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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 2021년 12월 <47호> 주제: 소외감



*소원상담센터 소식지 

 

 

 2021년 12월 <47호>

 


주제: 소외감

 

 

 

 

<1>성경적상담의 용어설명 : “ 소외감 ”에 대한 성경적 이해

 

연말연시에 많은 사람들이 다른 누군가와 흥겹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 그 반대 쪽에서는 외롭고 우울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소외감을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특히나 어디에서든지 어느 때든지 떠들썩하고 화려하며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형성되면 형성될수록 그 반대에서 소외되고 외면되며 소통을 이루지 못하는 경험들이 생겨납니다. 그럴 때 밝은 쪽에 소속되지 못하고 어두운 쪽에 있게 되면 누구나 소외감을 느끼게 됩니다. 같은 문화권에서 그런 마음을 경험하게 될 수도 있고 다른 문화권에서 그런 마음을 경험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세대 차이나 연령 차이나 성향 차이 등의 제한된 요소들이 강조되면 이와 같은 소외감은 더욱 커지게 됩니다. 단순히 개인의 문제로만 그치지 않고 확장되고 커져가게 되면 사회적인 문제로 이어지게 됩니다. 소외당하거나 소외하는 요소가 무엇인가에 따라서 종교문제, 성별문제, 인종문제, 계급문제, 성향문제 등이 심각한 주제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언제든지 어느 때든지 누구에게든지 이러한 소외감을 느끼지 않게 하고 그 반대인 일체감이나 소속감을 다른 사람이 느끼게 하거나 자신이 느끼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소외감 속에서 다른 부정적인 감정들이 양산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개개인이 스스로 해결할 문제이기도 하지만 단체나 공동체도 신경을 써야 하는 문제입니다. 소외감으로 인해서 생겨나는 부정적인 감정들은 더 큰 다른 문제로 확장됩니다. 갈등이 되기도 하고 분노가 되기도 하며 좌절이나 절망이 되어서 안으로 폭발하거나 밖으로 폭발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각 개인은 어떻게 소외감을 극복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하고 각 공동체나 단체나 집단은 그런 소외감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적절히 대응해야만 합니다. 그럴 때 그런 문제 속에서 더 큰 목표를 발견하고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고 그러면 더 풍성한 열매를 얻게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소외감을 대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를 고민할 때 그 다음에 해야 하는 일은 왜 소외감을 느끼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완벽하게 알 수는 없다면 어느 정도라도 예상하고 파악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경우에는 소외감을 느낄 것 같지만 전혀 느끼지 않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 소외감을 느꼈다면 그 소외감 속에서 느껴지는 감정과 원하는 내용이 무엇인가를 자세히 알거나 혹은 어느 정도는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그 문제를 어떤 방향으로 해결을 해 나갈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악한 일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 그것이 악하다고 생각하고 동조하지 않는다면 그는 소외감을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그런 부분에 빠져들어가고 싶지 않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결정을 통한 의지의 실현을 이루고 있는 것 뿐입니다. 그럴 때에는 소외감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소외감을 확실하게 느낀다 하더라도 그 속에서 원하는 것은 들어오려는 것인지 나가려는 것인지 참여하려는 것인지 주도하려는 것인지에 따라서 소외감의 대처방법이 달라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외감을 느끼는 각 개인은 자신의 소외감 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그 소외감을 해소할 수 있을지를 알 수 없게 됩니다. 