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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방법론] 번역 아티클, "닫혔던 눈을 뜨게 하기 - 자료수집에 대한 새로운 관점"

부록1: 닫혔던 눈을 뜨게 하기 - 자료수집에 대한 새로운 관점

-폴 트립


셀리아는‘인간관계에 대해서 도움을 얻기 위해' 상담을 받으러 왔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이 ‘어딜 가나 따돌림을 받는다'고 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단 한명의  ‘진실한 친구'를 찾지 못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그녀에게서 너무나 멀리 계신 듯 느껴졌지만, 셀리아는 애처롭게도 스스로가 그렇게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을 만한 나쁜 죄를 짓지는 않았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분명 그녀는 그 치명적인 고통을 받아도 될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나는 셀리아를 안타깝게 생각했지만 또한 그녀가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만 했다. 그런 따돌림은 그녀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에 나는 그 문제를 일으키게 하는 다른 이유가 있는지를 함께 살펴보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셀리아는 즉시 방어적인 태도를 나타냈다. 상담자로서 내가 이 다음에 해야하는 행동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셀리아에 대해서 좀 더 많은 것을 알아야만 했지만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좀 더 많이 알아야만 했던 것이다. 그 상황에서는 반드시 뚫고 지나가야만 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무지함이라는 벽이 있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셀리아는 결코 제대로 된 상담을 받을 수가 없었다. 셀리아는 상처받고 절망하며 지친 상태였지 하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무지함 때문에 그녀는 여전히 진정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준비가 되지 못했다.
죄로 인한 타락의 비극적인 결과 중의 하나는 자기 자신의 마음에 대한 무지함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의 보편적인 문제이다. 또한 그 점이 성경적 상담을 어렵게 생각하는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무지함은 자료수집의 과정의 의미를 완전히 바꾸어 버린다.
죄는 속이는 것이고 타락한 인간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 간과해 버리기 때문에 자료수집이란 항상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목표를 추구해야만 한다. 첫 번째, 그 과정은 상담자에게 지혜로운 성경적 상담을 전해 주기 위해 필요한 자료를 제공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만 이보다 더 근본적인 두 번째 목표는 우리가 너무나 오랫동안 자기 자신에 대해서 무지했던 자들의 눈을 뜨게 하는 메시야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닫혔던 눈을 뜨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메시야적 사명의 본질이다. 오실 메시야를 이미 오래 전에 바라보면서 이사야는 이렇게 말했다. "35:5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이사야 35:5) 하나님께서는 이 후에 약속하신다. "내가 소경을 그들의 알지 못하는 길로 이끌며 그들의 알지 못하는 첩경으로 인도하며 흑암으로 그 앞에 광명이 되게 하며 굽은 데를 곧게 할 것이라 내가 이 일을 행하여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리니" (사 42:16)
메시야는 보지 못하는 죄인들의 눈을 떠서 분명히 볼 수 있게 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이사야는 죄인된 인간의 상태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하였다.

그러므로 공평이 우리에게서 멀고
의가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즉
우리가 빛을 바라나 어두움 뿐이요
밝은 것을 바라나 캄캄한 가운데 행하므로
우리가 소경같이 담을 더듬으며
눈 없는 자같이 두루 더듬으며
낮에도 황혼 때같이 넘어지니
(사 59:9-10 상반절)

그리스도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우리들에게 진리의 빛을 죄의 어두움에 향해서 비추고자 하시는 메시야적인 사명에 함께 동참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하여 주신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상담 중에서 추구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의 목표는 단지 여러가지 인간관계와 상황 속에 존재하는 어두움을 드러내는 것 뿐만이 아니라 피상담자의 마음의 어두움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럴 때에 복음이 적용될 수 있다.
모든 피상담자는 어떤 면에서 '소경같이 담을 더듬는 자'와 같다. 우리의 자료수집은 이점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나는 피상담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로 스스로를 비추어 볼 수 있도록 돕기를 원한다. 나는 그들이 결코 물어보고 싶어하지 않을 질문들을 물어보고 그들이 결코 알고 싶지 않은 것들을 알게 하기를 원한다. 나의 질문들은 사람들과 그들의 문제들에 대한 성경적인 관점을 따라 진행될 것이다. 여기서 나는 어둠 속에서 더듬기만 했던 지난 날의 어리석음을 끝내려고 하면서 메시야의 모습을 닮아가게 된다. 나는 단순히 나의 결론을 말해주는 것 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던 눈이 명확하게 볼 수 있도록 돕는다. 바로 성경적인 확실성과 깊이를 가지고 마음의 생각과 동기를 보는 것이다.
이 부록은 자료수집에 있어서 '감았던 눈을 뜨게 하는'기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우리는 모든 죄인들이 경험하고 있는 영적 소경됨의 본질을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구로서 우리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살펴볼 것이다.


