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상담학은 심리학적 상담과 통합주의적 상담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1960년대에 그당시 심리학이 비성경적이며 반기독교적인 것을 고민하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교수인 제이 아담스를 통해서 주창되었다. 그는 일반심리학의 내용들과 복음주의 심리학자들의 사상이 비성경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 상담을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특별히 1965년 Mowere가 Beaver College에서 행한 심리학 비판 강연을 들으면서 네 가지 Mowere의 이론이 제이 아담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 영향은 1) 죄문제를 상담의 중심에 두어야 한다. 2)죄의 자백을 촉구해야 한다. 3)적극적이고 직접적인 상담자세가 필요하다. 4) 프로이드 이론에 대한 경계와 무분별한 심리학 이론 사용은 반격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지적은 그 당시 기독교인을 위한 상담사역에 눈을 뜨고 있던 제이 아담스에게 가장 적절한 것이었고 그 기반 속에서 그는 오직 성경만으로 행하는 상담학을 주장하게 되었다.
1970년 출판한 ‘Competant to counsel’은 제이 아담스가 기독교인을 상담하는 것은 가장 먼저 목회자들에게 책임이 있음을 강조하고 자극을 위해서 저술하였다. 그는 심리학적 상담 뿐만 아니라 복음주의적 심리상담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교회에서의 상담은 목회자를 중심으로 하는 상담이 되어야지 상담전문가가 중심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던 것이다. 이 책은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며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성경적 상담이 세간에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일반 심리학자들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복음주의적 심리학자들도 역시 그 주장은 인정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복잡한 인간의 심리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혹평하였다. 그러나 상담사역에 목회자들을 모이게 하는 구심점을 제공하였고 이후에 성경적 상담학은 비약적인 성공과 발전을 거듭하게 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이르러 성경적 상담학은 점차 쇠퇴기에 들어서게 되었다. 제이 아담스는 성경적 상담학을 하나의 운동으로 발전시키 뒤에 기존 심리학과의 교류를 거부하고 계속해서 심리학을 공격하기에만 급급하였다. 그는 기존의 상담구조를 뒤엎어버리고 교회 상담사를 중심으로 해서 새로운 체계를 세우려고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성경적 상담학에 결정적인 실수가 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목회자 상담 그룹은 계속해서 그 세력을 유지할 수 가 없었던 것이다. 목회자들은 상담사역이 100%의 사역이 아니었기 때문에 모든 시간과 여력을 상담에만 쏟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러한 목회자들의 퇴보로 인해 성경적 상담학은 80년대에 급속히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이러한 쇠퇴기는 다시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제이 아담스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교수직을 사임하고 지역교회로 돌아가면서 그 뒤를 이어 목회자 상담그룹을 이끌었던 존 베틀러는 성경적 상담학의 발전을 새로운 방향으로 모색하였다. 그는 강의사역보다는 실제문제를 해결하고 변화를 도와주는 상담을 중시하였다. 그리고 제이 아담스가 단순히 행동의 변화에 주력하였던 것에 반하여 존 베틀러는 가치관과 세계관의 변화에 촛점을 맞추었다. 그리고 기존의 모든 심리학 이론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배척하던 분위기와는 달리 모든 이론과의 대화를 모색하고 관계를 세워나갔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성경적상담학의 연구를 위해 세워진 웨스트민스턴 신학교 내의 상담기관인 CCEF에는 부드럽게 다가가고 여러사람에게 보급할 수 있는 발전된 성경적 상담이 자리잡게 되었다. 이는 피상담자의 고나계를 중시하였고 그리스도의 사랑에 더 큰 초점을 맞추었다. 그래서 사랑의 표현으로 마음을 들어주고 이해하고 교류하며 나누는 부분을 강조하기 시작하였고 이로써 성경적상담학의 주된 주제는 마음을 다루는 것이 되었다.
2)성경에서 마음으로
1990년대에 나타난 성경적 상담학의 놀라운 성장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가 아닌 CCEF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CCEF는 처음 1960년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실천신학교수였던 제이 아담스가 상담을 연구하는 기구의 필요성을 느껴서 개설하였고 이후 제이 아담스가 물러가고 존 베틀러가 1980년대 후반 2대 원장이 되면서 이곳을 통해 본격적인 성경적 상담학의 발전이 일어나게 되었다.
애초의 지역 목회자를 교육하려는 목표는 전문 상담사를 배출하는 것으로 바뀌었고 자연히 사역대상도 목회자 중심에서 전문 사역자 중심으로 변화되었다. 이후 성경적 상담에 관심을 갖는 일반성도들의 폭발적인 관심이 생겨나게 되었고 이와 아울러 책을 통한 적극적인 출판활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때마침 기독교 심리학자들에 대한 실망과 한계성으로 인해 교회는 상담문제에 있어서 다시 복음주의적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경향이 생겼고 이러한 분위기는 Alliance of Confessing Evangelical 이라는 집회에서 ‘Cambridge Decaration’ 선언문을 발표함으로써 가시화되었다. 이 선언문이 나타낸 바는 하나님을 인간의 심리적 욕구와 필요를 채우는 대상이라고 생각하거나 혹은 하나님의 우리 믿음의 대상이 아니고 욕구충족의 대상으로 생각하게 하는 모든 시도들에 대한 강한 거부와 저항을 표방하는 것이었다. 또한 기독교 심리학자들의 잘못된 상담을 통해 교회를 잘못된 신앙으로 호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하며 경계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와같은 선언문과 분명한 입장표명은 교회의 환영을 받았고 계속해서 성경적 상담이 발전할 수 있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CCEF는 ‘Changing Lives’시리즈를 출판하였고 이 도서들은 선풍적인 인기를 끈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도서들이 강조하고 있었던 것은 자녀교육의 문제와 가족 상호간의 대화의 문제, 그리고 여러 가지 심리적 괴로움에 대해서 ‘마음’에 대한 접근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얻게 하는 것이었고 이러한 시도는 성경적 상담학의 발전이 단순히 상담사의 양성이나 도서판매로만 그치지 않고 지역교회의 세미나 인도와 해외선교에서의 상담학 전파 등으로 계속 파급되어졌다.
