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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 성경QT 과제입니다.

《 성경 QT 》

( 이사야 29:7-8 아리엘을 치는 열방의 무리 곧 아리엘과 그 보장을 쳐서 곤고케 하는 모든 자는 꿈 같이, 밤의 환상 같이 되리니  주린 자가 꿈에 먹었을지라도 깨면 그 속은 여전히 비고 목마른 자가 꿈에 마셨을지라도 깨면 곤비하며 그 속에 갈증이 있는 것 같이 시온산을 치는 열방의 무리가 그와 같으리라 )

 내가 한참 우울증이 심했을 때 쯤엔 코미디 영화를 보아도 즐겁지가 않았고 슬픈 소설을 읽어도 무덤덤했었다. 게다가 다른 사람의 감정은 물론 내 자신의 감정도 거의 느껴지지가 않았었다.
 그럴 때면 친구나 가족과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형식적으로 배만 채우는 것 같았고, 모처럼 여행을 가도 도리어 내 방에 조용히 혼자 있고 싶은 마음이 컸다.
 나의 우울한 이 상황이 꿈이었으면 하고 생각했던 적이 많다. 아침에 깨어나면 왠지 한숨부터 나올 정도였으니깐.
 겉보기엔 멀쩡했지만 속마음은 늘 무언가에 굶주리고 목말라있었다. 지금도 그렇고 그게 무엇때문인가를 찾아가려고 노력하는 중인 것 같다.
 그 무엇인가가 하나님이나 진실한 믿음일지도 모르지만 아직은 확실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무언가 확실하지 않은게 있다는건 참 답답한 일이다. 얼른 해소되었으면 하는데 그것이 내 뜻대로만 될 일은 아니란 것을 알기에 조금 더 인내하고 노력해야겠다.




필독서1
필독서2


1.뇌구조 상담챠트

2.신체문제 상담챠트

3.정신구조 상담챠트

4.마음이해 상담챠트

5.변화과정 상담챠트


미리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5-04-26 (일) 20:58 9년전
《 성경 QT 》

( 마태복음 16:22-23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

 오늘 주일예배 설교는 마태복음 16장 21절부터 28절까지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일이 세상의 일보다 중요하다는 내용이었다.
 목사님께서는 특히 예수님께서 자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우리의 죄 대신 돌아가실 것을 이야기하신 후 이어진 베드로의 말에 예수님께서 격하게 책망하시는 부분을 강조해서 말씀하셨다.
 사람들간의 대화에서는 베드로의 반응이 아주 정상적이고, 도리어 사려깊게 배려하는 말같아 위로가 될 것 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거의 욕설과도 같은 사탄이라는 단어까지 쓰시며 강하게 거부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어쩌면 베드로도 사람이기에 습관적으로 예의바른 위로의 말을 했을 수도 있고, 더해서 정말 하나님이 예비하신 일을 방해하고자 예수님의 결단을 흐트리기 위해 사탄이 부추겼을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 사이에선 그냥 겉치레같이 쉽게 넘어가는 말도 하나님의 기준에서는 정말 큰 방해로 보여질 수도 있다는걸 또 한번 느낀다.
 요즘 내가 계속 보게 되는 성경 구절들이 이런 부분이 많다. 사람의 기준이나 판단과 하나님의 기준이나 판단이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다른지, 이 다른 점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가 항상 어렵게 느껴진다.

* TV 감상문은 특별히 생각나는게 없어 하루 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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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5-04-27 (월) 20:14 9년전
《 성경 QT 》

( 이사야 39:8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당신의 이른바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 또 가로되 나의 생전에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으리로다 하니라 )

 내가 모든 책임과 문제를 외면하고 싶었을 때에는 그저 하루를 무사히 지나면 그걸로 다 해결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었다.
 그리곤 또 아침이 오면 오늘은 또 어떻게 하루를 무사히 넘기나 하곤 단발성 해결책 찾기에 골몰하곤 하였었다. 그런 날이 반복 또 반복되었는데도 그 순간만 위기를 모면하면 그만이었다.
 이 히스기야의 태도는 그때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정작 하나님이 저주에 가까운 말씀을 하셨지만, 히스기야로서는 당장 자신에게 가시적인 피해가 없을 것 같으니 만족해하는 것이다. 이기적이고도 얕은 삶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내 살아 생전 큰 고난만 없으면 히스기야와 같이 만족해할 수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뭔가 빠진 듯한 가벼운 삶같지 않은가, 당장의 앞날과 자기만의 편안함을 챙기며 살기에는 내 삶에 더 중요한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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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5-04-28 (화) 20:43 9년전
《 성경 QT 》

( 이사야 43:25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

 도말(塗抹)은 발라서 드러나지 않게 가린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나의 죄 위에 덧칠을 해 가리시고, 또한 내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고 하신다.
 하지만 사람은 그렇지가 않아 세상을 살아가는데 많은 상처와 고통이 따른다. 좋은 일은 생각보다 빨리 잊게 되지만, 나쁜 일은 그 기억이 더욱 오래가는 느낌이다.
 나도 내 허물을 거억하고 있을 사람들로 인해 고통스럽다. 내 허물을 얼마나 비웃을지, 비난할지 그런 생각들로 한없이 웅크리게 된다. 그러면서도 나도 내 자신의 허물을 도말하지 못하고 그대로 노출해둔다.
 그런데 하나님은 내 허물을 가리고, 또 잊어주기까지 하신다고 한다. 왜 하나님 그 자신을 위해 그렇게 해주시는 것일까? 그리고 그렇게 해서 어떤 것을 이루시려는걸까? 하는 궁금함이 앞섰다.
 내가 좀 더 믿음이 있었다면 이런 죄사함에 깊이 감사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아직은 의문이 더 생기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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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5-04-29 (수) 08:23 9년전
다음 설교를 읽어보시고 관련된 의문을 해결해보면 좋겠습니다.