영적 소경됨의 가면

육체적인 소경됨과 영적인 소경됨 사이의 차이점은 전자는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에 반해 후자는 때로 잘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육체적으로 소경된 사람은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영적으로 소경된 사람은 자신의 소경됨을 알아차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훌륭한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영적으로 소경됨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부분은 자신의 어두움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것이다.
영적 소경됨은 모든 죄인들과 모든 피상담자들의 현재의 상황이다. 그러나 스스로를 바라볼 때, 그 소경됨이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과 자신의 상황들을 바라 보는 관점에 대해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들은 로마서 1장에 나오는 실제로는 어리석은 자들이나 스스로는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자들과 같다. 그들은 그 마음의 생각이 실제로는 어리석고 공허한 것일 때에도 자신들이 잘 생각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영적 소경됨은 스스로 속이는 것이다. 이점은 사도요한이 라오디게아 교회에 편지를 쓸 때 말한 것과 같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 3:17).영적 소경됨은 자신을 마치 다른 문제인 것처럼 속이기 때문에 기만적인 것이 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감았던 눈을 뜨게 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려고 한다면 우리는 영적 소경됨이 보이고 있는 그 전형적인 가면을 구별해 내야 한다. 다음은 그런 기만적인 모습 중의 대표적인 것들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라는 가면

셀리아는 자신이 스스로를 잘 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의 삶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 어떤 책임이 있을 수 있다는 말에 불쾌해 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실제의 모습을 스스로 알 수 있게 되는 성경의 온전한 거울(약 1:22-25)에 대해서 단지 자기 자신이 보고자 하는 부분만 의도적으로 보려고 할 때에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가 만나는 피상담자들의 대부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왜곡된 관점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바라보는 거울은 놀이공원에 있는 오목하거나 볼록한 거울과 같다. 그들은 사실 자기 자신을 비추어보기는 했지만 그 보여지는 상은 왜곡되고 찌그러진 것이었다. 자기 자신을 보기는 하지만 그것은 실제 자신의 모습이 아닌 것이다.
바로 이것이 많은 피상담자들에게서 나타나는 문제이다. 그들의 자기 자신에 대한 개념은 다른 사람의 견해나 성공이라는 문화적인 가치관, 혹은 세속 철학이나 과거의 경험 등등(그 원인은 계속 더 열거될 수 있다)으로부터 온 변형거울을 사용함으로 인해 생겨진 것들이다. 피상담자들은 자신의 자아상이 왜곡되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는 있지만 그것을 종교적인 생각들이 축적된 백과사전이나 혹은 예배를 드릴 때 쓰여지는 책 정도로 사용해 왔을 뿐이다. 심지어는 선포되는 설교말씀을 들을 때 조차도 그는 그곳에서 드러나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는 해설되는 이야기와 원리들을 듣기는 하지만 그 구절들 속에서 비춰지고 있는 자기 자신은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은 피해자일 뿐이다'라는 가면

셀리아는 매우 선명하게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받은 여러가지 괴로움들을 회상해 낼 수 있었다. 그녀의 초점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어떻게 행동했는가에 맞추어져 있었다. 영적 소경됨이 어떻게 스스로를 피해자라고 속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비유로는 마태복음 7장에 나오는 '티와 들보'의 비유 보다 더 효과적인 것이 없다. 말 그대로 자기 자신에게는 너무나 커서 밖으로 삐져나온 들보를 가지고 다니면서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에 대해서는 못견뎌하는 사람을 한번 상상해 보라!  그는 자신이 가해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오직 피해자라는 생각에만 사로잡혀있다. 그래서 그가 원하는 변화라는 것은 자기 자신을 제외한 외부의 변화일 뿐이다.


