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욥 7; 1-11 고난과 괴로움의 악순환
18욥 7; 1-11 고난과 괴로움의 악순환_2
2014.11.9.주.주일오후.
*개요: 상담비전, 3시가서, 1적용, 3감정-4욕구 [욥] 7:1 세상에 있는 인생에게 전쟁이 있지 아니하냐 그 날이 품꾼의 날과 같지 아니하냐 [욥] 7:2 종은 저물기를 심히 기다리고 품꾼은 그 삯을 바라나니 [욥] 7:3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달째 곤고를 받으니 수고로운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 [욥] 7:4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꼬, 언제나 밤이 갈꼬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 [욥] 7:5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 조각이 의복처럼 입혔고 내 가죽은 합창되었다가 터지는구나 [욥] 7:6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소망 없이 보내는구나 [욥] 7:7 내 생명이 한 호흡 같음을 생각하옵소서 나의 눈이 다시 복된 것을 보지 못하리이다 [욥] 7:8 나를 본 자의 눈이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고 주의 눈이 나를 향하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 [욥] 7:9 구름이 사라져 없어짐같이 음부로 내려가는 자는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이오니 [욥] 7:10 그는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겠고 자기 처소도 다시 그를 알지 못하리이다 [욥] 7:11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아픔을 인하여 말하며 내 영혼의 괴로움을 인하여 원망하리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역동성의 원리로 삶의 문제를 생각해 봅니다. 삶속에서 우리는 괴로워하는 사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괴로움을 올바르게 이해할 때에 그 괴로움이 어떻게 사라지게 될 수 있는 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욥의 괴로움을 보여줍니다. 욥은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욥의 세 친구는 그가 왜 괴로워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했고 엉뚱한 이야기만 해주면서 더욱 그를 괴롭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한 사람의 괴로움을 올바르게 이해할 때에 올바르게 도와줄 수 있습니다. 먼저 가져야 하는 질문은 [상황]에 대한 것입니다. 그럴 때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사람은 무엇이 가장 괴로운가?” 그 사람에게는 특별한 괴로움이 있겠지만 일반적인 경우를 생각해 봅니다. ‘일반적인 인생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는 괴로움과 고통 등이 해당됩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삶속의 여러가지 문제들로 인해서 인생을 힘들어하고 괴로워합니다. 또한 ‘진리를 호도하는 잘못된 조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상담이 아니라 나쁜 방향으로 인해서 나아가게 하는 상담을 통해서 문제가 더욱 악화되었을 때 그러한 조언과 상담의 내용이 괴로움이 됩니다. 그 외에 ‘우리에게 죄악을 범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악한 자들이 있고 그들의 악행은 피해자를 만들어내며 그 피해자가 바로 자신이 될 때 악한 사람들의 존재와 활동은 고통받는 자들에게는 커다란 괴로운 상황이 됩니다. 아니면, ‘악한 존재로서 자신을 닮게 만들려는 사탄’이 있습니다. 사탄은 지금도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고 자신보다 배는 더한 악한 자를 만들기 위해서 모략을 일삼고 있습니다. 이러한 존재에 대한 경계심과 대응자세는 이 세상에서의 삶이 결코 편한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특이한 경우이지만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만드는 좋은 것들’이 있습니다. 너무나 좋은 것들도 성도들에게는 고통과 괴로움이 될 수 있습니다. 지나친 성공과 지나친 축복도 그로 인해 생겨나는 많은 시기와 질투, 번잡함을 가져다 주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상황이 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보아야 하는 것은 그 괴로움에 대한 [반응]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습니다. “그 상황에 대해서 이 사람은 어떻게 반응하였는가?” 안좋은 반응이 문제를 더욱 악화시킵니다. 일반적인 악한 반응은 무엇입니까? ‘죄의식을 가져서 숨고, 두려워하고, 부인함’이 있습니다. 이러한 반응은 감정적이고 지혜롭지 않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피상담자는 자신의 은밀한 부분을 고백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책임전가합니다. 또한 ‘자신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못함’이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변화시키고자 애를 쓰고 그 일이 해결되게 학기를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더 문제에 빠지게 되고 더 깊은 괴로움에 파묻히게 됩니다. 그래서 그와 같은 모습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과 정확히 반대가 됩니다. 또 다른 경우에는 ‘어리석게 되고 강퍅하게 되어서 상황을 잘못 해석함’을 보입니다. 감정적이고 주체하지 못하는 반응은 더욱 어리석게 되고 강퍅하게 되어 악한 반응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행동은 전혀 상황을 잘못 판단하는 것이고 그로 인해서 더욱 예기치 못하는 악화된 상황을 만들어 내게 됩니다. 결국,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진리를 보지 못함’이 나타납니다. 악한 반응으로 인한 안좋은 결과들을 보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거나 스스로 올바른 모습에 무감각해져 버립니다. 더욱 참된 진리를 구별하지 못하게 되고 이전보다 더 큰 악으로 빠져들어갑니다.
