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역동성] 「Idol of the Heart and Vanity Fair」감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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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ol of the Heart and Vanity Fair」
<Response paper> 지금까지 성경적 상담에서 가장 매혹적인 부분을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성경적인 대안제시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성경적인 방법은 가장 진실하며 올바른 하나님의 뜻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 뜻을 알고자 하는 많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길과 방법을 알려줄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이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몇 가지 선결 조건이 있었다. 가장 정확한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기 위해서는 가장 정확한 문제 인식이 있어야만 했다. 그리고 이런 부분에서 성도의 상황을 파악하는 것은 필수적이었다. 문제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통찰이 절대적으로 요구되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엉뚱한 상담을 해줄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이 가장 난해하고 어려운 부분임을 자각하고 있는 성경적 상담자에게 이 article은 매우 도움이 될 만한 시각을 제시한다. 그것은 피상담자에게 존재하고 있는 가장 복잡하고 난해한 마음의 문제를 열어줄 수 있는 특수한 현미경이기도 하다. 이 복잡하고 난해한 마음의 문제란 바로 ‘우상숭배’와 ‘허영심’이라는 것이다. ‘우상숭배’가 무엇인가? 우상숭배의 본질에 대해서 저자는 매우 구체적이며 핵심적인 정의를 내리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는 무엇’이 아니다. 여기서 늘 모호하게 나타났던 것이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보다 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문제였다. 다시 말해서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결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존재가 사실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정확한 정의라고 할 수 없다. 이것은 우선순위의 문제가 아니라, 첨예한 대립속에서 하나님이냐, 아니면 그것이냐를 따지는 문제가 된다. 이제 문제는 더욱 본질적인 것으로 나아간다. 하나님이냐, 아니면 그것이냐의 선택의 문제는 우리가 적극적으로, 그리고 능동적으로 하나님을 택하지 않는다면 자연스럽게 하나님 이외의 것을 택하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저자는 여기서 단호하게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우리 인간은 모두 자기 자신의 필요와 욕구를 채우려고 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상숭배의 현상 이면에 있는 인간의 죄악성이 나타난다. 우상숭배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의 필요와 욕심을 채우기 위함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것이 힘든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 속에 자기를 더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그리고 능동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게 되고, 그 결과 우상숭배가 여러 가지 대상에 대해서 일어나게 된다. 저자는 바로 이러한 미묘한 마음의 문제를 핵심적으로 파악하고 그 마음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보여주고 있다. 왜 ‘허영심’인가? 특별히 우상숭배가 허영심과 함께 언급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 허영심은 우상숭배의 사회학적인 진단이다. 우상숭배 안에 존재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심리는 사회현상 속에서 다양한 방식과 문화적 형식을 통해 공통적인 분위기로 나타난다. 그것이 바로 ‘허영심’이다. 이 허영심은 단시간에 형성된 것이 아니다. 우상숭배자들의 모임 속에서, 주변의 영향을 받으며, 우리들의 마음속에 생겨났다. 다시 말하면 허영심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우리에게 뿌리깊게 파고든 마음의 경향인 것이다. 이것은 역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로 하여금 더욱 자신을 사랑하게 하고, 자신을 즐기게 하고, 자신을 모든 인생의 중심에 놓게 만든다. 성경은 정반대의 것을 말하고 있는데 말이다. 이 허영심은 우리에게 우상숭배의 악순환을 일으키고 있다. 허영심은 우리의 욕심과 필요를 채우라고 한다. 이것을 채우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속의 우상을 숭배해야 한다. 이 우상을 숭배함으로서 자신의 필요와 만족을 얻는다. 그리고 다시 우상 숭배는 강화된다. 우상 숭배의 대상이 사람이거나 사물일 때, 끊임없는 죄악의 악순환은 끊어지지 않는다. 만족을 위해 숭배하고 숭배를 통해 만족을 얻고, 다시 더 큰 만족을 위해 숭배하고.... 그래서 자기 자신의 판단과 하나님께 대한 방향은 사라지고 오직 만족을 채우려는 마음과 우상만이 최고의 목표로 남게 된다. 끊임없이 죄에 대해 종노릇하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이와 같은 우상숭배와 허영심에서 헤어나올 것인가? 문제인식과 진단 뒤에 따르는 대처방법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식이다. 하나님이 과연 나의 삶에 얼만큼의 주권을 가지고 계신가를 물어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 마음속에 주권을 가지고 역사하실 때 내 마음속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깨달아야 한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때에 내가 얻는 유익과 만족, 그리고 영원한 즐거움 등이 주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이 더 좋은 것임을 깨닫게 될 때에 지금까지 스스로 선택하고 취하였던 만족의 방법은 아무런 의미가 없음과 스스로를 더욱 괴롭히는 것임을 알게 된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인간 본성의 죄악성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인간에게 있는 만족과 필요와 욕구들을 완전히 무시하거나 배제하고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만족 더 진정한 만족 더 영원한 만족은 오직 주님의 주권을 인정할 때만이 생긴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뿐이다. 마침내, 우상숭배와 허영심에 반대되는 복음의 본질이 무엇인가가 극명하게 나타난다. 그것은 다른 주인을 섬기는 것이다. 주인을 섬기지 않는다거나, 홀로 독립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런 말은 비인간적이고 비성경적이며 비윤리적이다. 복음은 누군가를 섬겨야 하는 인간의 마음을 꿰뚫어보고 있다. 그리고 그 대상이 잘못되었으며 올바른 대상은 오직 주님뿐임을 말하고 있다. 복음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주인으로 섬기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럴 때에 모든 설명들과 조언들, 혹은 충고들이 의미를 상실하며, 심리적이거나 윤리적, 도덕적인 접근들의 허상이 드러나고 가장 확실하며 온전하고 믿을만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삶에 두각된다. 성경적 상담은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께서 구원자이시라는 해답을 주는 것으로 모든 삶의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방향을 제시한다. 성경적 상담자에게 필요한 것 다시 한번 강력하게 주어진 문제 인식과 분석의 도구를 가지고 성경적 상담자에게 주어지는 과제는 마음의 문제를 드러내라는 것이다. 마음의 문제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이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든, 우상숭배이든, 자만심이든, 몸의 문제이든 그 어떤 것이든지 간에 본질이 드러나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상담을 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것은 끊임없이 현상에 끌려 다니는 어리석은 추적밖에는 될 수가 없다. 원인을 규명하지 않고서, 나타나는 문제에만 집중한다면 계속적인 발생과 끊임없는 괴로움을 제거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마음의 문제가 성경적 상담자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인 이유는 이것이 가장 성경적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멸망 후 남은 자들이 예레미야에게 찾아와서 자신들이 애굽에 피난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물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그들의 마음을 밝히 드러내셨다(렘 42:20). 그것은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마음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그러한 통찰이 없다면, 그러한 분석이 없다면, 성경적 상담자가 아닐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신다. 성경적 상담자는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나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위해서 현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아니라, 본질을 바라보는 시각을 가져야 한다. 저자가 말한 것도 바로 이러한 필요를 위해 주어지는 것이다. 명쾌하고 논리적이며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 통찰과 분석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심령속에서 더욱 크게 역사하게 될 것이다. 바로 성경적 상담을 통해 그러한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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