'시련과 훈련 가운데 있다'는 가면

셀리아는 자기 자신과 스스로의 죄에 대해서 정확한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선택과 행동으로 인한 자연스러운 결과를 단지 '시련'이라고만 생각하였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7-8).
대부분의 피상담자들이 뿌린 대로 거둔다는 수확의 원리를 이해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결과적으로 얻게 된 것을 볼 때 자신들이 뿌린 씨앗의 수확물로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에 받지 않아도 되는 고통스런 시련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죄인으로서 인간은 창조자에 대한 경배와 섬김을 피조물을 경배하고 섬기는 것으로 바꾸려는 경향히 있기 때문에(롬 1:25), 창조자 하나님께서 각 상황에서 행하시는 좋은 것들을 잃어버리곤 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기대했던 피조물중에서 얻지 못한 것에 더 집착한다. 시련이란 그것이 내게  지금 현재 유익이 되는 것을 제시하기 때문에 내게 갈등의 시련이 된다. 하늘에서 내렸던 만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시련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런 것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의미하는 언약적인 하나님의 사랑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오직 애굽에서 먹던 다양한 맛과 비교를 하였기  때문이다!
영적 소경됨에 빠져 있는 피상담자들은 자신들의  행동으로 인한 결과를 '시련'이라고 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것들은 '시험'이라고 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구속적인 선을 위해 시련을 보내셨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자신들이 하나님앞에서 사랑을 받는 자요 그 모든 환경 속에서 그분의 아들의 형상을 나타내야 하는 자라는 것을 알지 못한채 자기 자신은 어려움 속에 버려진 자일 뿐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들에게 인생은 결코 공평하지 않다. 고통은 구속적인 목적을 갖고 있지 않으며 그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표시가 될 뿐이다.


'자신에겐 그것이 꼭 필요하다'는 가면

셀리아는 스스로를 도움이 필요한 자라고 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어떤 좋은 것도 누리지 못한 채 평생을 살아온 자라고 단정지었다. 때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만약 내가 ____만 가지고 있었다면, 나는 ____을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녀가 생각하는 필요라는 것은 구름과도 같이 그녀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문화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자신의 삶에 대한 이해는 전적으로 바로 그 필요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본질적으로 그녀가 자신의 삶의 문제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고전적인 인생에 대한 환상인 "만약 __했었다면"이라는 생각 속에 빠져 있었다.
셀리아가 보지 못했던 것은 자신의 필요라는 것은 사실은 죄의 비극적인 결과를 더욱 더 바라는 것이며 이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의 모습에서 멀어져서 오직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엡 2:3)"가 되게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녀가 필요하는 것은 지금 그녀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것 보다는 그녀가 어떠한 자인가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셀리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거부와 배반 보다는 그녀의 마음의 정욕에 대해서 더 많이 나타내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은 이전에 한번도 간절히 원했던 적이 없었던 바로 하나님 그분 자신이었다. 만약 당신이 정말 어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가 어떤 점에서 필요를 느끼고 있는가를 살펴보라. 그가 생각하는 가치는 바램이며, 그 바램은 욕구가 되고  그 욕구가 상담에서는 '필요'라고 표현되어 진다.
셀리아는 자신만의 우주에서는 그녀 자신이 그 중심의 태양이었다는 것과 모든 삶은 무엇이 가장 자신에게 이로울까를 생각하는 관점에서 이루어졌음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런 '필요의' 가치관을 경험하는 모든 인간관계 속으로 가지고 들어 갔고 그런 생각으로 모든 상황과 관계를 만들어 갔다는 사실에 완전히 무지하였다. 그녀는 그와 같은 은밀한 욕망을 품은 채로 매 순간의 상황을 주도했고 자신의 필요를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에게는 강한 비난과 분노로 반응하였다. 그녀는 자신이 그런 대우를 받는 것은 주변 사람들의 이기심과 불친절함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증거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런 일은 그녀 자신의 자기 중심적인 인생관을 보여주는 것 뿐이었다.


