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지] 2022년 4월 <51호> 주제: 생동력*소원상담센터 소식지
2022년 4월 <51호> 주제: 생동력
<1>성경적상담의 용어설명 : "생동력"에 대한 성경적 이해 생동력은 성경적 상담에서 선순환의 주제로 신체의 목표입니다. 정확한 의미는 '생기있게 살아 움직이는 힘'입니다. 그 반대는 '무기력'입니다. 무기력이 신체의 문제일 때 그 반대가 되는 신체의 목표는 생동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무기력의 반대되는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기력이 없는 힘이 다 빠진 모습이 아닌 힘이 넘치고 기력이 넘치는 모습이 바로 생동력입니다. 이러한 생동력은 무기력에 빠져있는 사람이 변화를 받아서 새로운 모습을 갖게 되었을 때 확인할 수 있는 변화의 모습입니다. 생동력이 넘칠 때 비로소 이전에 고민하고 괴로워했던 '무기력'함이 사라지고 변화와 성숙의 신체적인 목표가 완성됩니다.
이러한 생동력을 목표로 할 때 가져야 하는 마음은 무엇이 나를 생기있게 하는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생기있게 만드는 의지와 간절한 바램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합니다. 그것을 찾을 때 자신의 생동력의 근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의지와 바램을 앞으로도 지속적인 자신의 생동력의 근원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러한 의지를 설명하는 소원상담센터의 성경적 상담주제가 있습니다. 바로 마음의 '소원'을 설명하는 여섯 가지의 주제입니다. 그 여섯 가지의 주제 중에서 자신에게 가장 맞는 것을 찾으면 그것이 앞으로의 자신을 생기있게 만드는 의지이자 바램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여섯 가지의 주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계획, 능력, 희생, 용서, 동행, 충만'
가장 핵심적이고 근원적인 마음의 주제라서 얼른 눈에 띄는 것은 없을 수 있겠지만 하나씩 찬찬히 음미해 보면 자신에게 맞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계획'은 삶 속에서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실현하면서 다시 그 계획을 세우는 것을 좋아했던 것을 의미합니다. 거창하고 허황된 계획이 아니라 삶 속에서 소소하고 세밀하게 이걸 이렇게 하고 저걸 저렇게 한다는 마음가짐을 갖고 있었다면 '계획'의 소원을 가질 때 자신의 삶의 생동력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그 계획의 결과나 효과에 연연하면 생동력이 깨어집니다. 계획 자체는 하나의 본질과 같아서 본질은 평가하고 판단하고 재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려고 한다면 계획을 이룰 수가 없고 결국에는 다시 무기력으로 빠지게 될 것입니다. 계획이라는 소원을 가질 때 그 의지는 인생의 순간순간을 끊임없이 계획하고 수정하고 다시 그 계획을 세우면서 하나의 선순환을 이루며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됩니다.
'능력'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행하고 그 행함의 과정을 통해서 능력을 수행했음을 자각하고 다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개념이 매우 중요합니다. 할 수 없는 일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하고, 이미 자신에게 있는 능력의 발현을 목표로 할 때 그것은 자신의 삶의 생동력의 근원이 됩니다. 오뚜기 인형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리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오뚜기 인형은 이미 균형을 잡고 원상태의 위치를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 능력을 계속 구현할 때 끊임없이 움직이고 계속 일어서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그런 오뚜기 인형이라도 완전히 뒤집어 놓으면 다시 일어설 수 없습니다. 그렇게 일어서는 것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한계를 생각하며 씨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부분에서 중심을 잡고 균형을 잡으려고 할 때 오뚜기 인형은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능력은 바로 그렇게 사람의 마음 속에서 생동력을 갖게 하는 근원이 됩니다(지면상 두 가지 주제만 살펴봅니다).