그것을 오해한다면 소외감이 해소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소외감은 더욱 큰 부정적인 감정으로 확대되어서 결국에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안 좋은 방향으로 악화되어버릴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단체나 집단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외감을 느끼는 한 개인이 있을 때 일방적이고 지혜롭지 못한 방법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는 커녕 더욱 악화만 시킬 뿐입니다.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고 그 필요에 맞게 대응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면 기존에 있는 모든 좋은 선순환적인 요소들을 전부 포기해 버리거나 엉뚱한 방향으로 공동체를 인도할 수 밖에 없습니다. 소외감의 의미에 맞게 그 반대를 생각해야 하는데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결정해 버린 뒤 그에 따라서 움직이려고 한다면 선순환을 이루는 악순환의 반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악순환으로 들어가 버리게 됩니다. 소외감을 해결하기 위해서 다른 또 다른 사람들을 소외하는 악순환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에는 파국을 일으키게 됩니다. 원인에 대한 자세한 이해는 그것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게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주도적이고 지속적이며 해로운 문제의 핵심을 발견했을 때 그 문제의 해결은 의외로 간단하게 일어납니다. 그것을 찾기 위한 과정이 어려운 것이지 그 원인을 찾고 나면 그 다음에는 생각보다 간단하게 소외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어떤 나이많으신 분이 컴퓨터를 사용하다가 마우스가 갑자기 안 되었는데 그 원인을 알지 못해서 한참을 당황해 하면서 이런 저런 방법을 다 써보았다고 합니다. 그래도 안 되서 결국에는 다른 젊은 분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그 젊은 사람은 대뜸 마우스의 배터리가 있는지를 확인해 보더니 배터리가 다 되어서 안 되는 것이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몇 시간 동안이나 답을 찾지 못해 애를 태웠던 나이 많으신 분은 그 말을 듣고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그렇게 간단한 이유를 알지 못해서 자신이 했던 고생을 생각하니 어이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와 마찬가지로 한 개인이 느끼는 소외감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잘 알고나면 의외로 쉽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든 문제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원인을 알고 나면 더더욱 절망스러운 상황이 되기도 합니다. 소외감을 느끼게 하는 이유나 소외감을 느끼게 되는 이유가 엄청난 욕심과 오랜 기간 지속되어 왔던 많은 사람들의 근원적인 생각의 한계 속에 있는 것이라면 쉽게 해결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원인이 크든 적든 방향성을 갖게 되고 그 방향성을 꾸준히 추구한다면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선순환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선순환에 대한 소망을 하루 아침에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소외감이 없고 그것을 느끼지 않고 그것을 잘 해소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계획과 준비는 그로 인해서 더욱 발전된 개인이나 단체나 집단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될 것입니다.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소외감의 반대로 선순환에서 이룰 수 있는 좋은 목표는 일체감, 소속감, 친밀감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계속 소외감에 시달리면 더욱 더 안 좋은 감정에 빠지게 되지만 그런 소외감을 극복하기 위해서 일체감, 소속감, 친밀감을 목표로 해서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기 위한 노력과 과정을 만들어 나갈 때에 새로운 방식을 개발할 수 있고 새로운 생각을 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소외감을 해결하는 좋은 계획과 준비가 될 것입니다. 원래 일체감을 강조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소외감을 해소하기 위해서 더욱 의미를 강조한다면 일체감은 소속감이 되고 친밀감으로도 발전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목표는 단지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목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더 중요한 초점이 됩니다.