결국 ‘마음’에 대한 접근과 강조를 통해 성경적 상담학은 효과적으로 개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게 되었고 교회와 성도를 섬기고자 하는 CCEF의 노력은 성경적 상담학의 발전과 더불어 커다란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현재 성경적 상담학에서 다루고 있는 마음의 주제는 매우 치밀하다. 일반 심리학에서 다루고 있는 마음의 주제는 단지 감정과 느낌, 혹은 상태에 머물지만 성경적 상담학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욕구와 소원, 그리고 동기와 의도를 살핀다. 이는 성경 자체가 인간의 마음, 즉 죄성의 근본적인 소원에 대해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성경에 바탕한 상담학도 자연히 이와 같은 마음의 욕구에 대해서 깊은 이해를 가지고 나아가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마음에 대한 이해’는 문화와 관습, 인종과 세대를 넘는 인간에게 있어서 공통적인 것이기 때문에 모든 인류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자녀문제에 대해서 고민하는 부모들에게는 마음에 대한 이해가 부모 자신과 및 자녀들에 대한 문제해결에 있어서도 궁극적인 해결책을 제시할 줄 것이다.
이렇게 마음을 다루는 성경적상담학은 1994년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 세미나를 통해 국내에 처음 도입되었고 2000년 황규명 교수에 의해서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교의 성경적 상담학박사 예비과정이 본격적으로 들어와 지금까지 시행되고 있다.
2.성경적 상담학의 기본원리
성경적 상담학에는 그 이론을 떠받치고 있는 일곱 가지의 중요한 기본원리가 있다. 이 기본원리가 성경적 상담학의 신학과 상담성격을 규정해 주는 것이며 모든 상담적 적용의 근간이 된다. 특별히 이 원리 중에서 앞으로 다루게 될 부모교육에 관련하여 ‘마음’의 중요성을 다루고 있는 네 번째 원리는 성경적 상담학의 가장 중심이자 문제해결의 열쇠가 된다. 성경적인 은혜는 바로 이 마음을 알고 그 마음에 접목시킬 때에 비로소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의 기능을 알고 실제 문제에 적용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이해해야만 한다.
1)마음의 중요성
마음은 우리의 모든 행동의 원천이다. 마음으로부터 행동이 나오고 그 행동을 통해서 모든 문제가 나타난다. 그럴 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행동을 살펴보아야 하고 그 행동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마음을 들여다 보아야 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행동 그 자체에만 신경을 쓰고 그 이전에 행동을 촉발시켰던 마음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는 마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이며 겉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성경적 상담학에서는 행동과 마음의 관계를 열매와 뿌리에 비유를 하고 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행동과 마음의 관계를 잘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만약 행동에만 초점을 맞추고 마음을 들여다 보려고 하지 않는다면 나무에 열린 열매에 문제가 생겼을 때에 계속해서 그 열매에만 초점을 맞추고 근본적인 문제인 뿌리는 보려고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성경적 상담학에서는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행동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집중을 한다. 문제행동의 이면에는 문제가 되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그 마음에 어떠한 문제가 생겨났고 그것을 어떻게 바꾸어야 할 지를 살펴보는 것이 궁극적인 문제 해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또한 마음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행동이나 겉으로 드러난 모습에만 집중할 때에 여러가지 문제가 생겨난다. 삶속에 일어난 문제로 인해서 괴로워하고 있는 내담자의 경우 단시간에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행동만을 바꾸어보지만 그것은 책임회피나 변명, 혹은 상황모면만을 위한 임기응변이 될 수 밖에 없다. 일시적인 변화는 가능하나 궁극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으며 도리어 다른 측면에서 나쁜 행동이 더욱 강화되는 부작용을 낳는다. 행동을 바꾸려는 노력에만 급급하게 되면 그러한 행동을 일으키고 있는 마음의 문제를 파악하지 못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더욱 가장되고 의도된 행동 속에서 진짜 문제를 파악할 수 있는 기회마저 놓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마음에 초점을 맞춘다면근원적인 문제해결을 위한 노력을 행할 수 있다. 문제 행동을 일으켰던 이유와 목적을 깨달을 때에 단순히 문제 행동의 원인만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숨겨져 있는 의도와 목표를 깨달을 수 있다. 그것은 지금 당장은 그리 심해 보이지 않는 문제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미래에 생길 수 있었던 더 큰 심각한 문제행동을 미연에 방지하게 되는 효과를 얻게 한다. 그러므로 행동이 아닌 마음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문제해결과 더큰 문제를 방지하기 위한 중요한 방법이 된다.
2)마음의 작동원리
우리는 행동이 아니라 마음에 초점을 맞추었을 때 마음의 정확한 작동원리를 이해할 수 있다. 그 작동원리의 모범을 이해하고 나면 그와 다른 문제가 있는 마음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본질적인 마음의 문제는 다른 말로 하면 ‘욕구’와 ‘소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반 심리학에서 마음의 정의는 단순한 ‘감정’과 ‘태도’나 ‘생각’으로 국한되지만, 성경적 상담학에서 마음이란 ‘진정으로 바라는 것’, 혹은 ‘은밀하게 끊임없이 요구하는 것’이라고 설명된다. 이렇게 진정으로 간절히 은밀하게 계속해서 바라고 요구하는 것 속에는 자신만이 꿈꾸고 요청하고 있는 ‘우상’이 있다. 그리고 그 ‘우상’을 그토록 바라는 것이 바로 ‘우상숭배’가 되는 것이다. 이 자체가 죄이며 하나님 앞에서 금기시되고 죄악시되는 것이지만 서둘러 그것을 ‘죄’로 정죄하고 비난하기 전에 성경적 상담학에서는 그것을 충분히 깨닫게 만든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죄의 악한 모습을 스스로 분명하게 직시하도록 자기이해를 자극하고 독려하는 것이다.
이 우상숭배의 마음을 계속 지속하게 하고 보호하는 것이 인간의 ‘이기심’과 ‘욕심’이다. 우상숭배를 하고 있을 때에 얻는 유익과 기쁨, 즐거움을 계속해서 누리기 위해서 ‘이기심’과 ‘욕심’은 끊임없이 이 우상숭배의 마음을 감추거나 합리화하거나 정당화시킨다. 그래서 마음의 근본적인 죄성은 어떠한 권면과 지적 속에서도 철저히 보호되는 것이며 때로 자각되지도 않는다. 이러한 마음의 보호막을 걷어내고 진정으로 가지고 있었던 우상숭배의 마음을 찾아내기 위해서 마음의 욕구를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성경적 상담학에서는 이를 위해서 마음에 대한 구체적인 그림을 그리면서 조금씩 가장 근본적인 욕구를 향해 나아간다. 이러한 마음의 진정한 욕구를 찾아가는 과정은 마음의 작용과 역동에 대한 이해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에 이어지는 ‘성경적 상담학의 역동성’에서 자세히 설명되어질 것이다.