http://shchurch.or.kr/sermon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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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5-04-29 (수) 20:04 9년전
《 성경 QT 》

( 이사야 59:1-2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

 나에게는 나를 위해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시는 기도의 은사가 있으신 사모님이 있으신데, 어제도 엄마와 함께 기도를 하러 다녀왔다.
 함께 기도를 하시더니 내가 하고 싶은 것도 있고,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마음도 있는데 그렇지가 못해서 답답해한다는걸 아셨다.
 그러시고는 그 답답함을 이번에는 꼭 작정을 하고 뚫고 지나가보라고 권면해주셨다. 그래도 아직 그 답답함을 어떻게 해야 뚫을 수가 있는지 몰라 더 답답하기만 하다.
 그러던 중 저 구절이 눈에 띄었다. 내 죄가 모든 걸 가로막고 있다는 뜻 같았다. 나만 마음을 열면 될 일이라는 것이다.
 사모님도 몇번이나 그냥 무조건 하나님께 의지하면 안 될 것도 된다 그러니 그냥 믿고 뭐든지 된다고 생각하며 기도하라고 하셨는데, 그게 참 잘 안된다. 어느새 의심의 마음이 스멀스멀 스며드니 말이다.
 의심 많고 비판적인 성격탓일까, 어릴 때부터 가져온 거부감 때문일까, 어느새 나는 뭐든지 누구든지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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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5-04-29 (수) 22:30 9년전
아주 중요한 부분에 이르렀습니다.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당연시하고 합리화하지 말고 그속에서 죄를 깨닫고 그 죄를 회개해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그 죄를 씻어주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실 것입니다. 물을 마시려면 물을 높이 들고 자신에게로 흘러 오게 해야지 물을 아래에서 자신에게로 솟구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다음 설교를 읽어보면서 죄를 벗고 은혜를 누리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http://shchurch.or.kr/sermon/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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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5-04-30 (목) 21:39 9년전
《 성경 TV 》

( 이사야 64:10-12 주의 거룩한 성읍들이 광야가 되었으며 시온이 광야가 되었으며 예루살렘이 황폐하였나이다 우리 열조가 주를 찬송하던 우리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전이 불에 탔으며 우리의 즐거워하던 곳이 다 황무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일이 이러하거늘 주께서 오히려 스스로 억제하시리이까 주께서 오히려 잠잠하시고 우리로 심한 괴로움을 받게 하시리이까 )

 오늘 티비 감상문에서 느낀 내 생각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구절이어서 반갑기까지 했다. 이런 선지자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신다는 생각에 조금 웃음도 나왔다.
 하나님은 왜 전쟁이나 재해로 이 땅이 황폐해지는걸 지켜만 보시는걸까(하지만 이 또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일테니 왜 일으키시는 걸까로 물을 수도 있겠다.) 또는 왜 많은 문제들을 바로 바로 속시원하게 해결해주시지 않는걸까 하는 생각은 인간이 품을 수 밖에 없는 생각인가 보다.
 모태신앙인 나는 어릴때부터 가정이나 교회에서 그런 의문도 품지 말고 무조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라고 배우고 익혔는데도 여전히 그렇지가 못하다.
 작게는 나 자신부터 우리나라, 그리고 네팔이나 IS 문제 등의 지구 전체로 많은 괴로움과 황폐함이 있다. 여호와여 일이 이러하거늘 주께서 오히려 스스로 억제하시리이까 주께서 오히려 잠잠하시고 우리로 심한 괴로움을 받게 하시리이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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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5-04-30 (목) 22:00 9년전
단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잡기가 어렵습니다. 쭉 이어서 본다면 왜 그랬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아래 설교문을 참고하셔서 이러한 의문을 해결해 보세요.

http://shchurch.or.kr/bbs/board.php?bo_table=sermon3&sca=35%C7%D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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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5-05-01 (금) 22:17 9년전
《 성경 QT 》

( 이사야 66: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

 초등학생 때 (그때는 국민학생이라고 불렀지만) 마태복음 5장으로 암송대회에 나갔던 적이 있다. 그 중에서 3절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는 구절이다. 그 외에도 성경에는 마음이 가난한 자, 심령이 가난한 자라는 표현이 자주 나오는 것 같다.
 오늘 본 구절들 중에서도 마음이 가난하다는 표현이 나왔다. 예전에는 이 표현이 그냥 단순히 겸손하거나 복음에 굶주린 사람을 가리킨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다시 이 표현을 보니 나같이 마음 속에 미움, 슬픔, 좌절만 가득한, 공기만 잔뜩 든 풍선같은 자가 마음이 가난한 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생각에 나는 마음 속에 감정이 가득해서 꽉 차서 터져버릴 것 같지만 사실은 그게 공기처럼 대기 중에 흔적도 없이 흩어지는 그런 사람인 것이다.
 (오늘의 내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 나는 마음이 가난하니 이제 죄를 통회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 하며 받아들일 수만 있게 되면 하나님께서 나를 바로 잡아주실 것이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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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5-05-03 (일) 21:06 9년전
《 성경 QT 》

