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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역동성] how people change 1장 번역

'성경적 변화의 역동성'이 폴 트립 교수님과 팀 레인 교수님에 의해서 책으로 나왔습니다. 그중 일부를 번역하게 되어서 그 내용을 실어 봅니다. 나중에 전체가 책으로 나오면 꼭 사서 보세요. 너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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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people change

1장 삶과 복음 사이의 괴리

그의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필은 단지 성경에만 능통한 것이 아니라 조직신학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는 또 이름만 대면 누구다 다 알 수 있는 유명한 신학자의 방대한 주석책들도 소장하고 있었다. 빌이 잘 알지 못하는 신학주석이나 성경내용이란 거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어떤 전혀 새로운 문제가 자리잡고 있었다. 만약 당신이 빌의 서재에서 나와서 그의 삶을 기록한 비디오를 보게 된다면 당신은 전혀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다.

필은 항상 자기 주변의 뭔가 잘못된 일들을 지적하기에 바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신학적으로는 현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초보자와 같았다. 아내인 엘리와의 결혼생활은 날마다 위태위태하였다. 그는 그러한 숨막힐 것 같은 인간관계의 문제를 만들어 내는 끝없는 갈등들을 깨닫거나 혹은 해결해 나갈 힘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았다. 이제는 다 성장한 자녀들과의 관계역시 소원하였고 그는 항상 친척들하고도 이런 저런 문제에 휘말리곤 하였다. 그는 자신의 일에서는 결코 만족을 몰랐고 30년동안 교회를 네 번이나 옮겨다녔다. 그가 자기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쓰는 시간은 다른 사람과의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하였다.

문제는 필의 진짜 생활을 아는 사람이 너무나 적다는 것이었다. 그와 엘리는 결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싸우지 않았고 별거를 한 적도 없으며 이혼얘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그들은 교회에 열심히 출석했으며 봉사하는 일에서도 열심이었다. 주일학교시간과 성경공부시간에 필은 성경적인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헌신된 모습으로 변했다. 그러나 집에서 그는 쉽게 짜증을 냈으며 때로는 자주 불같이 성을 냈다. 또한 집에서 보내는 대부분의 시간을 그는 컴퓨터를 하는데 사용하였다. 그와 엘리는 하루의 일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외에는 거의 말을 서로 하지 않았고 심지어 그런 이야기를 할 때에조차 그는 거칠고 퉁명스러웠다. 사랑이나 용납, 그리고 감사와 같은 단어들은 필의 삶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엘리는 교회에 대한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아무도 진심으로 필의 본모습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겉으로 나쁜 행동을 한 것은 아니었고 약물이나 성인물에 중독된 것도 아니었으며 자기 가족들을 돌아보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교회의 관심으로부터 피할 수 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필을 존경하고 있는지를 보면서 엘리는 남편이 성경공부를 인도해 달라는 부탁을 받거나 신학관련 강의를 해 달라고 요청을 받을 때마다 괴로워하였다. 그녀는 자기 자신이 더 신랄해지고 냉소적이 되는 것을 견딜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수단을 다 써보았지만 점차 무기력하게 변하고 있었다. 때로 엘리는 남편 없이 홀로 산다면 얼마나 행복할까하고 부엌에서 혼자 멍하니 생각하기도 하였다. 

마침내, 엘리는 필에게 더이상 이렇게 살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녀는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상담을 받으러 가자고 요구했다. 처음에 필은 완강히 거부하였지만 결국에는 한번 받아보자는데 합의하였다. 우리가 처음에 함께 만났을 때에 나는 그들이 서로 자신의 이야기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다. 그들의 이야기에는 뭔가 이상한 점이 있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처음에는 잘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서 상담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그들은 내게 장황한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거기에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아니 전혀 없었다. 그들은 정말 신학적으로 무장된 남편이었고 신앙적으로 독실한 아내였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말 그대로 너무나 세속적이었던 것이다!

필과 엘리는 복음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현격한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그들이 자기 집 한 가운데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채로 살아가는 것과 같았다. 그들은 매일 그 주위를 비켜서 돌아가면서 다닌다. 어떤 다툼이 생길 때마다 그 구멍은 더욱 커진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런 것이 있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다른 가정들은 그런 구멍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그 구멍이 빨리 보수되거나 메워져야 한다는 것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다. 더우기 필은 그 구멍을 어떻게 하면 완벽하게 메울 수 있는가에 대한 놀라운 '지침서'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사용하여 문제를 고치려 하지 않는다. 엘리는 그 구멍에서 뿜어져 나오는 먼지와 악취와 고열로 인해 괴로워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그에 대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이 구멍은 그들의 신앙심이었다.

나는 필과 엘리의 경우가 그들 뿐만 이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사실은 우리 중에 더 많은 필과 엘리와 같은 가정들이 있다고 확신한다. 때때로 복음에 대한 우리의 이해 속에는 커다란 격차가 존재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정체성과 현재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무너뜨린다. 이러한 격차는 우리 삶 속에서 매일의 인간관계를 파괴시키고 우리가 하는 모든 선택들과 다른 사람들을 섬기려고 하는 모든 노력들을 무색하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구멍이 없는 것처럼 스스로 외면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격차에 대한 이해

베드로후서 1장 3절부터 9절은 다른 본문들보다 더욱 분명하게 이러한 격차를 잘 보여주고 있다.

" 3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4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5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8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9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

븍음의 이해 차이에 대해 적절히 비유하고 있는 이 내용을 살펴보면, 9절에서 베드로는 하나님을 알고는 있지만 그의 삶은 믿음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들의 삶은 온유하고, 넘치도록 사람들을 사랑하고, 온화하고, 자연스러우며, 날마다 주님께 예배드리며, 세상의 것들에 대해 온전히 균형잡힌 관계를 유지하며, 지속적으로 영적성장을 이루는 것과는 관계가 멀다. 그 대신 이러한 신자들은 깨어진 인간관계와 알기는 하지만 하나님과 진심으로 동행하지는 않으며, 세상의 것들과 씨름하며, 개인적인 성장에서도 한계에 부딪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모습은 분명 열매를 거두는 것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또한 그것은 그들의 근본이 되고 있는 믿음과도 배치된다.