연말에 이르러서 이전 해가 바뀌고 새로운 해가 찾아오는 시간이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갑자기 소외감에 사로잡히거나 이에 대한 아무런 준비없이 낙심하게 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성경적 상담의 원리로 잘 준비하고 대비해서 삶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는 귀중한 시간을 보내게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https://swcounsel.org/b/research1-77

 

 

 

 

 

<2>이 달의 학생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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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지금 어떤 일을 하시며 현재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교회와 교회내에 있는 대안학교의 실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2.어떠한 계기로 이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셨나요?

교회에서 일을 하며 앞으로의 일들과 교회에서 일하면서 활용할 수 있는 부분들이 없을까 고민하는 중에 부임해오신 부목사님의 소개로 성경적 상담을 알게되었고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3.공부하는 부분에 있어 어려운 점은 없는지요?

배우면 배울수록 깊고 넓은 성경적상담을 접하게 됩니다. 지금 듣는 과목이나 과제들이 느끼기엔 그저 바닷가에서 튜브타고 파도타는 정도 인 것 같습니다. 평소에 상담이라는 분야에 지식이 전무하다보니 생소해서 현재로는 모든 과목들이 개인적으로 어려움들이 있습니다. 그래도 이전에 공부해오신 선배님들을 보면서 그리고 목사님의 강의를 통해 조금씩 조금씩 알아가고 있고 자신의 심리적인 부분들을 마주하게 되면서 성경적인 것으로 바꾸어 가고 있습니다.

 

 

4.성경적 상담을 공부한 후 삶 속에서 활용하고 계신 부분이 있으시다면?

성경적 상담을 공부하면서 저에게 적용 할 수 있는 부분이 가장 좋은 것 같습니다. 잘못 생각하고 행동했던 부분들이 상담을 배울수록 좋은 모습으로 개선되어 지는 것을 느낍니다. 주변 사람들을 만나면서 고민을 들을 때 상황을 바라보는것도 성경적인 시각으로 변하게 되고 부족하지만 상담을 해주고 있습니다.

 

 

5.앞으로의 목표는 무엇인가요?

곧 있을 3급 시험을 잘 치러서 성경적 상담의 더 깊은 곳으로 들어 가보고 싶습니다.

상담을 통해 나 또한 하나님앞에 변화되고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치고 싶습니다.

 

 

6.기도제목을 말씀해주세요.

상담 공부를 통해 먼저 제 안의 잘못 정의된 부분들이 성경적인 원리 들로 변화되는 것이고

쉽지 않은 상담공부를 끝까지 공부해서 하나님께 쓰임 받는 도구가 되길 소원합니다. 


https://swcounsel.org/b/notice-1100


 

 

 

 

<3>인터넷 상담글과 답변

 

<고민 들어주세요. /관계단절, 대인관계>

중 2입니다. 반에 저희무리 5명이 있는데
처음엔 같은 초 나온 저포함 4명끼리 놀 생각이였는데 소문안좋은 어떤 애가 자연스럽게 끼여서 5명이 됐어요.

처음엔 괜찮은 애구나하면서 5명끼리 잘 놀았는데 5명이라서
2명씩 짝지어야하는 상황일 때마다 제가 혼자가 되더라구요 왜냐하면 5명 중 2명은 절친이고 한명은 다른 한명이랑 더 친해서 제가 항상 뒤에 혼자가고그랬어요

한 번은 소문안좋은 애가 저한테 와서 다른무리랑 더 친하지 않냐고 그러고 그 다른 무리랑 싸웠다면서 다른무리 뒷담을 저 빼고 까더라구요 소외감이 많이 들었어요 제가 그 다른무리랑도 말도 썪고하거든요..ㅜ

그래서 무리 중 저랑 5년친구인 한명한테 내가 혼자일 때 좀 그렇다면서 급식 먹을 때도 좀 같이가주고 그래달라는 식으로 말했는데 반응없이 지도 모르겠다면서 그러더라구요

체험학습가는 날이 있어서 자리를 어떻게 앉을지 정해야했어요
사실 그 전부터 지들끼리 나는 누구랑 앉을거야~이러면서 대충 말맞춰진 것 같던데 그 날 소문안좋은애가 다가와서 그래도 무리니까 물어봐준다는 식으로 저한테 어떻게할래? 이러는데
전 거기서 나도 같이 앉고싶어 이러면 눈치없는 애가 될까봐
그냥 너네 4명이서 앉아 이랬어요

걔가 너는? 이랬는데 제가 모르겠어..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그냥
그래! 이러면서 가더라구요 근데 혹시 내가 싫은건지 뭔지..그래서 물어봤는데 싫은게 아니라고 하더라구여 너가 먼저 다가오면 같이 놀면됀다라고 해서 오해가 풀렸고 저는 그럼 나도 같이 앉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근데 제가 이미 너네끼리 앉으라한 상황이였기에 올때만 같이 앉게해달라했어요 근데 아무도 안바꿔주더라구요

