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지] 2021년 11월 <46호> 주제: 주식코인중독
*소원상담센터 소식지
2021년 11월 <46호>
주제: 주식코인중독
<1>성경적상담의 용어설명 : “ 주식코인중독 ”에 대한 성경적 이해
현대사회 속에서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짧은 시간에 많은 수익을 낼 수 있는 방법을 찾던 사람들이 주식이나 코인에 몰입하는 경우가 많이 생기고 있습니다. 계획적이고 이성적이며 장기적인 의미로 주식과 코인에 투자를 하는 것은 현대 사회의 하나의 투자방법으로 있을 수 있는 일이겠지만 즉흥적이고 감정적이며 절박한 마음으로 주식코인 투자를 하는 것은 결국에는 가장 고통스러운 결과를 맞이하는 결말로 끝이 나고 맙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다시 반복해서 주식코인투자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한 두 번의 실패로 쓰라린 맛을 보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더 큰 투자를 감행해서 결국에는 모든 것을 잃어버려야 끝이 나게 되는 주식코인중독으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양상은 도박중독과도 같아서 일시적으로 커다란 수익을 얻기 위한 과도한 노력이 끊임없이 반복되며 파국을 일으키고 그것이 단순히 몇 몇 개인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로까지 발전되기 때문에 심각한 문제의 근원이 됩니다.
물론 전문가들이 제안하는 대로 안정적인 투자와 합리적인 판단에 근거한 자산운영의 의미로 주식과 코인을 한다면 그것은 결코 개인의 문제가 될 수 없고 더 나아가 사회문제로까지 확대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전문가들이 제안하는 대로 하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그만 둘 수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적은 금액을 투자하지 않고 많은 금액을 투자하며 적은 시간을 들이지 않고 많은 시간을 들이며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수준에서 하지 않고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 수준으로 한다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그러니 그것이 점차 절박해지고 감정적이 되며 몰입하게 되면서 결국에는 가장 하지 말아야 하는 결정을 내리고는 그 것으로 인해서 파국에 이르게 되어 버립니다.
이것을 막기 위해서 해야 하는 것은 자신이 왜 주식과 코인을 하는가를 의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투자를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단순히 더 큰 수익이라면 문제가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런 이유로 감정이 생기고 그런 이유로 판단이 흐려지며 그런 이유로 악수(惡手)를 두게 되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다 수익을 얻을 수 없고 꼭 손해를 보는 사람이 생기는데 욕심을 갖는 사람은 항상 손해를 보는 사람 편에 서게 됩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항상 묘수(妙手)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한 묘수는 욕구를 버리고 소원을 생각할 때 얻을 수 있습니다. 항상 얻고자 하면 잃어버리게 되지만 항상 잃고자 하면 얻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버려야 하는 것은 욕구이고 얻어야 하는 것은 소원입니다. 소원을 얻게 될 때 주식과 코인의 투자경험은 인생에서의 커다란 자산이 됩니다.
이를 위해서 욕구가 되는 경제적인 수익이나 심적인 편안이나 마음의 즐거움 등을 위해서 주식, 코인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스스로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목표가 자극이 된다면 과감히 모든 투자활동을 접거나 중단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 다음에 장기적인 계획과 자신이 운용할 수 있는 능력의 한계와 어떤 부분에서 손해(리스크)를 감당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을 찾아서 추구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많은 것을 얻게 만듭니다. 단순히 돈만 생각한다면 얻은 것과 잃은 것으로 손익계산서가 나오겠지만 그 이상을 생각한다면 인생에서 더 많은 것을 항상 얻을 수 있습니다. 신뢰할 수 있는 계획, 잃어버릴 수 있는 능력, 어려움을 감당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 등은 투자를 하든 회수를 하든 그 어떤 행위를 하든 항상 무엇인가를 얻는 시간이 됩니다. 그럴 때 주식코인에 대한 시간을 제어하고 조절해서 할 때 하고 하지 않을 때에는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무엇인가를 얻으면 항상 충만함을 얻게 되기 때문에 미련이 남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시 자신이 다른 해야 할 일을 한 다음에 생활의 한 사이클을 돌고 나서 소원을 이루는 투자행위를 하면 그것이 계속해서 선순환을 이룰 수 있습니다.
