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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 2022년 2월 <49호> 주제: 방어력



 *소원상담센터 소식지 

 

 

 2022년 2월 <49호>

 


주제: 방어력

 

 

 

 

 

 

<1>성경적상담의 용어설명 : "방어력"에 대한 성경적 이해

 

방어력이라는 용어는 선순환의 목표로서 자기 자신이 받을 수 있는 모든 공격과 스트레스를 이겨내는 힘을  의미합니다. 그 반대로 악순환의 증상은 자학, 자해 등이 있습니다. 스스로를 일부러 공격해서 더 큰 상처를 만드는 것의 반대로서  스스로를 보호하고 지키며 견디어 내는 것을 표현하는 용어입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방어력이 있어야 하고 이러한 방어력이  충분할 때 외부의 공격을 잘 막아낼 수 있습니다. 신체에는 면역력이 있어서 외부에서 바이러스가 침입했을 때 몸  전체에 퍼지지 않도록 잘 막아냅니다. 바이러스가 몸 전체에 퍼지거나 중요 장기에 깊게 침투해버리면 생명의 위협을 받습니다. 어떤  경우는 안타깝게도 사망에 이를 때도 있습니다. 신체에서 면역력이 높은 것은 중요한 부분입니다. 면역력이 낮으면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고 또한 앞으로 경험하게 될 수 많은 바이러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방어력도  정신적인 면에서 면역력을 높이는 것과 같습니다. 몸에 아무런 상처를 입지 않았다 하더라도 마음에 상처를 받으면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쓰러지고 맙니다. 그 결과로 인해서 스스로를 해치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은 그 이전에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노력과  의지가 있었을 때 막아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상황에서도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나서 마음을 회복하고 다시 더 중요하고  의미있는 일을 해나갈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그 속에 존재할 수 있는 요소를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많은 선순환의 목표와 비전이 그렇듯이 ‘방어력’도 역시 여러 가지 선순환의 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선순환에서는  성경적 상담의 총 48가지의 주제가 다양하게 결합되어서 그 내용을 구성합니다. 단순히 외부자극과 공격에 항상 동일한 방어력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대상에게 필요한 방어력은 각각의 상황과 주체에 따라서 다르게 구성됩니다. 예를 들면, 은혜의 소원으로는 ‘동행, 충만’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결심으로는 ‘인내, 양선’으로 채워져야 하는 사람이 있기도 합니다. 구체적인 실천의 모습으로는 ‘절제, 경건’이 필요할 수 있고 변화의  모습으로 ‘교육, 교제’가 있어야 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방어력이 단순히 외부 공격에 대응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적으로 항상 선순환 속에 있기 때문에 그 지속적인 선순환 속에서 외부자극에 그때 그때 대응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회적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수동적이 아니라 능동적인 모습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방어력은 언제든지 외부의 공격을  넉넉히 이겨낼 수 있는 모습이 됩니다. 고린도후서에서는 방어력의 모습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8-10)”

방어력의  근원에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항상 있는 것이고 그로 인해서 방어력이 형성됩니다. 그래서 외부의 공격이 있건 없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인해서 항상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고 그러한 선순환 속에서 모든 공격을 막아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방어력’이라는  선순환의 의미를 기억하면서 지속적인 선순환으로 살아가고자 할 때 늘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적  상담을 배우는 학생들이 항상 든든하고 흔들리지 않는 방어력이 가득한 마음으로 살게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https://swcounsel.org/b/research1-81

 

 

 

 

 

<2>이 달의 학생인터뷰: 박태오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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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지금 어떤 일을 하시며 현재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척추교정센터에서 척추를 고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쉬는 날이나 주말을 이용해서 소원상담센터의 온라인 강의를 듣고 있습니다. 원래는 총신대학교 상담대학원에 입학하여 야간에 수업을 들으려고 했으나 성경적 상담을 알고 난 후 계획이 바뀌었습니다.

 

2.어떠한 계기로 이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셨나요?