지네들도 혼자 앉기 싫은 건 알겠는데 저같으면 얘도 심심할것 같으니까 내가 바꿔줘야겠다이러면서 바꿔줄 거 같은데 진짜 이게 친구에요? 혼자 얼마나 울었는지..
이건 친구가 아니지 않아요? 저를 싫어하는 게 맞다는 거를 돌려말한거랑 뭐가 다릅니까ㅜㅜ

참고로 이야기만 들으면 제가 찌질이 왕따 성격이상한애로 보일 수도 있겠습니디만 다른반에 친구도 많고 속마음털어놀친구도 있을만큼 성격에 문제가있는 애는 아니랍니다ㅜ

저는 이제 어떻게해야할까요?ㅜㅜ 체험학습가서는 다른무리랑 놀면돼는데 그래도 2학년 남은 생활이 안두렵지만은 않네요..
걔네랑 절교해야하나요?

 

<답변>

안녕하세요. 소원상담센터 심정옥 상담사입니다.

현재 4명의 친구들은 학생에게 어떤 의미이며, 어떤 위치에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적어주신 글을 보아서는 학생과 마음을 진심으로 나누는 사이는 아닌 것 같습니다. 특히 소문 안 좋은 친구가 친구들 분위기를 안좋게 하는 것 같네요.

친구 사이에는 애매한 관계들이 존재합니다. 애매한 중간지점에서 바른 방향성을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학생에게 좋지 않은 친구들은 멀리하고 좋은 친구들을 가까이하는 기준이 필요합니다. 아무런 결정 없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면 학생이 피해 보고 마음 아파지는  부분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갈등 속에서 학생의 친구 관계를 점검하는 기회로 삼는다면 갈등을 통해 새로운 방향성을 세워가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학생과 서로 마음이 맞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진정한 친구가 분명히 있습니다.

더 나아가 학생 스스로가 누군가에게 의미있는 친구가 되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에게 좋은 친구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기보다는 적극적인 자세로 친구를 찾아보시고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대할 수 있는 친구가 되어주세요. 지금의 친구들과 갑작스러운 절교보다는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고 자연스럽게 정리될 친구가 있을 것이고 함께 할 친구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친구 관계를 4명으로 제한하지 마시고 더 다양한 친구들을 만나며 의미 있는 만남을 만들어 나가보세요.

힘내세요. 도움 필요하실 때 언제든지 상담 문의주세요. 감사합니다.

#3도덕적 해석

 

https://swcounsel.org/b/case-11613?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C%86%8C%EC%99%B8%EA%B0%90&sop=and

 

 

 

 

 

<4> 상담설교

 

 

42눅15; 25-32 큰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속뜻_1

 

 2013.10.13.주. 주일오전.

 