( 창세기 25:27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인고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인고로 장막에 거하니 )

 오늘은 어린이주일로 지켜졌는데, 설교말씀이 창세기 25장 27절 말씀이었다.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는 여러번 들었지만 매번 야곱이 에서의 장자권을 가로채는 장면이 아주 얍삽(?)하면서도 인상적이었다.
 그 일화에 앞서 에서와 야곱의 성격과 생활이 아주 달랐음을 볼 수 있는 구절이 나오는데, 에서는 뛰어난 사냥꾼으로 들로 산으로 활발하게 다녔고 야곱은 차분한 사람으로 집안일을 돌보며 예배나 하나님께 제사지내는 것에 힘썼다고 목사님께서 설명해주셨다.
 결과는 편법을 쓰거나 나쁜 일을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에 힘쓴 야곱에게 축복을 주셨다는 것이었고, 그만큼 예배드리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이런 일화들을 보면 '올바른' 예배나 기도를 항상 최우선으로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고 계신다는 것이 확실한 것 같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올바른 예배나 기도를 드릴 수 있는가 하는 것은 꽤 어렵고 고민되는 문제이다. 기도를 할 때도 나의 이 기도가 올바른 기도인가 하고 생각해보고는 하는데 골치가 아파지고는 한다.
 아무튼 예배와 기도를 내 생활에서 최우선시 한다면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내리신 축복을 나에게도 주지 않으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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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5-05-04 (월) 21:25 9년전
《 성경 QT 》

( 마태복음 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

 중학생 때는 요즘 소위 말하는 '중2병'에 걸려, 고민거리나 잘 안 풀리는 일이 생겨도 이 성경구절을 인용하며 허세를 부리곤 했던 기억이 있다.
 기독교인 뿐만이 아니라 일반 사람이나 TV에서도 심심치않게 이 구절을 많이 쓰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중학생이던 나나 세상 사람들은 이 구절이 그저 오늘 일만 걱정하기도 벅차니 내일 일은 그냥 될대로 되어라라는 뜻으로 잘못 쓰는 것 같다.
 내 생각에는 이 구절은 전혀 그런 하루살이같은 의미가 아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그 분을 믿는 자들의 앞날을 보살펴 주시니 그 분을 참으로 믿는 자들은 내일 일을 걱정할 이유가 없다는 의미가 더 크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 속뜻도 모르고, 호기부리는데 쓰며 또 이 구절로 자신의 나태함을 합리화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아주 잘못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러도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모든걸 맡기면 이 성경말씀대로 더이상 그 걱정과 고민들이 나를 계속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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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5-05-05 (화) 21:03 9년전
《 성경QT 》

( 예레미야 2:5-9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 열조가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관대 나를 멀리하고 허탄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  그들이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 곧 사막과 구덩이 땅, 간조하고 사망의 음침한 땅, 사람이 다니지 아니하고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을 통과케 하시던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기름진 땅에 들여 그 과실과 그 아름다운 것을 먹게 하였거늘 너희가 이리로 들어와서는 내 땅을 더럽히고 내 기업을 가증히 만들었으며 제사장들은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하지 아니하며 법 잡은 자들은 나를 알지 못하며 관리들도 나를 항거하며 선지자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무익한 것을 좇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여전히 너희와 다투고 너희 후손과도 다투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

 내가 보기에 구약의 배경이 되는 아주 먼 옛날에는 하나님께서 훨씬 더 직접적인 방법들로 사람을 꾸짖으시고 가르치시고 또 인도하셨던 것 같다.
 그렇게 여러가지 직접적인 체험으로 하나님을 만나고도 믿지 않는 자들이 많았던지 하나님은 이렇게 예레미야서 처음부터 한탄을 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들을 고된 노예생활에서도 구출해주시고, 아름답고 풍족한 땅에서 살도록 해주셨어도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심지어 부인하는 모습을 이 구절들에서 볼 수 있었다.
 얼마나 심했던지 일반 사람은 물론 법관과 제사장들까지 하나님을 찾지 않았고, 선지자들도 다른 신을 섬긴다고 했다.
 이쯤되면 성경을 읽는 입장인 나도 '은혜도 모르는 것들!'하며 분개하게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벌을 내리시지 않으셨다. 도리어 우리를 타일러서 우리가 하나님을 벗어나지 않도록 하겠다고 천명하고 있으시다. 그것도 후손 대대로 쭉 그러실 것이라고 하신다. 이런 것을 보면 하나님의 인내는 끝이 없으시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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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5-05-06 (수) 21:02 9년전
《 성경 QT & 성경세션 소감문 》

( 요한복음 1:9-13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

 오늘은 이 구절로 두번째 성경세션을 가졌다.
 내용은 그리 어렵지가 않았다. 어릴때부터 아주 많이 들어온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머리로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하나님의 계획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고 그 분의 계획을 쫓아야한다는 것을 나는 너무 잘 알고 있다.
 특히 이 구절들 중에서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하신 것도 너무 잘알고 있기에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으려면 어떻게 해야되는지가 더 괴로운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무엇인지도 세션을 통해 공부하게 되었는데, 영생을 얻게 되고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된다는 것.
 솔직히 나는 현재의 삶에서 그 분의 능력을 기대어 바르게 살 수 있다는 것에는 희망을 가지게 되지만, 죽고 난 뒤의 일과 영생에 대해서는 이해가 잘 되지 않고 상상이 되지 않는다.
 죽는 것이 어떻길래 그토록 천국에서의 영생이 큰 권세가 되는 것일까, 죽음이 이해가 되지 않기에 영생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오늘은 이 이해되지 않는 문제로 조금 고심하게 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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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5-05-06 (수) 22:04 9년전
추가과제를 드립니다. 다음 설교문을 듣고 소감문을 상담과제란에 새글로 '5은혜'분류로 부탁드립니다.