'자신은 지혜로운 상담을 받았다'는 가면

모든 피상담자들처럼 셀리아에게도 역시 주변에서 조언해 주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욥과 같이 그녀가 받은 많은 상담들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것들이 성경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셀리아는 잠깐 동안이지만 그들의 말을 통해서 위로를 얻을 수 있었다.
그녀 스스로가 상담을 받기 위해서 나를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종종 그녀는 주변 사람들에게서 주워들은 '지혜'를 도리어 내게 전해주곤 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단지 자신의 인생관에 대해서 동의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만을 언급하였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결정이 옳다는 것을 강변하였다. 자기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영적 소경됨을 지칭하는 또다른 성경에 나오는 용어는 "어리석은 자"이다. 셀리아가 받았던 '지혜로운' 상담은 사실은 어리석은 것이었다. 그것은 오직 그녀 자신에게만 지혜로운 것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의 삶의 실제 문제에 대해서는 무지하였기 때문이었다. 잠언은 어리석은 자는 "지혜를 사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잠17:16). 셀리아는 그녀가 사실은 자기의 관점을 지지해 주는 근거를 찾고 있었으면서도 겉으로는 지혜로운 상담을 찾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자신만의 통찰이 있다'는 가면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지만 셀리아도 역시 항상 자신의 인생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하고자 애를 쓰고 있었다. 그녀는 과거에 있었던 일과 그일에 대해서 했어야 하는 일에 관해서 이해하는 것을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여러가지 영역으로 조직화하기를 원했다. 그녀는 많은 시간을 들여 있었던 일들을 분석하면서 그 일이 매우 도움이 된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녀의 자신에 대한 탐구는 어떤 긍정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만약 내가 셀리아의 해석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간 그녀와의 상담은 그 자리에서 끝나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영적인 소경됨은 가끔씩은 정말 지혜로운 것처럼 스스로를 가장하기도 한다! 지적으로 확실하고 논리적으로도 정확하다는 것이 항상 지헤롭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진정한 지혜는 겸손으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스스로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완전히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진리를 추구하는 자가 되어야만 한다.  진정한 통찰이란 논리적이라는 것에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이라는 것에서 오는 것이다. 시편기자의 말을 한번 들어보라.

 주의 계명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이 나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증거를 묵상하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승하며
 주의 법도를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니이다 (시 119:98-100)

셀리아는 자신의 통찰이라는 것이 그녀가 처한 상황 보다는 그녀의 마음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에 무지하였다. 그녀의 통찰은 그녀의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한 이해를 왜곡시키는 그 마음의 욕구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그래서 그것은 대상을 분석하기 보다는 욕구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관점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신앙의 표현이 아니라 우상숭배하는 마음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셀리아는 그 어떤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왜냐하면 영적 소경됨이 통찰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치관의 가면

셀리아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계속 들으면서 그녀를 움직이는 것은 가장 중요한 그것이 아니라는 점을 확신하게 되었다. 여기서 다시한번 셀리아는 무지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상황을 판단하였고 그 판단에 따른 행동을 하였지만 그녀의 문제는 계속 되었다. 이것이 그녀를 더욱 좌절하게 만들었고 혼란스럽게 했다.
셀리아의 행동의 동기가 되었던 가치들은 전부 인간 관계와 관련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친구관계와 상호존중과 용납과 사랑받는 것을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보았고 거부나 소외, 그리고 그로 인해 생겨나는 낮은 자존감을 피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다. 그러나 그녀가 사람들과 그들의 반응에 신경을 쓰면 쓸수록 오히려 그들을 더 만족시키고자 하였고 이에 반해 그녀 자신에게는 더 큰 불만이 쌓여갔다. 그녀는 암묵적인 많은 요구 사항을 가지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유지했지만 그러나 그들이 그 요구 사항을 만족시키지 못할 때에 자신이 얼마나 그들을 비판적으로 대하며 용서하지 못했는지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마태복음 6장은 말하기를 우리가 귀중하게 여기는 것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할 것이고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는 것이 행동을 지배할 것이라고 하였다. 다른 말로 하면 나는 내게 귀중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얻고 유지하며 즐기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다.
셀리아의 문제는 그녀의 가치관에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을 사람들에게 좌우되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녀는 계속해서 좌절하고 실패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를 자신에게로 부르시는 하나님은 어떤 새로운 일을 행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분의 초점은 인간관계의 회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셀리아 자신에게 있었다. 그녀는 그분의 아들의 형상으로 변화받게 될 사람이었다.
피상담자가 때로 자신의 영적 소경됨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옳고 그름에 대한 열정적인 감각에 의해 가리워지기 때문이다. 수년동안 폭력적인 반응을 나타냄으로 가족들에게 아픔을 주어왔던 강퍅한 사람은 자신이 그들로부터 분리됨으로서 잃어버린 것들을 비로소 다시 보게 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자녀들을 만나볼 수 있는 권리와 자신이 산 집에서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는 상담가운데 계속 이렇게 이야기했다. "이건 옳지 않아요. 이건 공평하지 않다구요!" 그러나 그는 가족이 온전하게 회복되기 위해서 자신이 행해야 할 변화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하였다.
남편의 냉담함과 서먹서먹함으로 인해 힘들어하던 어떤 부인이 있었다. 그녀는 상담자가 자신의 남편이 자기를 귀중하게 여겨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그를 변화시켜주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녀는 남편이 자신을 멀리하게 만드는 끊임없는 비판적인 태도에 대해서는 무지하였다. 그러면서 오히려 상담자가 변화가 필요한 사람으로서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기 시작하자 불쾌하게 반응하였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 속에서 역사하기를 원하시는 영원히 가치있는 일들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지하였던 것이다.