이와 같은 설명 속에서 인간은 생동력의 근원을 자신의 마음 속에서 소원을 발견할 때 생동력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다른 데에서 생동력의 근원을 찾고자 하면 무기력에 빠질 수 밖에 없지만 소원 속에서 생동력을 찾는다면 끊임없이 일어나는 마음의 열정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가장 무기력하고 좌절되며 힘이 빠진다고 생각할 때 마음 속에서 소원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하나의 가능성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다음에 육체에는 심장을 주셨고 정신에는 소원을 주셨습니다. 그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의 가능성을 이루고자 할 때 주어진 시간과 환경 속에서 놀라운 생동력을 나타내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들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생동력과 그 근원이 삶 속에 넘치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2>이 달의 학생인터뷰: 정해경 성도님
1.지금 어떤 일을 하시며 현재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현재 아동심리발달센터에서 놀이치료와 심리운동치료를 하고 있고 미술치료대학원에 재학중입니다. 성경적상담은 1학기 강의를 듣고 있습니다.
2.어떠한 계기로 이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셨나요? 심리상담에 관심이 많았으며 상담을 받은 경험도 많았습니다. 기독교상담을 통해 감사하게도 신앙도 갖게 되었지만 상담분야에 공부하면 할수록 심리학의 한계를 느꼈었습니다. 성경적으로 하는 상담은 없을까 알아보던중 소원상담센터를 알게되었습니다.
3.공부하는 부분에 있어 어려운 점은 없는지요? 현재 심리쪽 일을 하면서 성경적상담 공부를 하는게 방향성 부분도 부딪힐때가 있어 힘들때가 있지만 역으로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현재 업무, 일, 학업이 바빠서 따로 성경적 상담 진도가 많이 나가지 못하는것에 어려움을 느끼곤합니다.
4.성경적 상담을 공부한 후 삶 속에서 활용하고 계신 부분이 있으시다면? 크게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삶을 보려고 하는것들이 생긴 것 같습니다. 처음에 욕구로 달려가며 열정적으로 살던 사람이라 성경적 상담을 받은 후 무기력에 빠지기도 하였습니다. 그치만 포기하지 않고 성경적 상담을 받고 공부하였더니 은혜를 찾아 결단하는 것들이 쌓이면서 더 나은 방향으로 기쁨으로 나아가고 있는것 같습니다.
5.앞으로의 목표는 무엇인가요? 지금 하는 세상적 아동상담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제가 흘려보낼수 있는 통로가 되었으면 좋겠고, 성경적 상담 공부도 끝까지 하여 성경적상담사가 되는것이 목표입니다.
6.기도제목을 말씀해주세요. - 2세를 준비하고 있는데, 저희 부부의 건강, 환경, 재정, 시간, 영적인것 모두 은혜로 잘 준비될수 있도록 기도부탁드립니다. - 양가 부모님들의 건강과 친정식구(아빠, 여동생)의 구원을 위해 기도부탁드립니다. - 하나님의 은혜를 흘려보낼수있는 치유의 통로가 되길 기도부탁드립니다.
