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상담센터 소식지
2019년 10월 <22호>: 주제- 감정조절
<1>추천도서
-악한분노, 선한분노
화산처럼 폭발하는 분노부터, 일상적인 짜증, 불평까지...
평생 씨름해야 할 분노의 문제,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
이제 하나님의 관점으로 분노를 바라보고, 선하게 분노하는 법을 배우라!
“분노에 관한 책들 중 단연 최고의 책이다!”
“내가 읽은 분노에 관한 책 중 가장 완성도가 높고 성경적이면서도,
통찰력이 넘치고, 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된다.”
“나는 죄악 된 분노의 문제로 매일 씨름한다.
이 책은 내 문제의 근원을 이해하는 데 탁월한 도움을 주었다.”
그리스도인에게 분노는 정말 중요한 주제다. 분노를 잘 다루지 못하면 당신은 인생을 망칠 수도 있다. 그러나 분노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인생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어질 것이다. 분노는 단순한 감정의 분출이 아니다. 분노는 당신이 무엇을 소중하게 생각하는지를 보여 주는 바로미터이며, 당신의 생각, 판단, 가치관 등 ‘당신의 전부’와 관련된 것이다.
저자는 격렬하게 표출되는 분노뿐 아니라 자기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감춰진 분노까지 모두 다룬다. 또한 짜증, 불평, 원한이나 악감정으로 괴로워하는 이들이 삶에서 실제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도움을 제시하며, 상황이 엉망일 때 건설적으로 반응하는 방법에 대한 지침도 제공한다.
이 책은 분노의 본질에 접근하며, 당신의 분노 이면에 내재한 죄와 교만을 밝히 드러낸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실현되는 통로로 선한 분노를 소개하면서, 분노의 감정을 선하게 사용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해 가는 길도 제시한다.
아마 우리는 평생 분노의 문제와 씨름하며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저자의 안내를 따라 하나님의 관점으로 분노를 바라보고 조금씩 해결해 나간다면, 갈등 속에서도 평화를 유지하며 선하게 분노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저자: 데이비드 폴리슨
하버드 대학교에서 심리학(B.A.)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신학(M.Div.)을 공부하고 펜실베니아 대학교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필라델피아 기독교상담교육원(CCEF-Christian Counseling & Educational Foundation)에서 교수와 카운셀러로 활동하며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상담학을 가르치고 있다. 성경적 상담 저널(The Journal of Biblical Counseling)의 편집인이기도 한 그의 저서로는 「성경적 관점으로 본 상담과 사람」(그리심), 「성경이 말하는 영적 전쟁」(생명의말씀사) 등이 있고, 공저로는 「심리학과 기독교 어떤 관계인가?」(부흥과개혁사) 등이 있다. 30년 이상 상담에 종사한 경험을 바탕으로 많은 저술 활동을 하고 있으며, 미국과 유럽 등 여러 나라에서 활발히 강의하고 있다.
*목차
추천의 글1
저자 서문
Part1 우리의 경험
Chapter1 분노하는 사람들
Chapter2 당신에게도 심각한 분노의 문제가 있는가?
Chapter3 당신의 분노는 어떤 유형인가?
Part2 분노란 무엇인가
Chapter 4 “그건 좀 아니지!”
Chapter 5 분노는 당신 전체와 관련된 것
Chapter 6 분노: 본성인가, 습관인가
Chapter 7 자비에 기초한 건설적인 불만 1: 인내와 용서
Chapter 8 자비에 기초한 건설적인 불만 2: 관대함과 건전한 갈등
Chapter 9 우리는 선하게 분노할 수 있는가?
Chapter 10 최고의 분노, 최고의 사랑
Part3 어떻게 변화될 수 있는가
Chapter 11 자신의 분노를 살펴보기
Chapter 12 하나님은 더 큰 은혜를 부어 주신다
Chapter 13 나의 분노를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기 위한 8가지 질문
Part4 해결하기 어려운 분노의 문제
Chapter 14 “이 문제를 절대 극복하지 못할 거야”
Chapter 15 일상의 분노
Chapter 16 자신을 향한 분노
Chapter 17 하나님을 향한 분노
Chapter 18 마지막 조언: 미래의 분노
감사의 글
추천의 글2
<2>이 달의 학생인터뷰: 김지인 성도님
1.지금 어떤 일을 하시며 현재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평일에는 간호사로 직장을 다니고 있고, 교회에서는 청년부 셀리더와 학생부 선생님으로 섬기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2.어떠한 계기로 이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셨나요?