청소년상담사 자격증을 취득하는 과정에서 여러 심리상담을 공부해보니 모두 인본주의적 세계관에서 출발하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그러한 인본주의적 세계관에 물들지 않게 경계하고 있던 터라 심리학은 기독교 신앙과 양립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그러한 심리상담들을 받아들이기가 싫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이런 심리학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 궁금하였고, 인터넷을 검색하는 중에 성경적 상담을 알게 되었고, 성경적 상담 또한 전통적인 입장과 통합적인 입장과의 구분이 필요하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습니다.

 

3.공부하는 부분에 있어 어려운 점은 없는지요?

커리큘럼을 공부하다보니 소원상담센터에서 배우는 내용들은 다 기존의 논문이나 학문으로서 없던 내용이고 목사님이 일일이 다 구상하고 지식적인 체계로서 만드셨단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 버젼을 거치면서 계속 발전 중이지만 중첩된 용어의 정리라든지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에 대한 실제사례라든지가 보완되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부분을 더 단단하게 보완하는 일이나 여러 사람에게 전수되는 일 모두 일단 가르치는 분이나 전문가가 점점 더 많이 나오고 규모가 확장되어야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님과 강사님들을 응원합니다!

 

4.성경적 상담을 공부한 후 삶 속에서 활용하고 계신 부분이 있으시다면?

성경적 상담은 기존의 심리학과 상담을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그러한 출발이 제가 하는 일과 굉장히 많이 닮아있습니다. 제가 하는 일은 많은 사람들의 인식에 너무 크게 자리 잡고 있고 또 그것에 접근하는 문턱이 낮기 때문에 그것을 선택하게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대안을 소개해주고 그 길로 인도하며 사람들을 돕는 보람이 있는 일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경적 상담 또한 진리에 더 가깝다는 점에서 같은 자부심을 갖고 있고, 목사님이 하셨던 그러한 고민들의 흔적이 제게는 큰 도움이 되고 있고, 저의 신앙적인 문제들과 제 마음을 이해하는 데도 큰 통찰을 이끌어주는 도구가 되고 있습니다.

 

5.앞으로의 목표는 무엇인가요?

성경적 상담을 상담도구로써 쓰는 청소년 상담센터를 만드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 내에서도 평신도들과 직분자들이 성경적 상담을 통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워나가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6.기도제목을 말씀해주세요.

지금 하는 일인 신체의 불편함으로 인한 인생의 여러 문제들을 가진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 뿐만 아니라 성경적 상담을 통해 마음의 문제에서 비롯된 여러 신체증상과 갈등들을 해결하는 데 까지 확장되었으면 좋겠고, 그러한 일들로 주님의 도구로 잘 쓰였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적 상담이 세상에서 더 널리 유용하게 쓰여서 모든 신앙인들의 고민을 속 시원히 해결하는 데에, 또 교회사역을 더 진취적이고 능동적으로 해내는 데에 좋은 도구로 쓰여졌으면 좋겠습니다.

 

이달의 학생인터뷰: 박태오 선생님 (swcounsel.org)

 

 

 

 

  

<3>인터넷 상담글과 답변

 

요즘 정말 우울하군요 수능도 끝났는데 친구도 별로 없어서 집에만 틀여박혀 있고...