신학적 지식의 가면

셀리아는 성경의 내용과 교리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었다. 내가 사용한 성경신학적 용어 중에서 그녀에게 생소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녀가 가진 신학적 지식들은 그녀에게 네 가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첫 번째, 그것은 삶에 대한 그의 이해에 일정 수준 이상의 자신감을 불어넣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생각과 행동은 그 교리적인 신념으로부터 나온다고 확신하였다. 두 번째 그것은 그녀의 성숙의 척도를 나타내고 있었다. 셀리아는 스스로가 성숙한 신앙인이라고 생각하였고 만약 어떤 사람이 기본적인 성경적인 가르침이 다시 필요한 것처럼 그녀를 대한다면 상당히 불쾌하게 생각하였다. 세 번재, 상담 과정 속에서 그녀의 지식은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은 태도를 갖게 만들었다. '나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벌써 그 모든 것을 실천해 보았다.' 네 번째, 그것은 그녀로 하여금 문제의 원인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럼으로써 닥친 어려움의 원인은 그녀 밖에서 찾아야만 하였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지식은 그녀 자신의 책임감과 죄에 대한 자책감을 흐리게 만들었다.
중요한 사실은 셀리아가 이미 알고 있던 신학을 자신의 모든 고통 속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적용할 수가 없었다는 점이다. 그녀는 지혜없는 여인이었고, 자신이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하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무지하였다. 영적인 성숙함은 매일의 삶 속에서 진리를 실천함으로부터 오는 것이지 머릿속에 그 지식을 집어 넣음으로 오는 것이 아니다(히 5:11-14). 그렇지만 셀리아는 자신을 담당하고 있는 기독교 상담자는 이미 자기가 알고 있는 것들을 계속 반복하고 있을 뿐이라고 확신하였다.
잘못된 질문을 제기하는 셀리아의 경향성은 이런 의미의 신학적인 근거로 무장되어 있었다. 그녀의 질문은 자신의 상황이나 하나님께 대한 더 큰 소망이나 혹은 변화를 위한 개인적인 목표 등에 대해서 더 큰 이해를 갖게 만드는 것이 전혀 아니었다. 여기에는 우리가 이후의 글에서 좀더 깊이 다루게 될 하나의 원리가 있다. 그것은 통찰력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올바른 대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올바른 질문을 하기 때문에 통찰이 있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올바른 질문을 하지 않는다면 결코 올바른 대답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셀리아는 끊임없이 논리적으로 막다른 골목에 이르는 상황에서 자신의 상황을 해석하려고 했기 때문에 소망을 잃어버리고 우울증에 시달리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여기 셀리아가 했던 잘못된 질문들의 예가 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나는 성경도 많이 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도와주시지 않았어요. 그분은 내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았다구요." 그리고 나서 이렇게 질문하였다. "하나님은 왜 나의 삶에서 역사하지 않으시지요?" 이것은 비성경적인 가정에 입각한 어리석은 질문이다. 이것은 결코 질문자를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해주지 못한다.
셀리아의 질문은 그녀를 두 가지 대답으로 인도하였다. 때로 그녀는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시지 않는 이유는 단지 그분이 자신을 사랑하시지 않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분은 그녀의 하찮은 삶에 대해서 걱정하시는 것보다 더 중요한 많은 일을 하셔야 하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로 그녀가 결론을 내린 것은 하나님은 그녀가 단지 비참한 죄인이기 때문에 그 죄에 대한 처벌로서 그녀의 삶에 역사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좋지 못한 질문에 대한 좋지 못한 대답은 역시 좋지 못한 열매를 맺게 만든다. 욥의 불성실한 세 친구처럼 셀리아는 인생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를 갖게 하는 자신의 신학적 지식으로부터 실제의 삶에 이르는 다리를 세우지 못했던 것이다.
셀리아의 질문을 다시 성경적으로 검토해 보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성경적인 전제로부터 다시 출발해야만 한다. 바로 하나님은 인간의 삶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신다는 것이다(시 46편; 롬 8:18-39). 왜 그분이 역사하시지 않는가를 묻는다는 것은 사실이 아닌 것을 전제로 하는 질문이다. 참된 결론은 잘못된 전제로부터 나올 수 없다. 더 좋은 질문을 하는 방법은 이렇게 묻는 것이다. "하나님은 내 삶에 구속적으로 역사하고 계신다. 그렇다면 그분이 행하시는 것은 무엇이며 왜 나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을 통해 우리는 성경적인 변화와 좋은 열매를 맺는 삶을 위한 더 큰 통찰에 이를 수 있다.