베드로의 말은 필과 엘리의 상태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들은 많은 부분에서 '게으르고 열매없는' 자들이었다. 갈등의 상처는 서로간의 존중을 잃어버리게 만들었고 그들 사이에는 어떤 신뢰나 상호간의 자발적인 애정이란 사라진지 오래가 되었다. 그들은 이웃들과도 잘 지내지 않았고 좋지 않은 모습으로 교회를 세 번이나 옮겼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일에 있어서도 그저 최소한의 성의와 노력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들의 신앙심은 진실한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마음이기 보다는 비현실적인 것이었고 그들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사명은 억지로 해야만 하는 의무였지 간절히 추구되는 기쁨의 노력은 아니었다. 그래서 필과 엘리가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미 오래 전에 물질적인 가치가 영적인 가치를 대치해 버렸다. 다른 어떤 것들보다도 더 심각한 것은 그들이 오랫동안 조금도 변함이 없는 상태였다는 점이다. 만약 당신이 십년 전에 서로에 대해서 내뱉던 원망들을 기록해 놓았다면 그 내용은 지금 그들이 하고 있는 논쟁 속에서도 고스란히 발견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게으르고 열매없는' 자들이 되었을까? 베드로는 9절에서 그에 대한 명확한 진단을 내리고 있다. 그들은 원시치 못하고 소경이 되었으며 자신들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됨을 잊어버렸다. 그들은 이 시대에 복음의 능력과 소망에 대해 소경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때-지금-그때'의 구조를 갖는다(그림 1.1을 보라). 먼저 과거의 '그때'가 있다. 내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고백할 때에 나의 죄는 완전히 용서함을 받는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서게 된다. 또한 미래의 '그때'가 있다. 그것은 주님과 영원히 살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며 죄와 갈등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이다. 교회는 복음의 두 가지 '그때'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아주 잘 설명해 왔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의 '지금 이곳'의 유익에 대해서는 미흡하거나 혹은 잘못 이해해 온 경향이 있다. 복음은 바로 지금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어떠한 차이를 만들어 내는가? 복음은 우리가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직장인으로서, 그리고 교회의 성도로서 살아가는 것을 어떻게 돕는가? 복음은 어려운 일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게 하며 어떠한 결정을 내리도록 돕는가? 복음은 우리의 삶의 의미와 목적과 정체성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복음은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일에 나를 어떻게 부르고 있는가?       

바로 '지금 이곳'에서 우리 대부분이 복음에 대한 무지를 경험한다. 우리의 시력은 더 급한 일이 가져다주는 재촉함과 성공에 대한 시급한 요청,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중독적인 매력, 우리 자신의 문제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저항, 그리고 우리가 잘못 오해하여 교제라고 부르는 교회안에서의 세속적인 인간관계 등에 의해 어두워져간다. 이러한 시력상실은 때로 복음을 사람들이 직면하는 삶의 구체적인 도전들에 적용시키지 못하는 설교 때문에도 더욱 가중된다. 사람들은 복음이 그들의 직장과 부엌과 학교, 침실, 마당, 그리고 그들의 차 안에 해당되는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그들은 복음이 그들 자신이 하고 있는 일과 하나님께서 하고 계시는 일 사이를 연결짓는 복음의 원리에 대해서 알아야만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의 이야기가 하나님의 더 큰 이야기 속에서 다시 재현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래야 복음의 정신을 가지고 매일매일을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세 가지 종류의 실명

우리 삶 속에서 생겨나는 '지금 바로 여기'라는 의식의 부재는 영적인 실명상태의 세 가지 형태를 만들어 낸다. 첫 번째는 자기 정체성의 상실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누구인지에 대한 복음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예를 들면 필은 훌륭한 신학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의 자기 정체성은 복음보다는 자기자신과 자신이 이룬 업적에 더 많이 근거하고 있었다. 이러한 복음의 정체성에 대한 결여는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첫 번째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속에 있는 죄성의 존재와 능력에 대해서 간과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죄의 그물에 자신들이 얼마나 쉽게 사로잡히는지를 깨닫지 못한다(갈 6:1). 그들은 모든 믿는 자의 마음 속에서 항상 일어나고 있는 전쟁의 본성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롬 7).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대치하는 것을 향해 얼마나 쉽게 달려가는지를 의식하지 않는다. 또한 자신들의 가장 큰 문제가 자기의 바깥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 속에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한다.

나는 십대 청소년들과의 상담을 통해서 복음에 대해 냉랭한 십대 청소년들의 주된 문제 중의 하나는 그들이 자신들에게 복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많은 부모들은 알게 모르게 자기 의로 뭉쳐진 작은 바리새인들은 키워왔던 것이다. 그들이 자기 자신들을 볼 때에 절박하게 복음을 필요로 하는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구원자에 대해서도 별로 감사하지 않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현상은 많은 부모들에게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많은 신자들은 또한 자신의 복음적인 정체성의 또 다른 측면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진 자들이라는 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죄사함과 새로운 성품만을 주신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신분도 주셨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것이 주는 모든 권한과 특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 각 사람은 나름대로의 정체성에 따라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복음적인 정체성이 혼란스럽다면 항상 어떤 형태로든지 전혀 다른 정체성을 가지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만약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는 것이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일들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나는 자연히 어떤 다른 정체성에 따라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우리가 때때로 이러한 영적인 실명상태에 있게 될 때에 정체성의 문제를 갖게 된다. 이혼갈등이나 우울증, 그리고 편부모 양육과 같은 일들은 심각한 일이기는 하지만 정체성의 문제는 아니다. 비록 우리가 하는 일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먹고 살기 위해 주신 중요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신분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의 정체성의 인식은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우리자신의 능력에 더 많이 근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일들 속에서 성공하는 것은 좋은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당신이 직업적인 성공을 당신이 누구인지를 설명하는데 사용한다면 당신은 항상 왜곡된 자아상을 가지게 될 것이다.
두 번째, 복음에서 보여주고 있는 '지금 여기'에 대한 인식의 차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비전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베드로가 말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받았다. 그는 여기서 왜 '생명'과 '경건'이라는 두 가지 단어를 사용하고 있을까? 두 번째 단어인 '경건'은 첫 번째 단어인 '생명'을 유효하게 만든다는 의미가 있다. 만약 베드로가 단순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에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다고 말했다면 우리는 손쉽게 그 앞에 '영원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구절은 때로 그렇게 해석되기도 한다. 대개 우리는 이것을 죽음 이전에 생명의 약속이기 보다는 죽음 이후에 찾아오는 생명의 약속이라고 이해하기가 쉬운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경건'에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다고 말했음을 감안할 때 우리는 그가 바로 현재의 삶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서 경건이란 바로 내가 그리스도께로 온 이후부터 그와 함께 본향으로 가기 전까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이다.