이달의 학생인터뷰: 정해경 성도님 (swcounsel.org)
<3>인터넷 상담글과 답변 제목: 목표를 정해도 의욕상실과 무기력증. 제가 약 1년 전에 남친한테 올인 하고나서 자존감이 낮아졌습니다 . 그래서 그런지 학창시절때 느꼇엇던 미래에대한 두려움 또는 사람에대한 동경심을 비교로 인한 경쟁의식을 느끼지 않고 있습니다. 이게 그냥 마음이 편하면 좋은데 마냥 불안하고 찝찝하고 이상합니다. 이런경우 대부분 목표가 없어서 그렇다해서 어제 나름 목표를 잡아봤지만 목표에대한 의욕이 없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눈 뜨면 우울하고 무기력합니다.. 대학의 과제처럼 그저 의무감으로 헤치워야 하는 것들 이렇게 생각됩니다 하려고햐고 집중도 잘 안돼고 실행에 옮기는게 너무 힘듭니다. 저 무슨 증상인가요 ? 변화는 하고싶은데 변화하려면 의욕이없고 딱 끌리지않아도 하는게 좋을까요? 제 자신도 잘 모르겟습니다 성의있는 답변 부탁드립니다... 답변 소원상담센터 원장(shcounsel)님의 답변입니다. 목표가 필요한 이유는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욕구에 휩싸여서 불안함과 좌절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자전거가 균형을 잡을 수 있는 이유는 달리기 때문인것처럼 사람이 우울함과 무기력함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목표를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목표가 너무나 크고 쉽게 이룰 수 없는 것일 때 그 목표는 더 이상 매력적이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포기해버리게 되지요 현재 증상은 무기력과 우울증입니다 하셔야 하는 것은 간단한 목표 가벼운 계획 할 수 있는 일들을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실천가능할때만이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가벼운 계획부터 하나씩 생각해보고 실천해 보세요 무기력을 이길 수 있는 한발 한발을 걸어 보시면 조금씩 달라질 것입니다 다만 남친과의 관계에서 느꼈던 괴로움이 트라우마로 작용할 수 있으니 이것은 필요하다면 상담을 받아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상담을 통해 예전 기억을 다시 잘 정리한다면 감정에 잔재로 남지 않을 것입니다 도움이 되시길 바라고 소망이 넘치는 삶을 사시길 기원합니다
목표를 정해도 의욕상실에 무기력(?)증 (swcounsel.org)
<4> 상담설교 47고후 4; 7-10 결코 꺼지지 않는 생명력2_2
2015.10.4.주.주일오후.
*개요: 신앙과 믿음, [고후]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후]4: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고후]4: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고후]4: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무한동력의 개념이 있습니다. 그것은 더 큰 에너지 근원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태양이나 원자로나 수력이나 그 어떤 막강한 것이 모든 힘과 동력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런 근원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공급받는 힘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소멸되거나 고갈되지 않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은혜입니다. 그 은혜가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힘든 상황에서나 어떤 위기에서도 충분히 그 모든 순간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이루어진 [무한한 생명력의 모습]은 어떤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이겨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4장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전혀 변하거나 흔들리지 않는 강인함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고후]4: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고후]4: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이것을 어떤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오래참음’이라고 할 것입니다. 끊임없이 우겨싸이지만 결코 싸이지 않는 마음입니다. 답답한 일을 당해도 포기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핍박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라지거나 버려지지 않는 모습입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해서 도저히 재기불능이라고 생각되었지만 망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것은 다시 일어서는 마음만 갖는 것이 아니라 상황도 그렇게 변한다는 것입니다. 이건 정말 불사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혹은 오뚜기 같다든지 잡초 같다든지 하는 표현도 가능할 것입니다. 이정도되면 그런 모습을 갖는 사람에 대해서는 경외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보통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과 그 일행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더 큰 능력에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능력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우겨싸이지 않았고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버린바 되지 않았고 망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붙들어주시고 힘을 주셨으며 필요한 모든 능력을 공급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결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말을 그냥 수사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다가 자신을 핍박하는 유대인들의 모함을 받아 아레다 왕의 방백들에게 쫓겼던 적이 있었습니다. 