말했다 시피 진짜 친구가 별로 없거든요....저도 생각을 많이 해 봤죠... 왜 친구가 없을까. 고1 때 까지만 해도 정말 좋았죠.. 반 전체가 절 좋아해주는것 같았어요.. 그땐 정말 활발하고 그냥 농담도 툭툭 잘 던지고 잘 웃고.... 솔찍히 그땐 철이 없었다고 해야하나.. 사람사이에 그런 벽이라는게 없는줄 았죠 아무것도 몰랐죠... 전 그때까지만 해도 다른애들이 부러워 할만한 아이였던걸로 기억됩니다...그런데 고2때 저는 완전 진짜 자퇴까지 생각할 정도로 반에서 거의 왕따를...어떻게 됬냐면요. 제가 맨첨 반에 도착하니까 쫌 노는애들이 있길래 그놈들이랑 친해지려고...살짝 만만하게 보여서 친해지려고 했거든요..근대 그때부터 그놈들이 ㅆㅂ 물떠오라고 하면서 ... 전 황당했죠..저도 그런적은 처음이라..그래서 싫다고 엄청 정색을 했는데 대가리를 치면서 떠오라면서..다른애들 다보는데서요..전 싸움같은거 안하고 자라서.. 싸운다는 생각도 못했죠..차라리 싸움을 했어야 했는데.. 그때가 이상한 저의 시작이 아닌가 싶네요..그뒤로 2학년때 찌질한친구들 몇명 사귀고 3학년 되면 다시 1학년때 처럼 살아야지 생각했죠...근데 1년동안 해온짓이 있어서 엄청 방어적으로 행동하고 그러니 별로 친구 없이 그냥 그저그런애로 말도 하기 싫은애 별로 할말 없는애로 ....아 정말 제가 불쌍합니다 예전에 저로 돌아가고 싶은데... 지금도 그냥 이렇게 폰을 사도 문자할 애도 별로 없고..1학년때 친구도 몇명 싸워가지고 베프같은거도 없고....상당히 힘드네요...대학가서는 이렇게 되면 안되는데요...

 

답변:[관리자]

우울함의 원인은 두려움이에요. 두려움이 시작되었고 그 두려움이 점점더 커져가고 있어요. 몸이 사소한 실수에도 다리를 다치거나 상할 수 있는 것처럼 마음도 사소한 일인것 같아도 심각한 상처를 받을 수 있어요. 싸우지 않았다는 것이 후회스러운 것이 아니라 두려워하기 시작한 것이 심각한 일이에요. 한번 두려움이 들어오면 점차 마음 속에서 퍼져나가기 때문이지요. 두려움을 벗어버려야 하는데....몸속에 바이러스가 들어올 때 자체방어력으로 이기지 못하면 약을 먹는 것처럼 스스로 두려움을 이길 수 없으면 그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다른 도움이 들어와야 합니다. 예전의 친구와 싸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에요. 현재 문제는 두려움이고 그 두려움은 바로 자기 자신 속에 들어와 있거든요. 님이 싸우는 대상은 자신을 괴롭혔던 과거의 친구가 아니라 자기 마음 속에 있는 두려움입니다. 거기에 스스로 얽히고 있어요.

 

요즘 정말 우울하군요 (swcounsel.org) 

 

 

 

 

 

<4> 상담설교

44행 19; 11-20 능력과 복을 주시는 하나님_1

 

 2015.6.28.주.주일오전.

 

*개요:    신앙에 대한 소개, 5은혜, 4극본

[행]19:11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행]19:12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행]19:13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

[행]19:14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행]19:15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행]19:16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행]19:17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행]19:18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

[행]19:19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행]19:20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사람의 손은 여러가지 기능을 합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중요한 기능은 붙잡는 기능입니다. 그것은 아주 본질적인 기능입니다. 갓태어난 아기들도 손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그 손으로 무엇인가를 붙잡습니다. 뭔가 손에 만져지는 것이 있으면 꽉 쥡니다. 그렇게 시작된 인생은 평생 무엇인가를 쥐고 붙잡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떠날 때에는 그 손에 힘이 풀리면서 손을 놓게 됩니다. 죽은 다음에는 아무 것도 붙잡지 않고 붙잡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대해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을 때에만 하나님을 붙잡을 수 있습니다. 죽은 다음에는 하나님을 붙잡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붙잡으려고 할 때 진짜 손으로 하나님을 붙드는 것이 아닙니다. 손에 다섯 손가락이 있어서 그 손가락을 오므려서 무엇인가를 붙잡는 것처럼 하나님을 붙들기 위해서도 뭔가 걸리는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을 붙잡을 수 있고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하나님을 붙들수 있는 근거에 대해서 생각해 왔습니다. ‘가족의 사랑’으로 하나님을 붙들 수 있음을 보았습니다. ‘내세의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을 붙들 수 있다고 했습니다. 또한 ‘존재의 근거’로 하나님을 붙들 수 있다고 했습니다. 또는 ‘선악의 기준’으로 진정한 선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붙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모두 몇가지의 근거를 가진 셈입니까? 네 가지입니다. 마치 네 손가락으로 하나님을 붙드는 것처럼 하나님을 붙들 수 있습니다. 네 손가락이 다 있으면 더욱 굳세게 붙들 수 있을 것입니다. 혹은 하나님께 대해서 손가락이 단 하나만 있어도 하나님을 붙잡을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는 손가락이 하나뿐이지만 그 손가락 하나를 하나님이 붙들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원래 손가락이 다섯 개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 손가락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손가락이 있으신 분이라면 더욱 굳게 하나님을 붙들 수 있겠고 그렇지 않고 하나도 없었다면 이제 말하려고 하는 다섯 번째 손가락이 마지막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갖는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보고자 하는 다섯 번째 손가락은 하나님께 대해서 능력과 복을 기대하면서 하나님을 붙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능력과 복을 주시는 분이심을 기대하고 바라면서 하나님을 붙들 때에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성경말씀은 바로 그러한 능력과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알게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사람들에게 나타내면서 전도를 하고 있습니다.

