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4방법론] 단행본,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사람들(Instruments in the redeemer's hand)" 서문, 1장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사람들

-변화가 필요한 자들을 돕고자 하는 자들에게 필요한 것들-


폴 데이비드 트립



먼저 길을 인도해 준 형 테드 트립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차례>

표 목차

서문

1장 최고의 소식: 아침에 일어나야 하는 이유
2장 구속주의 손에 잡힌 바 되어
3장 우리는 정말로 도움이 필요한가?
4장 마음이 목표이다.
5장 마음의 갈등을 이해하기.
6장 놀라운 상담자이신 주님을 따르라
7장 그들의 세계에 들어감으로써 관계를 만들기
8장 고통을 깨달음으로서 관계를 세우기
9장 사람을 알아가기
10장 변화가 필요한 곳을 발견하라
11장 사랑 안에서 진실을 말해야 하는 이유
12장 사랑 안에서 진실을 말하기 위한 과정
13장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기
14장 그리스도 안의 정체성을 심어주고 책임의식을 갖게 하기

부록

1. 닫혔던 눈을 뜨게 하기 - 자료수집에 대한 새로운 관점
2. 상담자가 자료 수집 과정을 통해 얻어야 하는 것
3. 자료수집을 위한 전략
4. 과제로 이어지는 교리
5. 과제와 연관된 상담의 네 가지 측면

각주
참고성경구절 (생략)



표 목차

6.1 변화를 위한 도구가 되어가기
7.1 사역을 위한 관계형성: 구원받음을 우리의 모범으로 삼음
7.2 사랑으로 맺어지는 사역관계 속의 네 가지 요소들
8.1 그리스도와 함께 괴로움을 감수하는 자들 (히브리서 2:10-11)
10.1 한 사람을 성경적으로 이해하는 방법
11.1 균형잡힌 복음의 관점
13.1 책임감을 다시 깨닫게 함

서문

하나님께서 교회에 대해서 부여하신 직무는 매우 놀라우면서 또한 온전하다. 그것은 주님이 열정적인 사랑을 가지고 계시며 완전한 계획을 이루신다는 뜻에서 놀라운 것이다. 그분이 자신의 백성들에게 대해서 행하시는 역사하심은 결코 실패하지 않으며 온전해질 때까지 계속되어진다. 뿐만 아니라 그 사역은 ‘주님의 모든 백성들에 의해서, 모든 시간 속에서 항상 실천되어진다’는 원리를 따른다는 뜻에서 온전한 것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만약 하나님께서 잘 훈련되고 학식 있는 전문가의 손으로 자신들을 성결케 하신다면 기뻐할 것이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게 하는 것은 성경적인 모델이 아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그분의 교회의 모든 부분들이 성실하게 참여하는 사역을 통해서 그분의 교회 전체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충만한 성숙함으로 자라가게 되는 것이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바로 이러한 ‘모든 사람에 의한, 매일의’ 사역활동을 위해서 훈련시키고 활용하기 위해서 은사를 받고 임무를 부여받으며 각종 직분을 맡게 된다.
이러한 성경적인 모형의 관점은 명료하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에게로 우리를 부르실 때에 우리가 섬기는 종이 되도록 부르신다는 것이다. 주님은 바로 그분의 구원의 손을 통해 사역하는 도구가 되도록 우리를 부르신다. 그분의 모든 자녀들은 이 사역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사역이 제공하는 매일 매일의 돌봄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있다. 이러한 필요는 우리의 성화가 영광 중에서 완전해질 때까지 계속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을 어떻게 사용하시는지, 그들 자신들이 도움이 필요한 자들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동일한 종류의 변화를 가져다주기 위한 도구로서 어떻게 사역하는지를 보여준다. 이 책의 목표는 단지 사람들의 삶이 그들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고받을 때 변화하게 된다는 것을 보이는 것만은 아니다. 더 나아가서 지금 교회에 있는 문화를 변화시킬 수 있도록 돕기 위한 것이다.
나는 오늘날의 교회가 헌신된 몇몇의 성도들보다도 더 많은 일반 성도들을 주된 관심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확신한다. 분명한 것은 조와 셀리아는 제자훈련이나 집사훈련과 같은 특별한 교회활동에 참여하게 되었지만 이것은 신약에서 말하는 ‘모든 사람들에 의한, 매일의’ 사역활동에 비한다면 턱없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교회론적인 면에서 성도를 단지 대중으로만 보는 경향은 교회의 기능을 심각하게 약화시켰다. 대부분의 경우 교회는 주로 출석하여 예배를 드리는 모임이나 신분상 속해있는 공동체만을 의미하곤 하였다. 우리는 이것이 우리의 모든 삶을 형성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잘 실천하고 있는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런데 이점을 한번 생각해보라.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일반적인 지역교회의 모든 사역적 필요를 충분히 채워줄 수 있는 사역자를 모시기란 결코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전문 사역자에게 충분한 사례를 지급하고 기용하는 현대 복음주의적인 교회의 분위기는 하나님께서 교회의 모든 성도들에게 부여하신 사역에의 동참이라는 모범을 약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바로 그에 대한 고민 속에서 쓰여졌다.
나는 항상 이와 같은 저술작업이 마무리에 이르게 될 때마다 내가 얼마나 큰 특권을 누리고 있는가를 새삼스럽게 깨닫곤 한다. 글쓰기에 전념하기 위해서 평상시의 사역의 책임을 6개월 동안 내려놓을 수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선물이었다. 나는 CCEF의 교수이면서 동시에 책임자인 존 버틀러와 이 사역을 가능할 수 있도록 헌신적으로 도와주었던 하나님의 모든 동역자들에게 감사를 드리고 싶다. 또한 수 루츠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빠트릴 수 없다. 그녀의 놀라운 편집 능력은 너무나 뛰어나다. 나의 생각이 구체적인 문장으로 나타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에 대해 감사한다. 그리고 이 책을 더 유익하게 만들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마다 주었던 ‘조언과 충고’에 대해서도 진심으로 감사한다.
끝으로 당신이 이 책을 읽을 때에 어떤 분들은 왜 이 책이 각 장별로 학습안내서를 첨부하지 않았는지를 의아하게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그 이유는 이 책은 지역 교회를 위한 훈련교재로 개발되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변화의 도구가 되는 학습과정’은 지도자를 위한 안내서와 학습자를 위한 교재가 될 수 있는 열 두 개의 단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단원은 세 분야에 대한 초점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는 당신이 알아야 하는 개념이고, 두 번째는 그러한 개념을 실제적으로 어떻게 적용하는가에 대한 방법이며, 세 번째는 그것들이 당신의 관계와 사역에 있어서 하나의 목표를 형성할 수 있게 하는 법이다.
여기서 말한 ‘변화의 도구가 되는 학습과정’이란 ‘마음을 변화시키며, 삶을 변화시키는 과정’의 첫 번째 단계이다. 이 교육과정은 말하자면 어떻게 사람들이 변화되며 그 변화와 인간관계는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대한 과정을 포함하고 있다. 여기서 말한 ‘마음을 변화시키며, 삶을 변화시키는 과정’이란 CCEF가 품고 있는 비전의 방향이다. 이것은 지역교회가 상담사역을 위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훈련시키고 준비시키며 배치시키는 일을 도울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하기 위한 교육과정이기도 하다.
만약 당신이 ‘변화의 도구가 되기 위한 학습과정’이나 CCEF에 대해 좀더 알고자 한다면 우리 홈페이지 www.ccef.org(한국에서는 www.kibc.or.kr에서 찾아볼 수 있다:역자 주)로 접속하면 자세히 내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 가족들에게 꼭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아내 루엘라는 나의 동역자이며 가장 큰 후원자였으며 가장 친한 친구 그 이상이었다. 지난 30여년 동안 날마다의 그녀의 상담사역을 통해 가장 큰 유익을 얻은 사람은 바로 나였다. 저스틴, 에단, 니콜, 그리고 다네이. 우리 아이들이 하나님께로부터 가르치는 사명을 받은 대로 살아나가는 법을 여전히 배워가고 있는 아빠를 인내로 참아주었던 것에 대해서 너무나 감사한다.
끝으로 이 책을 읽고 있는 당신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의 한 부분이 되라는 그분의 부르심을 따르고자 할 때에 그분께서 내리시는 축복을 풍성하게 받아 누리기를 기도한다.