때로 이러한 마음의 은밀한 부분은 영성이나 경건의 모습을 통해서 가려지기도 한다. 영성으로 충만한 상태나 혹은 경건으로 무장된 삶이라 할지라도 마음의 은밀한 부분에서는 온전하지 못하고 우상숭배의 마음으로 채워져 있을 수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죄성은 이기심과 자존심으로 강화되어서 오히려 철저히 신앙적인 모습으로 미화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적 상담학은 이렇게 가식적이고 위장된 영성의 모습까지도 분별해 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런 모습 속에서 정말로 바라고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기 때문이다. 그럴 때 오히려 과장되고 가려진 외적모습은 사라지고 내적인 마음의 상태를 발견할 수 있다. 그 모습을 발견할 때에 본질적인 문제의 해결을 기대할 수 있다.
3.성경적 상담학의 역동성
앞에서 우리는 성경적 상담학에서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중요성은 단지 중요하다는 강조만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본격적인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된다. 마음의 원리를 알고 그 원리에서 생겨나는 문제점을 파악할 때에 비로소 상담에서의 구체적인 해결책이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 문제점을 깨닫고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성경적 상담학에서는 ‘마음의 욕구’ 와 ‘욕구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고 있다. 이 두 가지를 살펴보면서 어떻게 구체적인 회복과 변화의 과정이 일어나는가를 깨달을 수 있다.
1)마음의 욕구
마음의 중요성을 깨닫고 그 속의 욕구를 들여다 보기 시작하면 사람들의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다. 이렇게 바라는 것은 단순히 부와 명예와 재물과 아름다움과 건강 등이 아니고 그것을 통해 더 궁극적으로 얻고자 하는 것이다. 그 본질적인 욕구란 물건이나 사람이나 사건 혹은 상황이 아니고 그것을 통해 최종적으로 더이상 나뉘어질 수 없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이러한 욕구에는 ‘유익, 편안, 쾌락, 인정, 존경, 지배’ 등이 있다. 이러한 욕구를 원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얻을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 수단과 방법 혹은 도구들이 겉으로 드러나는 소원이고 내부적으로는 더욱 근본적인 욕구가 있다.
이와 같은 욕구들에 대한 이유를 찾을 때 최종적으로 마주치게 되는 것은 이기심이다. 자기 자신을 위한 마음이 팽배해 있을 때에 그것은 구체적으로 얻고자 하는 욕구로 나타나고 그것이 모든 감정과 태도, 모습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역동성에서는 바로 이 마음의 욕구를 깨닫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알게 하는 것에 목표가 있다.
일반적인 원리에서는 이상과 같이 마음의 욕구와 그로 인한 행동 사이의 관계에 대해 이해를 할 수 있지만 개별적인 원리의 적용에서는 좀더 복잡한 역동이 존재한다. 그것은 쉽게 마음의 욕구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난다. 은밀한 마음의 욕구는 가장되고 미화되며 부인되고 합리화, 정당화 되어진다. 그런 다음 이 욕구는 스스로의 모습을 변형시켜 마치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열심이나 혹은 하나님이 주신 자연스러운 욕구이자 당연한 필요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이것은 인간이 욕구를 추구할 때 오는 즐거움과 유익을 버리고 싶지 않기 때문에 취하는 일종의 방어행동이고 이런 거부반응을 피해서 궁극의 욕구를 발견하는 것이 상담에서 아주 중요하다.
이렇게 욕구를 드러내게 되면 애초의 문제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형태의 욕구가 나타난다. 그것은 가장 노골적이며 원색적이고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적인 것이다. 이런 욕구를 온전히 드러낼 수 있을 때에 모든 문제의 원인이 무엇이었는가를 깨달을 수 있다. 그런 욕구들은 우리들 마음속에 은밀하거나 무의시적으로 스며들어서 전체 마음과 몸을 황폐화시키고 고통을 안겨다 주었다. 그러므로 그 욕구들이 발견되어진다면 문제의 근원이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그 문제를 변화시킬 수 있는 지를 결정할 수 있다.
여기서 상담을 통해서 욕구를 드러내는 과정이나 사용하는 도구는 성경적 상담학의 ‘방법론’에서 다루어진다. ‘역동성’에서는 단지 마음의 흐름과 초점이 어디에 주어져야 하는 지를 보게 된다. 특히 ‘역동성’을 통해 드러나는 개인적인 욕구는 때로 그리 나쁘 지 않아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드러내 놓고 나서도 별로 중요한 의미를 찾을 수가 없게 된다. 이렇게 나타난 욕구는 잘못 찾은 것일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런대로 괜찮은 욕구이자 다른 사람들에게도 쉽게 받아들여지고 납득될 만한 것이라면 전혀 바꿀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욕구에 대해서 성경적 상담학의 분명한 관점은 그것이 ‘죄’라는 점이다. 그것이 죄가 아니고서는 문제가 생겨날 수도 없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이라는 성경말씀을 통해서 욕구는 죄를 낳게 만드는 구체적인 원인이 된다. 그 욕심이 과연 무엇인가를 개개인에게서 밝혀내는 것이 역동성의 핵심이다.
2)욕구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
마음의 욕구가 구체적으로 잘 드러나게 되었을 때 이 욕구에 대한 처치와 해석이 필요하다. 이일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왜냐하면 죄악된 인간의 욕심과 죄성을 용서해주시고 변화시켜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바로 그 드러난 욕구에 대해 어떠한 말씀을 해 주시며 어떠한 은혜를 주실 수 있는가를 살펴보면서 마음 속에는 놀라운 치유와 회복이 일어나게 된다. 이렇게 인간의 마음에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는 세 가지가 있다.
a. 전능하신 대화자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모든 만물에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부여해주셨다. 모든 피조물은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며 움직이고 존재할 때에 가장 아름답고 온전한 모습을 나타낼 수 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자기 자신의 뜻에 따르고자 할 때에 본래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고 괴로움과 불편함, 그리고 고통 속에 빠져들어가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 속에 은밀하게 숨어있던 욕구가 온전히 밖으로 드러나게 되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정반대의 의미를 갖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이 수치심과 죄책감으로 나타나게 되고 그것을 버리지 않고서는 욕구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게 된다. 전능하신 대화자로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바로 이러한 욕구를 버릴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하나님께서는 원래 각 사람에게 주셨던 꿈과 소망을 다시 일으켜 주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룰 때에 더욱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음을 보여주신다. 그 뜻을 선택하고 자기 자신의 뜻을 포기함으로써 욕구에서 자유로워지며 은혜로 향해 나아갈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하나님의 뜻만을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로 인해 고통받고 괴로워하는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시며 능력으로 붙들어 주심으로써 온전히 그 욕구를 포기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이럴 때 자신의 욕구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계획과 능력을 의지하는 사람은 그분의 도우심을 간절히 사모하고 갈망함으로 인해 그 도우심을 얻을 수 있게 되고 그럴 때 원래의 죄악된 욕구는 사라지며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지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일을 인간의 마음 속에서 이루어주시며 그 일을 친히 상담자가 되어주심을 통해 이루신다.
b. 못박히신 그리스도
인간의 욕구는 무조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아는 것으로 변화되거나 포기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어떤 경우는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한 때가 있다. 못박히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희생’과 ‘용서’이다. 이 은혜를 통해서 주님은 극도의 이기심과 씻을 수 없는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는 마음에 회복과 변화가 일어나게 하신다.