“[행]19:11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행]19:12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서 놀라운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바울이 직접 병고치며 귀신을 쫓는 능력을 나타내었을 뿐만 아니라 바울이 가지고 있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사람에게 얹으면 병이 낫고 귀신도 떠나가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여기서 능력이라는 말은 헬라어δύναμις (dynamis)라고 합니다. 그 의미는‘miracle, strength power, ability’ 로서 기적, 강한 힘, 능력 등을 의미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가지고 있거나 사용하던 물건으로도 병이 낫고 악귀가 나갈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바울의 손으로 그리고 바울과 관련된 물품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셨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바울을 통해서 나타내신 놀라운 일은 사람들이 사도 바울의 말을 믿고 그 대상인 하나님을 믿게 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귀신이 나가고 병이 떠나가는 일들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능력을 나타내시는 일들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단지 기원후1세기 경에서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바로 2015년 현재를 살면서도 우리에게 능력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저 자신도 너무나 많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에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은 순순히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 그 능력은 때로 비판되어지고 폄하되어지며 의심되어집니다. 그들의 의심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병을 왜 하나님께 대해서 낫게 해달라고 하는 것인가, 병원에 가서 치료받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또 귀신을 정말 쫓아주시는 것인가, 귀신들린다는 것은 정신병의 한 일종으로 정신과치료를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등등의 의심과 비판이 있습니다. 또한 의심은 이어집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모든 병을 다 고쳐주시고 모든 귀신을 다 쫓아주시는가, 만약 어떤 병만 고쳐주시고 어떤 귀신만 쫓아주신다면 왜 하나님은 모든 병을 낫게 해주시거나 모든 귀신을 다 쫓아주시는 것이 아닌가라고 의심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능력은 제한되고 무능력한 것으로 평가절하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능력은 보잘것 없으며 하나님의 도우심은 없어도 되는 것이며 하나님은 믿고 의지할 만한 분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어서 결국에는 하나님을 거부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놀라운 능력을 나타내신다 하더라도 하나님에 대한 부정적이고 비판적이며 저항하고자 하는 마음은 그 은혜를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작은 능력으로도 하나님을 믿게 되고 따르게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아무리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셔도 하나님을 거부하고 부인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본질적으로 인간에게 ‘자기 자신의 능력’이라는 자의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바로  그 자기 자신에 대한 자의식이 깨어질 때에만 비로소 하나님의 능력을 기대하고 사모하여 받아누릴 수 있습니다. 그 의식을 흔한 말로 ‘자존심’이라고도 하고 ‘고집’이라고도 하고 ‘교만’이라고도 합니다. 그것이 깨어질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과 복을 누릴 수 있고 그 능력과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깨어지지 않은 상태로 하나님을 대하는 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능력과 복을 빼어내기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고 싶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과 복은 좋아보이니까 결국 생각해 낸 것은 하나님은 믿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능력과 복을 가져오게 만들었던 형식만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다음 장면이 바로 그렇게 하나님을 믿고 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절히 하나님의 능력과 복주심을 이용하고자 했던 자들의 모습입니다.