베드로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주시는 공급을 이해하지 않으면 현재에서 올바르게 살아갈 수가 없다고 말한다. 많은 신자들이 이러한 공급은 경건함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따르는 계명이나 원리, 약속들보다도 더욱 심오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심지어 성령의 감동이나 우리의 죄사함 보다도 우리 믿음에 대해서 훨씬 더 근본적인 것이다. 현재에서 이루어지는 경건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공급하심은 사실 그리스도 그 자신을 주신 것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자기 자신을 주셨고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닮아갈 수 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예수님은 임마누엘이 되시는데 그것은 단지 그분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사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실제로 그의 영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그분의 함께하심은 우리에게 우리가 되어야만 하는 모습과 행해야만 하는 일을 하기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신다.

그리스도의 거하심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불안에 떨면서 살아가게 된다. 그러면 어려운 일은 피하려고만 하고 쉽게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러나 분명한 자기 정체성과 주님의 공급하심은 우리에게 소망과 용기를 주어서 우리의 삶의 길에 찾아오는 갈등과 유혹에 당당히 맞서게 한다.

복음에 대한 이해의 격차가 가져오는 세 번째 형태의 영적소경됨은 하나님의 사역의 과정에 대한 무지이다. 신약이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우리 속에 시작하신 하나님의 일들의 마침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단순히 '나는 영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렀다'거나 혹은 '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다'는 삶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분은 우리가 끊임없는 사역과 지속적인 성장과 계속적인 고백과 회개의 삶을 살아가도록 부르셨다.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그분과 함께 영원히 살아가는 본향에 이를 때까지 지속되는 하나님의 흔들림없는 목표이다. 그분은 우리 속에 경건함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시고자 하는 모든 것을 행하실 것이다. 그분은 우리가 기쁨의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시지만 그러나 또한 우리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시기 위해 일시적인 즐거움 그 자체도 적절히 조절하실 것이다.
언제든지 우리는 어려움이나 시련 속에 거할 수 있고 그럴 때 우리는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졌거나 거부되었다고 생각하게 되기 쉽다. 이것은 우리가 현재의 하나님의 사역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단지 우리의 안위나 편안함만을 위해서 일하시지 않는다. 주님은 우리의 성장을 위해서 일하신다. 우리가 그분의 신실하심을 의심하게 되는 유혹에 빠지게 될 바로 그 때에 주님은 우리 속에 구속의 약속을 온전히 채워주신다. 결국에는 정말로 변화를 원하는 어떤 사람들만이 남게 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변화는 모든 사람을 위한 기준이고 하나님은 항상 이러한 사역이 우리 속에 완성되게 하시기 위해서 일하신다.


무엇이 그 격차를 줄이는가?

실생활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공백이건 영적인 공백이건 간에 그속에 공통으로 존재하는 한 가지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그것들이 결코 오랫동안 공백상태로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이다. 바닷가 모래 속의 공백은 금새 물로 채워질 것이다. 들판의 파여진 구멍은 나뭇가지와 나뭇잎으로 덮여질 것이다. 모든 공백은 항상 무엇인가로 채워지게 되어 있다.

우리 집에 있는 계단 밑에는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커다란 벽장이 하나 있다. 또한 그곳은 내 아내가 매우 신경을 많이 쓰는 곳이기도 하다. 매년 6개월 정도에 한 번씩 내 아내 루엘라는 이 벽장을 청소하기로 작정한다. 그리고는 그곳에 쳐 박아둔 것들을 내용물에 따라 분류하고 처음으로 바닥을 청소하면서 그곳을 완전히 비워놓는다. 그녀는 항상 말하기를 자신은 항상 모든 가족이 바로 이렇게 말끔히 정리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기를 원한다고 말하곤 한다. 나도 그 벽장이 그렇게 정리되어 있는 것이 좋기 때문에 별다른 반대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벽장은 항상 다시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 차버리게 된다. 우리 아이들도 이곳에 들어와서는 자신들이 왔다 갔다는 티를 내면서 잔뜩 여러 물건들을 쌓아 놓고 간다. 집에 소포가 오면 그 상자들은 이상하게도 영락없이 창고 안에 쌓이곤 한다. 모든 갈 곳 없는 '잡동사니'들은 죄다 그 창고 속에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선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창고문은 간신히 닫을 수 있을 정도가 되고 마침내 아내는 다시 그 창고를 향해 돌진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 속에서 복음에 대한 이해의 한계는 단지 텅 비어있는 정도로만 머무르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복음의 원리에 충실하고 그리스도를 온전히 닮고자 하며 늘 변화되고자 다짐하는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지 않는다면 그 이해의 한계라는 구멍은 다른 것들로 채워지고 말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아마 매우 그럴 듯하고 성경적이기까지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을 잃어버리게 만들 것이다.   

