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무신론자인 선생님이 모세가 홍해의 기적을 통해 이스라엘을 출애굽하게 했다는 사건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설명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사실 그것은 바다가 접시물처럼 얉아졌을 때 사람들이 건너간 것이랍니다. 절대로 깊은 바다가 갈라진 것이 아니에요"
그러자 한 학생이 이상하다는 듯이 선생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 그런데 어떻게 바로와 그 군대는 그 접시물처럼 얇은 바다에 빠져죽을 수가 있었을까요?"
모세의 기적을 가능한 부인하려고 하다 보니까 그 다음에 이어지는 놀라운 승리의 해석도 함께 사라져 버리는 것이지요. 죄문제를 다룰 때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죄를 가능한 별 것 아니라고 만들어 버리니까 그 다음에는 그 죄를 사해주시는 예수님과 그분의 희생이 별것 아니게 되어 버립니다. 지옥을 가능한 무시해 버리니까 천국에 가는 것이 선택사항처럼 되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적 상담에서 죄를 다루는 것은 매우 철저합니다. 그냥 인간은 죄인이다정도의 신학적인 설명을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으로서 우리가 어떤 죄를 졌고 그것이 어느 순간 어떻게 누구에게 일어났는가를 깨닫게 합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다들 고통스러워합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부인하고 싶기도 하고 죄인이 아니라는 껍질이 깨졌을 때 느끼는 당황스러움과 수치심과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중요한 이유는 그래야만 과거의 죄라는 헌옷을 벗고 은혜라는 새옷을 입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은혜라는 새옷은 우리가 심각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 살으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스스로 깨끗하다고 생각했을 때에는 심드렁하게 느껴졌었지만 자신이 철저히 발가벗겨지고 속속들이 악한 생각이 겉으로 드러났을 때에는 자신에게 얼마나 절박한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새옷을 입혀질 때의 안도감과 감사함은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충만한 것이 됩니다.
성경적 상담은 이 과정을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그리고 이 과정은 한 회기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죄의 악함과 은혜의 선함이 함께 대비가 될 때에 죄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은혜에 대한 소망을 붙들게 됩니다. 그러면 순간적으로 죄에서 은혜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나면 그 은혜를 향한 마음이 커지도록 계속 붙들어주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충격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환희로, 어떤 사람에게는 깨달음으로 다가오게 될 이 과정을 통해 성경적 상담은 죄를 다룹니다. 약간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 되겠지만 그 시간이 끝나고 나면 전혀 새로운 곳에 이르게 됩니다. 그만큼 성장한 것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