폴 데이비드 트립


1장 최고의 소식 : 아침에 일어나야 하는 이유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소식은 무엇인가? 혹은 “이렇게만 되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하는 당신의 꿈은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은 백만장자가 되어서 꿈에 그리던 집을 사는 것일지 모르겠다. 아니면 당신이 항상 바라고 있었던 직업을 갖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배우자가 갑자기 당신이 언제나 꿈꿔왔던 사람으로 변하는 것일 수도 있으며, 자녀가 잘 성장하여서 책임감 있게 살며 좋은 사람과 결혼하게 되는 것일 수도 있다. 과연 당신에게 최고의 소식은 어떤 것이 될 수 있겠는가?
이 질문을 좀더 다른 방법으로 해보도록 하겠다. 당신이 아침에 일어나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루종일 당신을 움직이게 만드는 동기는 무엇인가? 당신의 시간, 재능, 그리고 당신의 모든 에너지를 쏟게 만들 수 있는 가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그것을 중심으로 당신의 전체 인생을 설계하도록 할만큼 그토록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은 무엇인가? 
이 책은 지금까지 인간이 들을 수 있었던 최고의 소식에 관한 것이다. 이 책은 우리가 비록 타락한 세상에 사는 결점투성인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을 가치 있게 만드는 매우 의미 있는 어떤 소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소식은 환상이나 꿈, 혹은 비현실적인 기대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오직 역사적 사실 그리고 현재의 실재에 근거한다. 이 소식은 매우 힘든 인간의 상황 속에 삶을 변화시키는 희망을 심는다. 그리고 정말로 그것을 위해 살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것이다. 이 소식은 바로 복음(good news)이다!


복음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난 후에 짧은 시간 동안이지만 완전한 사람들이 하나님과 완전한 결합을 이루며 완전한 세상에서 거닐고 있었다. 각종 동물들이 공중과 땅과 바다에 가득 차있는 풍성하고 풍요로운 환경이었고, 따라서 모든 육체적 필요와 영적 필요가 충분히 충족되었다. 아무도 굶주리지 않았고, 두려운 질병도 없었다. 동산에는 잡초와 가시조차 없었다.
남자와 여자인 아담과 하와는 서로 완전한 결합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 그곳에는 불건전한 경쟁도 없고, 권력싸움도 없으며, 복수 혹은 비난도 없었다. 은밀한 계획이나 거친 말, 두려움, 죄, 수치, 혹은 권위에 대한 반항도 없었다. 그곳에는 이해와 온전한 의사소통, 그리고 사랑만이 존재했다.
또한 그곳에는 정체성이나 불안, 우울증 혹은 중독과의 싸움이 없었으며, 극복해야하는 개인의 고통스러운 과거도 없었다.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고, 혼란스러운 동기도 없었으며, 과도한 욕망과의 싸움도 없었다. 그리고 죄의 유혹도 없었다.
그 대신 하나님과의 완전한 결합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이 창조되어진 목적대로 사랑하고, 예배하고, 순종하였다. 날이 서늘할 때에 그들은 그들을 만드신 분과 완전한 친교를 즐거워했으며, 실제로 동산에서 하나님과 거닐고 있었다. 그들은 그분이 만드신 것을 다스리도록 그곳에 임명된 하나님의 거주지 관리자였고, 그들은 그들의 일을 잘 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질책하실 이유가 없었고, 그들도 역시 고백해야 할 어떤 죄도 없었다. 모든 것이 좋았고, 매일 매일이 그러하였다. 그 삶은 우리의 죄의 흉터가 생겨난 이후로부터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즐거운 것보다 더 좋은 것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것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지금까지 인간이 행한 행동 중에서 가장 치명적인 반역 행위를 통해서,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의 정하신 계획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는 모든 것이 무너지게 되었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과 놀라움은 영구적이면서도 깊은 흉터를 지니게 되었다.
즉시 두려움과 죄 그리고 수치가 인간 경험의 표준이 되었다. 완전한 조화 속에 살았었던 사람들은 이제 서로 비난하고, 속이고, 그리고 서로를 지배하기 위해 싸우게 되었다. 잡초와 질병이 매일의 관심사가 되었다. 사람들은 악한 것을 열망하고, 옳지 않은 일들을 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기 보다는 그들 자신의 신들에 따라 살게 되었다. 완전한 찬양 속에 있던 세상은 이제 타락이라는 중압감 아래에서 신음하게 되었다.
죄는 모든 생각, 욕망, 말, 그리고 행위를 변화시켰다. 그것은 두마음을 가진 세상과 혼란스러운 동기들, 자기 숭배와 자기도취를 만들어냈다. 세상 사람들은 섬김 받기만을 바랬고 남을 섬겨야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들은 지배력을 갖기 원했고, 자기 만족이라는 망상을 키워나갔다. 자신들의 창조주를 잊었고 대신 그분의 피조물을 숭배했다. 사람들은 남을 더 사랑하고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물질을 이용하는 대신에 물질을 사랑했고 그것을 갖기 위해 오히려 사람들을 이용했다. 심지어 인류의 두 번째 세대는 살인도 저질렀다. 그들은 거짓말하고 속이며 숨기고 그리고 자신의 행동을 부인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순간적인 경솔함에서부터 신체적 학대와 성적 학대와 같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행위에 이르기까지 다른 사람들의 손에서 고통 받고 있었다. 처음으로, 사람들은 내면으로부터의 슬픔과 외부로부터의 고통 때문에 울었다.
이제 하나님께서 죄로 황폐화된 그분의 세상을 보셨다. 그분은 이 세상을 그 상태로 놔두시기를 원하지 않으셨고, 그래서 한 가지 계획을 고안하셨다. 그 계획은 수천 년이 걸릴 것이다. 그것은 자연의 힘을 이용하고 인간 역사의 흐름을 지배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그분은 이것을 하실 수 있었다. 사실 타락의 순간부터 여러 세대를 거치는 동안 그분은 모든 것을 지배하셨고 그래서 이전에 매우 끔찍하게 손상되었던 것을 바로잡으셨다. 즉 하나님께서는 매우 적절한 시기에 이 세상 속으로 그분의 유일하신 독생자를 보내셨던 것이다.


