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2006년 1학기에 필자가 웨신대에서 상담학을 가르치기 시작했을 때 처음에는 목회에 상담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라는 다소 냉담한 반응과 씨름하면서 마치 산을 오르는 듯한 힘든 시간을 보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학기를 마칠 때쯤 되니 상담학을 넘어서 성경적상담학을 계속 배우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고생 끝에 정상이 다다라서 이제 더 큰 산을 올라보자는 원대한 포부에 마주치는 것 같았습니다. 물론 다시는 상담학이라는 산에 올라오지 않겠다는 원망과 불평보다는 훨씬 더 나은 경우이지만 본격적으로 임하고자 할 때에 겪게 되는 많은 어려움들을 생각해 본다면 가야할 길이 그리 녹록지만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이미 산 정상에서 느낄 수 있는 희열과 멀리 보이는 찬란한 소망을 발견하였다면 또 다른 산을 오르는 것이 무슨 대수로운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비록 가야하는 길이 험하기는 하지만 계속해서 성경적 상담학을 배울 수 있는 길을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우선 첫 번째로 넘어야만 하는 산이 있는데 그것은 '심리학적 상담학'입니다. 이미 상담학이라고 말할 때에 모든 상담학은 심리학적인 상담을 전제로 합니다. 이것이 만국공통어요 학문세계에서 뿐만 아니라 일반사회에서도 늘 공용되는 전제입니다. '심리학적 상담학'을 해야 기본 상담의 용어에 익숙하게 되고 '일반적인' 상담학에 적응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심리학적 상담학'을 반드시 해야 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아닙니다. 심리학적 상담학은 '성경적' 상담학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적인' 상담학은 결국에는 이러저러한 점에서 '심리학적' 상담학이 아니라는 부정에 도달하면서 최고조에 이르는데 그 내용을 이해하려면 과연 '심리학적' 상담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커다란 산은 '교육과정의 협소함'입니다. 현재에는 성경적 상담을 마음먹고 배우려고 해도 제대로 가르쳐 줄 수 있는 곳이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그중에서 정규학위과정으로는 총신대학교 상담대학원과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만을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두 학교 모두 정식 교과과정 속에서는 '성경적 상담학'이 아닌 '기독교 상담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이 둘의 차이에 대해서는 지면관계상 생략하기로 한다). 일반 상담관련기관을 통한 교육으로는 '성경적상담연구원', '기독상담센터'의 2곳이 있습니다. 그리고 유학을 꿈꾸는 분들이 계시다면 미국 필라델피아에 위치한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와 동교 상담기관인 'CCEF'를 통해 성경적 상담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렇듯 학교와 기관의 부족은 과연 제대로 성경적 상담을 공부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마저 들게 합니다. 하지만 위기 속에 기회가 있는 법. 오히려 척박한 교육현실을 이기고 나아가다 보면 새로운 진출의 기회를 얻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산은 '성경적 상담학'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배우면 배울수록 두려운 마음이 들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어떤 분의 존재와 자취와 손길과 숨결을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점이 '성경적 상담학'을 단지 학문이 아니라 예배로, 공부가 아니라 사역으로 받아들이게 만듭니다. 바로 그분은 이일에 관심있는 자들을 들어서 놀라운 그분의 도구로 삼아주실 것입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하고 보니 그렇다면 과연 '성경적 상담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궁금하게 여기는 분들을 위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못한 것 같습니다. 이점에 대해서는 관련도서인 '영혼을 살리는 말 죽이는 말(디모데)'과 '위기의 십대 기회의 십대(디모데)' 등을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그래도 잘 모르겠거든 이미 '성경적 상담학' 수업을 들으신 분들에게 한번 여쭈어보십시오. 그분들이 아마 친절하게(?) 설명해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적 상담에는 듣는 이를 매료시켜서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묘한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이것은 필자에게만 해당되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성경적 상담에 관심이 있고 그것을 더욱 배우려고 하는 분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넘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