예수님의 희생의 모습은 그분 자신의 십자가의 못박히심을 통해 온전히 드러났다. 그것이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위해 스스로 죄값을 치루셨던 것임을 깨달을 때 완전한 ‘희생’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그 자체로는 별다른 감동이나 감화를 주지 못한다. 이 은혜가 온전하게 각 개인에게 임하기 위해서는 각 개인이 얼마나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욕심에 몰입하고 있었는지가 나타나야 한다. 앞에서 보았던 인간의 ‘욕구’를 깨닫는 것이 바로 이 작업에 해당한다. 그것이 피상담자 자신에게서 고백되고 인정되며 선언되었을 때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죄악된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게된다. 바로 그 때 예수님의 ‘희생’의 모습이 보여지는 것이다. 그것이 불처럼 타오르는 이기심의 욕구를 잠재울 수 있다.
때로 그러한 욕심은 주체할 수 없는 ‘죄책감’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피상담자가 간절히 원했던 것은 수치심이나 혹은 죄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고 그것을 얻지 못했을 때 스스로의 행동과 마음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자신을 가장하거나 숨겨왔던 것이다. 그로 인해 죄를 저지르게 되고 복잡한 많은 문제 속에 처하게 되었다.
바로 그런 상태를 깨닫고 자신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임을 깨달을 때, 그리스도의 ‘용서’는 더할 나위 없이 그에게 필요한 은혜가 된다. 그 은혜를 통해서 피상담자는 자신이 간절히 바랬던 ‘용서’를 받을 수 있고 그럴 때 놀라운 회복과 변화가 일어난다.
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바라는 대로의 ‘용서’를 주실 수 있는 이유는 그분 자신이 친히 모든 죄값을 치루셨기 때문이다. 자신의 눈물과 고통과 생명을 바쳐서 예수님은 지구상에 존재했고 존재하며 존재할 모든 인류의 죄값을 다 갚으셨다. 모든 인류의 죄가 그 속에 포함되었고 예수님은 인간들의 모든 죄를 남김없이 다 없애셨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죄사함의 효력은 그 은혜를 누리고자 하는 사람에게 적용된다. 모든 인류를 위해 죽으셨으나, 원하는 자들에게만 그 효력이 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하고 찢기며 고통받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용서’를 간절히 바라고 원할 때 그는 원하는 대로 충만하고도 완전한 그리스도의 ‘용서’를 누릴 수 있다. 그것이 그 사람을 바꾸어놓는 것이다.
c. 생명주시는 성령
위의 두 가지 경우에서 자신의 욕구를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피상담자는 하나님의 ‘계획’과 ‘능력’, 그리스도의 ‘희생’과 ‘용서’의 은혜를 받아 누릴 수 있음을 살펴보았다. 그렇지만 위의 두 가지 경우에도 해당되지 않는 또 다른 은혜를 사모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는 성령의 ‘충만’과 ‘동행’이다.
성령의 은혜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는 자들에게 은혜를 부어주신다. 부어지는 은혜는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이며 그래서 하나님의 새로운 은혜가 피상담자의 마음에 부어지고 그것은 새로운 심령과 소원을 갖게 한다. 그러한 충만함을 통해서 마음은 새로워지고 이전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마음은 사라지게 된다. 성령의 ‘충만’은 자신의 욕구가 도저히 스스로의 힘으로는 없어지리라는 것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은혜주심이 아니고서는 어떠한 변화도 이루지 못하리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간절히 간구할 때 이루어진다. 이러한 충만은 이전의 하나님의 ‘계획’이나 ‘능력’, 예수님의 ‘희생’이나 ‘용서’의 은혜에도 전혀 반응하지 않고 여전히 자기만의 욕구에 집착하고 있을 때에 그러한 연약한 자들을 위해 제공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성령께서 주시는 또 다른 은혜는 ‘동행’이다. ‘충만’은 한꺼번에 위로부터 부어지는 뜨거움이나 강렬한 열정이라고 한다면 ‘동행’은 한결같이 변치않고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항상 함께 하심을 알게 하시고 믿게 하셔서 계속해서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신다. 말 그대로 늘 같이 다니심으로 피상담자가 자기 자신의 세계에 빠져서 책임감을 망각해버리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스스로의 책임을 통감하며 해야할 사명을 완수하고 그래서 조금이라도 옆을 돌아봄으로 순식간에 좌절하거나 쓰러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시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는 그것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주어진다. 욕구를 살펴보는 것은 바로 자신의 필요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만약 은혜를 바라지 않는다면 은혜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바라지도 않는 자에게는 은혜를 줄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욕구를 깨닫고 그 악함을 이해하면서 그것을 버릴 수 있게 해줄 수 있는 은혜를 간절히 찾는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것을 내려주신다. 성경적 상담을 그런 은혜를 얻을 수 있도록 준비를 시킨다. 그렇게 은혜가 피상담자의 마음에 임할 때 그 마음에는 회복과 변화가 일어난다.
4.성경적 상담학의 방법론
성경적 상담에서 마음의 문제를 다룰 때에 그 내용이 기존의 어떤 상담학보다도 매우 심오하고 복잡하며 심지어는 영적인 부분까지 다루기 때문에 여기에는 다른 상담학에서 볼 수 없는 특별한 방법론이 존재한다. 그 방법론은 역시 성경에서 나온 것으로 기존의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던 것들을 체계화한 것이다. 그러므로 매우 중요하기는 하지만 전혀 생소한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결코 쉽게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법론을 통해서 성경적 상담은 문제상황에 놓여있는 피상담자의 마음을 회복과 변화의 근원되시는 하나님께로 인도한다.
이 방법론에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라서 피상담자의 마음에 접근할 때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효과를 얻어낼 수가 있다. 성경적 상담에 근거한 네 가지 방법론은 다음과 같다.