나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10장 5절 말씀에서 이러한 위선의 모습들을 언급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들을 좋아한다. 그는 그런 모습들을 '이론'이라고 말한다. 물론 모든 거짓말들이 이론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이론은 정말 그럴듯해 보이는 거짓말이다. 내가 여자 올림픽 대표선수였다고 말한다고 해보자. 그것은 거짓말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속임수가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너무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내가 양복을 입고 서류가방과 몇 가지 건축도면을 가지고 사무실에 방문했다고 해보자. 나는 아마 내가 건축회사의 계약담당자라고 생각하게끔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가장 위험한 이론들은 진실한 신앙심인 것처럼 스스로를 위장하지만 실은 복음의 핵심인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목표로 하는 삶을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다. 그것들은 진리 위에 근거를 두고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완전한 것이 아니다. 그 결과로 나오는 것은 단순히 표면적인 신앙심뿐이다. 우리가 우리를 점진적으로 변화시키시는 그리스도의 내주하시는 사역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때마다 그 공백은 마음 보다는 외면적인 것이 더욱 초점을 맞추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으로 채워질 것이다. 나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가라는 싸움이 우리 주변의 모든 삶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 싸움은 자꾸만 우리를 본질적인 핵심에서 벗어나 외면적인 모습으로 치우치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종류의 기독교적 외면화가 이러한 복음에 대한 이해의 격차를 메우고 있는가? 그것들은 모두 일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삶속에 있는 한 부분들이다. 각각은 전혀 다른 시간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이러한 설명을 통해서 여러분은 스스로를 한번 살펴보라. 당신도 역시 이미 알고 있는 복음과 삶 사이에서 커다란 이해의 격차를 가지고 있으며 그 격차는 당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방식에 따라서 채워지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인들의 외면주의: 복음의 이해에 대한 공백을 메워 나가는 것

형식주의

만약 당신이 교회의 연간행사에 대해서 궁금하다면 짐의 계획표를 들여다보기만 하면 된다. 어떤 모임이나 사역에서든지 그는 항상 성경을 가지고 그곳에 있었다. 그는 주일학교 교사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철저히 해 내었고 정기적으로 단기선교여행에도 참여하였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것을 기꺼이 베풀었고 교회 주변에 어떤 봉사할 일이 있을 때에는 스스로 자원해서 열심히 동참하였다. 하지만 짐의 세계와 하나님의 세계는 일치하지 않았다. 그의 모든 교회활동은 그의 마음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그가 살아가는가는 방식에 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형식주의를 질책하셨고(이사야 1장), 그리스도께서는 바리새인들의 형식주의를 비판하셨다(마 23;23-28).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이유는 형식주의는 우리가 자신의 삶과 자신의 시간, 그리고 자신의 계획을 자기 자신이 지배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형식주의는 우리의 영적인 상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게 하고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을 사라지게 만든다. 짐은 그의 교회에 그저 건강한 삶의 한 모습으로서만 출석하였을 뿐이다. 그는 다른 삶의 영역에 대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에게서 복음이란 모임에 참여하고 교회의 행사에 빠지지 않는 정도로만 국한되어 있었던 것이다.

율법주의

샐리는 그 자신이 해야 할 일들과 하지 말아야 할 일들에 대한 걸어다니는 사전이었다. 그녀는 모든 일에 대해서 일련의 법칙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들은 그녀가 자기 자신과 주변의 다른 모든 사람들을 평가하는 방법이기도 하였다. 그녀의 자녀들은 그녀의 율법주의가 짓누르는 무거운 중압감 속에서 살았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자신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기준들을 강요하시는 냉혈한 심판자였고 그 기준들을 지키지 못했을 때에는 가차없이 벌을 내리는 분이었다. 어느 누구의 사소한 잘못도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샐리의 집에서는 항상 즐거움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샐리는 자신의 행동규칙들을 준수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받았던 은혜에 대해서는 아무런 감사가 없었다.   

율법주의는 아무도 하나님의 기준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는 없다는 진리를 완전히 잃어버리게 만든다. 그러면서 샐리는 엄격하게 자신의 기준과 자존심과 욕망, 그리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마음 등이 드러나지 않게 만들었던 것이다. 율법주의는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죄성의 심각성을 무시하게 한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율법주의는 단순히 복음을 희석시키는 정도가 아니다. 그것은 복음을 전혀 다른 것으로 만들어버려서(갈라디아서를 보라), 구원은 우리가 세운 규칙들을 지킴으로써 얻는다고 말한다.


신비주의

크리스틴은 감정적인 경험사이를 위태롭게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그녀는 항상 영적이면서도 고차원적인 하나님과의 극적 체험을 갈망하고 있었다. 이런 이유때문에 그녀는 결코 한 교회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녀는 교회의 책임있는 일원이기보다는 끊임없이 새로운 경험을 추구하는 사람에 다 가까웠다. 그러나 그 극적인 경험 속에서 크리스틴의 믿음은 점차 약해지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 속의 절망감과 싸웠으며 때로는 자신이 정말 신자이기는 한 걸까라는 의심까지 하게 되었다. 강력한 영적경험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전혀 믿음과 새로운 성품 속에서 성장하고 있지 않았다.

성경적인 믿음은 사변적인 것이 아니다. 진정한 기독교 신앙이란 인간 감정의 모든 경험 속에서 더욱 성숙되어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복음을 하나님과의 극적이고 감정적인 경험정도로 국한 시킬 수는 없다.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강권하실 때 우리 마음과 삶 속의 대부분의 변화가 삶의 순간 순간 속에서 일어난다. 신비주의의 위험은 그리스도를 따르기 보다는 경험을 더 따르게 될 수 있다 라는 점이다. 그것은 복음을 감정적이면서 영적인 극적 경험 정도로 축소시켜 버린다.


실천주의

셜리는 '똑바로 살라'는 구호가 적힌 나무판을 들고 서 있으면서 왜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기에 참여하지 않는가를 의아하게 여겼다. 물론 셜리는 음란서적을 파는 서점에서 데모를 하는 것에 대해서나 다가오는 지역구의 선거에서 자신이 참여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의문들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정의하고 있다. 그녀의 끊임없는 주장은 이런 것이었다. "올바른 일을 위해서 행동하라. 그것이 필요한 어떤 장소에서나 어떤 시간에서든지 그렇게 행동하라." 시간과 열정과 돈을 올바른 일을 이루기 위해서 기꺼이 헌신하는 그녀의 태도에 대해서는 정말 존경할 만한 점이 있었다.