*개요:    [54용서] {4복음서신서} <3분석> [5은혜]-[6결심]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왔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 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누가복음15장에 나타나는 이 탕자의 비유는 근본적으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때문에 생겨났습니다. 애초에 그들은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려고 예수님께 나아왔을 때에 불평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죄인들을 영접하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불평하였습니다. 그것은 죄인들이 받아들여지고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데에 대한 반감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이렇게 세리와 죄인들을 싫어하고 용납하려고 하지 않는데 대해서 탕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3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그렇기 때문에 탕자의 비유는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로 돌아와서 모든 것이 해피엔딩으로 끝나고 즐거워하게 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정말 중요한 부분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재산을 상속받았을 때 떠나지 않았던 첫째 아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 탕자의 비유에서 더 중요하고 핵심적인 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탕자의 비유는 애초에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세리나 죄인들을 위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세리나 죄인들을 싫어하고 비난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원래 바리새인들은 이스라엘의 바리새파에 속해서 경건과 거룩을 위해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또한 서기관들은 어려서부터 성경말씀에 능통해서 구약의 말씀을 암송하며 그 말씀을 필사하며 연구하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이 탕자의 비유는 예수님 시대의 ‘그들’에게 대한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시대의 ‘우리’에게 대해서 주어지고 있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어느 사회에나 성경에 나오는 세리와 죄인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있고,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만약 죄인과 세리에 대해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생각을 하고 있다면 우리가 바로 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같은 자들이 되어버립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용서를 해주셨지만 우리는 용서를 하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첫째 아들에 대해서 그의 아버지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맏아들이기도 하고 첫째 아들이기도 한 큰 아들과 탕자이기도 하고 둘째 아들이기도 했던 작은  아들의 차이점은 집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큰 아들은 한번도 집을 떠나본 적이 없었습니다. 바로 그랬기 때문에 뭔가 불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난 한번도 일탈을 해본 적도 없고 난 한번도 반항도 해본 적도 없고 난 한번도 불평을 해본 적도 없다’는 것이 바로 큰 아들입니다. 이것은 출생순위가 문제가 아닙니다. 첫째 아들이 떠나고 둘째 아들이 남아있을 수도 있습니다. 에서와 야곱의 경우에서는 큰 아들인 에서가 아버지 이삭을 떠났고 작은 아들인 야곱이 이삭과 함께 있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한번도 집을 떠나본 적도 없고 명령을 거역해본 적도 없던 큰 아들은 아버지에게 이렇게 하소연합니다.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큰아들이 정말로 원한 것은 무엇일까요? 정말 염소새끼를 달라는 것일까요? 아니면 둘째 아들에게 살진 송아지를 잡아주지 말란 뜻인가요? 이러한 말을 우리는 모태신앙인 사람들에게서 듣습니다.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던 사람들이 새롭게 믿은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종종 이러한 고백을 합니다. 자신은 교회안에서 자랐고 성장했지만 오히려 그래서 신앙이 미지근하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는 일탈이나 방황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래서 신앙에 감사가 없고 감격이 없다고 말합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모태신앙인 자들도 일탈을 좀 경험해 보아야 하나요? 반항도 좀 해 보아야 감사와 감격을 가질 수 있을까요? 아니면 새로 믿은 자들에게는 은혜나 은사가 있으면 안되는 것일까요? 그들에게 구원의 즐거움과 기쁨이 너무 넘쳐나면 안되는 것인가요?

 

이러한 구도는 모태신앙인가 아닌가로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교회에 온지 오래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나타납니다. 새로온 사람들을 위해 신앙이 초보인 성도들을 위해 교회가 송아지를 잡을 때, 혹은 송아지를 잡는 듯한 그런 관심과 애정을 기울일 때에 오래된 성도들과 기존의 성도들이 불평을 시작합니다. ‘목사님은 변했어요, 나에 대한 관심이 사라졌어요, 교회는 새로온 어떤 사람들 중심으로만 움직여요’  자,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새로 오는 사람들에게는 송아지는 커녕 닭한마리라도 잡아주면 안되는 것일까요? 애정과 관심은 절대 기울이면 안되는 것일까요? 기뻐하고 즐거워하면 안되는 것일까요? 아니면 상대적으로 기존교인들이 더 높아지고 더 존경받아야 한다는 것인가요?

 

뿐만아니라, 성경과 신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서도 동일한 구도가 생깁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서적을 많이 읽고 신학을 공부하고 성경본문을 암송하고 그 암송한 내용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간절함이 있는데 반해서,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신앙서적을 읽어본 적이 없고, 유명한 기독교 저술가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훌륭한 신학자나 그들의 신학이나 그들의 주석을 본 적이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자신이 읽은 성경말씀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 속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그 모습은 잘못된 것일까요? 그가 정규신학과정을 하지 않았기에, 그가 정식으로 성경을 배운 적이 없기에, 그가 성경을 몇번 통독을 해본 적도 없기에, 새벽기도를 하지 않기에, 은사를 받은 적이 없기에, 그런 즐거움은 옳지 않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어떤 식으로든지 그와 하나님의 관계가 형성되는데에 있어서 이런 저런 것이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는 어떤 근거가 존재할 수 있을까요?