[신앙비전] 43요 3; 16-18 세상을 사랑하셔서 이루신 구원계획2
글쓴이 : 관리자  (211.48.9.148) [IP조회] [IP검색] 날짜 : 2015-01-12 (월) 00:01 조회 : 138 [신고] [인쇄]
글주소 : http://shchurch.or.kr/sermon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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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5-05-07 (목) 21:15 9년전
《 성경 QT 》

( 예레미야 15: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나를 버렸고 내게서 물러갔으므로 네게로 내 손을 펴서 너를 멸하였노니 이는 내가 뜻을 돌이키기에 염증이 났음이로다 )

 이제까지는 나쁜 짓을 하고 죄를 지어도 늘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성경에서 봐왔다.
 하지만 오늘은 이 성경구절이 왠지 섬뜩하게 와닿았다. 우리를 끝까지 버리지 않으시던 인내하시는 하나님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 아니던가.
 하나님도 참는데 한계가 있으시다고 봐야하는지 조금 헷갈렸다. 하나님께서 나를 돌이키시려고 계속 애쓰시지만 내가 끝내 돌이키지 못하면 나를 버리실 수도 있다는 내용인걸까.
 그런건 아닐 것 같지만 이 구절은 너무 선명하게 하나님을 염증나게까지 한 내가 아닐까하는 두려움이 들게 했다.
 그래도 나는 아직 하나님께 등돌리지도 물러나지도 않았으니 나를 좀 더 인내해주실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주시길 기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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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5-05-09 (토) 21:25 9년전
《 성경 QT 》

( 예레미야 17:7-8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찌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

 요즘은 봄을 맞아 날씨도 좋고, 기온과 습도가 적당해서 나무와 꽃들도 아주 싱싱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나도 소일거리삼아 집의 화단과 베란다 화초가꾸기에 한참 재미를 붙인터라 나무에 대한 비유가 나온 성경구절에 눈길이 더 간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자신을 하나님께 의뢰하는 자는 맑은 물이 흐르는 강물을 곁에 두고 푸르른 잎과 맛있는 열매를 맺는 나무와 같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찌는 듯한 더위와 강렬해서 말라버릴 듯한 햇빛과 같은 걱정과 고난이 생겨도 무엇이든 이겨낼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푸른 강가의 튼튼한 가지를 뻗고 탐스러운 나뭇잎을 가진 나무가 저절로 떠오르는 듯한 생생한 구절이어서 참 마음에 들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는 하나님의 눈에 이 나무와 같은 모습으로 보이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나도 이 나무와 같은 모습으로 보여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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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5-05-10 (일) 21:00 9년전
《 성경 QT 》

( 신명기 5:16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한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

 오늘은 어버이주일로 지켜졌다. 그래서 설교 말씀도 어버이주일에 맞는 내용으로 말씀하셨다.
 생각해보니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내용의 구절이 성경에 꽤 많았던 기억이 났다. 성경 어플을 이용해서 부모라는 단어로 검색해봐도 예상보다 많은 구절들이 나왔다.
 오늘도 그러한 내용의 성경 구절을 봉독했는데, 이제까지 네 부모를 공경하라라는 표현은 아주 익숙하였는데, 그 앞에 있는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화의 명령한대로라는 구절은 조금 낯설었다.
 명령이라는 표현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유나 조건을 따지지 않고 꼭 지켜야하는 것이라는 느낌이 있는데, 이 성경 말씀에서는 하나님께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령하셨다고 되어있는 것이다.
 물론 십계명 중의 하나이기도 할만큼 강조하신 일이지만 명령하셨다는 표현을 보니 새삼스레 부모 공경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권세와 영생을 주신다고 하신 것처럼 우리가 부모님을 공경하면 길고 복된 삶을 주신다고 하시는만큼 하나님은 부모 공경하는 우리의 모습을 아주 좋게 보시는 것이다.
 명령은 꼭 지켜져야만 하는 것이다. 나는 이제까지 공경보다는 근심거리에 가까웠는데, 오늘 이 말씀을 좀 더 마음에 새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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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5-05-11 (월) 20:41 9년전
《 성경 QT 》

( 예레미야 26:13 그런즉 너희는 너희 길과 행위를 고치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선고하신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시리라 )

 내 마음대로 정한 행동이나 뜻을 고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재앙을 내리신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벌을 주신다는 일화들은 성경에 많이 나와 있어 익히 알고 있지만, 간혹 지금 내가 하는 일이, 행동이, 말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지 맞지 않는지 판단하는 것이 애매할 때가 있다.
 사람의 판단에 나쁜 일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일 것이라고 대충 결정할 수도 있고, 교회나 예배에 누를 끼치는 일도 그러할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보다 좀더 복잡하고 흐릿한 일들도 많기에 어떤 기준들로 판단을 하고 길을 돌이켜야하는지 어려울 때도 생긴다.
 아마도 내가 하나님을 아직 잘 알지 못하고 또 조금은 비판적인 태도로 성경을 읽거나 순수히 받아들이지 못해 일어나는 문제인 것 같다.
 이러한 갈등과 고민을 없애기 위해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노력과 참 믿음을 가지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리라 본다. (마음처럼 잘 되지는 않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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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5-05-13 (수) 22:32 9년전
《 성경 QT 》