 
 개인적인 거룩이라는 가면
 
 셀리아가 거룩에 대한 성경적인 용어를 두드러지게 사용해서 말하지는 않았지만 엄밀히 말해서 그녀의 이야기는 이미 자신이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올바른 것을 원하였고 자신은 올바른 일을 했지만 왜 일이 이렇게 잘못되어 버렸는지는 알 수가 없다고 확신하였다. 개인적인 거룩에 대한 그녀의 믿음은 율법주의적인 자기 의로움에 근거하고 있었는데 사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 11:44)는 말씀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셀리아는 자신이 전형적인 바리새인이었다는 사실에 무지하였다. 바리새인처럼 그녀는 하나님의 율법을 그저 행할 수 있는 인간의 기준으로 축소시켜 버렸다. 그녀가 강조했던 것들은 그리스도에게 의지할 필요가 없게 만드는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마음에 대해서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 외면적 행동의 기준일 뿐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복음이 천국이나 지옥에 대한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의 삶에서 바로 지금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구속적 능력에 대해서는 별로 필요로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가 갖고 있었던 '의로움'이란 단지 다른 사람을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계속해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그런 것들을 이루었다는 데서 긍지를 느꼈지만 율법의 더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그저 무시해 버렸다. 그녀는 자신의 깨끗이 정리된 집과 그의 시간약속에 철저함과 모든 친구들의 생일을 기억하는 기억력과 많이 읽은 기독교 서적, 자신의 여유로운 경제적 형편, 그리고 기꺼이 자원하여 봉사하고자 하는 자세 등에서 스스로 자긍심을 가졌다. 하지만 그녀는 질투가 많았고 쉽게 화를 냈으며 남을 판단하고 스스로 자학하며 복수하고 관용을 베풀 줄을 알지 못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또한 바리새인들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로움은 그것이 진실로 의로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았다. 오히려 추하고 자존심만 강하게 하는 것이며 인간적인 자기 의로움일 뿐이었다. 이러한 종류의 의로움은 항상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를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는 것들을 무시해버리고 인간적인 행동만을 강조한다.
 어쩌면 이것은 영적인 소경됨의 중심점인지도 모른다. 그 본질 속에서 영적으로 소경된다는 것은 당신이 사실 전혀 의롭지 않은 때에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그에 대한 의무를 별로 중요하지 않게 만들어 버린다. 만약 내가 의로운 자라고 한다면(스스로의 생각에), 나는 더 이상 그리스도가 필요치 않고 변화를 할 필요도 없다. 이것은 누가복음 18장에서 성전에서 기도하던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 속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바리새인은 성전에서 서서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자신에겐 하나님이 필요치 않다고 말했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이 괜찮은 자라는 것과 죄인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자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주님 앞에서 자신의 의로운 행동을 일일이 열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동일하게 셀리아는 상담을 하러 와서는 자신이 괜찮은 자라는 생각에 내가 동의해 주기를 요구하면서 자신의 선한 행동을 하나하나 열거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의 중요한 문제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외면적인 행동만을 강조하면서 자신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 속은 '죽은 사람의 뼈'가 가득하였다.
 
