 하나님이 주실 것으로 믿고있는 것이다.
 내가 그들을 기쁘게 한다고 생각하지 마라. 이것은 가장 밝은 마음의 빛을 발하는 사람들보다 한 수 앞서는 체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아마(Ama)와 그녀의 친구들을 聖人像들로 생각하기 전에, 그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우리와 같다는 것을 기억해야할 것이다. 그들 또한 그들에게 없는 것들을 원한다.
 차이는 그들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날씨가 뜨겁고 바람이 부는 저녁에 우리는 가나를 떠나려고 준비하고 있었고, 나는 아프리카항공관계자에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그녀에게 우리가 슬럼가에서 만난 행복한 사람들의 상처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그녀는 말하기를,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그 외에 다른 소망을 가지고 있지 않지요.” 그녀는 손으로 자신의 말총머리를 풀면서 내게 관찰하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녀의 눈은 흐트러지지 않았고, 그녀의 미소는 넓어 보였고, 단호해 보였다. 그녀의 모든 말에는 의미가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어떻게 미소를 유지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그녀는 그녀의 어깨를 으쓱이며, “나는 하나님을 너무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그녀는 그것을 그렇게 간단하게 말했다. 나는 그럴 수 있다고 곰곰히 생각하였다. 그녀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믿고 있었고 같은 성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고통을 당할 때는 우리처럼 같은 본문을 가지고 생각하였다. 고후12:9-10은 명백하게 말한다.“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
 고난은 우리를 짓누르지만, 우리가 주일학교에서 항상 배운 것 “우리는 약하나, 그리스도는 강하다.” 처럼,  그것은 보편적인 진리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본 아프리카의 그 밤이었다. 우리의 목사친구는 그의 팔로 넓게 안으며, 밝은 미소를 내보이며, “너희 하나님보다 더 크신 우리 하나님의 나라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하였다. 그것은 행복한 모습이었고, 하나님은 자기를 필요로 하는 하나님보다 언제나 더 크신 분이었다. 그리고 고통이란 그 크신 하나님이 우리를 돕고, 우리가 하나님을 더욱 필요로 하도록 하는데 사용하는 도구들이었다.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욱 잘 알 수 있을까?
 그것은 매우 흥미를 끄는 생각이다. 그런 후에, 하나님께서 진지하게 고민을 일으키기 전까지는 결코 가져보지 못한 고등학교친구가 있게 된다. 10대 대학에 미식축구장학금을 신청하려고 그의 모든 노력을 다 기울였다. 그리고 그가 미시간에 있는 학교의 2학년 때, 5야드라인에서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두 번의 외과수술 후에, 그는 부상선수로써 축구시즌을 세 번이나 벤치에서 지내야했다. 후에 그는 어떤 비장한 생각을 하게되었는데, 삶이란 이렇게 짧은데 자신의 우선 순위는 무엇인지 몰랐다. 오늘 그는 여전히 운동에 관여하고 있다(그는 티니토네도스(Tiny Tornadoes)학교의 방과후 코치이다.). 그러나 그의 우선 순위는 분명히 서 있었다. 그의 일정표의 상당량의 시간을 성경읽기와 기도에 보내고 있다. 
 시련을 통하여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을까?
그것은 또 다른 호기심이다. 약간은 유물론적 경향이 있는 두 남녀가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런데 작년에 남자아이는 직업을 잃었다. 그들은 더욱 기도했다. 보다 적게 사용하고, 얼마의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들은 가정이라는 의미가 재물보다 더 중요한 것을 알게 되었고, 그들의 프린스톤(Princeton) 공동체학교에서 태어난 딸을 기뻐했고, 하나님은 그들 가정을 보호하셨다.           
 상처받은 마음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할 수 있을까?
 이것은 더욱 독특한 것이다. 여기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약혼한 여자친구가 있는 26세의 남성이 약혼반지를 그녀에게서 되돌려 받았다. 그는 그 반지를 자신의 실패한 사랑을 기념하려고 책상 위에 수개월간 올려놓았다. 그는 자기 아버지에게 그 사실을 숨겼고, 아래층에 사는 청년과는 그와 싸움으로써 자신에게 부어진 슬픔을 나누려했다. 주말에는 그를 외양간에 데리고 가서 말 타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것은 그를 성장시켰다. 그는 자신의 문제가 매우 작은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2년 후에, 그 사람은 서점을 드나들면서, 그곳에서 미국 남서부産인 담황색 말 사진이 있는 달력을 훑어보며 미소로 사람을 녹이는 금발미녀를 엿보게되었다. 그들은 대화를 나누었고, 그들은 바로 그 말(馬)들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보다 자신들의 공통점이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다음 주에 그녀에게 말 타는 법을 알려주었고, 그녀가 다니는 교회의 독신모임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그녀는 그 남자가 불쑥 던진 질문에 큰 소리로 “예스”라고 답하였다. 오늘, 그는 그녀를 놓칠까봐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약할 때, 하나님은 강하신가? 그렇다. 우리는 그것을 믿을 수 있다. 우리는 왜 위기가 닥칠 때 주눅이 드는 것일까? 우리는 왜 계속해서 “왜?”라고 묻는 것일까? 실마리는 우리가 질문하는 그 속에 숨겨져 있는 것이다. “내가 다시 행복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나의 유익을 위해 어떻게 이것을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을까?” 이 질문들 자체는 기술적이며, 내 중심적이다. 심지어 우리가 이유에 대한 묘책을 찾았을지라도-미시간大學 축구선수가 그의 우선 순위를 견고히 가진 것과 유물론적 경향이 있었던 두 남녀가 절약의 삶을 사는 것처럼-그 좋은 이유들이 내 중심적일 수밖에 없다.
