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권세는 선순환에 대한 신체목표로서 '귀신들림'의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귀신들림이 영적권세가 없어서 귀신에게 지배당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반대로 영적권세가 있어서 귀신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는 사도의 모습이 나옵니다.
"[행]16:16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주는 자라
[행]16:17 그가 바울과 우리를 따라와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행]16:18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행]19:11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행]19:12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첫 번째 장면은 빌립보에서 일어난 일이었었고 두 번째 장면은 에베소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빌립보는 에게해 서쪽에 있는 그리스 지역이고 에베소는 에게해 동쪽에 있는 터기 지역이었습니다. 두 지역의 거리적 차이는 있지만 사도 바울이 복음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중에 머물렀던 지역이었고 그 지역에서는 이러한 영적 권세로 인해서 많은 복음의 열매가 나타났습니다. 물론 이러한 영적 권세를 시기하고 질투하고 비판하고 공격하는 자들도 있어서 빌립보나 에베소에서 적지 않은 괴로움이 따랐지만 사도들은 개의치 않았고 여전히 영적 권세를 나타내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했습니다.
오늘날 귀신들림이 일상적이지는 않지만 종종 상담주제가 귀신들림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 다시 한 번 영적 권세의 필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누가 귀신을 쫓아내며 누가 악귀를 물리치며 누가 악신을 제어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증거하는 자들이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믿고 의지하며 감당하는 것이 바로 복음의 전파와 박해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인 세계에서도 귀신을 이기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영적권세의 모습을 선순환 모습으로 이해할 때에 오늘날 성도들이 가져야 하는 영적 권세의 모습은 단순히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이끌리고 순종하며 그 뜻을 실천하는 의지와 결심에서부터 나타납니다. 자신도 하나님께 순종해야 귀신도 하나님께 순종하게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다면 귀신도 역시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런 모습을 비웃을 뿐입니다. 실제로 에베소에서 스게와의 일곱 아들이 바울을 따라하다가 귀신들에게 맞아서 벗은 몸으로 도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영적 권세의 본질은 귀신에 대한 위세를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실천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럴 때 귀신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증거하고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영적 권세의 의미를 잘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가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해야만 하는 삶을 주를 경외하면서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그럴 때 어떤 사람도 권세도 그 실천을 훼방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지켜 주시기 때문에 권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영적 권세는 온전히 하나님 안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힘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가장 의롭고 경건하며 거룩할 수 있는 권세는 하나님의 뜻과 그 나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생각하고 더욱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사모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온전한 영적 권세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