이제 최고의 소식을 위하여

이러한 복음의 최초의 공표는 너무나 간결해서 간과하기가 쉬울 것이다. 이것은 마가복음의 서두에 단지 짧은 몇 문장으로만 나와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이유에 대한 충분한 요약이 된다.
마가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런 식으로 기록했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이것이 그저 자기 자신을 소개하는 예수님의 방식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분의 선포는 그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이 타락한 세상의 거친 현실을 견디어 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아침에 소망을 가지고 일어나야 하는 유일하고 타당한 이유를 제시한다. 그리고 놀랄 만큼 실제적이고 개개인에게 강렬한 희망을 준다.
그 소식은 이러한 말씀으로 시작한다. “때가 찼고”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해 오신 일이다. 모든 역사가 이 한 순간을 향하여 움직여져 왔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에 대한 관심을 잊지도 않으셨고 잃어버리지도 않으셨다. 사실 그 끔찍한 첫 번째 타락 이후로 그분은 오늘날까지 이 세계를 이끌어오셨다. 무의미하고 통제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사의 전개이며 이것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그 정점에 이르게 된다.
이것을 생각해보라. 구약에 기록된 모든 좋은 일들과 나쁜 일들은 한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전투들, 여행들, 시련들, 왕국들, 계시들, 그리고 기적들, 뿐만 아니라 모든 정치적이고 개인적인 음모들조차도 이 시점까지 세상을 이끄신 하나님의 주의 깊은 계획의 일부였다. 마가복음에 그 말씀이 기록되기보다 훨씬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들에게 그분 자신이 깨어진 것을 회복시킬 것이라고 말씀해 오셨었다. 그러나 그들은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심으로 그분의 사역을 시작하신다. “이제 드디어 일어난 이 일을 이해하겠느냐? 지금이 예언자들에 의해 예언되었고 희미하던 소망이 밝은 현실로 나타나는 바로 그 때인 것이다. 때가 찼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보자. 무엇을 위해서 때가 찬 것일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음을 선언하신다. 이것은 “나는 왕 중의 왕이며, 나는 친히 나의 나라의 권능을 가지고 이곳에 왔다.”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성경의 다른 구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나라가 정치적인 것이 아니며 세상의 지배도 역시 받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다. 그래서 그분은 그 나라를 ‘너희 안’에 있는 나라라고 지칭하셨다(눅 17:20-21을 보라). 하나님의 구원 방법은 정치적인 혁명이나 물리적인 전쟁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최초의 싸움은 인간의 마음에서 일어났고 그리고 하나님은 승리하셨다.
우리의 자아-도취적(self-absorbed)인 문화에서 우리는 이 나라의 위대함을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필요들과 욕구들의 크기로 그 나라를 축소시킬 수는 없다. 그 나라는 우리의 개인적인 상황과 관계들로부터 우리를 멀리 떨어지게 만든다. 그 나라의 왕은 우리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전에 상상할 수 있었던 곳들 보다 더 놀랍고 영광스럽고 그리고 굉장한 어떤 곳으로 우리를 이끌기 위해 오셨다. 아마도 이러한 굉장한 목적을 이해하기 위한 최고의 방법은 영원함에 대하여 듣는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요한계시록 19:6-8절에서 우리는 구원받은 허다한 무리가 보좌 앞에 서있고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 목소리로 소리를 높이는 것을 볼 수 있다.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그들이 무엇을 찬양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라. “나는 그 직장을 얻었어! 나의 결혼은 환상적이었어! 내 주변에는 멋진 친구들과 잘 자란 아이들이 있었어.”가 아니다. “나는 우울증을 이겨내고 두려움을 극복했어.”도 아니다. 다음의 두 가지 내용이 모여 있는 무리들의 마음을 빼앗았다. 첫 번째는 그리스도께서 최후의 승리를 하셨다는 것이다. 그분의 뜻은 이루어졌고 그분의 계획은 성취되었고 어떠한 도전도 없이 영원히 만물을 통치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영광에 대한한 열정을 가지고 있고 그분의 통치하심 속에서 궁극적인 위안을 찾는 사람들을 모으셨다. 그들은 신앙을 따르면서 큰 희생을 치르면서도 순종하고 희생하며 고통 받지만 그러나 조금의 후회도 없는 그러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구속주의 인격과 통치하심 속에서 영원한 만족을 발견하였다.
두 번째로 영광스러운 일은 최후의 잔치인 양의 혼인잔치가 마침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들이 자신들은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자들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바로 신부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천둥과 같은 소리로 감격스럽게 외쳤다. 그들은 세마포 옷을 입고 서있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죄의 흔적과 결점들이 사라졌다. 모든 불법의 잔재들이 사라져버렸다. 그들은 마침내 그리고 영원히 깨끗하게 되었다. 마침내 순전하고 거룩한 신랑 앞에 서있는 것이다.
영원함에 대해서 들을 때 우리는 그 나라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는 것에 대해서 배우게 되는데 이것은 우리의 문화가 가정하는 그런 자아도취적인 의미에서가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정반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자아도취에 갇혀있는 제한된 세계관에 대한 우리의 몰입을 깨뜨리시고 하나님의 나라만을 위해 살 수 있다는 가치 있고 유일한 목적을 깨닫도록 우리를 부르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그분의 나라는 그분의 영광을 보여주는 것이며 거룩한 사람들에 관한 것이다. 이것이 그분이 오셨고 사셨으며 죽으셨고 그리고 부활하시면서 만들어내신 놀라운 변화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가 추구했을 일시적인 영광 대신에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그분을 위한 삶과 일을 주셨다. 이제 하나님 나라의 목표는 우리의 마음을 통제하고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복음과 회개로의 촉구를 연결하신 부분을 좀더 주의해서 살펴보자. 성경은 한 사람의 삶의 방향에 있어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마음의 근본적인 변화로서 회개를 정의하고 있다. 이것은 오직 변화시킬 능력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죄악에 빠져있는 사람들에게 변화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하지도 않으면서 회개하도록 요구한다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 일인가! 그러나 바로 이 부분에서 복음은 최고조에 이른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왔기 때문에 지속적인 마음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그렇다, 세상은 완전히 깨졌지만 왕은 그분 자신과 함께 그분 나라의 권능과 영광도 가지고 오셨다!
어쩌면 당신은 전혀 극복할 수 없는 특별한 죄에 빠져있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당신은 절망적으로 산산조각난 공동체의 일원일 지도 모른다. 아니면 당신 자신의 결혼이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에 전혀 미치지 못하는 상태일 지도 모른다. 혹은 당신이 어디를 가든지 당신 자신의 고통스러운 과거의 기억들을 짊어지고 다닐 수도 있다. 어쩌면 당신은 냉소적이 되어버린 선한 의도, 지키지 못하는 약속, 그리고 산산이 깨어진 희망과 비전들로 인해 지쳐있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변화를 간절히 필요로 하는 이유는 우리 삶 주위에 그리고 우리 마음속에 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죄는 모든 것을 좀더 복잡하게 만든다. 죄는 사랑을 변형시켜 이기적인 욕망이 되게 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세우신 온전한 가정 안으로 죄가 들어오면, 가정은 인간에게 가장 깊은 상처를 일으킬 수 있는 장소로 변한다. 죄는 일터를 부패시키고 정부를 타락시키며 심지어 교회를 더럽힌다. 그리고 그 날의 끝에는 죽음이 이른다.
죄가 당신 마음속에 있기 때문에 당신은 죄로부터 도망칠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이 배운 모든 것들이 죄의 능력에 의해 뒤틀려진다. 당신은 죄를 극복할 수 없으며 혹은 벗어날 수도 없다. 심지어 도망가기 위해서 움직일 수조차 없다. 이것이 바로 “왕이 오셨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최고의 소식이 되는 이유이다.
결단코 변화는 가능하다! 당신은 죄의 가혹한 실제 가운데에 서있으면서도 당신 자신을 절대 실망시키지 않는 소망을 가질 수 있다(롬 5:1-5). 결혼생활이 변화될 수 있다. 십대 청소년이 변화될 수 있다. 교회가 변화될 수 있다. 그리고 인간관계가 변화될 수 있다.  괴로움이 사라지고 억지로 하는 마음이 없어지며 두려움을 이길 수 있다. 돌처럼 굳은 마음이 부드럽게 될 수 있고 이전에는 신랄했던 비판의 말들이 다정한 위로의 말로 변할 수 있다. 과거에는 완전히 자아도취적이었던 사람이 이제는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다. 한마디로 사람들은 타락하지 않으면서 능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가정은 안전함과 사랑함과 그리고 치유받음의 장소가 될 것이다. 이 모든 변화는 왕이 오셨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 모든 것 안에서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분 자신의 영광이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을 지으신 목적 즉 그들 삶의 모든 부분에서 그분을 경배하고 순종하며 살도록 지으신 목적대로 그들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오셨다. 그분은 죽은 마음에 생명을 불어넣음으로써 이것을 성취하셨는데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우리에게 그분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분은 세상의 법을 지키면서 죄 없이 사셨다. 그러나 그분은 죄에 대한 형벌로 그분의 생명을 버리셨고 따라서 우리는 완전히 용서받을 수 있게 되었다. 우리를 그분의 자녀로서 모든 권리와 특권을 누리게 하시면서 그분의 가족으로 택해주셨다. 매일 우리가 그분 자신의 형상을 닮게 하신다. 우리가 그분의 은혜로 말미암아 옳은 일들을 하게 해주신다. 그분의 성령은 우리 안에 내주하시면서 죄를 깨닫게 하시고 진리를 조명하시며 우리에게 순종할 능력을 주신다. 그분은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우리가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곳에 우리를 보내주신다. 그분의 영광과 우리의 선함을 위해 모든 사건들을 다스리신다. 우리가 그분의 영원하고 구속적인 사랑의 대상이 되게 하신다.
성경은 이러한 변화를 구속(redemption)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단지 변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복되었다. 이것이 다른 모든 변화를 가능하게 만드는 이유이다.