그러나 좀더 그녀의 삶을 들여다 보면 셜리의 믿음은 즐거이 그리스도께 헌신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올바른 것을 지키려는 것에 더 가까웠다. 이러한 종류의 기독교 실천주의의 초점은 항상 외면적인 악에 맞추어져 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현대 금욕주의의 한 형태를 띠는 것이 된다. 금욕주의자들은 본질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은 악한 세상이다. 그래서 악과 싸우는 길은 그것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다." 하지만 금욕주의는 결국 실패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벽안으로 들어와 있는 모든 수도사들의 마음 속에 있는 악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는데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밖에 있는 악이 우리 속에 있는 악보다 더 크다고 생각할 때마다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따르려는 노력은 우리 주변에 있는 악과 있는 힘을 다해서 싸우려고 하는 마음으로 대치되어 버릴 것이다. 우리를 우리 자신의 죄에서 구원해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는 주변 문화의 죄악됨으로부터 교회를 구원해 내겠다는 책임감으로 대치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숙이란 악으로부터 선을 보호해 내기 위해서 애쓰는 것이라는 의미로 한정될 것이다. 그리고 복음은 그저 그리스도인들의 문제제기 활동에 참여하는 것으로 국한되어 버린다.


성경주의

존은 성경과 신학에 있어서는 전문가였다. 그는 신학적인 해박한 지식을 통해서 희귀한 고전적인 기독교 저서를 섭렵하고 있었고 항상 최신 신학서적들을 구입하는데 열정을 쏟고 있었다. 그는 자주 '성경적인 세계관'이나 '신학적인 관점', 그리고 '그리스도인다운 사고방식'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하였다. 그는 성경을 사랑하였지만(그 자체로는 정말 좋은 것이다), 존의 삶 속에는 성경에 따라서 살지는 않는 면들이 있었다.

기독교 신학에 대한 그의 열정적인 연구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거만하고 비판적이었으며 자신은 가지고 있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잘 정리된 지식체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존은 끊임없이 담임목사님의 설교를 비판하였으며 교회사역에서는 다른 주일학교 교사들을 낙심시키곤 했다.
존의 신앙심 속에서 성도간의 교제, 헌신,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경배는 성경의 내용과 조직 신학의 원리를 숙지해야 한다는 의지로 뒤바뀌어 이었다. 그는 신학적으로는 전문가였지만 그의 기술적인 해석으로 정의를 내릴 수 있는 은혜에 따라서 살아가지는 못했다. 그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말씀을 연구하는 데에 투자하였지만 그 말씀을 통해 자신을 훈련시키지는 못했다. 성경주의 속에서는 복음은 성경적인 내용과 신학을 섭렵하는 것 정도로 국한되어버린다.


'심리주의'

젠에게는 항상 그녀를 챙겨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괴롭게 하는지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하곤 한다. 그리고 얼마나 교회가 그들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성토하곤 한다. 기독교 상담서적류의 열렬한 애독자이기도 한 그녀는 항상 누군가에게 새로 나온 책을 적극적으로 권하기도 한다. 때로 그녀는 기독교 신앙이란 진정한 도움과 치유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라고 강변한다. 그러나 그 신앙을 통해 스스로를 치유하지는 못하는 것 같아 보였다. 젠은 많은 시간 절망한 상태로 보냈고 가끔씩은 교회의 친교모임에 나와서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젠은 우리의 궁극적인 필요는 그리스도안에서만 채워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리스도가 구원자라기 보다는 심리치료자에 더 가깝다고 말하였다. 젠은 자신의 가장 궁극적인 필요는 무시당하고 거부당한 경험으로부터 나온다고 확신했고 그래서 자신은 구원보다는 치유가 더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요구가 많고 비판적이며 자기함몰적인지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복음이 말하는 문제를 자기 나름대로 재해석하고 있었다. 우리의 문제를 도덕적이고 영적 관계적인 것으로 보기 보다는(창조자를 섬기고 경배하기 보다는 이 세계의 것들을 더 경배하고 섬기는 우상숭배적인 마음의 결과인) 채워지지 못한 필요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당신이 당신 자신의 죄보다 자기 자신에게 행한 다른 사람들의 죄를 더욱 큰 문제라고 볼 때마다 당신은 그리스도를 구원자로서가 아니라 심리치료자로서만 따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기독교 신앙은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보다는 치유를 추구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복음은 감정적인 필요에 대한 치유책정도로 국한되어지는 것이다.


'관계주의'

조지는 그가 새롭게 교회에 나가게 되면서 알게 된 성도간의 나눔에 대해서 매우 감사하게 생각하였다. 그것은 이전에 경험했던 어떤 친구관계와도 달랐다. 그는 자신이 참여하게 된 새로운 기독교 공동체로 인해 커다란 기쁨을 누렸고 그로 인해 더 많은 다른 신자들과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조지는 자신이 소속된 20대로 이루어진 청년 성경공부 모임을 사랑했지만 그는 특별히 그 이후에 사람들과 함께 밖으로 나가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는 수련회와 야외캠프와 그리고 단기선교 등을 사랑했다. 그의 생애에 처음으로 조지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느꼈으며 누군가와 긴밀히 연결되어있음을 경험하였다.

조지의 문제는 그의 가장 친한 친구들 중의 하나가 다른 주로 이사를 하고 또 다른 친구는 결혼을 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때부터 그의 교회에는 새로운 목사님이 부임을 했는데 그분은 미혼 청년들에 대한 투자와 관심을 좀 줄이기로 결정하였다. 그 교회에서의 소그룹은 새로 조직되었는데 조지는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는 나이든 기혼성도들과의 모임에 갇혀져 버렸다고 생각되었다. 교회는 더이상 이전과 같은 곳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성경공부 모임에 나가는 것을 그만 두었다. 오래지 않아 주일에 교회 나가는 것도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교회에 가는 것은 다른 사람의 집에 식사초대를 받아 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조지가 깨닫지는 못했지만 사실 교회에서의 교제나 나눔이나 돌봄이나 어떤 위치를 갖는 것이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마음을 몰아내고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해 버렸다. 교회는 그의 영적인 사교모임으로 전락해 버렸고 그 모임이 깨어지기 시작했을 때 그는 계속 교회에 나갈 필요성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조지에게 있어서 성도간의 교제가 주는 은혜가 그에게 자아정체성과 삶의 목적과 소망을 주시는 분인 그리스도를 대치해 버렸던 것이다. 아울러 복음은 성도간의 교제를 이루게 하는 기능 정도로 축소되어 버렸다.