이제 그로 인한 [결과]가 무엇인지를 보게 되면 그로 인해서 변화의 동기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잘못된 반응으로 일어난 악한 결과는 무엇인가?” 결국은 일어난 일은 무엇입니까? ‘죄가 인생을 어리석은 자가 되도록 만듦’이 있습니다. 자신이 지은 죄로 인해서 더욱 우둔하여져서 하나님의 계시를 배척하고 끊임없이 자기자신과 및 다른 사람들을 속였습니다. 그런 속임수와 거짓으로 인해서 원래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진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죄의 분명한 결과’가 있습니다. 인간 관계는 파괴되고 혼란에 빠지며 스스로 고립된 상태 속에서 이 세상의 악한 사람들이 제시하는 온갖 나쁜 것으로 인도됩니다. 이전에는 그런 악한 것들에 저항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죄를 지으면서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죄악에 스스럼없이 동참합니다. 사실 올바르게 나아갔다면 그래서 어리석음의 악순환에서 지혜로움의 선순환으로 바뀌었다면 나타났었어야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첫번째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어리석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성장하고 변화하고 있지만 여전히 스스로의 잘못을 보며 자책하게 됩니다. 세 번째로, 상황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조심하면서 전에 했던 실수들을 기억하고 주의를 기울입니다. 네 번째로, 결국 어리석음이 다 사라지고 전혀 찾아볼 수가 없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상황은 계속 어리석음의 반복이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일 때 우리는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그것은 [욕구]가 바뀌는 것입니다. 욕구를 내려놓을 때에 비로소 변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욕구]란 근본적인 마음 속에 있는 악한 것들입니다. 그런 것을 추구했기 때문에 여전히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를 깨닫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질문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대답 속에서 우리는 그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우상숭배’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상은 실제적인 경배와 사랑의 대상이며, 그의 마음을 바칠 수 있는 대상이자, 그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며, 마음의 초점이 고정되어서 끊임없이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그의 마음을 다스리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또는 ‘정욕’이 있습니다. 정욕으로 인해서 욕구는 더욱 만족할 수 없는 악한 것으로 변화됩니다. 인간의 욕망은 점차 커지며 결국에는 마음이 사로잡힙니다. 욕망은 본능적인 죄성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에 다스리지 않으면 다스림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는 통제하고 금지하는 것을 잘 따를 때에만이 자신의 욕구도 통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의 할 것은 처음에는 선한 마음도 너무 지배적인 것이 되면 악한 욕망이 되어버린 다는 것입니다. ‘I want’의 마음은 점차 ‘I must’로 바뀌게 되고 급기야는 ‘I will’이 되어서 자기 스스로 죄악에 나아가게 됩니다. 스스로에게 이러한 욕망이 있을 때 그 마음은 처음에 ‘Expectation(기대)’하게 되고 뜻에 맞지 않을 때 ‘Disappointment(실망)’하게 되고 나중에는 그로 인해서 상대를 ‘Punishment(처벌)’하게 됩니다. 그것은 선한 마음일 때에도 그것에 집착하게 되면 결국 욕구가 되어버립니다. 이러한 욕구에는 ‘자기기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자기 합리화이자 그럴듯한 거짓말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도 속아넘어가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온전히 드러나야 하고 성벽이 무너지듯이 무너져야 합니다. 모든 생각은 사로잡혀서 그리스도께 복종케 되어야 합니다. 사실 어떤 행동 자체로 그 마음 속의 뿌리를 다 알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보다는 행동의 이유, 동기를 통해서 그 이면에 있는 마음을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자기 마음 속에 있던 것이 어떻게 결과적인 행동으로 나타나는가를 깨닫도록 해야 합니다. 이는 다시 말하면, Exposed(드러남) 에서 Weekened(약해짐) 으로 가고 die(사라짐)에서 Replaced(바뀜)로 가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끊임없이 반복될 때 자기기만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복합적인 동기와 뒤죽박죽인 행동의 동기, 욕망의 상호충돌 속에서 최우선적으로 중요하게 보았던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욥은 비록 처음에는 본문에서 나온 것처럼 스스로를 원망하고 괴로워하면서 악순환에 있었습니다. 그의 말을 보십시오. “[욥] 7:11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아픔을 인하여 말하며 내 영혼의 괴로움을 인하여 원망하리이다” 하지만 그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그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욥] 40:3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 40:4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달라질 수 있습니다. 어리석음의 악순환속에서 괴로워하는 자에게 하나님을 설명해주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해줄 때에 그 악순환이 끊어지게 됩니다. 이 원리를 기억하고 여러분 자신이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 은혜를 얻게 하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여러분 자신이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가 그러한 올바른 생각으로 인해서 다시 살아나며 새로워지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여러분에게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