“[행]19:13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

[행]19:14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왜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악귀 들린 자들에게 대적기도를 하였을까요? 이들이 바로 방금말한 예수님을 믿지는 않지만 예수님의 능력만 이용하려고 했던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단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였을 뿐입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통해서 귀신을 쫓아내보고 싶었던 것뿐이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 의해서 예수님은 죽임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혹은 자신의 민족이 예수님의 하나님 아들되심을 못알아보고 십자가에 죽였다는 것을 고백할 때만이 예수님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싫고 그분의 능력은 좋아 보였기 때문에 그들은 그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라고 밖에 말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 스게와의 일곱 아들은 아주 크게 낭패를 당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도 그렇게 다른 유대인들을 따라해서 실제로 자기 자신이 믿지는 않는 예수님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내려고 했는데 귀신들이 도리어 공격을 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행]19:15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행]19:16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악귀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바울의 대척점에 존재하는 실존하는 영이었습니다. 그 악귀는 지금도 사람 속에 들어가서 이런 저런 악한 일을 행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능력과 복을 누리게 되는 것처럼 악귀는 모든 악한 일과 불행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의롭고 정직하고 안전한 이유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고 그 공의를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흉악한 자들이 우굴거리고 모든 추악과 더러움과 악행을 일삼는 사탄적인 삶을 살아가는 환경 속에서는 손쉽게 이러한 귀신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 귀신이 하는 말이 바로 자신들이 예수를 알고 바울도 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너는 누구냐’라고 했습니다. 귀신에게 있어서 하나님과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었고 바울은 그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권세와 위엄앞에 도망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유대인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진실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귀신을 속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귀신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귀신들린 한 사람은 일곱 명에게 뛰어 올라서 달라붙었는데 일곱 명이 그 한 명을 당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귀신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힘으로도 완력으로도 당해낼 재간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옷이 다 벗겨진채로 여기저기 다치고 상한 상태로 도망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이러한 귀신의 영향을 받지 않고 무병장수하며 만사형통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귀신은 아무런 방어력없이 무방비상태로 노출되어 있는 인간들을 공격합니다. 그 마음에도 들어가고 그 몸에도 들어갑니다. 그래서 악을 상상하게 하고 죄를 저지르도록 욕심을 더 강하게 갖게 합니다. 이런 저런 나쁜 일들도 만들어 냅니다. 몸을 약하게 하고 불운이 따르게 하고 병이 들게 하고 정신이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귀신은 둘째치고 우리는 때로 사소한 감기조차 이기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시라는 강하고 든든한 구원자를 만나기 전까지 인간은 초라하고 나약하고 불쌍한 존재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날 때 인간의 삶은 달라집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창조자이십니다. 인간이 하나님께서 주신 본능에 따라서 자신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자신을 만드신 창조자를 섬기며 그분의 도우심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임을 깨닫고 도와달라고 할 때에 하나님은 그를 도와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집을 떠난 자식이 집에 돌아오는 것이며 아버지를 거역한 자녀가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자신을 믿고 따르는 자들을 도우시며 능력을 나타내시며 보호하시고 지켜주십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각 사람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일들을 잘 끝내고 무사히 하나님 나라에 이르게 될 때까지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도우시고 보호하시며 지키십니다.

 

조선시대 암행어사 제도가 있었습니다. 과거에 급제한 선비가 왕으로부터 암행어사로 부르심을 받아 지방 곳곳의 폐단과 학정을 찾아 엄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그에게는 마패가 주어지고 호위무사와 수천명의 포졸을 동원할 수 있는 권세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모든 권세는 왕의 명령을 수행하려고 할 때 의미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능력과 복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설때까지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맡기시는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주시는 은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진실히 믿고 따를 때 비로소 하나님의 능력과 복도 잘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원리를 깨달았을 때 하나님을 진실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은 기뻤습니다. 그래서 더욱 굳세게 하나님을 붙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복을 붙든 것이 아니라 능력과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붙들었습니다.