1)사랑하라
먼저 첫 번째 성경적 상담의 방법론적 원리는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마음의 변화에 대해서 상담자와 피상담자의 관계와 그 관계가 어떻게 세워지는가에 대한 모델을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이끌어낸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랑한다’는 것은 상담관계를 세우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마음에 뿌리를 내려 오랫동안 계속될 수 있는 진정한 변화를 세워나가는 수단이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단순히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모습을 따라 피상담자를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별히 이것이 ‘사랑’이 되는 이유는 우리의 동정심이나 긍휼히 여김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위치에 까지 이르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손쉽게 할 수 있는 감정의 상태라면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그분을 닮아야 겠다는 생각을 할 필요도 없겠지만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할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리스도를 의지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또한, 성경적 상담자로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해 주셨는가를 잊어버려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주실 때 그것은 최종 목적이 아니었다. 단순히 받아들여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완전히 사랑해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때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를 괜찮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 넘치는 사랑이 다른 사람에게도 흘러갈 때에 우리는 반드시 그 사람을 사랑해야만 한다. 그것이 이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에 보답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우리에게 흘러 넘쳤는가를 나타내는 표현이 된다.
이렇게 피상담자를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되면 그를 같은 하나님의 가족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고 상담자나 피상담자나 동일한 위치에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이것은 동일한 상태라는 말은 아니다. 분명 상담자는 피상담자와 동일한 상태에 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동일한 위치에서 그를 바라보게 될 때 진심으로 피상담자를 긍휼히 여길 수가 있다. 그리고 동일한 고통의 경험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럴 때 더욱 심정적으로 피상담자의 상황을 안타깝게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괴로움을 친히 체휼하셨고 고통의 모습을 통해 우리의 모든 슬픔을 이해하시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성경적 상담에서 바라보는 상담자와 피상담자의 관계는 단순한 환자와 의사의 관계가 아니고 돕는 자와 도움을 받는 자도 아니며 오직 그리스도안에서 함께 울고 함께 웃을 수 있는 진심으로 그를 사랑하는 관계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욕구와 은밀한 비밀들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그러한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진심으로 피상담자를 ‘이해’할 수 없다. 또한 그의 숨겨진 이야기를 ‘들을 수’도 없게 된다.
피상담자와 친밀한 사랑의 관계가 형성되었다면 구체적으로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준비를 할 수 있다. 그것은 ‘진입구(Entry Gate)’를 통과하는 것이다. 이 진입구를 통과할 때만이 비로소 피상담자의 진정한 이야기를 ‘알 수’ 있게 된다. 이를 통과한다는 것은 피상담자의 가장 괴로워하고 힘들어 하는 부분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는 현존하는 문제나 상황 자체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내담자가 가지고 있는 괴로움의 근원을 의미한다. 그의 괴로움이 정말 무엇인지를 사랑으로 다가가서 알아주지 않는다면 그 괴로움이 생기게 된 진정한 이유와 사연들에 대해서 알 수가 없게 된다. 그러나 그 마음을 알아준다면 피상담자는 편안한 마음으로 자신의 내면의 이야기를 끄집어 낼 수 있다. 그럴 때 진입구를 통과하는 것이다.
특별히 이러한 상담의 방법이 중요한 것은 성경적 상담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상담할 수도 없고 상담을 하고자 한다면 사랑해야만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듯이 사랑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피상담자의 마음 속에 아주 깊숙히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진정한 욕구에까지도 이를 수 있다.
2)알라
피상담자에 대해서 그의 문제를 알고 그의 고민을 들어주면서 마음속으로 깊숙히 들어가면 그 속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들을 때에 진정한 문제 해결을 위한 단서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듣는 것은 일종의 자료수집이라고 할 수 있다. 자료수집의 목표는 문제를 밝히기 위하거나 죄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자료수집은 그의 인격을 이해하고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피상담자가 성경적인 자기 이해를 갖도록 돕는 것이며 상담자가 피상담자의 근원적인 욕구를 깨달을 수 있기 위함이다.
많은 문제들은 자기가 스스로 모든 문제의 이유와 원인을 잘 알고 있다는 착각속에서 더욱 악화되고 심화된다. 진정으로 문제의 원인을 알고 있었다면 그것을 해결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안다고 생각하면서도 손을 대지 못하는 이유는 정말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안다고 생각하면서 스스로 모른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진다.
그러므로 피상담자는 이전에 자신이 해보지 않았던 방법으로 새롭게 스스로를 바라보아야 한다. 상담자는 바로 이것을 도와주는 것이며 그럴 때 피상담자는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이전에 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시도를 행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상담자는 피상담자의 모든 이야기를 이해하고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제시해주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자료수집을 해 나갈 때에 몇 가지 주의해야할 점이 있다. 첫째, 상담자는 자신의 경험을 상담에 끌어들여서 그것으로 내담자를 해석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경험은 자신의 경험일 뿐이지 피상담자의 경우는 전혀 다른 것이다. 비슷한 상황과 비슷한 처지에 있다 할지라도 그 어려움에 대한 반응과 생각은 전혀 다르다. 이점을 분명히 기억하면서 중립적 위치에서 자료수집을 할 때에 한 방향으로 몰아가거나 치우치지 않고 유연하게 피상담자의 마음을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에 상담자는 피상담자의 상황을 가정하지 않고 구체적인 정보와 내용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 있다.
둘째, 상담자는 피상담자로부터 얻은 자료들을 충분히 검토하고서 선별하여 상담에 이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피상담자의 모습을 만들게 된다. 상담 가운데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간다. 그 모든 이야기들을 일일이 적용하고 반영하려고 한다면 정말 중요한 정보를 놓치고 실제의 모습을 알아차리는 데에 실패하고 만다. 이러한 실수를 피하기 위해서 상담자는 반드시 자료를 검토해야만 한다. 그리고 피상담자가 스스로 말하는 것보다 피상담자에게서 발견된 것에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때로 어떤 피상담자는 적절히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 갈 수도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셋째, 상담자의 결론은 불명확한 전제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상당한 자료수집에 근거한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근거가 분명한 상담자료를 준비해야만 한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상담자는 자료수집에 근거하지 않고 스스로의 판단과 추측에 의존하게 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피상담자에게는 별로 관련이 없거나 도움이 되지 않는 상담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구체적인 분야에 대한 정확한 자료와 그에 대한 명확한 의사표현을 확인할 때에 점차 피상담자에게 스스로에 대한 이해를 제공할 수 있고 그것을 통해서 효과적인 상담을 해 나갈 수 있다.