“고통은 확실히 나의 영적 삶과 더불어 나를 돕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시련이 얼마나 나의 성격과 기도의 삶을 변화시키는지 알 수 있다.”
“내가 그 마음의 상처를 잊으려고 애썼던 것을 생각해보라.”
“이 시련은 실제로 내 결혼생활을 강하게 해주었다.”

내게 속한 모든 것들을 주목해 보라,
하나님도 역시 그것들을 주목하신다.


고통은 그 경계를 넘어,...

 바람은 계속 불고 있으며, 들국화들은 우리가 앉은 바로 발 밑의 제방 위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소나무가지들은 바람에 움직이며, 내 머리카락도 휘날리고 있으며, 나의 정신도 약간은 고무되었다. 뒷마당에 그렇게 많은 태양 빛이 들어본 적이 있을까? 나와 존 맥엘리스터(John McAllister)는 휠체어에 앉아 있었고, 산들바람 속에서도 근엄해 보였다. 그는 꿈꾸는 듯 산들을 멀리 바라보고 있었고, 털 목덜이는 그의 목에서 걷어올려졌다. 그는 어떤 고귀하고 유명한 사람같이 보였고, 또한 정원을 거닐며 묵상하는 학자같이 보였다.
 나는 숨을 내쉬며 “나는 여기에 더 자주 와야 할거야, 나는 이런 날과 이런 장면을 좋아해, 나는 너의 우정에 고맙게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하~아 하,..” 그는 크게 웃으면서, 나중에 한턱을 내겠다고 의례적인 말을 덧붙였다. 나는 우리의 상황들을 비교하였다. 거의 약 30년간의 이 마비상태는 나를 이 틀 속에 가두어두었다. 그러나 퇴행성신경질환은 그에 대해 공개적으로 부당취득한 죄가 되었다. 6피트3인치 높이의 떡갈나무(이전 건강한 자기 모습: 역자 주)는 내 앞에서 구부러지고 주눅이 들어 있었다. 
 한 간호원친구가 주사기와 말랑말랑한 액체가 들어있는 플라스틱 통을 가지고 닦아왔다. 그녀가 그의 셔츠의 마지막 단추를 풀 때까지 그와 나는 이야기를 계속 하였다. 그의 하얀 복부는 드러났고, 헝겊조각과 반영구적인 급식튜브가 따라왔다. 그녀는 그 튜브 속으로 점심식사를 넣었다. 그는 난처해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도 나는 그 순간을 지우고 싶어 “당신이 그 튜브로 음식을 먹을 때, 감사의 식사기도를 한다는 것을 아는 것은 매우 어렵다!”라고 말했다.
 그는 머리를 끄덕였다. 나는 그가 더 잘 움직일 수 있는 힘찬 날들을 생각했다. 요양원에서 자원봉사를 할 수 있고, 언제나 능동적이고, 봉사적이고, 활동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보았다. 간호원은 주사기를 뽑고 그의 배를 닦았다. 마치 그녀가 음식을 먹은 후 냅킨으로 입을 닦듯이 말이다. 나는 그녀의 말쑥한 모습에 매우 흡족했지만 존(John McAllister)은 계속 깨끗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샤워를 해달라고 그가 떼를 쓰는 것은 이제 일반적인 일이 되었다. 그 밖의 다른 것은 어제의 일이다.
 여러 달이 지나갔다. 날씨는 차갑고, 해는 짧아졌다. 존의 휠체어는 구석에서 사용하지 않은 채 놓여있다. 그는 지금 너무 약해져서 오랫동안 앉아있을 수가 없다. 그의 침대는 거실 중앙에 있고, 존이 거기에 있다. 밤은 더 이상 그의 친구가 아니었다. 이전 모습은 사라지고, 날카로운 움직임만 방을 가로지르고 있다. 그의 가슴에 무거운 공기가 얹혀있듯이 무거운 중압감은 그의 적이 되었다. 호흡은 갈수록 힘들고, 소리지르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그는 오늘밤에 소리치고 싶었다. 어둠 속에서 한 개미가 그를 발견했다. 그 정찰병은 다른 동료들을 불러냈고, 그들은 이내 왔다. 수백 마리 후에 수천 마리가 왔다. 소리 없는 군대가 그들 방법대로 굴뚝을 내려와 마루바닥을 가로질러 조금씩 전진하여 그의 소변튜브를 따라 은밀하게 기어올라 그의 침대 위로 진군했다. 그들은 존이 덮은 담요의 언덕과 골짜기로 삽시간에 퍼져 그의 몸 속과 아래에 터널을 파기 시작했다. 그는 꿈틀거리는 검은 침략자에 의해 정복당한 것이다.