“[행]19:17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행]19:18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

[행]19:19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의 능력과 복을 나타내었던 바로 그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이 일을 듣게되고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높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거짓되고 이용하다가 낭패를 보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정말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렇게 교활하고 이기적인 자들에게 임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 그들은 더욱 진실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붙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자복하고 자신의 악한 행동을 고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교만했던 자아가 깨어지고 고집과 자존심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의심하고 부정하며 부인했던 일들을 자기 스스로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술을 행하던 자들은 자신이 행하는 일들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지한 일이었는가를 절감했습니다.

여기서 마술은 헬라어로περίεργος (periergos)라고 해서 모든 주술, 마법과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고대부터 에베소는 이러한 주술이나 마법으로 유명한 도시였고 그에 대한 많은 책들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흉내만 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는 장난으로 여겨졌습니다. 또한 진정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술을 버려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마법책을 불살랐고 그 값이 은 오만 드라크마였고 이는 약 25억 원의 가치였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앞에서 진정으로 머리를 숙이고 엎드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진정한 능력을 의지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진정으로 능력과 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그것을 진정으로 믿는 자만이 그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은 다른 신과 겸하여 섬길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유일하시며 가장 존귀하신 이 세계의 창조자이십니다. 그분을 의지할 때 우리는 그분의 자녀가 되고 그럴 때 진정한 하나님의 능력과 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수]24:16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니

[수]24:17             이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우리와 우리 조상들을 인도하여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올라오게 하시고 우리 목전에서 그 큰 이적들을 행하시고 우리가 행한 모든 길과 우리가 지나온 모든 백성들 중에서 우리를 보호하셨음이며

[수]24:18             여호와께서 또 모든 백성들과 이 땅에 거주하던 아모리 족속을 우리 앞에서 쫓아내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이다 하니라”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누리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과 복을 경험하고 그 하나님을 높이는 하나님의 자녀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https://swchurch.org/b/sermon-1067?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B%B0%A9%EC%96%B4%EB%A0%A5&sop=and

 

 

 

 

 

<5> 성경적 상담 사역자료

[파파고 번역]

고등학교 1학년 초, 나는 어떻게든 크로스컨트리 가입을 권유받았다.그 팀은 빡빡하고 재미있는 팀으로 알려져 있었고, 비록 내가 운동선수를 많이 해본 적이 없지만, 나는 "그냥 뛰는 거야.얼마나 힘들까?"


나는 그것이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고통스러울 정도로 힘들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짧은 단거리 달리기의 스릴을 즐겼지만, 거리가 마일로 늘어나자 달리기가 고문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내가 이기고 싶은 의욕이나 심지어 속도를 향상시킬 의욕이 부족했던 것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심지어 내 팀 동료, 코치,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옆에서 응원하는 것을 들어도 경기 중에 나를 격려하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그들의 열정과 에너지는 나의 피로와 너무나 대조적인 것이었고, 나는 종종 그들의 환호에 "하지만 나는 너무 피곤해!"라고 대답하고 싶었다.그래서 나의 첫 크로스컨트리 시즌도 나의 마지막이라는 말을 듣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장거리 달리기 선수로서 짧은 시간 동안 지구력에 관한 몇 가지를 배웠다.나는 땅에서 발을 겨우 딛을 수 있을 때 계속 움직이는 창의적인 방법을 찾는 것의 중요성을 배웠다.나는 남아 있는 마일리지 대신 다음 짧은 시간 동안 또는 심지어 다음 단계에 주의를 집중해야 할 필요성을 배웠다.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나는 네가 계속 가야 할 때 다른 사람들과 함께 달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어.불편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과 함께 있으면 마음이 끌린다.


인생 후반기에 인내의 본질에 대해 많은 것을 반영했다.내가 신학교에 다닐 때 피로가 쌓이기 시작했다.학교, 일, 관계, 그리고 다른 책임들은 길고 끝이 없는 인종처럼 느껴졌다.나는 이것이 일시적인 것일 뿐이고 내 성인의 삶은 내가 숨을 쉴 수 있게 해주고 삶의 필요를 온전히 해결해 줄 구조와 안정으로 구성될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대학원의 결승선을 통과한 후, 나는 그 경주가 단지 더 오래 지속되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만성 질환, 항상 어려움에 처한 아이들을 갖는 것, 직업의 전환과 요구, 관계 투쟁, 끝없는 심장병을 가져온 손실, 그리고 유행병이었다.말할 필요도 없이, 나는 육체와 영혼 둘 다 피곤하다.