이와 같은 주의사항을 염두에 두면서 자료수집을 해 나갈 때 그 과정은 질문과 대답으로 이루어진다. 중요한 것은 좋은 질문을 통해서 원하는 대답을 얻는 것이다. 여기서 원하는 대답이란 원하는 내용을 듣는다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내용을 듣는다는 것이다. 피상담자의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내용들을 듣는 것이 중요하지 상담자의 호기심이나 추측을 정당화하기 위한 내용을 듣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대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상담자는 육하원칙에 따른 질문을 할 수 있다.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 로 이루어진 육하원칙에 따른 질문은 때로는 많은 내용을 들을 수 있는 개방된 질문이나 단답형의 답을 듣게 되는 폐쇄된 질문의 형식으로 주어진다. 또는 마음 속의 생각과 의도에 대해서 들을 수 있는 깊은 질문이나 여러 가지 사건이나 정황에 대해서 들을 수 있는 넓은 질문을 할 수도 있다.
질문과 그에 따른 대답을 듣는 과정은 결코 상담자의 호기심을 채우는 것이나 피상담자를 취조하고 추궁하며 유도하기 위한 대화가 아니며 감추고자 하는 은밀한 의도를 더욱 위장하고 합리화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세심한 관찰과 심층적인 대화를 통해 정말로 피상담자가 의도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마음의 목표와 욕구를 찾아내는 과정이다. 그렇게 할 때만이 비로소 그리스도의 은혜와 맞닿을 수 있는 적나라한 죄의 욕구를 발견해 낼 수 있다.
3)말하라
말하는 것은 지금까지 사용했던 방법에 근거하여 상담의 종결을 향해 나아가는 가장 핵심적인 방법이다. 말하지 않는다면 성경적 상담이 아닐 정도로 이것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이를 한마디로 재정의한다면 ‘사랑으로 진리의 말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미움이나 비판의 마음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고 피상담자가 원하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반드시 들어야할 진리의 말을 해주는 것이다. 이는 다른 용어로 말한다면 ‘직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직면을 통해서 피상담자는 자신의 삶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다. 자기 만의 생각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깨달음과 전혀 색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피상담자에게 ‘말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인간의 마음의 본성적인 거짓 때문이다. 성경이 보는 바 인간의 본성은 항상 악하며 거짓으로 스스로를 가리고자 한다. 그래서 때로 그 거짓이 진실처럼 여겨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거짓을 보이고 있음을 전혀 깨닫지 못하면서 천연덕스럽게 거짓을 일관하곤 한다. 이러한 인간의 본성때문에 우리에게는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
둘째는 비성경적인 생각 때문이다. 피상담자는 여러가지 질문, 즉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신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내가 해야하는 일은 무엇인가, 다른 사람들은 어떠한 자들인가, 그들의 의미는 무엇인가 등등의 자기 마음 속에 떠오르는 질문에 대해서 성경에 근거하지 않고 자기 경험대로 해석하여 편리한 대로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린다. 그렇게 몰이해에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말을 해주어야 하며 특히 상담자가 올바른 말을 해줄 때에 잘못된 이해와 억측, 그리고 오해를 버릴 수가 있다.
셋째는 감정적인 생각 때문이다. 감정에 사로잡혀 있을 때 피상담자는 올바른 사고방식으로 생각하지 못한다. 감정 속에서 생각은 비뚤어지고 왜곡되며 더욱 악하여지게 마련이다. 모든 것은 자신에게 불리하게 생각되고 복수심과 원한에 사무치게 된다.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서 상담자는 말을 해주어야 하며 때로 피상담자의 잘못된 생각을 고치기 위한 말이 필요하다.
넷째는 진실이나 지속적인 변화는 회개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피상담자의 깨달음과 이해만으로는 완전한 회복과 변화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없다. 회개에는 말의 고백이 필요하고 그러한 고백을 위해서는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말은 단순히 상담자가 피상담자에게 하는 말로만 그치지 않는다. 피상담자가 상담자에게 하는 말을 통해서 역시 자신의 마음과 상태를 나타낼 수 있다. 그러므로 앞으로 어떻게 회복을 이루어나갈 것이며 어떤 변화를 나타내고자 하는지를 말의 고백을 통해서 구체화시켜야 한다.
다섯 째는 피상담자의 인생관은 경험으로 강화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전에 행하던 습관과 늘 따라오던 패턴으로 인해 변화는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이를 고치기 위해서는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지속적인 교정과 지적을 통해서 점차 행동을 달라질 수 있고 그렇게 바뀌어질 때 비로소 인격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이 모든 이유들로 인해서 피상담자에게는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말은 아무에게서나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사랑하고 진실을 이해하고 있는 상담자를 통해서 전해져야 하고 그럴 때 문제의 회복과 새로운 변화가 시작된다.
4)행하라
이제 마지막 성경적 상담의 방법은 ‘행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상담자가 피상담자의 행동을 촉진시키는 것이며 변화를 일으키고 삶의 발전을 추구하는 것이다. 또한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단지 감정의 변화와 생각의 달라짐 만으로 모든 것이 다 좋아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특별히 상담자는 피상담자가 일상생활에서 새로운 습관을 성공적으로 적용하기까지 계속 지켜보아야만 한다. 그럴 때 이전의 문제였던 마음의 욕구와 헛된 목표를 새로운 삶의 계획과 소망으로 열매맺으며 살아갈 수 있다. 이 실천을 행하기 위해서 상담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도와주어야 한다.
첫째, 책임감을 주지시켜야 한다. 책임감은 앞으로 구체적인 행동을 해 나갈 때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책임감이 없다면 아무리 새롭게 놀라운 결심을 했다 하더라도 분명한 열매를 맺어나갈 수가 없다. 그러므로 상담자는 피상담자에게 분명한 앞으로의 결심과 그 결심을 이룰 수 있는 다짐을 세우도록 해야 한다. 그럴 때 그 책임감은 자기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닫고 다른 사람에게 미룰 수 없는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그분께 도움을 간구해야 하는 필요가 생기고 그것이 바로 책임감이 된다.
둘째, 구체적인 행동목록을 작성해야 한다. 이 목록들을 살피고 깨달으면서 행동에 대한 준비를 하게 된다. 이러한 행동목록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하나님이 하라고 부르시는데 내가 하지 않고 있었던 것들
-내가 평상시에 해 왔던 일들 중에서 더 이상 해서는 안되는 것들
-내가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려고 노력했던 영역들
-다른 사람들의 책임을 스스로 떠맡으려고 했던 부분들
이러한 일들을 살피면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명료화한다. 그럴 때에 구체적으로 행동을 계획하고 실천을 준비할 수 있다.