성문을 잠그고 바울을 잡기 위해 집집마다 수색을 벌였습니다. 그 때 바울은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성벽에서 광주리를 타고 빠져나갔습니다. 정말 우겨싸였지만 우겨싸이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애썼지만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자 바울은 낙심하지 않고 앞으로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겠다고 하면서 이고니온으로 갔습니다. 루스드라에서는 유대인들에 의해서 돌에 맞아 죽는 줄 알았지만 그는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로마로 가는 배안에서는 풍랑에 의해서 거꾸러뜨림을 당했지만 물에 삼키지 않고 멜리데 섬 해안에 배가 닿아서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이정도만 봐도 바울이 그냥 자신의 마음의 상태나 노력만으로 살아난 것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그를 도우셨고 함께 하셨기 때문에 그는 그 모든 어려움으로부터 살아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면 그는 항상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요? 행운의 상징이었을까요? 운명의 열쇠였을까요?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신의 모든 생명력이 나타났다고 그는 고백하였습니다. 과연 그것은 무엇일까요? 오랫동안 그토록 고생하며 공격받고 핍박받으면서도 하나님의 은혜와의 관계를 놓지 않았던 그 연결고리는 무엇이었을까요? [무한한 생명력의 근원]은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만이 도우시고 역사하실때 생명력이 일어났습니다.그는 그것을 ‘예수 죽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죽인 것’이 그가 항상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고후]4: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것이 바로 비결이었습니다.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는 것이 그렇게 강한 생명력을 갖게 하는 비결이었습니다. 그것이 그들과 하나님의 은혜를 연결시키는 고리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고리가 될 수 있을까요? 예수 죽인 것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여기서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졌다는 것은 그들이 항상 예수님의 죽으심을 생각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셨지만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이 항상 예수님의 죽으심을 생각하면서 예수님의 다시 살아나심을 기억하였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죽으심을 생각하면서 항상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내게 나타나게 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의 생명이 그들의 몸에 나타나기를 원했기 때문에 항상 예수의 죽음을 생각했고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능력으로 부활하신 것처럼 그들도 역시 예수의 생명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경외심을 느낄 정도의 ‘인내’를 보일 수 있었던 이유였습니다. 또한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결코 망하게 하지 않으시고 다시 일으켜 세워주신 이유였습니다.
우리나라의 기독교 역사를 생각해 보십시오. 일제치하에서 얼마나 많은 기독교 탄압이 이루어졌습니까? 신사참배를 강요하기도 하였고 교회를 통한 항일운동은 제암리 학살사건과 같은 교회를 중심으로 한 탄압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잠깐동안의 남북전쟁은 목회자들의 순교와 교회의 파괴로 이어져서 그대로 진행되었다면 우리나라에 기독교를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을 뻔 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을 역전시켜주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남북전쟁이 휴전으로 끝이 나게 하시고 이후에 하나님을 믿고 잘살아 보겠다는 간절한 믿음과 바램을 들어주셔서 우리 나라가 현재의 번영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또한 대한민국 전 인구의 4분의 1인 기독교 천만명의 신자와 우리 나라의 주요 요직에서 기독교인을 찾아보기 어렵지 않은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단순히 마음의 결심이나 노력으로 이루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과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놀라운 생명력은 단순히 국가나 민족이나 기독교 전체의 목표만은 아닙니다. 우리 개개인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어떤 한계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을 붙들고 나아갈 때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더 크고 놀랍고 새로운 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능력을 힘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러한 능력을 갖지 않을까요? 또한 무엇이 우리에게 이런 능력을 갖지 못하게 할까요? 