사실, 그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가 좋다면 그것은 기쁜일이 아니겠습니까?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그를 받아주셔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그가 즐거워한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만족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 모든 것을 폄하하며 비판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먼저된 자들이 가질 수 있는 이러한 모든 생각들은 인간적인 기준으로 판단하고 재단해서 낮추려고 하는 것입니다. 최소한 나보다는 낮게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기준으로 올라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기준으로 내리려는 마음입니다. 모든 것을 자기 뒤에 놓고 싶은 것이지요. 나보다는 못한 상태로 존재하게 하고 싶은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결국 원하는 것은 내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내가 여전히 신앙에서 앞선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 내가 여전히 먼저 교회에 온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 내가 여전히 신앙에서 높은 위치에 있고자 하는 마음, 그런 마음들이 하나님의 더 깊은 속뜻을 알지 못하는 안타까운 마음들이 되어버립니다.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그 무엇인가가 있는데 그것을 알기보다는 자기 수준만큼 이 모든 세계의 수준을 격하시켜 버리려는 것입니다. 슬프고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희 집에서 둘째가 태어났을 때 큰애는 열살이었습니다. 큰애와 둘째 사이에 나이차이가 너무 많았습니다. 저희 부부는 큰 애가 혹시 새로 태어난 동생으로 인해서 소외감을 느끼지는 않을까를 걱정했습니다. 자연히 엄마 아빠는 동생에게 신경을 많이 쓰게 되고 동생때문에 분주해지니까 언니로서 뭔가 부족함을 느끼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큰애는 별로 그런 것에 자극은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었지요.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우리의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큰 애는 소외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개인주의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동생을 잘 돌보지 않았습니다. 동생을 돕는 것을 힘들어했던 것입니다. 우리 부부는 이 문제와 씨름을 했습니다. 얘기도 많이 했고 혼도 많이 냈고 기도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소외감도 아니고 개인주의도 아닌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우리가 했던 핵심은 이것이었습니다. 아이를 그 자신의 미성숙한 마음에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마음으로 성장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이의 마음이 이미 잘못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이렇게 저렇게 고친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오직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마음이 자라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빠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고 엄마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그 마음을 나누었을 때에 비로소 큰애는 자신이 언니고 부모님의 귀한 큰딸임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도 이와 동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옹졸한 수준으로 끝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 자신의 그 편협하고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세계관으로 신앙이 축소되어 버리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정말 심각한 퇴행입니다. 자기손해입니다.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 영광스럽게 신앙생활을 시작했지만 자기 권세와 자기 자리와 자기 위치에 연연하는 이기적인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된다면 그것은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세속적인 인간으로 전락해버리고 마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눈을 열어주십니다. 큰 아들에게 찾아온 아버지처럼 우리의 눈을 열어주십니다. 이 아버지는 큰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여기서 ‘얘’라고 번역된 부분이 영어로는 무엇일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영어로는 ‘My son’입니다. ‘내 아들아’라고 아버지는 큰아들을 불렀던 것입니다. 헬라어 원어로는 ‘teknon’,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아버지는 정겹게 그 아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말하였습니다. 항상 아버지와 함께 있어서 얻은 것은 아버지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가 자기에게 송아지 하나 내주지 않아서 즐기지 못했다고는 하나 그것을 원하지 않은 이유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 자기 것인데 그렇게 허비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큰아들의 위치였습니다. 이미 아버지의 충만한 사랑 안에 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태신앙인 사람들이 왜 일탈과 반항을 경험해야만 합니까? 그들은 이미 교회에서 자랐고 선에 익숙한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이 몸에 체화된 사람들이 아닙니까? 교회에 다니고 교회사람들과 교제하며 헌금을 하고 교회일을 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문화가 된 사람들이 아닙니까? 이미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계십니다. 교회생활을 힘들게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계십니다.