 나는 영국해협을 건너 호텔에 도착했을 때, 그 내용이 적힌 팩스를 받았다. 간호사와 같이 따라 온 존의 아내는 아침 일찍, 아직도 개미들이 그의 입과 눈과 머리에 붙어있는 그를 보았다. 그의 피부는 혹독하게 물려있었고, 검게 그을려 있었다. 그를 위한 기도,.. 팩스전보들,.. 우리는 다시 그를 그렇게 우울하게 볼 수가 없을 것이다. 나는 그 메시지가 도착했을 때 호텔에 없었다. 그때 나는 세미나에서 연설하고 있었으니 무능한 사람으로써 궁상을 떨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때 호텔에서 연약한 자들과 상처 입기 쉬운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자비와 그의 도우심에 대해서 연설하고 있었다.
 나는 안내자의 책상에 앉아 있었고, 그 팩스를 두 번이나 읽었지만 읽을 수가 없었다. 나는 위병에 결렸다. 존은 기독교인이다. 그의 하나님은 어둠 속에서 알 수 있었다.
 왜?, 하늘의 이름으로, 왜? 하나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하마터면 이렇게 말할 뻔했다.
 만약 당신이 존(John McAllister)을 알고 있다면 아마 이렇게 말했을지 모른다. 이것은 축구장에서 인대가 끊어졌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프린스톤大學에서 재정 지원해주겠다는 것을 정중히 거절했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약혼반지를 되돌려 받아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는 정도가 아니다. 이것은 거의 미칠 지경이며, 이것은 고통이 全身에 퍼지는 것이며, 온전한 정신을 찢어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고통이 궤도를 벗어난 것이고, 이 고통은 결코 나를 하나님께로 이끌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고 당신은 생각할 것이다. 그것은 나를 그에게서 멀리 던져버린 것이다.
 우리는 고통이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 잘 알도록 돕는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고통의 목적은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려고 한 단계 더 올라가는 것인가? 이것은 우리들의 삶 속에서 어떤 깊고 심오한 것을 달성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이신가? 누군가 이것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누가 이것을 실제로 믿습니까?


성경으로 돌아가서

 권세자에 의해 그의 허리는 벗겨지고, 그의 복부는 타격을 받았다. 바울(Paul)은 그의 눈을 감아버렸다. 한 쌍의 슬리퍼가 그의 뒤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질질 끌며간다. 그리고 한 무리가 조용히 닦아오는 소리를 그는 들었으며, 숨소리와 가죽 소리를 들었고, 그리고 - 철컥! - 하는 쇳소리를 들었다. 호위병은 일련의 순서를 잘 알았고, 매질은 실제로 시작되었다.
 태형은 전통적인 유대습관이다. 삼겹줄 채찍으로 39대가 적용되었다. 채찍질은 39대였으며, 40대가 아니었다. 모세율법은 40대를 허락했으나, 한정된 범위를 넘지 않는 것이 덜 위험했다.
 서른 번째 매를 맞고, 바울의 혀는 먼지바닥이 된다. 바울은 그의 인생이 끝나기 전에 유대인회당에서 그러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고, 먼지를 맛보았다. 그는 로마의 무서운 채찍 하에 상처의 흔적이 있고,  때때로 거의 암살을 피할 수 없었으며, 바다에서 밤낮동안 난파된 배에 붙잡혀 있었고, 사슬에 묶였었으며, 폭도들의 돌에 의해 죽을 뻔하기도 하였다(고후11:24-27).
 그는 약간의 포기성명서를 발표하고, 비평적인 상황에서 약간 입다물고 있으면, 그 모든 것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의 적들은 그의 대단한 지성에는 일언반구 대꾸하지 않으면서, 그의 거침없이 쏟아내는 질문들을 혐오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바울을 속일 수 없었다. 그는 그들의 어려운 난점을 다 알고 있었다. 그의 적들이 정말로 싫어했던 것은 그가 제기한 모든 문제들과 토론 뒤에 보이지 않는 어떤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의 샌달 끈을 풀기도 감당 못할 자였다. 바울이 줄기차게 증거한 것은 바로 이 숨겨진 사람에 대한 기억이었다.
 물론, 언제나 그 “무덤에서 삼일만에 다시 살아난..” 사실은 모든 사람들을 흥분시켰다. 헬라인들은 그 사람에 대하여 상스러운 웃음을 지을 수가 없다! 시체가 그의 돌판 위에 앉을 수는 없지 않은가? 시체가 여기저기 동네를 다닐 수도 있는가? 하! 유대인들이 분향하는 것은 헬라인들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 되었다. 어떻게 감히 유한한 인간을 전능자와 같은 반열에 놓을 수 있는가! 특별히 많은 교훈과 사람의 병을 고치는 일로 안식일을 오염시켰다는 농촌에서 온 이상한 랍비가 그렇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게 둠으로써 이중의 우를 범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 랍비를 보았다. 그것도 매장당한지 10년도 못되어 그를 보았다. 이 랍비는 바울에게 나타났고, 낙타를 타고 가는 다메섹도상에서 그를 만났다. 그리고 강한 빛에 의해 바울은 눈이 멀었다. 그후 그는 삼층천에 올라가 사람으로써는 들을 수 없는 말을 들었다. 의심할 것 없이 돌무덤으로부터 부활이 있었다. 이 사건은 바울로 하여금 나사렛 예수는 선지자들이 예언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으며, 예수는 생명을 다시 가져,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도 아낌없이 주기 위해 세상의 죄를 속하려고 죽음을 감당하신 것이다.