제 주변에 여러 가지 상황과 해결되지 않는 마음의 문제로 인해 힘들어 하는 청년들이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옆에서 함께 하며 같이 이야기하고, 나름대로 조언도 해보고, 같이 고민했었으나 결국 그들은 교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몇년간 이러한 일들을 옆에서 지켜보며 저 또한 좌절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만약 내가 마음의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상담을 하게 되면 성경을 기반으로 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배우게 되었습니다.
3.공부하는 부분에 있어 어려운 점은 없는지요?
다른 일을 하면서 시간을 내어 꾸준히 공부를 하는 것이 힘들다면 힘든 부분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반대로, 이렇게 좋은 강의를 인터넷으로 편한 시간에 들을 수 있다는 점이 정말 감사한 점인 것 같습니다.
4.성경적 상담을 공부한 후 삶 속에서 활용하고 계신 부분이 있으시다면?
우선적으로는 제 자신의 생각이나 고민 등을 인식할 때 제가 가진 감정이나 욕구가 무엇인지 한번씩 생각해보게 됩니다. 어떤 욕구가 나에게 있고, 그것이 어떻게 표출되고 있구나 생각해보게 됩니다. 또한, 어떠한 선택을 하게 될 때 저의 바람보다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어떠한 방향으로 가는 것이 맞는 것인지 고민하게 된 것 같습니다.
5.앞으로의 목표는 무엇인가요?
마지막 까지 강의를 잘 듣고 배워서 성경적 상담을 통해 교회의 지체들을 세워가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해결되지 않는 고민들로 답답해하는 지체들과 대화할 때 들어주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배우고 싶습니다.
6.기도제목을 말씀해주세요^^
예수 그리스도 반석 위에 서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 가진 자가 되게 하소서. 매일 매일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소서. 주님의 사랑의 통로가 되게 하소서.
[출처] 마음의 소원을 이루는 소원상담센터 - https://swcounsel.org/b/notice-835
<3>인터넷 상담글과 답변
[감정조절] 제가 진짜 무슨 병인가요?
일단 저는 평택에 사는 1996년생 19살 사람입니다
2012년도 10월 말, 고등학교 1학년 말 시절
저는 반 친구들과의 다툼에서 시작된 담임과의 오해로 인한 담임과의 5개월 이상의 지속된 극단적 갈등을 견디지 못하고등교거부사태까지 이르른 끝에 자퇴했는데요
뭐 자퇴과정에서 부모님과 친척들하고 당연히 마찰이 있었고 학교측과 부모님 그리고 친척들에게 온갖 소리를 다 들었습니다
학교, 담임측이 한 말에 의해 저에 대한 오해가 쌓이신 부모님과 친척들은 저를 신경정신과병원에 입원시키려다가 사촌형에 의해 가까스로 저지된 경우도 있었고 신경정신과 의원에 강제적으로 내원하여 약물치료를 강행하려다가 주위 이웃들과 친구들에 의해 저지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물론 부모님과 친척들이 공인된 기관에 의한 정상판정과 주위의 증언 등으로 저에 대한 오해를 푸셨으나 그 과정에서 제가 조금 심리적으로 충격을 먹었는지 예전에는 안그랬는데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검정고시도 합격하고 수능준비도 하고 있기는 하고 자퇴한 학교 친구들과도 지금도 가끔씩 만나 잘 지내고 있고 어찌 보면 이 모든 일들의 발단이라 할수 있는 그 싸운 친구한테서도 종국엔 사과를 받기는 했으나 그 당시 그 기억이 자꾸 떠올라 저를 좀 힘들게 합니다. 가끔씩 그 기억이 심하게 떠올려지면 가만히 아무것도 못하고 마음을 30~40분 안정을 시켜야 할 경우도 있고요 엄마, 부모님, 친구 뭐 기타 뭐 사람들과도 갑자기 예민해져가지고 큰 싸움이 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악몽을 꾸기도 하고 수능공부할때 집중도 잘 안됩니다. 요즘 들어 이런 상황들이 좀 자주 일어나는 것 같아서 제 마음을 어떻게 안정시켜야 할지 제가 혹시 공인된기관에서 정신적으로 정상판정을 받았지만 무슨 신경정신과적으로 큰 병이 생겼나 싶어 이렇게 문의드립니다. 의원에 방문하는건 조금 그런데 의원에 가야할 정도인가요? 전문가님들의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답변:
삶속에서 생기는 갈등들에 대해서 매번 병원에 가서 약을 해결을 하려고 한다면, 결국엔 그 갈등들을 해결하지 못하고 늘 몸의 문제로만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정말 병원에 가야하는 문제가 있지만, 병원에 가지 말아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님의 경우도 바로 병원에 가지 말아야 하는 문제였습니다. 다만 몸에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에 그 경계선상에 있습니다. 여기서 더 심해져서 더 예민해지고 더 안정을 필요로 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더 감정의 혼란을 겪는다면 그럴 땐 병원에 가야 하는 문제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병원에 가게 되는 경우는 더 안좋아 졌다는 뜻이기 때문에 결코 좋은 일이 아닙니다. 가능한 그렇게 되지 않고 해결할 수 있도록 다음의 방법을 사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난 일들을 정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현재는 감정에서 몸에 영향을 주고 있는 상태인데 그 감정은 사건으로 분해될 때 더이상 몸에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들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말하자면,
이해되는 사건--> 이해되지 않는 사건 --> 감정의 문제 --> 몸의 문제