유명한 투자자들은 항상 투자 생각만 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해야 할 것을 하고 할 수 있는 것을 한 다음에 다시 때가 되었을 때 투자를 합니다. 그렇게 하기 때문에 오래 하고 잘 하며 항상 남들과 다른 묘수를 생각합니다. 만약 주식코인을 하고자 한다면 이렇게 욕구를 버리고 소원을 가지고 해야 하고 그렇게 하기 어렵다면 주식코인을 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하는 욕구를 버리고 하지 않을 수 있는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주식코인 이외의 다른 분야에서 더욱 소원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히려 주식코인을 하지 않는 것이 더욱 큰 마음의 담대함과 자랑과 풍성함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해 본다면 모두가 한다고 해서 나도 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모두가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나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주식코인을 하게 되는 경우와 상황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하는 한계와 조건이 있습니다. 자신이 처한 위치와 의미를 잘 기억한다면 주식코인에 대한 올바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혼자 생각해 보아도 뾰족한 대답을 얻지 못한다면 그 분야에 대해서 성경적 상담을 받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자기 속에 있는 복잡한 생각을 상담사와 함께 풀어서 나누다 보면 자신이 왜 주식코인을 하려고 하는지, 아니면 왜 주식코인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지를 입 밖으로 풀어서 설명할 수 있는 좋은 자아성찰의 계기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https://swcounsel.org/b/research1-76
<2>이 달의 학생인터뷰
1.지금 어떤 일을 하시며 현재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인턴상담사로 상담도 하고 강의도 들으면서 부족한 부분들을 계속 배워나가고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청년부 셀리더, 새신자 섬김 등을 하고 있습니다.
2.어떠한 계기로 이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셨나요? 대학교 때 정신, 심리 관련 강의들이 흥미로웠고 항상 관심이 갔던 것 같습니다. 또, 교회친구들 중에서 정신과 문제로 약을 먹고 상담을 하는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 친구들도 소문난 심리상담소에서 더 이상 할 상담이 없다고 말할 때까지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선 위로는 올라가지를 못했습니다. 많은 돈을 투자했지만 다시 악순환의 반복이었고 결국 교회를 나가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웠고,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성경적상담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3.공부하는 부분에 있어 어려운 점은 없는지요? 강의 듣고 공부하는 것 자체는 재밌습니다. 다만, 어떻게 제 것으로 만들고 실제 사례에 적용할 것인지는 아직 노력해야 할 부분인 것 같습니다. 여러 가지 과목을 배웠는데 그것을 상담에 적용하려면 통합적으로 녹아져야 하는 것 같습니다.
4.성경적 상담을 공부한 후 삶 속에서 활용하고 계신 부분이 있으시다면? 가장 좋은 것은 저에게 적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잘못 생각하고 있던 것들도 바로잡게 되었습니다. 또, 교회 친구들을 상담해주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힘들어하는 모습을 봐도 해줄 수 있는 것이 들어주는 것 밖에는 없었는데 이제는 성경적인 원리 안에서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5.앞으로의 목표는 무엇인가요? 하나님께서 쓰시는 성경적상담사로 잘 성장하여서 하나님이 만나게 해주시는 사람들을 돕고 싶습니다.