 얼마의 시간 후에 부활하신 예수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다메섹의 그리스도인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말하기를 바울을 찾아 세례를 주라는 것이다. 그 메시지는 이런 말로 끝을 맺고 있다.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행9:15-16)”
 선포된 말씀은 사실로 드러났다. 바울은 함께 한 다른 사도들보다 더 예수의 명성을 전하도록 운명지어졌다. 여전히 그는 열정적인 과정 속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그를 칭찬하는지! 얼마나 자주 우리가 그를 인용하는지! 우리는 그렇게 훌륭하게 살기를 갈망하며, 그렇게 굳세게 말하기를 바라며, 강건하게 우리의 악과 싸우기를 바란다. 우리는 그의 마음과 정신을 거울로 보기 원하며, 전적으로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새롭게 되기를 바란다. 바울이 활동하던 시절에 그의 몇 친구들이 “바울, 우리는 당신과 같이 되기를 바란다. 비결이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우리가 당신처럼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가?”라고 말했다. 바울사도는 그들에게 편지를 통해 이야기 해주었다. 그는 자신의 영적 삶이 무엇인지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였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3:10)”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힘쓴다.”고 기록하였다. 그렇다. 우리도 최선을 다해 그렇게 되기를 원해야한다. 삶이란 우리를 창조하신 그분과 최상의 교제를 할 때 가장 행복한 것이다.
“부활의 능력에 참여하려고 전력하며,..” 절대로 그렇다! 그것이 생겨나야 한다. 우리는 바로 그가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의 모든 환경을 딛고 일어나기를 원한다. 우리는 정결한 영혼을 사용해야한다. 하늘은 우리가 우리의 악들과 싸우려할 때 도움을 준다. 우리 모두는 더 나아지는 것을 원한다.
“그의 고난에 동참하려고 전력하며,..” 어! 기다려라, 아마 사도는 자기자신이 약간은 과장하여 말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정말 그리스도의 고통이나 다른 사람의 고통에 동참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러나 더 생각해보면, 우리는 적당한 분량의 어려운 순간들이 영혼을 위해 좋은 强壯劑가 된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이 고난의 주제가 우리가 앞으로 더 알기 원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적당한 정도의 수준에 이르도록 항상 열정을 가져야한다.
“그의 죽으심을 본받으려 한다.” 뭐라고, 그리스도처럼 그의 죽음에 참여하려한다고?, 순교자처럼 십자가를 진다고? 우리는 의아해서 묻는다. 우리가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가 애착을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천천히 비틀어버리실 때, 우리는 살았으나 죽은 것이 아닌가? 당신은 가지고 싶은 것을 원하는 반면에, 당신이 원치 않는 것을 억지로 하게되는 것을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받는다는 것으로 알고 있지 않는가? 고통이라는 것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이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어야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는지? 어이쿠!..
 당신의 말을 잠시만 기다려라, 만약 사도바울이 우리의 원형이라면, 만약 하나님이 우리가 그와 똑같이 할 수 있도록 바울에게 지적해 주었다면, 그가 - 또는 하나님이 알려주신 대로 - 내가 겪어야 할 고통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을까? 
 어떤 근면한 사람이 자기를 포기하고 산더미 같은 빚을 남겼는가? 그는 놀이터에서 몰려든 조롱과 주목을 받는 얼굴흉터를 잘 참았는가? 그는 번민과 간절한 열망을 간단하게 생각했는가?, 내가 관능적인 쾌락을 다시는 원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바사(Iran: 페르샤)의 감옥에 앉으시고, 눈을 가리우시며, 당황해 하셨는가? 어느 누가 뉴욕의 길거리에서 1월 달에 천천히 凍死하고 있는가? 욕설과 근친상간과 강간을 자행한 부모를 생각하며 살 수 있을까? 그는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들 - 아이들, 하나님을 위하여 - 을 靈肉간에 고통으로 얼룩진 채 바라보았는가? 정말!

 내가 알고 있는 이 하나님은 누구신가?
 오직 친구의 만족을 위해 우리로 깨진 유리조각 위를 걷도록 명하신 이 하나님은 누구신가?
     




 



    A. 이 하나님은 누구신가?

2. 넘쳐흐르는 황홀함

 물질이 존재하기 아주 오래 전에, 우주가 그 첫 호흡을 하기 전에,  그 처음 천사가 눈을 뜨기 전에, 아무 것도 그곳에 없을 때에, 하나님은 언제나 영원히 계셨다. 그는 단순히 영원히 계신 것만이 아니라, 그에게는 영원한 충만함이 있으셨다. 어떤 일에든지 하나님은 계셨다. 그는 아직도 계시며, 앞으로도 영원히 계실 것이다.
 현대의 우리들에게는 좀 색다른 思考가 있다. 하나님은 만족하시다 라고 말한 이는 누구인가?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좋은 소식이다. 결국, 인류의 모든 종족은 고통으로 인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하나님이 흔들 침대에서 자기 발 밑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을 보기만 하실 수 있단 말인가? 아마 만족하다는 관념은 고요한 하나님이 너를 방해하지 않는다는 것이겠지.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만약 하나님이 어느 누구를 구하시려한다면, 그것은 그를 죽이지 않는 것이다.