우리가 전하는 소식은 복음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분의 이름으로 사역할 임무를 주셨을 때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선포하도록 명하신 메시지이다. 죄와 싸우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했을 때에도 극복할 수 없는 일들로 인해 곤경에 처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도울 때에도 이것은 역시 우리의 메시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성심을 다해 다음과 같이 선포해야 한다. “소망은 오직 왕 중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되어진다. 그분 안에서만 영원하며 인격적인 마음의 변화가 가능하다.” 이외의 다른 메시지는 거짓된 소망을 조장할 뿐이다.
사람들은 이 타락한 세계에서 삶에 지치고 힘들어하며 살아가면서 자신의 삶에 대한 어떤 설명을 얻을 수 있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비전을 갖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그저 자신들이 처한 상황이 좋아지기만을 원하기 때문에 전략이나 기술, 그리고 원리들을 얻고자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보다 더 많은 것들을 제공하신다. 사람들은 그들의 가족들, 이웃들, 친구들, 도시들, 직업들, 역사와 교회들을 바라보아야 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들에게는 보이진 않지만 실제로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능력, 즉 비전이 필요한 것이다. 바울은 바로 이것에 그의 시선을 고정시켰다(고후 4장). 그들은 한 도시를 바라보면서 그 치열한 영적 싸움 가운데에서 하나님과 연합하여 살기 위해 모인 구원받은 영광스러운 사람들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자녀를 바라보고 그리고 구원자이신 하나님께서 자녀들의 마음을 그분 자신의 것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을 바라보아야 한다. 역사를 자세히 살펴보고 하나님께서 그분의 목적대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루시는 것을 바라보아야 한다. 또한 인간 존재의 빛나는 소망을 바라보아야 한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섬길 수 있다. 그들은 그분과 영원히 교제할 수 있고 다른 방법으로는 불가능한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왕이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그들에게 주셨기 때문에 가능하다.
우리는 죄인으로서 창조주를 떠나 그분의 피조물을 섬기려고 하는 자연스러운 성향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한 인격이신 하나님 안에 있는 소망으로부터 멀어져서 제도와 사상과 사람들 혹은 그 소유물에서 소망을 찾으려고 한다. 진정한 소망이 되시는 그분은 우리의 얼굴을 바라보고 계시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분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 대신에 우리는 작은 통찰이라도 얻을 수 있는가 해서 인간 사상의 언덕을 파헤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는 마침내 어떤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 통찰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 통찰에 따라 행동하면서 지속적인 인격의 변화가 가능하다는 유혹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서 실망하게 된다. 그런 식의 변화는 문제의 핵심을 간파하는데 실패한 일시적이고 표면적인 것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번에는 다른 좀더 올바른 장소에서 파헤쳐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다시 그 언덕으로 돌아간다. 우리는 이전보다 좀더 심오하게 보이는 또 다른 통찰을 발견한다. 찾았다! 그런 다음 그것을 가지고 집에 돌아와서 그것을 연구하고 실제에 옮긴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 항상 같은 자리에 있음을 알게 된다.
복음은 마음을 변화시키기 위한 도움은 결코 그 언덕에서는 발견되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깨닫게 한다. 그것은 오직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발견되어질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구속의 체계, 즉 통찰과 원리의 체계를 제공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구원자이신 주님을 제공해야 한다. 그분의 능력 안에서 우리는 가장 강력한 적들을 이기기 위해 필요한 소망과 도움을 발견한다. 소망은 지속적인 변화의 유일한 실제 수단인 구원자의 은혜 가운데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문화의 심리학으로부터 성도들이 구별되어야 하는 점이다. 심리학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배척되기 때문에 그것은 사람들에게 어떤 종류의 체계만을 제공할 수 있다. 그것은 소망을 관찰의 체계, 일련의 통찰, 혹은 과정의 단계들로 격하시킨다. 그렇지만 우리는 절박한 마음으로 언덕을 파헤치고 있으며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좀더 효과적인 삽을 간절히 구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난다. 우리는 친절하게 그들을 그 언덕에서 떠나게 하여 기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게 한다. 이것이 개인적인 사역(personal ministry)의 핵심이다.
그러나 마땅히 섬겨야 할 대상을 왕되신 하나님에서 피조물로 대치하려는 우리들의 성향은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가 성경에서 답을 찾을 때에도 나타나게 된다. 우리는 ‘이 문제에 관한 구절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가지고 성경말씀을 대한다. 우리는 그 성경말씀 속의 원리들이 제공하는 유일한 소망이 오직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그리고 성경말씀이 백과사전이 아니며 소망이 없는 무기력한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잊어버린다. 다시 말하지만 성경은 그들 자신의 자기만족과 헛된 지혜로부터 구원되어서 예수님이 중심이 되시고 진정한 소망이 살아있는 하나님의 나라로 이동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좀더 자세한 연구를 위해서는 The Journal of Biblical Counseling에 나와 있는 “상담에서의 지혜(Wisdom in Counseling)”을 참조하라, vol. 19.2 (winter 2001), 4-13. 
우리는 성경말씀을 일련의 치료기법적인 통찰로 간주할 수 없다. 말씀의 메시지를 그렇게 왜곡하는 것은 지속적인 변화로 이끌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어떤 체계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우리에게 줄 수 있다면 예수님은 오시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 안에 잘못된 어떤 것이 다른 방법으로는 고쳐질 수 없기 때문에 오셨다. 그분만이 유일한 답이며 따라서 우리는 복음 외에 다른 메시지를 제공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한 체계를 제공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에게 구원자를 가리킨다. 오직 그분이 소망이다.


왜 소망이 한 사람에게만 있는가?