6.기도제목을 말씀해주세요. 겸손한 마음으로 변치 않고 주님을 따르는 자가 되길 원합니다.
https://swcounsel.org/b/notice-1097
<3>인터넷 상담글과 답변
주식 끊는법 도박 끊는법 안녕하세요 20살 사회초년생입니다 1200으로 600이된 주식했다 망한케이스죠 이제 20살인데 정말 안될걸 한것 같아요 제가 돈 잃고 너무 힘들어 하니까 아무튼 엄마가 다음엔 절대 하지말라며 400을 매꿔 주셨습니다 이제 제손에는 1030이있어요 사실은 엄마 몰래 300가꼬 하다가 또 30만원 날림 개죽고 싶음 그러고 바로 현금으로 뺏어요 더 ㅈ될까봐 지금 막 남북경협 날라갈것 같아서 또 하고 싶고 원래 잃으면 더하ㅣ고 싶다는게 주식인데 상한가 2방만 맞으면 전 원금회복 인데 라는 생각 하루종일 하고 맨날 토론방가보고 뉴스보고 주식 사지도 않았으면서ㅏ 맨날 입맛만 다시고 있습니다 제발 끊는법 알려주세요 여기서 더잘못되면 엄마가 피눈물 흘리실겁니다
앞으로 일 열심히 해서 돈벌고싶은데 주식에선 하루가 몇십만원이 왔다리 갔다리 하니 알바나 일해서 버는돈이 안들어와요 진짜 피쳐폰으로 폰바꾸고 한달 살까 생각중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돈벌어서 4~5천모으면 또 주식 할까봐 하... 두렵습니다 근데진짜 할것같아여 ㄹㅇ; 후 시바 이걸어쩌지 증말 ,,,, 죽겄습니다 도박은 평생 못끝는다던데 저진짜 큰일 난것 같아요,,, 도와주 세요 어떻게 하면 중독같은거 끝을수있나요 술도안하고 담배도 안하는 청적스럼 사람인데 주식이라는 중독에 걸려버렸습니다....
[상담답변] 안녕하세요. 소원상담센터 신미진 상담사입니다.
https://swcounsel.org/b/ask-11828
<4> 상담설교
42눅23;33-43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우리의 절제_1
2014.9.28.주.주일오전.
*개요: 73절제, 4극본, 5복음서, 5은혜-7실천 눅 23: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눅 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뽑을새 눅 23: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눅 23:36 군병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눅 23:37 가로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눅 23:38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눅 23: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눅 23: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눅 23:41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눅 23: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눅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제 9월 마지막 주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추석으로 시작되어서 휴식이나 혹은 많은 가족행사의 의미가 있었는데 그래서 그런지9월은 특히나 더 빨리 지나간 것 같습니다. 그속에서도 우리가 하려고 했던 것을 잊어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달에 우리가 생각하고 애쓰려고 했던 주제는 ‘절제’였습니다. 절제는 헬라어로ἐγκράτεια (egkrateia)라고 하고 이를 영어로 하면 ‘self-control’ 혹은 ‘temperance’라고 합니다. 이 말을 형용사로 쓰면 ‘temperate’이고 이는 절제된, 온화한, 차분한 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이것이 보여주는 의미는 절제는 일차적으로 행동의 통제를 의미하지만 더 나아가면 성품의 변화로도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제란 단순히 내가 나쁘게 하는 어떤 일의 자제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어떤 행동이든 과잉하지 않고 과도하지 않고 지나치지 않는 온화한 모습을 나타내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절제는 말에 있어서도 적용될 수 있지만 또한 우리의 삶의 행동, 모습, 태도 등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삶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절제의 열매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에게 이러한 절제가 필요할 까요? 그것은 그렇지 않을 때에 우리의 모습은 무절제의 모습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무절제한 모든 모습으로 인해서 생겨난 일들은 바로 ‘죄’입니다. 우리가 적절히 통제하고 관리하고 조절했다면 좋았을 많은 일들이 무절제하고 남용하고 과잉될 때에 결국은 죄의 고통스러운 결과로 나타나게 됩니다. 부부간에 연인간에 한참 사이가 좋다가도 욕심을 내고 과도하게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다보면 큰 마음의 상처를 받게 됩니다. 가족간에 화목하게 보내다가도 좀더 자신의 뜻을 더 요구하고 추구할 때 결국에는 감정이 안좋아지게 되어버립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열심히 신앙생활 해보려고 해도 교회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자신의 위치에 대해서 욕심을 내다가 결국에는 실족하고 범죄하고 맙니다. 이 같은 일은 우리가 있는 이 사회 속에서 얼마든지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1994년 5월, 한국사회를 충격에 빠트렸던 부모살해사건이 있었습니다. 