이러한 변질이 그토록 유혹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고린도후서 10장 5절 말씀에서 바울은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스스로 높아진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러한 가장은 속이는 거짓말이고 정말로 그럴듯한 진리처럼 보여진다는 점을 잊지 말라. 그리스도인인 우리를 사로잡는 거짓말은 기독교 신앙의 기준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우리에게 잘 들어맞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포스트모더니즘과 성적타락은 우리 시대에 교회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이 아닌 것 같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복음을 이해하고 있느냐에 대한 미묘한 변화로부터 흘러나오는 사소한 거짓말들이 가져오는 더 심각한 위험에 처해있다. 우리는 진리를 완전히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근본적으로는 성경에 나와있는 복음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것을 재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복음에 대한 재해석은 일순간에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교회내의 신학적인 공개토론장에서조차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재해석은 교회에서의 성도의 교제와 그들의 삶과 목회사역이라는 실제적인 영역 속에 있는 경미한 단계의 변화 속에서 일어난다. 그리스도만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은 기독교적인 사회참여와 감정적인 체험주의와 기독교인간의 교제, 혹은 그 어떤 다른 것들로 대치되어 버리고 어느 누구도 복음을 의식적으로 재해석하거나 잊어버리는 것도 아니면서 이런 일들이 진행된다.
우리가 살펴본 모든 종류의 어떤 '주의'는 그것들이 복음의 한 부분만을 강조하기 때문에 매우 매력적으로 보인다. 복음은 정말로 우리가 경건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예배를 위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서로 모여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특정한 시간에 어떤 특별한 방법으로 우리를 만나주실 것이다. 복음은 우리가 선을 추구하고 진리를 사랑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일에 대해서 세상에 영향을 끼쳐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슬픔 속에서 우리를 친히 만나 위로하시는 위로의 하나님이시다. 또한 우리는 교회에서의 성도의 교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만 한다.

우리가 복음을 이러한 요소 중의 어떤 한 가지로 국한시킬 때에 위험성이 생겨난다. 내가 그렇게 할 때마다 나의 신앙심은 더 이상 날마다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 겸손한 순종과 그분의 은혜를 간절하게 바라는 마음을 통해 자극을 받지 않게 된다. 그 대신 이러한 간절한 바램을 이루는 도구가 되어야 하는 일들이 목표가 되어 버린다. 예를 들면 복음의 진리를 이해하고자 하는 목표는 그리스도와의 더 깊은 관계를 맺어야 이루어진다. 하지만 신학적 지식이 그 목표가 되면 그리스도는 사라져버리고 만다.

이러한 '주의가 그토록 매력적인 또 다른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어떤 점에서 각각의 '주의'는 우리가 숨길 수 없는 영적인 문제를 자극한다. 첫 번째로 그것들은 우리의 '자기의'를 불러 일으킨다. 어떤 사람도 우리가 복음이 말하는 대로 우리 자신이 얼마나 악한 자들인지에 대해서 생각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그저 부분적인 신학적인 이해가 더 필요하거나 아니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수준에 맞추기 위해서 좀더 열심히 교회에 나오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를 더 좋아한다.  하지만 복음은 어떤 신학적 체계나 신앙활동도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지는 못한다고 말한다. 우리 죄는 너무 커서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사역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주의'는 또한 우리의 이기심을 자극한다. 죄인인 우리들은 우주의 중심에 있게 되기를 더 좋아한다. 우리는 자신이 모든 계획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사람이 되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복음은 진정으로 살고자 하는 유일한 길은 먼저 죽는 길이며 애써 살려고 하는 자들은 결국에는 죽음으로써 끝이 나게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복음이 나에게 가장 매력적이고 편안해보이는 어떤 '주의'를 선택할 수 있는 목록의 집합체 정도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어떤 개인적인 희생없이 그리고 내 자신이 그 모든 일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전혀 변화됨 없이 기독교 복음에 열정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주의'는 우리의 상황주의를 자극시킨다. 우리는 우리 밖에 있는 죄는 우리 안에 있는 죄보다도 더 위험하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바로 남편이 자기 아내에 대해 매정하게 대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없으며 아내가 남편에 대해서 한탄하는 것을 용인할 수 없으며 자녀들이 부모의 경제적인 실패에 대해서 반항하는 것을 당연시 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기가 어려운 이유이다.
우리가 사실 우리의 상태가 얼마나 절박한 것인지를 잊어버릴 때 신앙적인 활동이 그리스도와 그분의 은혜에 온 마음을 다해 의지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복음이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거하심으로 말미암아 생길 것이라고 약속하는 마음과 삶의 변화를 위해 애를 쓰기 보다는 그저 세상을 변화시킨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해서 더욱 몰입하게 된다.

이와 같은 일련의 '주의'는 계속해서 우리의 '독립심'을 자극한다. 우리는 죄가 얼마나 우리를 약하고 눈멀고 불안정한 상태로 만들었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날마다 지혜와 훈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는 오히려 우리 자신이 충분히 자립적이라는 거짓된 속삭임을 더 좋아한다. 물론,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눈멀고 어리석음은 기가 막히게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기준에서 바로 우리는 예외라고 생각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를 도움이 필요하고 연약한 사람이라고 보는 것은 매우 불편한 일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정말 그러한 자들이고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 삶의 유일한 해답이 되시는 이유가 된다.   

진리를 배우는 것, 그리고 교회 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온전치 못한 시각으로 바라볼 때에 당신에게 오히려 당신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왜곡된 관점을 가져다 줄 수 있다. 교리에 대한 지식은 기독교인의 인격적인 성숙과 죄의 유혹을 이겨내는 것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기독교적인 문제제기에 참여하는 것이 바로 동일하게 나의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죄와의 싸움을 희석시키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당신이 자신은 죄인이라는 것을 잊어버리는 한, 당신은 그 수준 속에서 그리스도를 향한 당신의 날마다의 필요를 망각할 것이고 변화에 대한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그의 몸인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도의 교제의 필요성을 잊어버릴 것이다.