( 예레미야 51:60-62 예레미야가 바벨론에 임할 모든 재앙 곧 바벨론에 대하여 기록한 이 모든 말씀을 한 책에 기록하고 예레미야가 스라야에게 이르되 너는 바벨론에 이르거든 삼가 이 모든 말씀을 읽고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이곳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이 땅을 멸하여 사람이나 짐승이 거기 거하지 못하게 하고 영영히 황폐케 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라 )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악하고 불신하는 바벨론일지라도 돌이킬 기회를 주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결말이었다.
 그냥 아무런 경고없이 바벨론을 멸하실 수도 있으셨지만 이렇게 길고 다양한 표현과 비유를 들어 바벨론이 받게 될 벌에 대해 미리 말씀해주고자 하신 것은 아무래도 끝까지 바벨론의 회개를 기다려주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최후의 경고로 이 재앙들에 대해 기록하고 또 바벨론으로 가 그 모든 것을 읽어주게 하셔서 그들이 회개하기를 진정으로 바라셨으나 끝내 바벨론은 돌이키지 않아 더욱 처절한 멸망을 겪게 된 것이다.
 죄가 큰 만큼 벌도 크다. 그래도 하나님은 끝까지 돌이킬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경고하신다. 그리고 그 회개가 크고 진실하면 도리어 상을 주시고 그 희망을 외면하면 냉엄한 멸망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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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5-05-15 (금) 20:46 9년전
《 성경 QT 》

( 다니엘 2:47 왕이 대답하여 다니엘에게 이르되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의 신이시요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 네가 능히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었으니 네 하나님은 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자시로다 )

 느부갓네살왕이 꾼 꿈을 다니엘이 명쾌하게 해몽해주고 나서 왕이 다니엘에게 큰 상금을 내리고 엎드려져 한 말이다.
 어떻게 보면 그냥 꿈 하나 맞춰 해몽해준 것 뿐인데 이게 그렇게까지 감복할 일인가 싶기도 하다(물론 신기해할 수는 있겠지만).
 게다가 그 다음의 느부갓네살왕의 행보를 보면 우상을 떡하니 만들지 않던가? 정말 하나님께 감복하고 믿음을 가지게 된 것 같아 보이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저 표현만을 보자면 왠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의 고백보다도 더 대단하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께서는 왕의 입으로 저런 말을 하게 되면 왕의 권위를 아는 다른 사람들이 (왕도 인정한 신을) 더 쉽게 하나님을 영접하고 관심을 가지게 되리라 보신게 아닐까 싶다.
 이렇게 생각하면 하나님께서는 굉장히 용의주도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심하고 효과적으로 계획된 선포라는 느낌을 많이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방법도 사용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나도 내 주변 사람들의 말과 행동들에서 혹시 나타날 수도 있는 하나님의 뜻에 좀 더 주의를 기울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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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5-05-16 (토) 20:32 9년전
《 성경 QT 》

( 다니엘 12: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

 세상에서도 지혜로운 사람은 주목을 받고, 정의로운 사람은 세세토록 칭송을 받는다.
 성경에서는 더욱 강한 표현으로 지혜있는 다는 햇빛같이 환하게 빛나고, 많은 사람을 옳은 길로 이끄는 자는 반짝거리는 별과 같이 영원히 빛난다고 나와 있다.
 물론 지혜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니 지혜 있는 자도 하나님께서 좋아하신 사람이겠지만, 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한 사람은 영원히 빛난다고 하실 정도로 아주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옳게 이해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하나님께선 조용히 지혜로운 자보다는 직접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를 더 중요하게 여기신다고 느껴진다. 그리고 결국은 행동으로 나서서 이끌게 하시기 위해 지혜를 더해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도 나에게 어떤 지혜를 주실 때는 하나님의 일을 행하길 원하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니 지혜를 가지고 낮동안 빛나길 바라기 보다는 행동으로 영원히 빛나길 바래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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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5-05-18 (월) 12:33 9년전
《 성경 QT 》

( 호세아 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

 사람의 얕은 생각으로는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니 애초에 우리를 찢거나 치지 않으시면 좋지 않겠는가 하게 된다. 이 생각은 점점 올라가 선악과를 먹지 않게 하셨으면 우리가 지금도 걱정, 고민없는 에덴동산에서 행복하게 살텐데 까지 가게 된다.
 항상 이런 사람 입장에서의 생각이 하나님을 믿는데 큰 걸림돌이 된다. 조금 믿음이 생겼나 싶으면 이런 의심과 의문이 다시 드는 것이다.
 다시 성경말씀으로 돌아와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찢으시고, 치실 수도 있으시지만 우리를 도로 낫게 하고 싸매어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찢으시고 치신게 아니다. 하나님께세 하신 것이긴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과 멀어졌기 때문에 찢어지고 치신 것이니 결국은 자기 스스로가 자기자신을 찢고 친 것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손수 그 찢어지고 상한 것을 도로 싸매어 낫게 해주신다고 하셨다.
 그것만 믿으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방식을 이해하려는 것이 애초에 무리일 것이다. 방식이 이해가 안된다고 해서 확실한 결과까지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오면 낫게 해주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왜 나를 치고 찢으셨냐고만 계속 묻는 것은 어리석지 않은가? 나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셨으니 그대로 하면 나을 것인데, 쓸데없는 의문에 힘뺄 것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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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5-05-19 (화) 20:58 9년전
《 성경 QT 》