바로 옆에 생명샘물을 놓고도 그 생명샘물을 먹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왜 우리 속에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인내와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는 소망과 좌절하지 않는 용기를 가지지 않는 것일까요? 만약 그것만 있으면 사랑이 생겨나고 희락이 피어오를 것입니다. 화평한 마음으로 담대하게 자신의 할 일을 잘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과의 연결을 어떻게 이루지 못하게 하는 것, [무한한 생명력을 얻지 못하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도바울은 7절 말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고후]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이 보배는 우리 자신의 질그릇에 담겨지는 것입니다. 보배가 보배합에 담기는 것이 아니라 보배가 질그릇에 담기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보배를 보배합에 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도 보배합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무리하게 되는 것이지요. 보배가 질그릇에 담기는 것인데 보배를 보배합에 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그 보배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됩니다. 그냥 받기만 하면 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그냥 받아 누리면 됩니다. 도와달라고 하면 됩니다. 간구하고 요청하면 됩니다. 내가 질그릇이니 부족한 저에게 주의 보배를 채워달라고 겸손하게 무릎꿇고 하나님께 간구하면 하나님은 주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만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않음을 알게 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겸손히 주님을 따를 때 주님은 우리에게 보배를 부어주십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주님의 보배를 담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내가 준비가 되어야 보배를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담배를 끊고 내가 술을 끊고 내가 정상적으로 생활하고 내가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야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보배합에 보배를 담으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나는 똑똑하고 신앙도 좋고 봉사도 열심히 하고 지금까지 크게 무리가 없이 신앙생활을 했으니까 당연히 보배를 담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보배합에 보배를 담으려는 것입니다. 하지만 질그릇에 보배를 담는 것이 신기하고 놀랍고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지 보배합에 보배를 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두 사람이 기도를 할 때 한 사람은 가난하고 죄도 많이 져서 얼굴도 못들고 회개하며 용서를 구하면서 기도합니다. 다른 사람은 돈도 많고 헌금도 많이 하고 선한 일도 많이 해서 얼굴을 곧게 들고 당당하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누구의 기도를 더 들으실까요? 누가 하나님의 보배를 더 많이 얻게 될 까요? 질그릇에 보배를 담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질그릇과 같이 겸손해질 때 하나님의 보배를 담게 됩니다. 하나님께 힘들다고 고백하고 두렵다고 고백하고 화가 난다고 고백하고 부끄럽다고 하나님께 고백할 때 하나님은 도우십니다. 그래서 그런 감정을 새로운 결심으로 바꾸어주십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깨닫습니다. 이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만 있고 우리에게는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새로운 결심을 갖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새로운 결심으로 충만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오늘도 구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한 동력의 은혜를 내려주실 것입니다. 질그릇 같은 마음에 은혜를 내려달라고 담대히 구하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이 온전히 나타날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를 담아 이번 한 주를 살아갈 때에도 더욱 사랑이 넘치고 화평하며 더욱 인내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47고후 4; 7-10 결코 꺼지지 않는 생명력2 (swchurch.org)
<5> 성경적 상담 사역자료 또는 학생 연구 [파파고 번역]