우리 모두는 다 어느 수준에서든지 그리스도가 우리의 본질이고 의미이며 목표이고 소망이자 푯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자기의'는 사라지기 어렵다. 우리는 세계의 중심이 되기를 원하고 우리가 영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자들이라기 보다는 더욱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자들이라고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좀더 편한 요소로 국한시키려는 경향이 있지만 그 어떤 것들도 그리스도안에서 발견되는 은혜의 말씀에 합당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이 그 공백을 메울 수 있는가?

내가 복음이 무엇인지를 정말로 이해하기까지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것은 참으로 믿기 힘든 일이다. 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처럼 나의 죄는 사함을 받았고(과거의 죄) 나는 그리스도와 영생을 보낼 것(미래의 은혜)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의 현재적인 사역의 유익에 대한 간절한 필요성에 대해서는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현재의 은혜). 나의 외면적인 믿음은 복음의 현재적인 능력으로 채워져야 했다. 하지만 그것은 죽음이후의 삶에 대한 그리스도의 약속이라고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죽기 전에 삶에 대한 그분의 약속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오늘날 우리의 마음 속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이 책은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로 인해서 우리의 것이 된 죄사함의 은혜에 영광을 돌리는 책이다. 그리고 그 바라보는 초점을 영원한 세계의 소망에 대해서 둔다. 그렇지만 이 책의 우선적인 초점은 바로 현재의 오늘의 문제에 대한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우리를 성장시키시고 변화시키시는가? 지난 화요일 밤 아내와 심하게 다투었던 일을 도우시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는 내게 어떠한 은혜를 공급해 주시는가? 절망감이나 두려움과 싸우고 있는 한 사람의 삶 속에 주님의 은혜는 어떠한 영향을 미치시는가? 자녀를 키우는 일이나 혹은 직장일로 인해 심한 압박을 받고 있는 나를 도우시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어떠한 은혜를 베푸시는가? 탐욕이나 두려움 혹은 물질에 대한 욕심과 씨름하고 있는 나를 위해서 그분께서 마련하신 새로운 소망은 무엇인가? 회개와 변화가 실생활에서 일어날 때 그 모습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우리는 왜 다른 여러 가지 죄보다는 유독 한 가지 영역의 죄에 대해서 그토록 고군분투하는가? 그것도 왜 우리가 절대로 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일을 하게 되면서 그렇게 갈등하는가?

이러한 실제적인 삶 속의 여러 가지 의문점들이 바로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우리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이 당신이 살아가고 있는 삶 속의 가장 구체적인 현장에 적용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을 왜 하고 있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알 수 있다고 믿는다. 당신은 삶속에서 변화가 필요한 부분이 어디이며 그 변화는 어떠한 모습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분명한 이해를 할 수 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현재 하고 계시는 일이 무엇이며 당신이 어떻게 그 일부분이 될 수 있는지를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당신에게 한마디 충고를 해두려고 한다. 이 책에는 별다른 새로운 것이 없다. 아무런 비밀도 없고 마술과 같은 원리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당신이 이미 알고 있지만 그러나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거나 실생활에서 깨닫지 못하는 것을 당신에게 말해주게 된 것을 큰 기쁨으로 생각한다. 우리의 목표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복음의 오래되고 익숙한 이야기를 당신의 마음과 삶속에 들려주는 것이고 지금까지 그 이야기는 우리에게 마음과 삶을 바꾸게 만드는 능력이 되어 왔다. 때로 우리가 믿는다고 말하는 신학과 날마다 우리가 씨름하는 삶 사이에는 커다란 이해의 차이가 있었다. 이 책의 목표는 그 차이에 다리를 놓는 것이다.



다섯 가지 복음의 관점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의 복음의 관점은 앞으로 이 책에서 다루게 될 내용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다.

 우리의 죄의 본질과 심각성

일반적으로 죄의 교리는 당신이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교리라고 말하여진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사실 그것을 가능한 축소시키는 경향이 있다. 나의 결혼생활 초기에 내 아내 루엘라는 그녀를 사랑하는 방법에 있어서 나의 부족한 점들을 부드럽게 지적해주곤 하였다. 그녀는 극도로 비판적이 되거나 하지 않았다. 그녀는 내 마음 속에 있는 잘못된 태도 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는 죄의 실제적인 영역에 대해서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녀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녀가 분노를 터트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내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었을 때 내가 얼마나 악한 상태였는가는 정말 도저히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나는 과거를 돌아보았고 내가 얼마나 자기의가 강했는지를 깨달으며 몸서리를 쳤다. 자기의는 당신에게 있는 가장 열정적인 자기변호의 수단이다. 스스로를 변호해야만 하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교회에 있는 95퍼센트의 여성들은 다 나랑 결혼하고 싶어 할거야!"(이 말이 겸손하게 들리는가?) 그러자 루엘라는 웃으면서 자기는 나머지 5퍼센트에 속해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 때 그 교회의 목사였다. 정기적으로 부부들을 상담하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원하시는 사랑이 넘치는 연합에 방해가 되는 죄를 다룰 수 있도록 돕고 있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죄를 깨닫고 고백하도록 돕는 일에 일가견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이 사실 절박한 죄였다는 것을 쉽게 믿으려 하지 않았다. 아마도 나는 나의 신학적 지식과 목회적인 기술에 의해 눈이 가리워져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그 이유가 무엇이었든지 한 가지는 분명했다. 바로 내가 누구인지를 잊어버렸다는 것이고 루엘라가 나에 대해서 그렇게 형편없는 평가를 내리는 것에 대해서 화가 났다는 것이다!

이일이 나 혼자에게만 해당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넘쳐나는 죄악성을 인정하는 일에 대한 씨름은 그리스도의 몸된 모든 교회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전적타락의 교리를 믿고 있다. 하지만 우리 자신의 죄에 대해 다루기 시작할 때에는 스스로를 자기의라는 비단천으로 두르고서 강하게 저항하기 시작한다.

성경은 이러한 자기의에 대해서 명확하고도 권능있는 말씀을 통해서 강한 도전을 던지고 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죄의 영향력은 모든 생각과 동기와 욕구와 말과 행동에 미쳐서 그 모든 것들을 다 뒤틀어버린다. 이러한 마음의 병은 우리 모두를 병들게 하고 그 결과는 정말 참담하다.