다음과 같이 발전되는데 그것을 거꾸로 돌리면 몸의 문제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일 어려운 점은 '이해되지 않는 사건'을 '이해되는 사건'으로 올리는 부분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상담이 필요할 수 있기 때문에 도저히 혼자서 되지 않는다면 상담을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전에 가능한 이해되지 않는 사건을 이해하려고 노력해 보십시오. 어떤 식으로든지 해답을 찾고 정리를 해보십시오. 그게 가능하다면 더 큰 몸의 문제가 생기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출처] 마음의 소원을 이루는 소원상담센터 - https://swcounsel.org/b/ask-10195
<4>상담설교
47고후 7;10-11 구원을 이루는 근심 사망을 이루는 근심
2009.7.19.주일 주일오전 / 3감정
'희노애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기쁨과 화냄과 슬픔과 즐거움을 의미하는 한자성어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감정상태를 보여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 인간은 이와같은 '희노애락'을 겪으면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 어떤 장소에 있든 다 이러한 희노애락을 느끼면서 살아갑니다. 이것은 정신적인 상태일 뿐만 아니라 우리 몸과 연결되어서 육체적인 자극이 되기도 합니다. 기쁨을 느낄 때 분노를 경험할 때 슬퍼할 때 즐거울 때 우리 몸도 역시 동일하게 반응합니다. 그래서 희노애락의 감정 속에서 몸의 상태도 상승되거나 혹은 하강합니다. 많이 웃다보면 젊어지기도 하지만 많이 울다보면 더 늙게도 됩니다. 많이 기뻐하면서 병든 몸이 건강해지고 많이 괴로워하면서 없던 병도 생기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의 상태는 몸의 상태와 연결되어있고 이것은 어떤 식으로든 서로 영향을 주고 받고 있습니다.
이 연결관계를 발견한 어떤 사람들은 일부러 몸에 좋은 영향을 미치기 위한 노력을 합니다.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기뻐하고 더 많이 즐겁게 살다보면 몸이 좋아진다는 원리입니다. 물론 이러한 노력이 일리는 있습니다만 그것이 쉽지만 않은 이유는 항상 그렇게 긍정적으로 살다보면 때로 죄까지도 모두 간과해버린다는 것입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으니 특별히 기준을 가지고 살아갈 필요가 없고 애써 어떤 목표를 위해 노력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사상적 근원을 가만히 따져보면 육체의 행복과 정신의 평안을 추구했던 동양의 도교나 혹은 서양의 헬라철학과도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살아가기는 어렵습니다. 그것이 목적이 되어버리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좋은 마음, 좋은 생각, 좋은 감정, 그로 인한 좋은 건강상태를 갖는 것이 목표이면 어떤 것도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새로운 시도는 엄두도 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기본적인 모든 상황의 변화가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상황을 변화시키지 않고자 노력하다보면 사실 하나님의 뜻이나 계획과는 마찰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과 세상이 주는 마음의 차이를 이해해야 합니다. 모든 기쁨이 다 좋은 것이 아니고 모든 분노가 다 나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슬픔이 다 나쁜 것이 아니고 모든 즐거움이 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과 세상이 주는 것이 있습니다. 이 둘을 구별할 때에 우리는 인생 가운데 반드시 경험하게 되는 '희노애락'의 감정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목표를 이루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감정과 세상이 주는 감정은 어떻게 다를까요? 오늘 사도 바울은 이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근심,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룹니다. 이는 절대 후회하지 않는 놀라운 유익입니다. 그러한 근심, 그러한 고민이 없다면 회개를 하지 않을 것이고 구원에 이르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근심, 두려움, 괴로움이 있었기 때문에 회개를 했고 결국에는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존 번연이 쓴 유명한 기독교 소설인 '천로역정'에 보면 주인공 크리스천이 회심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성이 장망성이고 앞으로 다가올 심판을 피하려면 천국의 성을 향해 나아가야 된다는 성경말씀을 보게 됩니다. 그런 다음부터 그의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과연 천국의 성을 향해 자기가 머무르던 장망성을 떠날 것인가, 아니면 그냥 눌러 앉을 것인가의 고민이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크리스천은 천국의 성을 향해 나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럴 때 부인과 자녀들이 그의 발을 붙들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크리스천을 성에 남게 하려고 했지만 마침내 그는 이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성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아내와 자녀들도 아버지를 따라서 성을 떠났습니다.