셋째, 마음의 장애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감정부분은 실제로 새로운 일을 행하고자 할 때에 다시 떠오르는 문제가 될 수 있다. 이전에 한번도 해보지 않았던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두려움, 분노, 비통함, 의심, 이기심, 자기의, 비뚤어진 정체감 등이 생겨날 수 있다. 이것은 애초의 문제로부터 기인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새로운 행동을 하고자 할 때에 생겨나는 마음의 문제들이다. 이점을 도와주지 않으면 새로운 삶으로의 변화와 발전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애초의 문제에 대한 회복도 일어나지 않는다.
넷째, 성경적인 활동계획의 작성과 평가가 있어야 한다. 앞에서 구체적인 실천목록이 이루어졌다면 성경적인 활동계획은 이 실천목록을 꾸준히 잘 이루기 위한 제반 환경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아무리 자신이 깨끗하게 살려고 한다 하더라도 주변환경이 지저분하다면 청결한 삶을 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성경적 활동계획은 건전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서 계획하였던 실천을 꼭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다섯 째, 남은 문제들을 다루고 종결준비를 해야 한다. 실천과 평가가 잘 이루어지고 있다면 상담의 종결을 준비해야 한다. 하지만 그럴 때 남은 문제들이 있다면 그것들을 돌보아주는 것이 꼭 필요하다. 여기에서 해야 할 일은 신뢰와 이해관계를 지속적으로 세워야 한다. 단순히 어느 정도의 상담으로 끝이 나지 않도록 이후에 또다른 문제가 생겼을 때에도 다시 만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친밀한 관계를 세워놓아야 한다. 또한 부족한 부분이 있을 때에 용기를 가지고 말을 해주어야 한다. 그일을 잘 하지 못한다면 그간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수가 있다. 그리고 피상담자의 삶에 실제적인 변화의 일부가 되어서 필요할 때 도움을 주고 격려해주어야 한다. 상담의 종결이 관계의 종결이 되지 않도록 지속적인 관계를 확신시켜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반드시 강조한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야말로 인간의 삶 속에 놀라운 평안과 유익을 얻게 만드는 삶이다. 바로 계속해서 이러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격려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성경적상담의 방법론은 구체적인 상담이 어떻게 시작되어서 어떻게 끝이 나는지를 보여준다. 상담은 단순한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과 발전으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상담의 과정 또한 성경적이며 신실해야 하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방법과 일치되어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럴 때에 성경적 상담이 잘 이루어질 수 있으며 뿐만 아니라 상담 그 자체도 유익을 얻을 수가 있다.
5.성경적 상담학의 대화법
성경적 상담에서 대화법은 지금까지 살펴본 마음의 원리를 구체적인 일상생활에 적용시키는 중요한 분야이다. 이로써 상담의 유익은 말과 행동에서 표현되어지게 된다. 일반적으로 대화법을 생각할 때 대화의 기술이나 방법에만 치우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 대화를 이용하기 위한 기술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적인 대화법은 대화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명을 이루려하는 것이며 그 일을 어떻게 행할 수 있느냐에 대한 방법을 제시해 주고 있다. 하나님의 사명을 이루는 대화를 하기 위해서 9가지의 원리를 생각할 수 있고 각각의 원리에 대한 머릿글자를 따서 ‘ENCOURAGE’원리라고 부른다.
1)E.N.C.O.U.R.A.G.E.원리
‘ENCOURAGE’원리는 성경적인 대화를 이루기 위해 방법론적으로 잘 정리되어 있는 대화의 원칙을 의미한다. 이러한 원리에 충실해서 대화를 해 나갈 때 그 대화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하나님의 목표를 이루는 대화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하나님의 방법으로서 잘 듣고 잘 말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이러한 방법으로 대화를 해 나간다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일상생활에서 잘 듣고 잘 말할 수 있게 된다.
이 원리에는 아홉가지의 수칙이 있는데 첫 번째는 당신의 마음을 ‘점검하라(Examine)’이다. 이는 말하기 전에 먼저 스스로를 돌아보도록 하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이 분노로 쌓여 있다든지 혹은 절망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런 마음에서 나오는 말은 자연히 분노의 말이나 절망의 말이 될 수 밖에 없다. 마음을 중시하는 성경적 상담에서 먼저 마음을 돌아보는 것은 당연한 순서이다.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점검할 때에 성급한 마음으로 악한 말을 내뱉지 않도록 제어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다시 그 마음을 주님께 의탁함으로 평안을 찾았을 때 온전한 말을 할 수 있고 실수의 말이나 혹은 생각하지 못했던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있다.
두 번째는 당신의 부르심을 ‘깨달으라(Note)’이다. 이것은 대화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대화를 우리 자신의 것으로 생각한다면 자신의 마음대로 해버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항상 자기 중심적이고 악한 말만을 하게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대화가 하나님께 속해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부르심과 뜻이 무엇인지를 먼저 깨닫는다면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된 마음으로 대화를 할 때에 우리의 대화는 애초의 감정섞인 대화가 아닌 완전히 새롭고 온전한 대화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러한 부르심을 깨닫는 것은 자신의 위치와 처지와 형편이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함으로 더욱 겸손하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말을 하게 할 수 있다.
세 번째는 당신의 태도를 ‘살피라(Check)’이다. 태도를 살핀다는 것은 자신이 행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돌아보는 것이다.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게 한다. 그것은 때로 악한 것이며 잔인한 것이고 상처를 입히는 것일 수 있다. 그렇지만 감정에 사로잡히게 될 때 아무 것이나 막 사용하게 되고 그것이 상대방에게 어떤 해를 입히게 될지 전혀 깨닫지 못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태도를 살피는 것은 싸우려고 드는지 아니면 비난하려고 하는지 혹은 격려하거나 위로하려고 하는지에 대한 태도를 먼저 결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상대방에게도 자신의 대화의 태도를 미리 분명하게 보일 수 있게 되고 상대방도 역시 동일한 반응으로 대화를 준비할 수 있게 된다.
네 번째는 당신 자신의 죄를 ‘인정하라(Own)’이다. 대화가 시작되었을 때 자신의 위치를 고압적이며 거룩한 모습으로 치장하는 것은 그 대화가 하향적인 것이 되게 하고자 함을 미리 보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상대방과 대화가 되기는 커녕 도리어 분개심만 더욱 일으키게 만들 것이다. 그러한 대화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없고 원래 대화를 시작할 때 가지고 있었던 최소한의 목표 조차 이룰 수가 없게 된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것은 스스로를 낮춘다는 말이다. 이는 법적으로 자신이 죄인이며 모든 것이 자신의 실수임을 인정하라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위치가 죄악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며 동일한 실수가 많은 자임을 겸허히 인정한다는 말이다. 때로 어떤 부분에 있어서 분명한 잘못이 있었을 때에는 그에 대한 솔직한 고백도 필요하다. 이 모든 것은 대화의 위치를 공평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며 상대방으로 하여금 들을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말 중요한 말을 할 수 있게 된다.