왜 이러한 관점이 그토록 중요한 것일까? 오직 당신이 복음의 슬픈 소식을 받아들일 때만이 복음의 기쁜 소식이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복음의 은혜, 재건, 회복, 용서, 긍휼, 인내, 능력, 치유, 그리고 소망은 모두 죄인들을 위한 것이다. 그것들은 당신이 그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이 절망적인 것임을 깨달을 때에만이 당신에게 의미가 있게 된다.


마음의 중심

일반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대개 죄를 행동에 대한 것으로 정의를 내린다. 예를 들면 대부분의 기독교 부모들의 목표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 자녀들이 올바른 일을 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자녀들의 행동을 바로잡고 인도하기 위해서 모든 종류의 관계적이면서 동기유발적이고 교육적인 체계들을 세워 놓았다. 이러한 체계들은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만약 이러한 것들이 자녀들의 불순종과 죄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면 당신은 죄에 대해서 그들을 무방비상태로 놓아두는 것이고 언젠가 그들은 집을 떠나고 체계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행동에 대한 힘겨운 싸움 이면에는 전혀 다른 더욱 근본적인 싸움이 있는데 그것은 마음의 생각과 동기에 대한 싸움이다.

마음은 본질적이면서도 필수적인 부분이다. 성경이 속사람에 대해서 일컫는 모든 형태의 표현들이(생각, 감정, 정신, 영혼, 의지, 등등) 모두 마음이라는 이 한 단어로 축약된다. 마음은 인간의 모든 존재를 좌지우지하는 운전대와 같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들이 우리 마음이 원하는 바에 따라서 형성되고 조절된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분명하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원하신다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오직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을 가지고 계실 때만이 그분은 당신을 소유하고 계시는 것이다. 우리가 계속해서 타락한 이 세상과 우리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죄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는 한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우리 마음 속에 존재하고 있는 죄이다. 그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적인 메시지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킴으로써 우리의 삶을 바꾸신다는 것인 이유이다. 

지속적인 변화는 항상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온다. 이것은 성경 속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고 있는 주제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것의 심오한 의미를 놓치고 있다. 우리는 잠언 4장 23절의 깊은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그리스도의 현재적인 유익들
 
그리스도인들이 갖는 소망은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실제적인 원리들을 가지고 있는 구원에 관계된 체계보다 더 큰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은 한 분,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분은 모든 성경적인 원리 이면에 있는 온전한 지혜이시며 우리가 따라 살아야 하는 진정한 능력이 되신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오늘도 거하시기 때문에,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모든 일들을 주관하고 계시기 때문에(엡 2:22-23), 그리고 그분이 지금도 그분의 발아래 모든 원수들을 누르고 계시기 때문에(고전 15:25-28), 우리는 용기와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

우리의 소망은 신학적인 지식이나 교회에서의 경험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들에 대해서 감사한다. 하지만 사실은 오직 한 가지 소망만을 붙들고 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이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바로 이 순간 이곳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얻는다. 바울의 말은 이점을 너무나 잘 보여준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성장과 변화를 위한 하나님의 부르심

어떤 지속적인 흐름에 따라 계속 움직이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부르심을 받았고 언젠가는 그분과 함께 영원에 거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동안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우리가 그리스도께로 온 그때부터 우리가 그분과 함께 집으로 가는 그때까지 하나님은 우리를 변화로 부르신다. 우리는 그분의 은혜로 변화되어졌고 그분의 은혜에 따라 변화되어지고 있으며 그분의 은혜에 의해 앞으로도 변화되어질 것이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그 변화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더 나은 결혼생활이나 잘 교육받은 자녀들, 직업적인 성공, 혹은 몇 가지 거슬리는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 그 이상이다. 하나님의 목표는 우리가 실제로 그분을 닮게 되는 것이다. 그분은 단지 당신이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피할 수 있게 되기만을 원하시지 않는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지옥을 피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정말로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것은 사실이다!) 그분의 목표는 죄의 종노릇하던 데서 벗어나고 자기 자신에게 얽매이는 것도 자유로워지며 우리의 순간순간의 우상숭배도 버려서 진실로 그분의 형상을 입게 되는 것이다!


베드로는 이러한 변화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벧후 1:4).


회개의 믿음의 삶의 방식

하나님은 그분의 은혜로 당신에게 축복을 주셨다. 그분의 함께 하심으로 당신에게 재능을 주셨다. 그분의 능력으로 당신을 강하게 하셨다. 그리고 당신을 그분의 영원한 사랑의 대상으로 삼아주셨다. 우리가 그분께 속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계획을 위해 살아간다. 그리고 만약 변화가 그분의 계획이라면 그 다음에 이어지는 회개와 믿음은 우리가 그 일로 부르심을 받은 삶의 방식이다.

은퇴가 가까울 무렵 마이클 조던은 경기 전에 연습하기 위해서 왜 그렇게 일찍 오는지, 그것도 유명선수가 되기 전부터 왜 그렇게 했는지에 대해 질문을 받았다. 그는 이미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농구선수라고 불려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골성공률은 그저 50퍼센트를 갓 넘길 뿐이었다고 대답했다. 그말은 그의 선수생활동안 그가 성공한 만큼이나 실패도 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자신에게 성장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한 연습을 지속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항상 고백해야할 새로운 죄가 있고 물리쳐야 하는 새로운 대적들이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변화에 대한 하나님의 사역을 아예 삶의 한 방식으로 삼아버리는 것이고 그럴 때 우리는 이를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게 된다. "11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12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13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딛 2:11-13)



찬양과 경배

이 책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설명한 것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이것은 우리 주님과 그분의 날마다 은혜 베푸심에 대한 찬양이다. 우리는 우리와 함께 그 은혜를 찬양하는 일에 당신을 초대한다. 그 은혜는 단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의 가장 은밀하고 어두운 부분부터 가장 사소한 행동과 의미없이 내뱉는 모든 말까지 변화시켜 주시는 은혜이다.


필독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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