 
 회개라는 가면
 
 셀리아는 일반적인 피상담자들과 마찬가지로 상담을 한다는 것은 회개의 행위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가 상담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들이 한 말을 고백으로 생각하고 상담실에 앉아있는 것 자체를 회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렇지만 셀리아에게는 상담이란 정말 고백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스스로 속죄하는 행위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나는 그런 속죄의 행위를 "개신교도의 죄사함"이라고 부른다. 피상담자는 고백하고 문제를 점검하고 자기 자신과 상황에 대한 지속적인 논의에 참여하고 몇 주동안 그렇게 한다면 사죄받고 정화되고 올바르게 된 느낌으로 상담을 마치게 된다. 피상담자들은 자기 자신을 회개하는 사람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상담은 하나님의 목표에 대한 주제를 다루지 않기 위한 하나의 도피수단이 되는 경우도 있다.
 분명 그녀의 삶은 회개의 열매를 맺지 않았다. 우선, 그녀는 자발적으로 순종하려는 자가 아니었다. 우리는 많은 횟수 동안 그녀의 죄악되고 비생산적인 행동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었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그 행동을 고집하였다. 그녀는 그것이 잘못이라는 직면을 받을 때에만 마지못해서 그렇다고 인정하였다. 하지만 그녀의 고백은 새롭게 변화된 삶으로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두 번째, 셀리아는 여전히 방어적이었다. 그녀는 자신에 대한 나의 성경적인 관찰에 대해 들을 때에는 항상 힘들어 하였다. 그녀는 오히려 내가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고 믿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의 편만 든다고 공격하였다. 세 번째 셀리아는 다른 사람에게서 배울 수 있을만한 마음을 갖지 못했다. 그녀가 스스로 자신은 성경에 대해 더 많이 알아야 하고 그것을 어떻게 자신의 삶에 적용시키는가도 역시 배워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신학과 성경구절에 대한 해석과 내가 그녀의 삶에 대해 성경적인 원리를 적용하는 것을 가지고 계속 논쟁하였다. 네 번째, 셀리아는 내준 상담과제를 할 때에 열정이나 통찰이나 혹은 그 과제의 목표가 되었던 변화는 전혀 없이 그저 형식적으로만 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셀리아는 중요한 것을 전혀 볼 수 가 없었다. 오히려 상담시간에 빠짐없이 출석하는 것과 개인적인 문제에 대해 소상하게 말하는 태도와 주어진 성경구절들을 꼼꼼히 연구해 오는 것으로서 그녀는 더욱 영적인 소경이 되었다. 불행히도 이 모든 것은(자신은 이것을 회개의 표시라고 생각하였지만) 그녀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던 쓰라림과 자기 의로움을 가리는 것이 되어버렸다.
 성경에서 회개는 삶에서 이전과 전혀 다른 획기적인 방식으로 나타나는 급격한 마음의 변화라고 나타난다. 마음이 변화되고 다른 방향으로 움직일 때에 삶도 역시 변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엄밀히 말해서 회개라고 볼 수는 없다. 많은 사람들은 속죄함을 얻기 위해서 상담을 하러 오기는 하지만 이러한 점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들은 자신이 행하는 일에 대한 지원과 격려를 원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기를 원하고 일련의 상담시간을 가진 다음에는 정말로 기분이 좀 좋아졌는지를 확인해 보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상담을 계속 받는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회개에 대한 강권적인 부르심에 대해서는 응답하지 않는다. 그들은 시편 139편에 나오는 시편기자처럼 기도하지는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 하소서 (시 139:23-24)

'상담을 받는다'는 것이 셀리아를 자신의 완고하고 회개하지 않는 마음에 더욱 무지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자신이 고백해야하는 모든 것을 고백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 자신을 회개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왜 내가 계속 상담을 받겠어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이다. 충격적으로 들리기도 하지만 영적 소경됨은 심지어 회개라는 가면을 뒤집어 쓰기도 하는 것이다!
영적 소경됨이 모든 죄인과 그들의 인생관에 미치는 심각한 영향력에 대해서 기억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우리의 자료수집은 피상담자가 보아야 할 것을 보게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우리는 영적으로 소경된 사람들은 그들의 어두움이 많은 가면들을 쓰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소경되었음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만 한다. 우리는 이러한 가면들을 구별해 내고 자기 자신의 모습이 실제로 무엇인지 피상담자가 눈을 떠서 볼 수 있도록 자료수집의 과정을 진행해야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감은 눈을 뜨게 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야 함과 또한 이것이 자료수집의 필수적인 기능임을 잊지 않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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