만약 당신이 누군가를 도우려고 한다면 당신은 무엇이 잘못되었으며 그것을 어떻게 고칠 수 있는지 알 필요가 있다. 당신이 자동차 정비사에게 가는 것은 그 사람이 당신 차가 왜 고장이 났으며 어떻게 해야 다시 잘 쓸 수 있는지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격적 변화에 대해서도 이와 똑같은 절차를 거쳐야 한다. 즉, 그 사람들에게 있어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그리고 변화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정확하게 진단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문화에 있어 완전히 잘못되어 있는 점이다. 이 세상은 사람에 대한 성경적 관점을 부인하면서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라는 질문에 정확하게 대답하려고 하는 어떠한 노력도 거부해버린다. 그런데 만약 세상이 이 질문에 잘못 대답한다면 적절한 해결책을 제공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겠는가?
나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져본다. 왜 사람들은 그들이 현재 하는 일들을 계속하고 있는 것일까? 자, 나의 의문은 근본적이면서 어떤 새로운 것을 알게 되는 것인가? 잘 연구되고 논리적인 통찰들이 그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나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경험에 의한 것인가? 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의 과거를 다룰 것인가? 나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성경적인 것인가? 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화학적 균형을 이루도록 도울 것인가? 이도 저도 아니고 내가 잘못 완전히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러한 모든 일들 이면에 또 다른 어떤 이유가 있는가? 이 마지막 질문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명확하다. 바로 “그렇다”라는 것이다.
성경은 내가 알아야 하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점에서 나의 문제는 어떤 새로운 것을 알게 만든다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성경은 또한 우리의 경험들이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확언해주기는 하지만 우리의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경험에 선행되며 더 심오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의 육체적 본성과 영적 본성 사이에 복잡한 상호작용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우리의 핵심적인 마음의 문제를 육체의 수준에서 찾지는 않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경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문화와 구별된다.
 성경은 우리의 의문 즉, 우리가 현재 하고 있는 일을 계속하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죄 때문이라고 말한다. 성경에서는 죄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성경은 죄를 결과적으로 행동을 초래하는 상태로 정의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죄인이며 이것 때문에 우리 모두는 죄를 짓는 일들을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핵심적인 마음의 문제가 우리의 경험보다 선행된다고 내가 말하는 이유이다. 다윗은 시편 51편에서 이것을 잘 이해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5절). 여기서 다윗은 ‘나는 근본적인 문제를 가지고 태어났다. 나는 내가 처음으로 무엇인가를 경험하기 훨씬 전부터 이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인간으로서 기능하는 방식에 근본적으로 영향을 주는 나의 내적 자아에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말에는 엄청난 뜻이 있다. 다음과 같은 고백이 되는 것이다. 죄는 인간으로서의 나의 본성이기 때문에 피할 수 없다. 이것은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에서 나타난다. 이것은 나의 열망과 권위에 대한 나의 반응과 나의 결정을 이끌어갈 것이다. 나의 가치를 바꾸고 나의 소망과 꿈을 조종하며 내가 하는 인생에 대한 모든 해석을 확정지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자기 자신의 어려움들을 다루고자 한다면 혹은 자신의 어려움을 다루기 원하는 다른 사람을 돕고자 한다면 먼저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야만 한다. 먼저 당신은 과거의 고통 그리고 육체가 원활하게 기능하지 않는 상황들을 다루어야 한다. 그러나 당신은 좀더 나아가야만 한다. 그들이 이러한 모든 경험들을 왜곡하는 죄를 극복하도록 도와야만 한다. 두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파멜라는 매우 학대받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하루 중 최악의 시간은 그녀의 아버지가 직장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였다. 파멜라는 집에 있지 않거나 혹은 무사하기 위해 그녀의 방에 안전하게 숨어 있곤 했다. 이것은 매우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험들이다. 우리는 파멜라와 함께 눈물을 흘려야 하며 우리는 그녀에게 행해진 잘못된 일들에 대해 분노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조금 더 무언가를 해야 한다.
파멜라의 현재 갈등들을 살펴보면 당신은 그녀의 문제는 단지 그녀의 경험이 아니라 그녀가 그것을 다루는 방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파멜라는 늘 매사를 극단적으로 대처하는데 그래서 다른 사람과 함께 일하거나 친구를 진심으로 사귀기가 힘들다. 늘 다른 사람과 갈등을 갖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이 옳다는 것을 인정해주길 요구하는 것이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에 집착해있는데 그 생각은 다른 사람들과의 모든 상호작용에 영향을 미쳤다. 그녀의 끊임없는 질문은 ‘그들은 속으로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였다.
하지만 파멜라가 당신과 이야기할 때 그녀는 깊은 고통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나타난다. 그녀는 계속해서 거절됨과 외로움의 고통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녀는 사람들이 자신을 위협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아무도 자신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느낀다.
파멜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그녀의 현재 모든 문제들은 과거의 결과인가? 분명히 그 이상이다. 파멜라는 과거의 두려움과 싸우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의 어려움들에 대처하는 방식에도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항상 성경이 우리를 깨닫게 하는 부분이다. 만약 죄가 우리 본성의 일부라면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과거뿐만 아니라 죄가 우리의 과거를 다루는 사고방식을 어떻게 왜곡시키는지도 다루어야 할 것이다. 도움은 오직 우리가 우리의 과거를 다루면서 우리의 죄를 고백할 때 얻게될 것이다. 이것은 본질적인 문제인데 왜냐하면 죄인들은 자신들에게 대적하는 사람들에게 죄성을 가지고 반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파멜라와 우리에게 있어 유일한 희망이 구원자이신 하나님인 이유이다. 우리는 우리의 죄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우리에게는 사랑과 격려와 정보와 통찰보다 그 이상이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구원이 필요하다. 그 외에 어떤 것도 우리에게 정말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에 대해서 말해주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 사례로 잭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잭의 아버지는 교회에서 활동적인 장로이며 그의 어머니는 교회 사역에 헌신적인 성도였다. 잭은 매일 가정 예배를 드리면서 삶의 경험을 나누는 좋은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다. 잭의 아버지는 열심히 일했고 또한 매우 성공한 사람이었다. 그의 부모는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자녀들과도 의사소통이 잘되는 사람들이었다. 잭은 기독교 학교에 다녔고 그의 부모는 좋은 대학에 보내줄 수 있었다. 그런대 모든 것이 잭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잭이 이야기를 나누기 전까지의 상황은 직장을 오래 다니지 못하는 상태였고 결혼도 두 번이나 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는 확실히 분노하고 있었다. 자신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의 말을 들어 줄 시간이 없는 바보 같은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불평했다. 그는 자신이 직장을 잃은 이유가 회사가 하는 사업에 대해 그 자신이 다른 누구보다도 더 많이 알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직장 상관들이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혼한 이유는 감정적으로 연약했던 이전 부인들이 ‘자신감이 있고 완벽하게 사는’ 사람과 사는 것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잭의 현재의 삶이 그의 가정환경에 영향을 받은 것인가? 물론 그렇다! 그러나 여기에서 좀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 잭은 근본적으로 자신과 싸우고 있다. 죄는 나로 하여금 고통에대해서도 죄성을 가지고 반응하게 할 뿐만 아니라, 축복에 대해서도 죄성을 가지고 반응하게 한다. 영리한 아이는 모자란 아이를 놀린다. 운동선수가 다리가 불편한 아이를 놀린다. 우리 안에 어떤 것이 너무나 잘못되어서 우리는 심지어 축복조차 제대로 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이제 잭에게는 통찰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그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구원받을 필요가 있으며 이것을 위해서 그에게 구원자가 필요하다. 이것이 어려움에 있는 사람들에게 단순히 과거를 다루는 방식에 대한 체계나 조언만을 제공할 수 없는 이유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강력하시며 현재에도 살아계신 구원자를 알려주어야만 한다. 그분만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죄를 정복하셨다! 그분은 우리에게 마음을 변화시키고 삶을 바꾸시는 은혜를 기쁜 마음으로 주신 것이다!
이것이 골로새서 2장 8절에서 바울이 매우 명백하게 말한 내용이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세상의 철학이 기만적인 이유는 그 약속한 것을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것은 잘 연구되고 논리적으로 제시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것이 아니다. 죄의 상태는 여전히 잘못된 그대로 있기 때문에 진정한 소망과 도움은 오직 그분 안에서만 발견되어질 수 있다. 어떠한 다른 해답도 공허한 것으로 입증될 것이다.