이러한 고민과 근심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도교적인 가르침에서 본다면, 혹은 헬라철학적인 가르침에서 본다면, 아니 이렇게 어려운 말이 아니라 그냥 행복을 추구한다는 세속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와 같은 근심은 얼마나 어리석은 것입니까? 하지만 지금 당장 행복을 누리려고 하다보면 나중에는 괴로울 것이라는 세상사의 이치를 생각해보면 결코 어리석은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괴로웠지만 나중에는 행복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얻은 것이 행복이기 때문에 그 행복은 오래 오래 지속되는 행복인 것입니다.
그러나 똑같은 근심이라고 해도 사망을 이루는 근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창세기에서 처음 발견됩니다. 가인은 자신의 제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고 동생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받으시자 근심합니다. 사실 그 감정은 근심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분노에 가까왔습니다. 그 근심의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결국 가인은 아벨을 들에서 쳐죽이고 맙니다. 감정의 상태는 동일했을 지 모릅니다. 괴로움의 정도도 비슷했을 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겪는 이유가 달랐습니다. 천로역정에 나오는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위해 하는 근심이었고 창세기에서의 가인은 자기의 위신과 명예 때문에 생겨나는 근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구원을 이루었지만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은 바로 우리들의 삶 속에서 나타납니다.
우리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위해서 고민합니까? 그러면 그것은 세상근심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까를 위해서 고민합니까? 그러면 그것은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근심과 감정 속에서 목표는 나를 세우고 나를 채우고 나를 높이기 위함입니까? 그러면 세상 근심입니다. 그러나 가지고 있는 모든 근심의 목표가 하나님을 세우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높이기 위함이라면 그것은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입니다. 반드시 구원을 이루게 됩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하는 고민은 보기에는 세상 근심과 잘 구별이 가지 않는데 어떻게 그런 근심이 하나님의 구원을 이룰 수 있을까요? 시작은 초라하지만 결과는 놀라운 것입니다. 애초에는 구별이 잘 가지 않지만 나중에는 확실한 구별이 생기게 됩니다.
처음에 이러한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아주 작은 감정상태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그것은 우리를 간절하게 합니다. 원하고 찾고 바라게 만듭니다. 모든 것은 그것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 바로 모든 감정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바라지만 모든 일을 뜻대로 쉽게 되지 않습니다. 바라는 것이 단순한 것이 아니면 아닐 수록 그렇습니다. 바라는 것이 높은 것이면 더욱 새로운 문제가 생깁니다.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그럴 때 우리는 변명합니다. 여기서 변명한다는 것은 잘못에 대해서 변명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논쟁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혹은 과정 중에 무슨 실수가 없었는지를 살펴봅니다. 그것이 변명하는 것이고 그러다 보면 여러가지 감정이 생겨납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이 있었다면, 그 사람에 대한 미움이 생길 것이고 자기 때문에 그렇다면 자신에 대한 절망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한 감정상태는 계속 고조됩니다.
'얼마나 분하게 하며'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이나 사람에 대해서 우리는 분통을 터트립니다. 왜 이렇게 모든 것이 잘 되지 않을까를 괴로워합니다. 일을 방해하며 협조하지 않는 모든 상황이나 사람에 대해서 우리는 분노합니다.
'얼마나 두렵게 하며' 이제는 혹시나 안좋은 일이 생길까봐 걱정이 됩니다. 실패할 까봐 전전긍긍합니다. 아무리 마음을 편하게 하려고 해도 제대로 되지 않을 때에 우리는 두려움에 빠집니다. 모든 것이 다 망치게 되는 것은 아닌가 걱정하게 됩니다.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는 목표를 놓치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힘주시기를 기대합니다. 우리 스스로 일을 시작한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그것을 얻어야만 하는 절박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길을 열어주시기를 간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합니다.
'얼마나 열심있게 하며' 또 다시 노력합니다. 그냥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일이 되도록 계획된 대로 이루어지도록 계획된 대로는 아니더라도 가능한 그와 비슷하게는 될 수 있도록 노력합니다. 그래서 열심을 내어 자지 못하고 먹지 못하며 쉬지 못하면서 노력합니다.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때로는 스스로를 자책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해주셨는데 자신의 잘못으로 혹은 자신의 노력부족으로 또는 자신의 믿음부족으로 이루지 못했다고 후회합니다. 스스로를 벌하면서 자책하기도 하고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기도 합니다.