새벽에 부부가 남편은 안방에서 부인은 부엌에서 칼에 찔려 죽었는데 그 범인이 알고보니 그집의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아버지를 안방에서 칼로 찔러 죽이고 놀라서 도망가려는 어머니를 부엌에서 살해한 이 희대의 끔찍한 살인사건은 그 아들의 이름을 따라서 ‘박한상 사건’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정신병을 앓아서 이기적이고 무계획적이며 공부에 흥미가 없고 불성실했던 이 아들은 성인이 된 후에는 도박과 나이트클럽을 전전하는 불성실한 삶을 살다가 부모의 100억대 재산을 노리고 부모를 살해하는 범죄를 저질렀던 것입니다. 부모님은 그를 고치기 위해서 병원에 다니고 학교를 옮겨주고 원하는 미국유학도 보내주었지만 결국 그 자유로운 두 손과 두 발로 새벽에 집에 들어와 부모님을 죽이는 극악무도한 일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그리고 더 비극적인 사실은 그들이 모두 교회에 다니던 사람들이었다는 점입니다.
그 모든 슬픔과 괴로움과 죄악들이 바로 인간의 죄때문에 생긴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지시고 죽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의 죄값을 지고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에 달리심은 바로 우리의 죄와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그 두 손과 두 발이 모두 대못에 박혀서 십자가에 매달리셔야만 했습니다. 우리의 죄로 인해서 예수님이 치루신 댓가는 그냥 죽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잃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속에서 처절한 고통과 괴로움을 겪는 것이었습니다. “눅23: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그렇게 가운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두 사람의 행악자도 함께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셨지만 바로 우리 죄때문에 그렇게 형벌받으신 것이었지만 함께 있던 두 죄수들은 온전히 자기 죄로 인해서 십자가에 달린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구원받는 인간들의 죄를 지시고 죽으시는 구세주와 오직 자기 죄로 인해서 형벌받아서 죽는 죄인이 함께 동일하게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차이는 실제로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그저 똑같이 동일하게 죽는 것뿐이지 인간의 죽음에 어떤 차이가 있을 수 있는가라고 생각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태어나 죽는 모든 인간의 죽음 속에서 다 자신이 죽는 것에 대한 회한과 슬픔과 괴로움만이 있을 뿐이지 그 죽음에 어떤 다른 의미가 있을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할 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구주이신 예수님의 죽으심은 달랐습니다. 그 어떤 인간의 죽으심과도 달랐습니다. 그분은 이 세상에서 죄가 하나도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또한 그분의 신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러나 그 고귀하신 분이 이 세상의 죄많은 인간들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그 죄는 전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하면서 생긴 일들이었습니다. 그 죄인들은 날때부터 죄인이었고 살아있으면서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죄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자원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르셨습니다. 그들을 대신하여 형벌 받으셨습니다. 그 형벌은 죄인 각 사람이 져야만 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을 예수님이 다 인계하여 받으셨습니다. 그들 중에는 자기가 그런 죄를 짓고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도 깨닫지 못하는 자들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을 위해서 주님은 형벌받으셨습니다. 각 사람이 져야 하는 모든 죄를 온전히 자기 자신이 다 지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온몸에 채찍질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자신이 메고 온 십자가 위에서 주님은 이 양손과 양발에 대못이 박히는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머리에는 가시관이 박히셨습니다. 그리고 그 형벌과정이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백주 대낮에 모든 사람들 앞에서 펼쳐졌습니다. 그속에서 주님은 진정한 구세주이셨습니다. 