죄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들

죄는 궁극적인 질병으로서 어떤 의미에서는 광범위한 정신병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신은 스스로의 힘으로 그것에서 도망가거나 그것을 이길 수 없다. 주위를 살펴보라. 그러면 당신은 모든 곳에서 죄의 흔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죄는 이미 복잡해져있는 것을 더 복잡하게 만든다. 타락한 세상에서의 삶은 하나님께서 이전에 의도하셨던 것보다 좀더 힘이 들게 되었다. 그리고 죄는 그 삶을 더욱 힘들게 만든다. 우리는 고통, 질병, 낙심이나 죽음보다 더 많은 것들을 다룬다. 우리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는 경험적이나 생물학적이나 혹은 관계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도덕적인 것인데 그것이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죄는 우리의 정체성을 왜곡시키며 우리의 시각을 변화시키며 우리의 행동을 탈선시키며 그리고 우리의 소망을 빼앗아가 버린다. 모세는 홍수를 앞둔 사람들의 문화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이것이 바로 죄가 우리에게 행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궁극적인 질병이다!
우리 부부의 첫 아이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활동적이었다. 그 아이는 루엘라(Luella)가 마치 최고의 놀이기구 인 양 아내를 움켜잡고 매달리고 기어오르며 온종일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8개월 반이 되었을 때, 이 작은 아이는 첫 번째 발걸음을 떼었다. 그리고 나서 곧 그 아이는 집안을 굉장한 속도로 돌아다니게 되었다. 나는 이것을 매우 신기하게 생각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 아이가 걷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벌써 걷고 있는 것이었다!
아기가 걷기 시작할 때 그에게는 이전과 전혀 새로운 집안에서의 위험들로부터 보호받는 것이 필요하였다. 당신의 아이를 보호하는 한 가지 방법은 당신의 무릎에 앉히고 그 얼굴을 쳐다보면서 특별한 위험들에 대하여 아이에게 경고하는 것이다. 나는 집안 곳곳을 데리고 다니면서 피해야할 것들을 가르쳐주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이런 연령의 아이에게는 대단한 시간 낭비처럼 보였다. 앞서 나는 우리 작은 꼬마에게 모든 방에 있는 전기 콘센트에 대해 말하면서 경고했다. “이것들을 만지면 안 된다. 그리고 이 안에는 어떠한 것도 꽂지 말거라. 그것이 너를 죽일 수도 있단다!” 그 아이는 나를 멍청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한 손은 티셔츠를 만지작거리고 있었고 다른 한 손은 코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나는 아이에게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고 물었고, 그 아이는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아이는 또 다른 모험을 찾아 뒤뚱뒤뚱 걸어갔다. 그 때 나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을 확신했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오후, 나는 거실에서 나를 힐끗거리는 우리 아이를 곁눈질하며 책을 읽고 있었다. 그 아이는 나를 슬쩍 보더니 벽에 기대섰고 그리고는 뒤돌아섰는데 그러한 행동을 몇 번 반복했다. 그리고 내가 책에 몰두해있다고 생각했는지 콘센트를 향해 똑바로 갔다. 그런데 그 아이가 최초의 호기심어린 접촉을 갖기 전에 그 아이는 나를 놀라게 만드는 행동을 했다. 그 아이는 멈추어 섰고 내가 보고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 뒤돌아보았다. 그리고 다시 콘센트를 향해 손을 내밀었고 그와 동시에 나는 아이를 구하기 위해 벌떡 일어섰다.
우리 아이가 그러한 행동을 하기 전에 나를 마지막으로 쳐다보았다는 것은 그 아이가 일전에 내가 말한 내용들을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내 뜻과는 반대로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자신의 반역을 숨기려고 했고 그리고 명백히 금지된 것에 몰두되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죄의 강력한 세 가지 요소가 이 짧은 사건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죄가 만들어내는 첫 번째 요소는 ‘반역’이다. 이것은 몇 가지 규칙을 어기는 것 이상이다. 이것은 내 성격에 있어서 근본적인 한계이다. 이것은 내가 배우는 어떤 것이 아니다. 나는 그것을 가지고 태어났다.
나는 이 작은 아이에게 금지된 것을 바라보라고 가르칠 필요가 없었고 권위를 피할 기회를 찾도록 가르칠 필요도 없었으며 ‘금지된 열매’에 손을 뻗치라고 가르칠 필요가 없었다. 사실 나 자신도 그와 똑같은 일을 하며 당신도 그렇다. 주차금지구역에 주차를 하고 소득세를 속이고 장난감 가게에서 엄마로부터 멀리 떨어지고 교회의 조언에 따르기를 거부하고 비밀스런 욕망에 탐닉하기도 하는 등 반역은 우리들 각자의 삶에게서 나타난다.
반역은 자율성이나 자기 충족성, 혹은 자기 초점이라는 거짓말로 포장된 타고난 성향이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주신 울타리를 끊임없이 침범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자율성(Autonomy)은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하고자 하는 때에 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라고 말한다. 자기 충족성(Self-sufficiency)은 “나는 내 자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나는 누구에게도 의존하거나 순종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한다. 자기 초점(Self-focus)은 “나는 내 세상의 중심이다.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과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일만을 하는 것은 정당한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에덴동산에서의 거짓말, 즉 수많은 세월동안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사람들에게 사탄이 속삭여왔던 것과 똑같은 거짓말이다. 이런 말들은 우리의 근본적인 인간 존재로서의 성향을 부인한다. 우리는 자율적인 존재로 창조되지 않았다. 우리는 하나님께 매일 순종하며 그리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지음받았다.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과 상관없이 사는 인생은 결코 제대로 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반역 정신은 고난과 축복에 대해 우리가 접근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독립심, 자기 충족성, 그리고 자기도취는 우리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먼저 생각하도록 하며 우리 자신과 우리의 욕망 사이에 있는 울타리를 넘어가도록 한다. 우리는 통제하는 것은 원하지만 통제받는 것은 싫어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편리한대로 규칙들을 만들고 또 변경시키기를 원한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세상을 우리 자신의 뜻대로 다스리는 신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에 대해 반역하든지간에 우리의 반역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향한 것이다.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그분의 영광을 취하고 다스리심에 대한 그분의 권리를 빼앗으면서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죄는 또한 우리 안에 있는 어리석음을 보여준다. 어리석음은 우리 자신보다 더 믿을만한 전망이나 통찰, 이론, 혹은 진리는 없다고 믿는다. 그것은 내가 더 많이 알고 있다는 거짓말에 넘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현실을 왜곡하고 우리 자신이 만들어 낸 세상에서 살도록 한다. 이는 마치 분명하게 똑바로 보고 있다고 확신하면서 오목볼록 거울을 통해 자기를 보는 것과 같다.