보십시오. 이러한 감정을 겪는 것이 때로는 세상 근심과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이 근심들은 이미 어느 수준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한계입니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붙들고 있습니다.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하고 누리고 취하려는 것이 세상 근심이었다면 하나님의 근심은 하나님을 붙들게 하고 의지하게 하며 하나님 안에서 노력하게 해서 마침내 이루는 그 무엇인가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깨끗함'입니다. 이런 일들을 하면서 하나님앞에서 성실하였음을,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버리지 않았음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았음을 보이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이 말하는 '너희 자신의 깨끗함'입니다.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저는 서두에서 구원을 이루는 근심과 사망을 이루는 근심이 있다고 했습니다. 모든 근심이 다 똑같은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계속 악순환을 이루는 근심이 있고 그러한 근심의 중심에는 자기 자신이 있습니다. 그래서 반복하고 반복하며 반복합니다. 어리석은 일을 또하고 또하며 또합니다. 더 큰 근심이 생겨나고 더 큰 감정이 쌓이면서 점차 사망으로 가까이 가다가 마침내 사망하고 맙니다.
하지만 구원을 이루는 근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하나님 앞에서 간절하게 하고 변명하게 하며 분하게도 하고 두렵게도 하며 사모하게 하고 열심있게 하다가 벌하게도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엎치락 뒤치락 하면서 좌충우돌하면서 붙들은 것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상으로 구원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애쓰고 노력하며 감정을 갖게 하시고 마침내 구원을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에서를 두려워하면서 모든 처자와 종들과 재산과 소유물을 다 먼저 보내고 혼자서 다가올 미래를 걱정하며 근심하고 있었을 때에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천사의 모습으로 오셔서 그와 씨름을 벌이십니다. 야곱은 자기 문제로 산적해 있었지만 나타난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을 합니다. 바로 이 장면에서 우리가 놀라는 부분은 고뇌하는 인간과 씨름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 속에서 야곱과 씨름해 주시며 야곱의 근심이 그의 감정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되게 바꾸어 놓으십니다. 결국 야곱이 하나님께 간구하고 간절히 요청했던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복'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 그 복을 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냥 세상의 복이 아니고 그냥 세상이 줄 수 있는 평안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고 하나님만이 보장해주실 수 있는 그 축복과 평안을 그는 원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셨고 그의 이름은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변화됩니다. 사람의 뒤발꿈치나 붙드는 사람에서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근심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이 세상을 살면서 감정을 가지고 희노애락을 느끼며 어떠한 종류의 근심을 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근심은 구원을 이루는 근심입니까, 사망을 이루는 근심입니까? 그것을 가지고 주님께 나와보십시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가지고 주님께 나와보십시오. 주님께 가져와서 내려놓고 하소연을 해도 좋습니다. 주님께 내려놓고 애통해 해도 좋습니다. 여러분이 가해자일 수도 있고 피해자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주님께 가지고 와서 주님의 방법대로 근심해보십시오. 주님의 방법대로 씨름해 보십시오. 그것은 얼마나 여러분을 간절하게 할 것입니까? 얼마나 여러분을 변명하게 할 것입니까? 얼마나 여러분을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할까요? 그러나 무엇을 하든지 그것은 깨끗해질 것입니다.
마치 세탁기 안에 있는 세탁물이 이리저리 요동치며 그 때가 벗겨지는 것처럼, 옷을 빨래하는 아낙네가 그 옷을 몽둥이 내리치며 물로 적시며 그 때를 벗겨내는 것처럼, 모든 감정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왔을 때 얻는 것은 우리 자신의 깨끗함입니다. 회개를 하기도 하고 스스로 벌하기도 하고 새로운 결심을 갖기도 하면서 우리가 얻는 것은 우리의 깨끗함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었습니다. 바로 우리를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문제를 주시고 목표를 주셔서 우리 자신이 점도 없이 흠도 없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올바르게 서게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가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로써 하나님 바로 그분의 목표가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놀라운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했던 근심 속에서 말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기 원하시는 그분께 여러분의 감정을 드리십시오. 상관마시라고 하지 마시고 여러분의 마음을 드리십시오. 주님은 그 마음을 새롭게 해주실 것입니다.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깨끗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마음의 변화가 우리 모두에게 넘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신앙의 소원을 이루는 소원교회 - https://swchurch.org/b/sermon-6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