 오늘날 소수의 사람들은 남에게 강한 자기주장을 하지 않으면서도 만족하신 하나님을 믿고 있다. 최근에 일어난 빌모여스(Bill Moyers)의 TV프로에서 개최한 ‘창세기 연구’가 사회일각에서 회자되고 있음을 생각해 보라. 그 쇼에서 성경학자들은 모세의 책을 토론하는 방에 둘러 앉아있었다. 거기에서 그들보다 더 위대하신 하나님을 발견해 보라. 그는 괴로워하시고, 불안하시며, 소심하시며, 질투하시며, 심지어 보복하시는 분이 되었다. 아담과 하와는 동산에서 과일을 따먹음으로 쫓겨나게 되었고 죄책 때문에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갖게 되었다. 먼저 그는 그의 손톱을 물어뜯었으며, 발끈 화를 내었고, 과민반응을 하며, 머리를 흔들었다. 그는 아마도 아침에 그것에 대해 나쁘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를 “축복의 하나님(딤후1:11)”이라고 불렀다. 위협하지 않으시고, “축복의 하나님은 권위자이시며, 만왕의 왕, 만주의 주, 그에게는 죽지 아니함이 있고,..(딤후6:15-16)” 라는 것을 주목하도록 신앙적 갈망을 하도록 함께 한다는 것이다. 어떤 번역은 실제로 “至福의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고대 헬라역은 ‘부요하고 능력있는’ - 이 말은 사회의 상류계층의 의미-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고 그리고 신들의 경지, 즉 그들이 원하는 것과 즐거워하는 것은 무엇이나 가질 수 있다는 정도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예수는 그가 “온유하고, 가난하고, 화평케 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하면서 이 말을 사용하였다. 그는 그러한 사람들의 행복에 대해 말한 것이다. 그들은 진실로 행복한 자들이기에 우리는 그들을 부러워해야 한다.
 이것은 성경이 하나님을 묘사할 때 사용한 말이다. 그러므로 매우 정확한 것이다. 만족하다라는 것은 그것이 강력하게 충분하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실 행복하시다. 성경의 전체적인 그림을 검색하면 당신은 곧 그가 매우 행복하시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형식적인 꾸민 말들에 의해 묘사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과연 그렇게 행복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한번 생각해 보라. 우리와 달리 그는 어떤 것이든 핍절함이 없다. 그는 성탄절 때 사람들을 위하여 가게에서 물건을 사시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번은 그가 어떤 예배자들을 상기시킨 적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에게 호의를 베풀기를 원했던 자들이다. 이들에게 하나님은,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수염소를 취치 아니하리니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시50:9-10)라고 하셨다. 선생들도 안되고, 깡패들도 안되고, 보스, 코치, 훈련교관들, 오사(OSHA)검사자들, 마구 심부름을 시켜먹으려고 총알까지 장진한 망나니들일지라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시115:3). 그는 정각보다 늦지 않으시며, 힘이 없어지지 않으시며, 능력이 작지 않으시며, 또 누구의 동의를 기다리지 않으시며, 자신의 계획을 이루시려고 허락을 받으실 필요가 없으시다. 왜냐하면,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사에게든지,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가 없도다(단4:35)”
 그가 친히 만드신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으신 그분의 기쁨을 한번 생각해 보라. 당신은 자녀가 크레파스로 “나무가 있는 집”의 걸작품을 그린 후, 그림을 냉장고 위에 테이프로 부쳐 놓은 자녀의 얼굴 속에서 만족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식사대접 후에 사람들의 칭찬소리와, 기말숙제를 부탁하려고 감언이설로 눈웃음을 치며, 그리고 회사의 합병작업을 끝냈을 때 등에 대해 당신의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쌓은 벽돌 길을 보면서, 또한 만든 모형보트를 가지고 서재 건너편에서 실험하면서, 그리고 차고에서 64년형 포드무스탕을 고쳐놓고는 자주 감탄해 마지않는다. 또한 우리는 엉클 프랭크(Uncle Frank)에 대해 완벽하게 짓궂은 농담을 해놓고는 입이 찟어지게 웃는다.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가 그의 수집된 작품들의 첫 카피本을 손에 쥔 감정이 어떠했겠는가? 또는 미켈란젤로(Michelangelo)가 시스티네(Sistine)성당의 천장에 마지막 붓을 그리면서 그것을 쳐다보며 어떠했겠는가?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가 그의 가장 최근 작품을 처음 개봉할 때 그것을 대충 보겠는가?
 그것들은 하나님에 비하면 모두 작은 감자 덩어리들과 같다. 수백만의 은하계의 별들이 있은 후에 그에게로 몰려드는 미세한 것들을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성경은 절제된 말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주야를 주관하게 하시며 빛과 어두움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18)” 전체적인 광경을 바라보고 서 계신 후에, 그분은 쉬셨다. 힘이 빠져 숨을 쉬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들을 풍미하시려고 쉬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만족하심(좋으심)이었다.

 잘 끝낸 어떤 일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과 함께 더욱 기쁨이 두 배나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것을 잘 말씀하셨다. 그는 욥에게 땅의 기초를 쌓을 때를 “그때에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었느니라(욥38:7)” 라고 말하셨다. 얼마나 그것들이 그 밝은 빛 앞에서 엎드려 복종했겠는가! 이러한 하늘의 광경을 포착할 수는 없는가? 지나간 시대로부터 여태껏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일들을 스펄젼(Spurgeon)은 이렇게 말했다.