하나님을 경험하기 (에드 웰치)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믿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만남"을 원합니다. 우리는 앞뒤로, 알고, 알려지고, 감정적인 생동감을 원합니다. 그것은 성장하는 관계의 결실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감정적이고 경험적인 건조함의 꿈을 품지 않습니다. 그 대신에 약속된 풍성한 생명을 가져 오라(요 10:10) 모세가 앞장섰다. 그는 신을 느끼고 싶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하나님의 영광의 표시로 받들기를 원하였습니다(예 33:18). 정말 힘들었어요. 의심이 무르익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한 약속을 확인하신 작은 경험적 부양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세의 요구를 들어주셨다. 그의 영광은 휙휙 지나가고 모세는 하나님의 뒷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일이 일어났다고 가정했지만 모세는 그 사건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하고 싶은 욕망은 좋은 것, 아주 좋은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온전한 찬양과 사랑과 단결을 향한 열망을 이끌어 줍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재를 느끼면서도 그분의 존재를 간절히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어떨까요? 하나님이 자신을 숨기고,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할 때 그렇게 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어떨까요? 감정적인 경험이 우울함이나 두려움에 지배되어 신의 경험이 돌파할 수 없는 사람들은 어떨까요? 이와 같은 질문들은 우리를 성서로 돌아오게 하며, 주님께로 돌아가게 하며, 내면의 긴장은 "나는 결코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와 "나의 하나님 왜 너는 나를 버리셨는가"를 모두 인정하는 것이다. 성서에서 우리가 발견한 것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과 함께 하는 더 깊은 길이다. "가끔 하나님께서 아이들을 어둠 속에서 재우신다"는 것도 한 가지 표현입니다. 또 다른 방법은 이런 것입니다. 이 시대에 우리 하나님은 눈으로 걷는 것보다 믿음으로 걷는 것이 더 근본적이고 복되게 하시기로 선택하셨습니다(고린도전 5장 7절). 바로 우리 눈으로 주님의 선하심을 볼 수 있는 때가 많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이 "하나님은 멀리 계신다"고 말하고 "나는 너와 함께 있다"고 맞설 때가 또 있을 것이다. 그런 경우엔, 그의 말이 승리한다. "보면서 걷는"에서 "시각"이라는 단어를 확장하면 우리의 감정과 같은 모든 감각적인 것들을 포함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다시 궤도에 올랐다: 신은 우리에게 바로 말하고 있다. 그는 멀지 않다. 이 가르침은 성경의 핵심을 찌른다. 성경은 우리에게 계시가 필요하기 때문에 존재합니다. 우리는 육안으로 현실을 똑똑히 볼 수 없다. 성경은 우리가 보아야 할 모든 것을 볼 수 있게 해주는 하나님의 기술입니다. 그 사람이 있는 게 느껴지지 않아요? 당신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를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 이끌어 주신 일을 기억하여라. 너희는 어떻게 너희를 겸손하게 하고, 너희 마음 속에 무엇이 있는지, 너희가 그의 명령을 지키는지 시험해 보아야 한다. 예수께서 너희를 겸손하게 하시고, 너희를 굶주리게 하신 다음에, 너희도 너희 조상도 알지 못했던 만나를 너희에게 먹여서, 사람은 오직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로 사는 것임을 너희에게 가르치셨다. (신명 8:2-3) 여기 있네요. 우리의 감각은 우리가 궁핍하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심오한 만족감을 주는 영적인 음식이 있다고 밝히신다. 우리의 목표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셔서 덜 알고 있는 우리의 감정을 물에 잠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모세도 이 전통에 서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고 싶었지만 정작 필요한 것,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자비와 용서를 보장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출34:6). 이 계시가 모세를 경외케 하고 그를 경배케 하였노라 경험에 의존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계시된 약속에 의존하라. 그렇지 않으면, 삶은 하나의 경험적인 백합 패드에서 다른 백합 패드로의 연속적인 비약이 된다. 하나님 나라의 이 특징은 예수님이 지상에 머무르실 때 가장 분명하게 발표됩니다. 왕국의 길을 계획하기에 얼마나 좋은 때인가. 그의 제자들은 그들의 지상 생활에서 예수를 눈에 보이는 존재로 보지 않는 순간이었다. 예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손가락을 여기에 놓아라. 내 손을 보아라.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주세요. 의심하지 말고 믿어라." 토마스가 예수께 말하였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나를 보았으므로 믿었느니라 보지 못하고 믿는 자에게는 복이 있으리라 하시니라(요 20:27~29) 예수님은 새로운 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제자들과 우리들에게 자기 나라의 길이 항상 이렇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감각과 약속 사이에 경쟁이 있을 때, 우리는 그의 약속에 안주합니다. 상황이 구약성서의 광야이든, 아니면 "이 세상에서 너희가 고난을 당하리라"는 모든 변종이든 말입니다(요 16:33) 예수님이 덧붙이는 유일한 것은 믿음의 방법이 시각보다 얼마나 더 축복받았는지에 대한 부드러운 상기시켜주는 것이다. 내가 몇 번이나 예수님의 청각적 목소리와 육체적 존재를 원했을까? 나는 심지어 하늘이나 거실 벽에 글씨를 쓸 수 있었다. 하지만 더 나은 방법이 있습니다.믿다. 약속을 말하고 그 모든 약속을 자기 희생적인 행동으로 뒷받침한 사람을 믿으세요.
Experiencing God . . . Or Not, a Blog Post by Ed Welch (ccef.org)
<6> 3월 후원금 내역
2022년 4월 4/19 진흥교회(박충권 목사): 50,000원 4/20 익명후원: 70,000원 4/27 크리스찬 투데이 광고: -300,000원 계: 50,000원
센터후원금계좌: 국민은행 449901-01-210121 윤홍식(소원상담센터) "소중한 후원은 누군가의 새로운 삶이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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