교회에 먼저 온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을 통해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어차피 교회를 나가는 것이고 어차피 십일조를 내고 헌금을 하는 것이 일상생활이고 당연히 교회봉사를 하는 것이고 또 그것을 당연히 여기는 사람들을 통해서 교회는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그들을 통해 하나님은 새로운 일을 이루십니다. 더 세워지고 더 채워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느정도 받쳐주는 사람들이 있어야만 하나님의 일을 존재할 수 있습니다. 먼저 온 사람들은 그렇게 가장 기본적인 바탕인 토대를 만드는 교회의 주춧돌이요 교회의 기둥들입니다.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그속에서 분명한 의미를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들이 진정으로 교회를 이루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 가을에 류현진 선수가 미국프로야구에서 선전하고 있다는 소식은 박찬호를 잇는 즐거운 소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원래 야구는 미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영국에서는 크리켓이라는 운동이 있지만 본격적인 야구는 미국에서 1845년 뉴욕의 알렉산더 카트라이트라는 사람이 근대 야구의 규칙을 확립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미국 사람들은 야구를 즐깁니다. 선수나 관중이나 모두 즐거워합니다. 반면에 영국사람들은 야구를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야구를 싫어한다고 합니다. 비신사적인 운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대신 크리켓이라는 운동을 합니다. 그러니 류현진 선수가 미국으로 가니까 환영을 받는 것이지 영국으로 갔다고 해보십시오. 영국에서는 찬밥신세를 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사람들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만약 먼저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들이 새롭게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을 존경하고 격려하며 귀하게 여겼다면 더욱 기쁨으로 하나님 안으로 들어오려고 했을 것입니다. 신학자들이 성도 개개인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시하며 그들의 이해와 깨달음을 격려하였더라면 성도들은 더욱 성경을 읽으면서 기쁨을 누렸을 것입니다. 또 정말 잘 모르는 부분에 고견을 구하고 자문을 얻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된 자들이 신앙의 기쁨을 희석시키고 감소시켰을 때 결국에는 관심이 사라졌습니다. 또한 신앙도 약화되었습니다. 먼저 있는 자들이 나중된 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생산과 소멸의 원칙에 따라서 자연히 교인은 줄어들게 됩니다. 사람들의 보람과 즐거움도 사라집니다. 결국 그속에 하나님의 기쁨도 사라집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렇게 만들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의 음성으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관점으로 바라볼 때만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잃었다가 얻은 것이 기쁨이 됩니다. 즐거움이 넘칩니다. 그것이 당연해집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의 마음 속에는 인간적인 기준을 넘어서서 신적인 기준이 생깁니다. 나보다 앞섰는가 뒤섰는가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으로 기뻐하고 하나님이 즐거워하시는 것으로 즐거워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서 진심으로 주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보며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제 큰 아들이 아버지의 설명을 들으며 이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되기 그 이전에 그의 모습이 어떠하였가를 생각해 보고 마치려고 합니다.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왔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 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맏아들이 밭에서 열심히 일하고 돌아왔을 때 그는 집에서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물어보니 그 풍류와 춤추는 소리는 자기를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신의 동생’이라는 말도 듣기는 했지만 그 동생은 이미 자신에게는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일 뿐이었습니다. 내 동생이 아니라 그 아들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자신을 위한 춤과 노래가 아니었고 아버지를 위한 춤과 노래도 아니었고 동생을 위한 춤과 노래였습니다. 자신이 뒤쳐졌고 소외되었다는 생각에  분노가 시작되었고 집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현실속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같은 그리스도인들의 축복과 은혜에 배가 아파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패망과 심판에 기뻐하고 같은 그리스도인들의 실패와 좌절에 만족해 합니다. 그런 시대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그런 심정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거기에서 모든 갈등과 오해가 시작되었지만, 우리가 그렇게 하지 맙시다. 거기에서 다르게 한다면 어떻게 다르게 했을까요? 이 모든 하나님의 시각과 그 마음과 그 속뜻을 이해하고 있는 여러분 같으면 그럴 때 그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선포될 때 그 용서하심이 기쁨으로 축복으로 나타날 때 축하해 줍시다. 그리고 그 기쁨으로 들어갑시다.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가 그 즐거움에 동참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조용히 빠져나가서 분노와 억울함과 잘못된 오해에 스스로를 망치는 자들이 되지 말고, 우리들의 아버지 하나님의 기쁨과 즐거움에 그 진실하신 사랑하심과 용서하심에 동참하여, 그로 인해 그 기쁨이 우리 삶속에 충만한 진정한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의 그 넓은 마음을 갖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swchurch.org/b/sermon-965?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C%86%8C%EC%99%B8%EA%B0%90&sop=and