  “밤낮으로 찬양의 향기가 엎드려 절을 하는 영혼들에 의한 황금 유리병으로부터 그 앞으로 올라가고, 수많은 천사들과 스랍들의 하프가 계속 그를 찬양하며, 경배하는 모든 천군천사들의 소리가 웅변으로 들리며,... 당신은 하나님의 귀에 계속적으로 퍼부어 들리는 조화의 향기로움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그는 그러한 기쁨과 예배를 받으시도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그의 마음에 완벽하게 들지 못하고 있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이라면, 당신은 어디서 그러한 감명을 받겠는가? 아무튼, 당신에게는 창조한 모든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모두 놀라운 것이며, 의심할 바 없이 당신보다 못한 것들이다. 당신은 창조한 어떤 것하고도 대화할 수 있고, 심지어 가장 웅대한 것들과 또는 당신자신보다 못한 무수한 것들과도 가능하다. 당신의 망막한 마음을 즐겁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어떤 생각이 당신의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가? 어떤 친구가 당신의 마음을 매혹시키는가? 누구의 소양과 인격이 당신을 깜짝 놀라게 하는가? 당신은 당신을 무척 기쁘게 하기에 충분한 아름다움과 멋을 어디서 발견할 수 있는가?
 거기에는 오직 하나의 답이 있을 뿐이다. 어떤 무한한 존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그 무한한 존재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울로 자기를 마주볼 때 비로소 실제적인 만족이 따라오는 것이다.
            그런 거울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바로 삼위일체이시다.
 우주가 있기 전, 천사가 있기 전, 영원 전, 하늘 그 자체가 생기기 전에 - 유일하신 하나님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하나님이신 삼위로 계셨다. 이것을 거절한다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신비를 알려면 당신이 그들 중 하나가 되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언제나 홀로가 아니시다. 셋이 하나이시다. 그는 자기 자신이 아닌 누구로부터 삶과 존재와 본질적인 판단을 끌어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지속하시고,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돋우신다. 그는 자기 자신이 가장 좋은 친구이시다.
 성령은 조용한 분이시다. 동등한 신성으로, 다른 位格들과 함께 계신다. 게다가 그는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영원히 나오신다. 그의 사역은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의 은총을 우리들에게 적용하사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데 있다. 아버지와 아들은 그를 “보내신다(Send).” 성령은 이것을 불편해 하지 않는다. 그는 절대로 이것에 반감을 가지고 있지 않으신다. 삼위가 이것을 영원히 동의하신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본래적 본질이 아들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아들과 아버지가 무엇을 생각하시는지 정확히 알고 있으며, 그들을 매우 사랑하고 있다. 왜냐하면 삼위하나님은 항상 같이 계시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이것 때문에 또한 성령을 사랑하신다.
 그러나 성경에는, 아들을 그들의 무대 중앙에 세운다. 그는 절대신성의 하나님이시며, 모든 일에 있어서 아버지와 성령과 동등이시다. 아버지는 아들에 대한 자랑을 절대 싫증내지 않으신다.
“내가 기뻐하고 나의 택한 자를 보라(사42:1)”
“이는 내 아들이요, 내 사랑하는 자니 내가 기뻐하노라(마3:17)”
 이 두 구절은 “아버지의 가슴에 있는” 아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것은 그의 가슴에 그의 머리를 기대고 있으며, 중동지역의 저녁식사의 낮은 식탁 주위에 있는 카페트에 몸을 기대고 있는 가까운 친구의 모습인 것이다. 더욱이, 하나님은 우주를 만드시고 아들에게 그것을 관장하도록 하셨다. “내게 주신 모든 것은 다 아버지가 주신 것이며,..(눅10:22)”
 왜 아버지는 아들을 그렇게 귀하게 대하시는가? 그것은 그가 아들 안에서 자기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의 완전함은 완벽하게 그것을 나타내고 있다. 아들은 하나님이 거울에 서 있는 것과 같다. 그 안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모든 지혜, 웅장함, 선하심의 샘을 보고 있으신 것이다. 우리도 거울을 보지만 언제나 거의 실망투성이다. 하나님은 거울을 보시고는 마음이 끌리신다. 만약 아버지가 아들보다 더 “열망하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들은 매우 우스꽝스러운 것들이다. 영원하신 삼위의 동등함은 무도회에서 서로 사랑함으로 원무(圓舞)를 추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삼위일체하나님은 서로를 포용하는 기쁨을 가지고 있다.
 당신의 마음 속에 이런 바람이 있는가? 분명히 그럴 것이다.
 그러나 피를 토하는 암 환자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는가? 혹은 감옥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는 자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는가? 개미들의 습격으로 죽은 존 맥엘리스터(John McAllister)을 어떻게 도울 수 있는가?
 그것에 대해 이렇게 생각해 보라. 당신의 차는 당신의 집으로부터 백마일 떨어진 곳에서 고장이 나서 길 뒤쪽에 있고, 당신은 고칠 능력이 없다. 아이들은 차 뒷자리에서 배고프다고 한다. 당신은 당신의 지갑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 결국 당신은 반 마일 떨어진 가까운 마을을 걸어갔다. 당신이 걷는 동안, 당신은 감기기운을 느꼈고, 전화박스에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받는 사람이 없다. 편의점은 문들을 닫았고, 당신은 누군가 당신을 도와 당신의 차가 있는 곳까지 갈 수 있는 사람을 찾기 위해 큰 길가를 나섰다. 그래서 혹시 고칠 수 있나해서 당신 차 앞 뚜껑을 열고 살짝 들여다 보려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식구들은 누군가 송금전보를 쳐서 돈이 올 때까지 결국 기다릴 수밖에 없다.