( 호세아 11:4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저희를 이끌었고 저희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저희 앞에 먹을 것을 두었었노라 )

 나는 동물을 무척 사랑하는 편이다. 그래서 동물이 고통을 당하거나 좁은 곳에 감금 당한 것을 보게 되면 내게도 그 고통이 느껴지는 것같이 마음이 괴롭다.
 소에게 멍에를 매어 밭을 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은 알지만 소가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이 들어 가엽게 여겨지기도 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내가 멍에를 맨 소같이 힘들고 가여우신가보다 그 무겁고 딱딱한 멍에를 벗기시고 맛있는 음식을 먹이시기 위해 사람과 사랑의 줄로 이끌어 오셨다고 하시는걸 보면 말이다.
 이 사람의 줄, 사랑의 줄은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고, 또는 부모님, 목사님, 선교사님 등등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런 사람들을 줄로써 보내셔서 나를 하나님과 직접 이어, 직접 멍에를 벗기시고, 또 직접 먹이신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줄은 저절로 이어지지 않을 것 같다. 줄을 내려보내시지만 내가 그 줄을 잡지 않거나 잡았다가도 끊어버린다면 하나님의 노력이 허사가 될지도 모른다. 그 사랑의 줄을 잘 잡아 놓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은 나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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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5-05-20 (수) 22:22 9년전
《 성경 QT 》

( 요나 1:1-3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

 보통 기독교인이 뚜렷한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게 된다면 (겪어보지는 못했지만) 크게 놀라면서도 생생한 음성을 믿고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믿는 하나님이 손수 명령을 하신다면, 믿음이 굳건하고 담대한 사람이면 '네, 알겠습니다.' 하며 즉시 따르기도 할 것이고, 나같이 의심 많고 소심한 사람이면 이리저리 못할 것 같은 핑계를 대며 방법을 수차례 되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요나는 나보다도 더 나약하고 게으른 사람이었는지 그 음성을 듣자마자 도망칠 궁리부터 했고, 또 즉시 실행에 옮겨 엉뚱한 곳으로 가는 배를 타버리기까지 했다.
 그렇게 도망갈 노력으로 니느웨에 가서 시도라도 한번 해보는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엉뚱한 도망이었다.
 하나님은 요나가 이런 인물인걸 알고 계셨음에도 굳이 요나에게 큰일을 직접 시키셨다. 이것은 요나같은 인물도 하나님의 일을 맡을 수도 있고 또 하나님은 그 일을 어떻게든 가능하게 하신다는 걸 나타내시는 것 같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요나에게 교훈을 주시거나 더 담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훈련시키신 것을 아닐까 싶다. 내가 요나를 한심하게 생각했지만 요나는 결국 하나님의 일을 하기는 한다. 요나를 한심하게 생각한 나는 그러지 못하고 있다.
 내가 요나를 한심하게 볼 자격이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는 결국 시작과 과정이 엉망일지라도 하나님의 이끄심을 따라 그 명령을 실행하게 되면 그것으로도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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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5-05-21 (목) 20:52 9년전
《 성경 QT 》

( 스가랴 7:5-6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년 동안 오월과 칠월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너희의 먹으며 마심이 전혀 자기를 위하여 먹으며 자기를 위하여 마심이 아니냐 )

 주일에 교회에 가게 되면 장로님들께서 대표 기도를 돌아가며 하신다. 매주 다른 분이 돌아가며 기도하시지만 그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다. 표현이나 비유는 조금씩 달라도 늘 교인들과 그 가정의 건강, 재물, 화목 그리고 교회의 발전, 나라의 안녕 등을 구하는 기도를 하신다.
 이런 것들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를 원한다는 뜻으로 하시는 기도이지만 조금은 내가 하나님을 잘 믿을테니 이런 복들을 주십시오 하고 떼쓰는 것 같기도 하다.
 수능을 앞둔 자녀가 있거나 집안에 중요한 일이나 환자가 있는 등 중요한 일을 앞두곤 금식기도 하는 것도 볼 수 있다. 좋은 결과를 주십사 하고 금식까지 하며 기도하는 것인데, 오늘 성경말씀을 읽고 나니 그 기도들이 자신을 위한 것인지 정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 확실히 알고 기도드려야겠다는 경각심이 들었다.
 주기도문을 보더라도(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은 최소한의 기본적인 내용이라고 보이고) 죄를 사하여 주시길 바라거나 시험에 들지 않길 바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 나 자신과 가족을 위해 돈 많이 벌게 해주시고 좋은 대학에 가게 해주시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시지는 않으신 것이다. 이런 것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는 것이라면 다른 종교와 다를 것이 무엇이겠는가?
 지금부터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하나님을 위한 기도를 드려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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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5-05-22 (금) 22:27 9년전
《 성경 QT 》

( 스가랴 11:1-2 레바논아 네 문을 열고 불이 네 백향목을 사르게 하라 너 잣나무여 곡할찌어다 백향목이 넘어졌고 아름다운 나무가 훼멸되었도다 바산의 상수리나무여 곡할찌어다 무성한 삼림이 엎드러졌도다 )