 

 


 

 

<5> 학생연구실 

소외(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소외(疏外)는 철학 또는 경제학 용어이다. 인간이 만든 것 (상품 · 화폐 · 제도 등)이 인간 스스로부터 멀어져 반대로 인간을 지배하는 같은 생소한 힘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또한 이를 통해 인간이 지닌 자기의 본질을 잃는 상태를 말한다 .


개요

사회관계의 비인격화(impersonalization)는 사람들을 사회관계 속에서 고립시키고 소외한다. 거대도시에 지배적인 사회관계는 예컨대 대면적(對面的)인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라는 형태를 취하는 경우일지라도 마음이 통하지 않는 물건과 물건과의 관계로 기울어져 간다. 여기에서는 금전관계가 모든 인간관계보다 우선한다. 사람들을 결합하는 공통적인 관심은 교환이라는 것에 수축(收縮)되고 말며, 적극적인 의미를 갖지 않게 되기가 쉽다. 또 생활요구나 생활관심은 복잡해지고 확산하기 때문에 공통된 방향을 가질 수 없게 된다. 생산하는 장소에 못박히고 강제적으로 획일화당하고 있던 사람들은 생산 이외의 곳에서는 얽매였던 사슬에서 풀려나서 하나하나의 흩어진 개인으로 분산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생산 이외의 곳에서도 사회관계에서 소외되어 인격적이고 정서적인 욕구를 채우지 못하는 데서 욕구불만을 해소시키지 못한 채로 비합리적인 경향을 띠게 된다. 그것은 고립감과 고독감을 합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좋은 예가 직장과 가정의 중간에 성립하는 거리의 군중이다. 군중 속에서 사람들은 서로 아무런 관계없이 제멋대로의 방향으로 이합집산(離合集散)한다. "군중 속에서 있을 때만큼 서글픈 때는 없다"는 것은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이것은 서로 결합시킬 수 있는 연결고리가 없기 때문이다.현대의 거대도시와 거기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관계는 마치 경기(景氣)의 바람에 날려서 쌓이는 모래언덕과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하나하나의 모래알과 비슷하다. 현대의 거대도시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문화나 규범으로부터 해방되어 있다는 의미에서는 자유스럽지만, 서로서로의 사이를 결합하는 강력한 심리적 유대를 갖고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는 고립적이며, 전인격적(全人格的)인 접촉이 어렵고, 외면적인 기준에 의해서 행동하고 평가된다는 점에서 익명적이고 비인격적인 다수의 사람들로 이루어지는 집합체이며, 이런 의미에서 대중사회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1]

 

각주

[1]《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 〈사회관계로부터의 소외〉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C%86%8C%EC%99%B8

 

https://swcounsel.org/b/study-106

 

 

  

 

 

<6> 11월 후원금 내역

  

 

11월

 

11/22 익명 후원 70,000원

 


 

잔액: 150,000원

   

 

https://swcounsel.org/b/letter-235

 

 

 

 

 

센터후원금계좌:

국민은행 449901-01-210121 윤홍식(소원상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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