주님이 그 모든 형벌을 받으시는 것은 바로 죄인들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통 중에서도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눅 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뽑을새”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죄를 사해주시기 위해서 대신 형벌받는 고통의 시간이었지만 악한 자들은 기뻐하고 즐거워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지만 저희는 예수님의 옷을 가지기 위해서 제비뽑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예수님은 모진 고통과 괴로움에 헐떡이며 가뿐 숨을 몰아쉬고 계셨지만 저희는 구경하며 비웃었습니다. “눅 23: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눅 23:36 군병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눅 23:37 가로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이 모든 과정이 예수님을 죽이는 자들에게는 자신들의 원하는 일을 온전히 성취하는 만족스러운 형벌이었지만 주님에게는 그 모든 과정은 바로 그 죄인들을 위한 대신 형벌 받으시는 구원의 시간이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자신을 구원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 죽으시고 계시는 것이었는데 그들은 바로 그 앞에서 스스로를 구원하고 하면서 조롱하며 비웃고 예수님을 더욱 고통스럽게 하고 있었습니다. 왜 그들은 자신을 위해서 죽으시는 예수님의 뜻을 깨닫지 못했을까요? 왜 그렇게 예수님의 말씀과 사랑을 이해하지 못했을까요? 왜 끝끝내 예수님이 죽으시는 순간에도 그렇게 예수님을 부인하며 거부하며 멸시하며 조롱했을까요? 예수님은 바로 그들을 위해서 대신해서 형벌을 받고 계셨는데도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죄를 사해주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미련한 사람들을 봅니다. 그리고 그들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으심 앞에서 구경하며 조롱하는 자들은 바로 우리들이기도 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애쓰시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얻을 수 있는 유익만을 생각하며 악을 저지르면서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행하는 우리가 바로 그 어리석은 아들입니다.
아까 그 패륜 아들은 왜 그런 악한 짓을 했겠습니까? 부모가 시키는 일은 끔찍한 굴레이자 얽매이는 것이고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은 자유롭고 쾌락적이며 즐기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모의 뜻을 어기고 결국 부모를 죽여 유산을 차지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그런 일을 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뜻대로 산다면 자신들의 자유로움과 활달함과 정치적 자유와 종교적 권위를 잃어버릴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 모든 순종과 매임과 따라감 대신에 인도자인 예수님을 죽여서 자유를 얻고자 했던 것입니다. 절제하지 못하는 우리도 이와 동일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모든 self-control과 temperance와 온유함과 차분함과 절제함을 우리가 따르지 않으려고 할 때 그것은 결국 그리스도를 외면하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능욕하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죽이는 것이 됩니다. 정확히 그일을 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그 편에 서게 되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님께 끊임없는 자유를 요구합니다. 이미 그 자신의 어리석음과 죄악됨을 깨달으면서도 더 큰 자유와 더 큰 즐거움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있던 한 강도도 그것을 원했습니다. “눅 23: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그는 그 상황에서도 그리스도를 비방했습니다.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도대체 무엇을 원한 것입니까? 이 상황에서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무엇을 하기를 원했던 것인가요? 이미 행한 악에도 성이 차지 않아서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서 더 죄를 지으며 살아가기를 원했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죽이고 한 사람이라도 더 고통스럽게 하고 한 사람이라도 더 괴롭히기를 원한 것입니다. 그가 그 변화되지 않은 상태로 다시 사회에 나가기만 하면 그것은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일입니까? 그는 자신이 한 일에 불구하고 자신의 죄에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런 생각속에서 그는 여전히 움직이는 흉기입니다. 아무런 제지없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악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죽으시는 예수님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미 앞서 가시는 주님을 따라갈 때에 우리는 그분 편에 서게 됩니다. 주님 앞에서 구경하는 자가 아니라 함께 우리도 그속에서 우리의 악함과 우리의 강팍함을 깨닫고 우리가 우리의 손을 십자가에 부착하고 우리의 발로 십자가를 딛고 설 때에 그 때에 비로소 그 죽으심을 온전히 따르는 자들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우리의 죄성과 우리의 한계를 인식하고 해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정말 주님을 따르고 주님 편에 서고 주님의 구원하여주심을 감사하는 자가 될 때 우리는 기꺼이 우리의 매임과 우리의 고통당함을 감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 그런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아버지로서의 책임이 있습니다. 