우리 아이는 이전에 위험에 대해 계속 경고를 받아왔었다. 그러나 그 아이의 어리석음은 자신이 더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어리석음은 어떠한 사람의 조언도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사람들을 지배한다. 이러한 어리석음은 우리의 정체성 의식을 왜곡시키고 관계를 파멸시키며 성장을 지체시키고 그리고 변화를 가로막는다.
어리석음은 우리가 괜찮은 자들이며 우리의 반역적이고 분별없는 선택이 정당한 것이며 최선의 것이라고 우리에게 확신시킨다. 어리석음은 인간 존재로서의 우리의 기본적인 자연성에 대한 거부이다. 우리 자신은 결코 지혜의 근원으로 창조되지 않았다. 우리는 계시를 받는 존재가 되도록 고안되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진리들에 의존하도록 고안되었으며 그러한 진리를 자신의 삶에 적용하도록 고안되었다. 우리의 해석들이나 선택들, 그리고 행동은 그분의 지혜에 근거하도록 창조되었다. 이것에서 벗어나는 삶은 결코 제대로 되지 못할 것이다.
다윗이 시편 14:1에서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어리석음의 근거에 대해 설명한 것이다. 우리의 어리석음은 하나님께 대한 거부로서 우리의 지혜로 하나님의 지혜를 대신하려고 하는 타고난 욕망인 것이다. 그 모든 것들에 더하여 우리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진리’들을 우리 자신에게 계시하는 신들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명하신 것들을 할 수 없게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무능력은 우리 삶의 모든 상황과 모든 관계들에서 나타난다. 그것은 단지 나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이나 혹은 내가 하는 방법이 더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심지어 내가 올바른 의도를 가지고 있을 때에도 나는 그것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항상 하나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
친구와의 어려운 대화를 위해 스스로를 준비해본 적이 있는가? 당신은 당신의 대사를 연습하고 상대방의 가능한 반응들을 예기해본다. 당신은 그 대화가 어느 부분에서 잘못될 수 있는지 미리 생각해보고 나중에 후회하게 될 말들을 하지 않기 위해 준비한다. 당신은 이 대화로 인해 관계가 악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막상 대화를 하게 되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난다. 상대방은 당신에게 상처를 주고 그로 인해 감정이 격발되어서 당신도 상대방에게 보복하는 것이다. 당신은 그 결과를 믿을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하지 않기로 결심했었던 일들을 그대로 해버린 것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이러한 경험에 대해 절박하게 말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 당신 역시 그렇지 않은가? 바울은 계속해서 말한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19, 21-23). 사실상 바울은 “심지어 내가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고 그분의 지혜를 듣기 원할 때에도, 결국에 나는 옳지 않은 일을 행한다! 나는 나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실패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문제는 단지 우리가 반역을 하고 어리석은 일을 한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죄가 우리로 하여금 도덕적으로 전신마비환자가 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옳은 일을 행할 수 없다. 우리들 중 누가 친구에 대한 우리의 분노가 항상 의로운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어떤 남편이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듯 자신의 부인을 항상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어떤 사람이 자신의 이웃을 자기 몸처럼 늘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심지어 우리가 옳은 일을 하기를 바랄 때에도 이러한 것들에 실패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도덕성이 죄에 의해 위축되어왔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창조되어진 목적대로 선을 행할 수 없다. 이것은 궁극적 질병인 죄의 가장 비극적인 결과중의 하나이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뜻대로 삶을 살아갈 수 없다. 우리에게는 구원과 치유와 용서가 필요하다. 즉,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지속적인 변화를 가능하게 만드는 이 땅에 오신 왕의 소식인 복음이 필요하다. 이것만이 우리의 개인적인 소망이며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 사역의 근거이다.
하나님 왕국의 복음은 고난이나 고통, 상실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다. 그것은 나 자신의 죄된 본성으로부터 나를 구하기 위해 오신 구속주(Redeemer)에 대한 소식이다. 그분의 구원은 이러한 피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나의 반응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변화를 가져온다. 구속주는 반역자들을 제자들로, 그리고 어리석은 자를 겸손한 경청자로 변화시키신다. 그분은 불구자가 다시 걷게 만드신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가지고 삶에 직면하며 반응할 수 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변화시키실 때,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의 삶에서 그분이 하시는 일에 동참하도록 하신다. 당신이 당신의 삶에서 구속주의 사역에 반응할 때 당신은 그분의 손에 잡힌 도구가 될 수 있다.
 