 당신은 누구에게 가까이 가겠는가? 초로의 신사가 喪을 당한 집으로부터 걸어오고 있다. 그의 눈물을 닦아주겠는가? 길 건너편에 있는 십대아이들이 서로에게 상소리를 질러대고 있지 않은가? 한 중년의 사람이 주택단지에서 뛰어나오면서 문을 꽝 닫으며 욕설을 퍼붓고 있지 않은가? 누더기 옷을 걸친 여인이 옷을 질질 끌면서 뒤에는 더러운 얼굴을 가진 아이를 끈으로 끌며 길을 걸어오고 있지 않은가? 또는 연결된 현관에 있는 두 이웃들이 잡담하면서 시끄럽게 웃고있지 않은가?
 당신은 이웃을 야단칠 수 있을 것이다. 왜? 그것은 다른 이들이 그들 때문에 방해를 받기 때문인데, 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심지어 당신의 말을 가로막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이웃들은 좋은 감정을 드러낼 것이다. 좋은 감정의 사람들은 대부분 이웃돕기를 좋아하는 이들이다.
 하나님에 대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은 좋은 감정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는 낙담하지 않으시며, 구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않으시며, 네안데르탈 原始人이 자기손가락을 핵폭탄 위에 얹는 것 같은 혹독함 등은 없으시다. 하나님은 기쁨이 넘쳐흐르는 분이시다. 이것은 그의 자비하심이 어디에서 오는지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가 기뻐하는 가득 찬 사랑의 저장탱크는 하늘나라의 벽에서 튕겨 나온 것이다. 그는 의기당당하게 그곳에서 수영을 하며, 우리에게 그것을 나누어주려고 드라이브하신다. 왜냐하면, 답은 간단하다. 그는 그것을 “나의 기쁨이 너희 안에 있기 위해(요15:11)” 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에 대한 거룩한 군주이지만, 그의 기쁨을 그가 사용하는 용어들로 나누어 주셨다. 그러한 용어들로 고통에 있어서 우리를 부르셨고, 고통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 지상사역을 하는 동안에도 있었다. 우리는 그의 이유들을 이해할 수 없지만, 그러나 우리는 이것에 대해 몰상식하게 그에게 대항하지 않는다.
  그는 언어의 범위를 넘은 어떤 황홀함 가운데 계시도다!
  그것은 어떤 가치로써 그의 친구가 된다.
 
 좋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좋아하신다. 그는 그 자신을 기뻐하신다. 그러나 그는 우리를 돌보시지 않는가? 하와이의 햇빛은 보스턴의 진눈깨비를 멈추지 못한다. 그러면 하늘에 있는 햇빛은 무엇인가? 촛불식탁주변에 있는 연인들은 주위사람들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카페는 문을 닫았고, 사람들은 귀가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신경쓰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랑이 너무 많으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행복하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슬픔에 빠져 낙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그가 우리를 위해 생각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그의 아들을 안다.
 아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다(골1:15)”. 그는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히1:3)”하셨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하였으니, 이것을 경의롭게 가지는 것이 바로 예수에 대한 사진을 찍는 것이요, 필름에 하나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슬리퍼를 신으시고 걷는 것처럼 하실 수 있을까? 그는 그러실 수 있다. 사람들은 나사렛의 목재가게에서 아버지를 따라 일하고 있는 아이를 기뻐하고 있다. 이 지혜로운 소년이 거기에만 머무를 수는 없었고, 그의 부모들은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주의하였다.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눅2:51-52 ; 4:22)”.
 성년이 되어서, 그는 연어가 자신의 산란기에 물을 거슬러 올라가듯, 자신의 탐욕적인 삶의 시기를 거슬러 수영하듯 대항하였다. 그가 그의 날들을 어떻게 보냈는가 바라보라. 막1장은 삶에 대한 그 자료들이다. 안식일 아침에 그는 가버나움 湖水가에 있는 회당에 나갔다. 거기서 그는 돈이 없어 사 먹을 수 없는 사람들을 먹이셨다. 그의 설교 도중에 어떤 귀신들린 자가 군중 속에서 소리를 질러댔을 때 선생은 “나오라!”라고 소리쳤다. 귀신은 즉시로 성이 나고, 증오에 가득 찼지만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그 불쌍한 자는 회복되었다. 그 사건은 끝났지만, 그는 지금 시몬 베드로의 그리 넓지 않은 집에 있다. 마침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에 걸려 누워있었다. 그 병에 걸리면 일반적으로 목숨을 건지기 어렵다. 예수는 그 방으로 건너가 말하지 않고, 그녀에게로 다가가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녀를 고쳐주었다. 그녀의 어려움은 해소되었고, 그녀는 그들에게 음식을 만들어 봉사했다.
 태양이 졌다. 이것은 안식일이 끝나고 이제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길 아래 집에서 병자를 들것으로 나르는 일들이 가능해졌다. 그녀가 당신이 알고 있는 그 사람에 의해 고침 받았다는 것을 당신은 들었는가? 이르기를, “각색 병든 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이 온 동네에서 그 집문 앞에 이르렀고, 예수는 병든 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을 고쳤으니,...”