어머니로서의 책임이 있습니다.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아들로서, 딸로서, 형으로서, 언니로서, 동생으로서, 친척으로서, 이웃으로서, 친구로서, 아는 사람으로서의 매임이 있습니다. 그속에서 우리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요구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좀더 유익을 누리는 삶을 위해서, 좀더 쾌락적인 삶을 위해서, 좀더 편안한 삶을 위해서 다시는 돌아갈 수도 없고 돌아가서도 안되는 인생길을 자꾸만 뒤돌아가려고 한다면 그 자체가 우리에게 더 큰 악을 저지르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좀더 좋은 삶을 살았더라면, 좀더 좋은 사람을 만났더라면, 좀더 좋은 일을 했었더라면 하는 모든 후회는 얼마나 우리로 하여금 절제되지 못하고 책임지지 못하고 감당하지 못하고 온유하지 못하고 온화하지 못한 삶을 살게 합니까? 인생의 종착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우리는 그 목적지를 바라보면서 뒤돌아갈 생각을 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갈 생각만 해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눅 23:41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눅 23: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그것이 우리의 최종적인 기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모든 대신 형벌 당하심을 생각할 때 우리가 원하는 유일한 것은 바로 그 나라에 주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께만 기억되고 주님만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말씀해 주십니다. “눅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토록 십자가에서의 자유로움을 부르짖었던 행악자에게는 아무 말씀이 없었던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나라에 함께 있기를 고대하고 부탁했던 그 다른 편 죄인에게는 낙원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도 바로 그 나라에 가고 계셨기 때문에 그 나라를 소망하는 죄인을 주님은 불쌍히 여기시고 거두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온전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시고 이루시며 사모하셨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유와 행복을 추구했던 그리스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그 나라를 사모하고 온몸을 바치셨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입니다. 그 편에 서는 자들로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함께 십자가에 매달리며 우리의 행동을 절제하며 우리의 자유로움이 아닌 신앙의 얽매임 속에서 주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속에서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다 모이게 될 것입니다. 인생의 실패자가 아니라 진정한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를 따라서 인생속에서 절제의 열매를 이루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얽매임속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그 영광을 이루며 살아가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https://swchurch.org/b/sermon-1025
<5> 학생연구실
도박만큼 무서운 '주식 중독'… 뇌가 고장난다 이슬비 헬스조선 기자 2021.03.16 09:00
단기 투자자 중심 '중독' 호소… "나만 못 벌어" 우울증까지 한 손으로 주식 그래프를 꽉 쥐고 있는 모습 심리적 요인에 따른 주식 투자는 중독을 유발해 뇌 기능을 저하할 수 있다.
코로나 블루로 우울감에 빠졌던 김모(26)씨는 주식으로 다시 활기를 되찾았지만, 곧 더 큰 우울감에 빠졌다. 힘들게 모은 돈을 되레 잃었기 때문. 김씨는 “잃은 돈도 돈이지만 심리적으로 불안해졌다”며 “장이 열리지 않는 주말에는 초조함과 심란함을 느꼈고, 작은 이슈에도 신경질적으로 변했다”고 말했다. 팬데믹과 함께 찾아온 주식 붐으로 개인투자자들의 ‘주식 중독’ 호소가 늘어나고 있다. 중독 증세는 잘 관리하지 못하면, 우울증은 물론 뇌 변화까지 일으킬 수 있어 주의해야 한다.
◇주식 중독자, 코로나19 팬데믹 이후로 늘어 주식 투자는 이미 새로운 ‘문화’로 자리 잡았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지난 4일 기준 주식거래 활동계좌 수는 3862만1934개다. 투자자 한 명당 4~5개의 계좌를 가지고 있다고 고려해도 주식 투자 인구수는 800만명을 넘는다. 그만큼 중독 증세에 시달리는 사람도 늘었다. 한국도박문제관리센터 연구부 박애란 부장은 “주식 중독으로 센터를 찾는 사람이 최근 확실히 늘었다”며 “2019년에 비해 2020년 상담 건수는 64% 급증했고, 지난 1월 한 달 동안에만 238명이 주식 문제로 430건의 상담을 받았다”고 말했다.