 계속 사람의 기준과 뜻대로 살면 하나님께서 벌하신다는 내용의 구절들이 이어지는 선지서들을 읽고 있다.
 솔직히 반복되고 이어지는 갖가지 끔찍하고 처참한 징벌의 묘사에 조금 지치고 지루해져가던 중이었지만 이 구절들은 불타는 나무의 매캐한 향이 느껴질 만큼 생생하게 보였다.
 수없이 많은 멋진 수형의 아름드리 나무들이 단번에 불타고 부숴져 쓰러지고 산산히 박살나 사라져버린다.
 사람의 입장에서는 정말 안타깝게 느껴지는 광경일 것이다. 보기도 좋지만 열매도 주고 집짓고 불피우는 등 쓸모가 많은 나무의 숲이 훼손되고 사라지는 것은 괴로울 정도로 아깝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 모든 나무와 그 나무들이 이루는 숲은 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시고 보기 좋았더라고 말씀까지 하신 것들 중 하나일 것이다.
 숲이 훼멸된다면 그 숲을 보고 즐기고 이용하던 사람이 더 마음이 아플까, 직접 아름다움과 유용함을 계획해서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더 마음이 아프실까? 단순히 생각해도 직접 만드신 분이 더 마음이 아프실 것이다.
 그런데도 망설임없이 불태우고 쓰러뜨리신 것은 그만큼 사람의 죄와 이기심에 대해 벌주실 수 밖에 없으신 심정을 나타내는 것이다. 죽어도 죄를 깨닫거나 잘못된 것을 돌이키지 못하니 마음 아프셔도 벌주실 수 밖에 없으신 것이다.
 숲의 처참한 모습을 보지 않기 위해선 늦더라도 사람의 기준과 뜻에 집착하지 않고 하나님의 기준과 뜻으로 돌아서야한다. 그렇게 되면 숲도 그 푸르름이 여전할 것이고 하나님도 마음 아프지 않으실 것이다. 사람도 유용한 나무와 옳으신 하나님의 능력 모두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뻔한 결과가 있는데도 사람의 기준과 뜻을 쫓아 죄를 지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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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5-05-23 (토) 10:17 9년전
우리의 삶과 환경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받은 환경도 달라집니다. 모든 것에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사람의 기준과 뜻을 쫓아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과 뜻을 쫓아 의를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관련된 상담설교를 읽어보세요.

[53희생]

1창3; 17-24 하나님께서 잃어버리신 것들


http://shchurch.or.kr/sermon/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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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5-05-23 (토) 21:51 9년전
《 성경 QT 》

( 마태복음 5장 7절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

 이번주 상담 후 동생에 대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실천해보라는 과제를 받은 참이었는데, 이 말씀을 다시금 읽게 되었다.
 이웃이나 친척의 고민을 듣게 되거나, TV, 영화를 보다가 안타까운 일을 당한 사람을 보게 되면 '참 안됐다.' 라던지 '불쌍하다.' 라고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이런 것은 어쩌면 순간의 동정심이라고 보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이런 감정을 긍휼이라고 여기기엔 조금 가볍고 짧은 감정인 것 같다.
 남을 긍휼히 여긴다는 마음은 지속적이고 실천이 동반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순간이나 며칠동안 불쌍하다 생각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대하는데에 있어 늘 진심으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진 채 말이나 행동을 그 긍휼히 여김이 우러나오도록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보다 쉽지 않고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 같다. 자연스레 우러나올 정도가 되어야 진정한 긍휼의 마음이라 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그런 마음을 가진다면 남들도 나를 대할 때 그런 마음으로 대해준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순간적이고 가벼운 동정심으로 동생을 대한다면 나도 그 정도의 동정심밖에 받을 수 없다. 그것은 서로에게 비아냥거리는 것에 더 가까운 부정적인 결과만 가져왔다.
 그렇지만 이제부터라도 진심으로 동생을 긍휼히 여긴다면 나 또한 동생에게 그리고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확실히 말씀하고 계시다. 이 말씀을 의지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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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5-05-25 (월) 21:09 9년전
《 성경 QT 》

( 마태복음 27장 3-4절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

 가룟 유다는 뒤늦게 후회하며 자신의 잘못이 엄청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사람의 기준으로는 이미 저지른 죄에 대해서는 스스로 반성한다고 해서 정상참작은 될지 몰라도 처벌이나 비난을 받게 된다.
 그리고 성경에서도 가룟 유다는 모든 것을 용서받지 못하고 자살로 더욱 큰 죄를 짓고 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성경 구절에서 알게 된 점은 바로 스스로 뉘우치는 것과 회개는 또 다르다는 것이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엄청난 죄를 지었지만 그가 정말 진심으로 회개하였으면 자살에 이르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되어 세계를 다니며 전도하지 않았을까하는 상상도 해보았다.
 그러나 결국 가룟 유다는 인간적인 도덕 기준에서 양심이 찔리고 이건 아니다 싶은 마음에서 그쳤는지 끝내 회개로 용서받지 못하고 성경 기록상 가장 극악무도한 자로 남고 말았다. 그리고 현재의 우리까지 우리는 가룟 유다같은 악인이 되지 말자고 다짐하게 만드는 인물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사람이 말하는 뉘우침이나 후회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회개는 다르다. 우리는 주로 뉘우치는 척이나 후회하는 것을 회개라고 생각하고 기도하지 않았나 다시 한번 돌이켜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회개를 하기 위해 힘써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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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5-05-26 (화) 21:14 9년전
《 성경 QT 》