 그러나 이른 아침, 어느 누가 알기 전에, 그는 어둠을 헤치고 마을을 떠나 한적한 곳을 찾아 나섰다. 그의 제자들이 그를 찾아 나섰다. 거기에서 그는 기도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찾고 있는 줄을 알지 못하나이까?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가자, 우리가 가까운 마을로 가서 거기서도 복음을 전해야할 것이다. 이것이 내가 이곳에 온 이유이다.” 그래서 그는 가장 私心없이 3년 반을 그렇게 사신 것이다.
 한 문둥병자가 자신을 땅에 던지며, “주여, 당신이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할 수 있나이다.” 절차와 급한 감정을 무시하고 예수는 앞으로 나아가, “내가 원하노라.” 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대셨다. 병으로 하얗던 피부는 홍조를 띄었고, 그 이웃은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눅5:12-13).
 일단의 상여꾼들과 문상객들이 나인(Nain)성 입구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죽은 자를 운반하고 있었다. 그는 과부의 외동아들이었다. 누가 지금 그녀를 위로할 수 있는가? 예수와 제자들은 마을에 이르렀다. 길 양편으로 두 무리가 지나가는 동안, 예수는 그들을 정지시켰다. 눈들이 험악하게 돌아갔다. 그는 실제로 그 관을 만지시려고 하였다. 무리 중에 얼마가 막아섰다. 지나가는 나그네가 무슨 권세로 이렇게 하려는가? 그러나 그들은 그의 마음과 그의 능력을 알지 못했다. 왜냐하면 “주님이 그녀를 보았을 때, 그의 마음은 그녀에게로 갔다.” 그는 말하기를, “울지 마라.” 그리고 그 죽은 자에게 이르기를, “일어나라!”하셨고, 그는 일어섰다(눅7:11-15).
 이것이 바로 거지 소경을 일으키고, 척추 휜 여인을 고친 것이며, 혼인집의 술이 떨어졌을 때의 혼인집사람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었는지의 이유들이다.
 배는 갈릴리호수를 항해하고 있었다. 바다를 때리는 바람소리를 제외하고는 얼마나 조용한지, 차츰 사람들이 그곳으로 많이 몰려들었다. 주님과 제자들은 밥 먹을 시간조차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살며시 그곳을 빠져 나왔다. 그러나 무리들은 그들이 배에 내렸을 것을 생각하여 그들을 만나려고 호수 주위를 열심히 뛰어 다녔다. 그들은 힘들게 헛수고를 했지만, 그러나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막6:34)라고 하였다.
 해는 졌지만, 많은 병자들은 도리어 힘이 솟구치는 감정이 들었다. 많은 귀머거리들이 처음으로 그 날 낮에 일어난 이야기들을 듣기 시작했고 많은 사람들의 영혼은 매우 충만했다. 그러나 그들의 배는 매우 시장했다. “그들을 보내어 먹을 것들을 사게 하소서.”라고 그의 제자들은 그에게 재촉했다. 그러나 그가 말하기를, “여기는 한적한 곳이니 그들을 어디로 보내겠는가? 너희 중에 음식이 없느냐?” 어떤 아이의 엄마가 아이를 위해 도시락을 주었는데, 아이는 아직 그것을 먹지 않았다. 예수는 축사하셨고, 오 천명의 사람들은 귀가하기 전에 포만감으로 음식을 많이 먹었던 것이다.
 예수가 행한 이 모든 것들을 누가 할 것인가? 상류층 사람들이 할 것인가? 그들 중 대부분은 그가 말한 한 두 가지를 듣고는 그를 떠나고 당황해하였다. 그것은 그를 매일 따랐던 사람들-어부들, 세리들,  미혼 여성과 결혼하지 않은 두 형제들-이었다. 예수는 따르는 무리들이 너무 많은 행낭들을 짊어지고 다니지 않기 위해 자기의 길을 갔다. 거기에 혈루병 앓는 여인이 있었다. 당신은 아마 그녀를 주의조차 주지 않을 것이다. 그는 군중들을 헤치고, 아무도 자기를 주의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 여자는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는 돌아보았고, 그녀는 그가 눈치챈 것을 알고는 울어버렸다. 그러나 그는 전혀 화내지 아니하고,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고쳤느니라, 평안히 가라.”고 그녀에게 말했다(눅8:48).
 그때에 거기에 무덤 사이에 다니는 사람이 있으니, 그는 종일 벌거벗고, 소리를 지르며, 모든 사람으로 무덤에 오지 못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그를 다룰 줄 알았고, 예수가 행하고 나서야 그는 옷을 입고 모든 것을 하였다. 마치 양손을 책상 위에 올려놓은 유치원아이같이 온순했다. 그는 예수를 따르게 해달라고 강하게 요구하였다. 돈이 너무 많은 유죄선고 받은 죄인들(세리들), 混血兒들, 성미가 괴팍한 젊은 아이들, 그리고 당신이 해가 진 뒤에 초대한 집의 여자들, - 이들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다. 그는 이들의 발을 씻기기도 하고, 그들의 모임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신은 그의 손이 나중에는 더러워질 것이라는 생각을 절대 갖지 않는다. 아이들은 그의 옷을 끌어당기고, 그의 무릎에 올라  앉는다. 그는 거만에 대한 자신의 분노를 자제하고, 자기의 제자들이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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