◇단기적인 주식 투자, 접근성 좋은 도박일 수도 전문가들은 주식과 도박 중독이 비슷하다고 본다. 뇌에 즉각적인 보상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돈을 벌고, 잃는 게 바로 결정돼 뇌에 강력한 자극으로 인식된다. 박애란 부장은 “장기적인 투자가 아닌 단기적인 투기는 사행성을 띤다”며 “불확실성에 돈을 걸게 하고, 땄을 때 희열을 느끼게 해 더 많은 투자를 하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켜 도박과 같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장기적인 투자는 높은 확률을 계산해 합리적으로 선택하게 하지만, 단기적인 투기는 심리적인 요인을 따라가는 경우가 많다.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조성준 교수는 “적절한 경제 교육 없이 주식을 권장하는 문화도 중독을 야기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고 본다”며 “도박은 하면 안 된다는 사회적 분위기라도 있지만, 주식 투자는 권하는 분위기라 쾌락적 자극에 약한 사람이 죄책감 없이 투기에 뛰어들기 쉽다”고 말했다.
◇주식 중독, 전두엽과 중피질 경로 손상해 주식으로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는 것도 정신건강학적으로 보면 ‘중독’ 질환의 일환이다. 조성준 교수는 “도박 중독은 1990년부터 세계보건기구(WHO)에 의해 질병코드를 부여받은 질환으로 뇌에 손상을 준다”며 “주식으로 충동을 조절하지 못하게 돼도 도박 중독과 같은 기전으로 뇌에 손상을 입을 수 있다”고 말했다. 도박이나 주식 투기와 같이 즉각적인 뇌의 보상으로 쾌락 호르몬인 도파민이 과다하게 분비되면, 도파민을 분비시켰던 자극을 원하는 보상회로가 계속해서 자극되면서 전두엽과 중피질 경로가 손상된다. 뇌 변화가 지속하면 욕구 조절의 어려움, 의사결정의 문제 등 뇌 기능에 문제가 생긴다.
주식 중독은 우울증과도 연관성이 깊다. 도박은 적은 사람이 돈을 따지만, 주식은 비교적 많은 사람이 돈을 벌기 때문이다. 자신에게만 안 좋은 일이 일어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조성준 교수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도박은 하지 않던 사람들도 주식 중독에는 쉽게 빠진다”며 “주식을 시작하고 다른 일에 집중하지 못해 업무 수행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면서 자기 효능감이 떨어져 우울증이 오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우울증은 인지 기능을 떨어트린다. 일명 행복 호르몬인 세로토닌 신경전달 물질 분비량이 줄어들면 각성이 떨어지고, 집중력이 떨어져 인지 기능이 저하되게 된다.
◇건강한 주식 투자하려면 즉각적인 보상 심리 피해야 주식 투자를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심리적 요인에 따르지 말고, 정확한 정보를 기반으로 분석해 투자하라는 것이다. 즉각적인 보상 심리를 이겨내야 한다. 조성준 교수는 “주식 투자를 포함해 매일 목표와 우선순위를 세우는 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며 “오늘 하루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을 분명히 세우고 순서대로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 충동이 혼자 힘으로 이겨내기 힘들 정도라면 센터를 이용하면 된다.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법에 의한 실행 기구인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도박문제관리센터에서는 주식 중독 문제를 무료로 상담해주고 있다. 언제든 1336번으로 전화만 하면 된다. 12회기 정규상담을 진행하고, 동반 질환이 있다면 외래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가까운 센터도 소개해준다.
출처 : https://health.chosun.com/site/data/html_dir/2021/03/15/2021031502119.html
https://swcounsel.org/b/study-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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