필독서1
필독서2


1.신체문제 상담챠트

2.뇌구조 상담챠트

3.정신구조 상담챠트

4.마음이해 상담챠트

5.변화과정 상담챠트


번호 분류 이미지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조회
16 301상담역사
정신과적 문제 아티클, 번역본 관리자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7-07-02 7 1882
15 201문제진단법
논문: 상담문제에 대한 도형적 진단기법연구 관리자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7-07-02 7 2249
14 101개론
국민일보에 실린 성경적상담연구원 소개 기사입니다. 관리자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7-06-30 2 1912
13 101개론
데이빗 포울리슨, Competent to Counsel?, 논문번역 일부 관리자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7-06-29 5 2823
12 301상담역사
성경적상담학의 개요 관리자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7-06-21 5 2155
11 104방법론
S c r i p t u r e O p e n s B l i n d E y e s (영문) 1 관리자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7-06-04 2 4175
10 301상담역사
로저스 상담비평 관리자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7-05-23 6 2924
9 301상담역사
행동주의 상담비평 관리자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7-05-07 7 3004
8 301상담역사
인지치료 상담비평 관리자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7-04-28 7 3057
7 301상담역사
프로이드 상담비평 관리자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7-04-20 6 3153
6 301상담역사
'기독교상담의 이론과 실제' 수업계획서, 아신대 관리자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7-04-19 5 1755
5 301상담역사
행동수정과 기독교상담, 수업목차, 아신대 관리자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7-04-19 7 1827
4 301상담역사
행동수정 수업계획서, 아신대 관리자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7-04-19 3 1813
3 101개론
'상담학 개론' 강의 계획서, 웨신대 관리자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7-04-19 2 2068
2 104방법론
번역 아티클, "닫혔던 눈을 뜨게 하기 - 자료수집에 대한 새로운 관점" 관리자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6-12-15 6 1898
104방법론
단행본,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사람들(Instruments in the redeemer'… 관리자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6-07-03 4 19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