이런 자세에서 선의의 지인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진부한 환호성이 어떤 것인지 듣기가 어려울 수 있다: "계속 가!…더 나아질 거야…날은 길지만 세월은 짧다…" 등의 반응을 보였다.심지어 성경에서도 이사야의 40:30–31의 말씀처럼 때때로 이렇게 느낄 수 있다.여호와를 기다리는 자는 다시 기운을 차리고, 뛰어도 지치지 않고, 걷지도 않고, 기절도 하지 아니하며,나는 이 말을 듣고 그들이 틀림없이 다른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고맙게도, 이러한 "용감"에 대한 나의 미지근한 반응은 내가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듣는 더 크고 달콤한 메시지에 의해 힘을 얻었다.


그는 내가 피곤할 때 나를 반갑게 맞아 주고 상냥하게 대한다(매트 11:28–30).그는 내 자신에 대한 기대가 너무 높거나 너무 무거울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그는 나의 노력이 내 주위의 세상에 보잘것없거나 한심하게 보일 때조차도, 나의 속도를 늦추고 믿음 속에서 전진하는 작고 꾸준한 방법을 찾도록 나를 초대한다(Luke 10:38–42).가장 힘들었던 날에도 더 많은 실망이나 요구를 접하는 대신 위로와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자신 있게 그에게 다가갈 수 있다.

그는 내가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끝까지 갈지 예상하는 것은 나에게 너무 벅찬 일이기 때문에, 그는 내가 나의 다음 몇 가지 단계에 주로 집중하도록 격려한다.내 몸, 자원, 관계가 쇠퇴하거나 사라지더라도 그는 언제나 내 안에 모든 상실, 심지어 내 자신의 죽음(Matt 6:25–34)을 능가하는 영광의 희망을 쌓고 있다.그는 항상 나에게 필요한 일을 할 수 있게 해줄 것이고, 그러므로 나는 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나 믿음 둘 다 결코 바닥나지 않을 것이다.

그가 멀리 떨어져 서 있거나 그저 옆에서 격려를 외치는 것이 두려울 때, 나는 그가 이 경주에 참가하는 것이 그를 나의 피로를 친밀하게 알게 한다는 것을 기억한다.그가 이 경주를 완성한다는 것은 나의 고통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이득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것을 보장할 뿐만 아니라, 결코 나 혼자 뛰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다.예수님은 항상 나와 내 팀원들과 함께 뛰는 나의 파트너다.그의 성자 구름은 언제나 나를 둘러싸고 있다(Heb 12).그리스도와 나의 결합은 내가 하는 모든 일을 왕과 왕국의 목적과 존재에 주입시킨다.

오늘 너도 피곤할 것 같아. 그리고 나처럼, 넌 피곤함이 떠나길 원해.우리가 생명이라고 부르는 이 종족의 나머지 기간 동안 그것이 우리와 함께할 것 같으나, 우리의 예수님은 항상 더 가까이 계실 것이며, 우리를 결코 남겨두지 않으실 것이다.이 순간을 포착하여 눈을 감고 옆에 있는 그를 상상해 보라, "우리 앞에 놓인 기쁨을 위하여, 함께 이 일을 끝내자."라고 귓속말로 속삭인다.

 

I’m So Tired (swcounsel.org)

 

 

 

 

 

<6> 1월 후원금 내역

  

1월


1/7 센터 홍보비(네이버) 출금: -100,000원

1/9 무명 센터후원 적립금 수령: 50,000원 

1/9 상담후원 적립금 지급: -50,000원 

1/18 익명 후원금 입금: 70,000원 

1/28 후원금 입금: 200,000원 


잔액: 510,000

2022년 센터후원 내역 (swcounsel.org) 

 

센터후원금계좌:

국민은행 449901-01-210121 윤홍식(소원상담센터) 

 "소중한 후원은 누군가의 새로운 삶이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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