( 마가복음 9장 35절 예수께서 앉으사 열 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

 이 말씀은 정치인들도 입버릇처럼 떠드는 말이고 또 여러 봉사단체나 리더들에게서도 자주 들을 수 있는 관용적인 표현이다.
 그런만큼 조금은 식상하기도 하고, 진심은 그렇지 않으면서 겸손한 척 한다고 비꼼을 당하기도 하는 표현이다.
 예수님을 직접 곁에서 모시고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놀랍게도 네가 높니 내가 더 높니 하며 서로 자신들이 더 높고 귀한 사람임을 자처하며 갑론을박하는 모습을 보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희생하심을 직접 보고 듣던 열두제자도 높아지기를 원하고 뻐겼다는게 놀랍고도 역시 사람은 어쩔 수 없구나 하는 생각도 들게 했다.
 요즘 우리 사회나 가정, 또 친구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는 어쩌면 다 서로 자신이 높아지길 원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마치 저 열두제자처럼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문제에 대해 첫째가 되고 싶으면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낮은 곳에서 그들을 섬기라고 하셨다.
 우리는 쉽게 이 말을 내뱉으며 자신이 이런 것을 알고 있으니 마치 실행한 것인양 굴지만, 실제 이렇게 낮은 곳에서 남들을 섬기는 사람은 극히 드물고 또 그런 만큼 그런 사람들을 영웅이나 성인처럼 존경한다. 이는 섬김을 실행하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 또한 존경받고자 하는 욕구가 커서 남보다 낮아지는 것을 참지못한 경우가 많았다. 마치 청개구리처럼 첫째가는 사람이 되려면 하라고 하신 반대로만 했던 것이다. 그러니 존경받는 사람이 절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처럼 자신을 숙여 낮고 좁은 곳에서 오직 자신이 아닌 인류를 섬기고, 그 인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심을 배워야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자면 버려야할 습관도 포기해야할 안락함도 수없이 많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제는 알고 있는 만큼 실행하기 위해 노력해야할 때이다. 알고만 있는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죽은 지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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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5-05-27 (수) 21:59 9년전
《 성경 QT 》

( 마가복음 11장 28절 가로되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누가 이런 일 할 이 권세를 주었느뇨 )

 사람들끼리 싸우는 상황을 가만히 살펴보면 많이 나오는 표현들이 있다. 그 중에 하나가 네가 뭔데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느냐라는 식의 상대방이 자신한테 그런 조언이나 폭언을 할 처지가 안된다는 뜻으로 하는 말들이다.
 꼭 싸우지 않더라도 기분이 상하게 되는 상황들에선 늘 이런 식으로 생각하게 된다. 저 사람이 뭔데 나한테 저런 소리를 하지? 또는 자기도 잘 못하면서 왜 나한테 간섭을 하는거지? 등등 무의식적으로 상대방이 나보다 못하다는 생각을 바닥에 깔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장로나 지위높은 자들에게 이런 소리를 들으셨다. 자신들보다 예수님께서 아래라고 생각하기에 저런 소리를 했을 것이다. 그리곤 자신들의 권세와 지혜가 최고인데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것을 잠식하려한다고 여겼던 것 같다. 예수님의 능력과 권세를 아는 우리들은 그 자들이 참 어리석고 건방지다고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나도 저 장로나 대제사장, 서기관들 같이 말하고 있다. 내 고민을 간단히 해결해주시지도 않으시면서 어떻게 진심으로 믿으라고 하시는지 묻기도 하면서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물음에 너희가 대답하지 못하니 나도 답해주지 않겠다고 하셨다. 나 스스로 저런 의문이 생기지 않을 때까지 노력해 혼자 힘으로 믿음을 시인할 수 있어야 한다고 여기신 것 같다. 그리고 다른 쪽으론 너무 당연한 답변이라 굳이 말씀하지 않으신 것 같기도 하다.
 의문만 계속 가질 것인지 스스로 답을 찾을 것인지는 나의 선택인 것 같다. 이왕이면 답을 찾는 것이 옳은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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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5-05-28 (목) 21:28 9년전
《 성경 QT 》

( 누가복음 5장 5절~8절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

 시몬 베드로는 열두제자 중에서도 가장 예수님께 가까이 있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어부의 전재산과 같던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서기까지 했다.
 이 장면에서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심없이 그물을 다시 쳤다. 이미 여러번 빈그물만 끌어올리던 지친 상태였고, 물길이나 환경이 바뀔만한 상황도 아니라 상식적으로는 딱히 새로이 그물을 내린다고 물고기가 잘 잡힐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한번 믿고 그물을 다시 쳤다. 이미 지칠대로 지치고, 실망할대로 실망한 상태였지만 베드로는 그래도 마지막으로 한번 도전해보기로 한 것 같다.
 그런데 마지막 구절을 보니 베드로도 그물을 다시 내릴 때에 100%의 확신은 없었던 것 같다. 밑져야 본전이다라는 마음으로 눈 딱 감고 마지막으로 한번 그물을 쳐보자 하는 마음이었을 것 같다.
 왜냐하면 물고기가 엄청나게 많이 잡히고 나서 예수님의 말씀을 따랐더니 많이 잡힌 것이라고 기뻐한것이 아니라, 예수님 발밑에 엎드려 자신이 죄인이라고 회개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수님 말씀을 확신하지 못한 것에 대한 회개일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베드로의 의심을 모르시진 않으셨지만 마지못해 따른 그 믿음이라도 좋게 보셨던 것 같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확실한 믿음과 순종을 원하시긴 하지만 우리가 혹시 그것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이해해주시고 참아주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의심섞인 믿음에 대해 우리가 회개하면 그것에 대해 복주시는 것을 이 말씀에서 알 수 있었다.
 확신이 없다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베드로와 같이 조금 미심쩍지만 그래도 한번 말씀을 실천해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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