다섯 번째는 당신의 말을 지혜롭게 ‘사용하라(Use)’이다. 감정과 태도에서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하게 되었다면 자유롭게 말을 사용할 수 있다. 말은 사용되어야지 말에 의해서 지배당하면 안된다. 말을 사용하려고 한다면 할 말을 주의깊게 선택할 수 있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이 더 좋은 말일까를 주의깊게 생각하며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말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지혜롭게 사용할 수 있기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께 지혜롭게 말을 사용하게 해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지혜없이 말을 하게 되면 그 이후에 오게될 반응과 상황에 대해서 대처하지 못한다. 그러면 말을 부주의하게 내뱉게 되고 말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어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우리는 어떠한 말이든지 할 수 있음을 깨닫고 그것이 지혜롭게 사용하는 것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여섯 번째는 성경말씀을 ‘인용하라(Reflect)’이다. 이것은 성경적인 대화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잘 실현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이렇게 성경말씀을 인용할 때 그 말씀의 뜻을 잘 전달할 수 있고 그것을 통해서 성경적인 대화의 궁극적인 목표인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 하지만 성경말씀을 인용하는 것이 단순히 성경말씀을 전달하는 것이나 혹은 암송하라는 것은 아니다. 그 의미와 내용을 이해하고 전하는 것이 중요하지 단순하게 옮기는 것이라면 전혀 다른 각도로 이해될 수 있다.
일곱 번째는 항상 ‘들을 준비를 하라(Always listen)’이다. 말을 하는 것은 또한 듣기도 하겠다는 준비를 동반한다. 자신의 말만 하려고 한다면 결국 아무도 대화를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대화에서 중요한 것은 말하기 전에 듣는 것이다. 들으려고 한다면 말해야 할 것과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구분할 수 있다. 잘 듣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들으려고 하는 마음가짐이다. 그렇게 스스로의 대화자세를 규정해 놓는다면 효과적인 대화를 해 나갈 수가 있다.
여덟 번째는 반응을 보일 ‘시간을 주라(Grant)’이다. 말을 하고 나서 그 말에 대한 반응을 기다리는 일은 때로 대화가 진행되기 위해 꼭 필요한 단계가 된다. 그 시간을 기다려주지 않을 때에 반응을 얻어낼 수가 없고 또는 나타난 반응을 이해하지 못하기도 한다. 만약 대화가 상대를 다그치는 것이나 압박하는 것이라면 제대로 된 대화였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한 대화는 설교나 훈계, 혹은 고문으로 여겨질 뿐이다. 시간을 주는 것은 상대가 심사숙고하여 반응하게 하고 그 다음에 취할 행동과 대답을 주의깊게 살필 수 있게 만든다. 그리고 조바심을 가지고 조절하거나 통제하려고 하지 않고 조금씩 천천히 움직이고자 할 때에 새로운 인격이 형성되면서 좋은 반응을 보일 수 있게 한다.
아홉 번째는 복음으로 상대방을 ‘격려하라(Encourage)’이다. 모든 대화가 끝나고 난 뒤에 마지막에 반드시 해야 할 것은 소망을 주는 것이다. 만약 대화가 소망없이 끝난 다면 더 큰 절망으로 빠질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절망에 빠지게 되면 대화에 참여한 사람들 사이에 커다란 관계의 단절과 회복되기 어려운 거리감이 생기게 된다. 이러한 결과를 방지하기 위해서 대화의 마지막은 복음으로 격려함이 있어야 한다. 또한 복음으로 격려하는 것은 대화의 궁극적인 목표이기도 하다. 더욱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대화를 나누었던 것이고 이점이 반복해서 강조될 때에 대화의 의미가 부여되고 그 유익이 더욱 배가될 수 있다.
이러한 원리를 통해서 대화는 ‘Encourage’의 의미를 그대로 나타내게 된다. 대화가 이렇게 이루어졌을 때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며 대화의 근본이신 하나님의 목표가 우리의 말 속에서 성취되는 것이다.
2)사명을 이루는 대화
성경적인 대화의 또 다른 중요한 요점은 사명을 이루는 대화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던 ‘Encourage’의 대화원리는 결국 하나님의 사명을 이루는 대화를 하기 위해 필요한 원칙이다. 만약 그 사명을 이루려고 하지 않는다면 굳이 그런 원칙을 지킬 필요가 없고 역시 성경적인 대화를 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성경적인 대화의 이유는 하나님의 사명을 이루는 것이고 그 목표를 가질 때에 대화에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의 욕심을 채워주고자 하는 목표로 행하는 대화는 모두 다 거짓되고 가식적이며 왜곡되기 마련이다. 하나님의 사명만이 사랑안에서 진실을 말할 수 있게 하고 분노나 두려움 등 다른 감정에 휘말리지 않게 만든다.
이럴 때 주지해야 하는 몇 가지 주의사항이 있다. 첫째, 대화는 언제나 하나님의 구속적 방법이 아닌 자신의 죄악된 욕심과 목적을 따를 수 있다는 것을 주지해야 한다. 문제 상황에 대해서 어떤 대처방법이 효과적이며 만족스러운가가 중요한 핵심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중심적인 생각으로 말하고자 할 때 갖는 목표이다. 여기서 첨예한 갈등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나의 마음에 드는 방법으로 대처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에 동참하고자 할 것인가의 선택의 문제이다. 그럴 때 우리가 하나님의 원하시는 일을 생각하며 그 방향으로 나아가면 모든 문제들을 지혜롭게 다룰 수 있다.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항상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도구가 되어야 하고 영광을 돌리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자기 자신의 이기심과 욕심에 빠져 끊임없는 괴로움과 슬픔의 감정 속에서 헤매이게 된다.
둘째, 사랑을 나타내는 방법도 때로는 분노와 자기애로 치우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 속에 있는 죄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 문제는 그 죄를 하나님의 구속적인 방법으로 다루는가 아니면 우리 자신의 죄악된 마음의 욕심과 목적에 따라 다루는가이다. 만약 우리 자신의 죄악된 마음과 목적에 따라 다룬다면 그 결과는 반드시 후회스럽고 부끄러운 일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과 그 영광에 따라서 행한다면 더 크고 좋은 유익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를 위해서 우리 말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과 원하시는 바의 경이로움에 완전히 사로잡혀야 한다.
셋째, 사람들이 자신의 경고에 순종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알려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 사명이 집착으로 바뀌는 이유는 하나님의 경고를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고를 들려주기 때문이다. 그럴 때 감정이 생기고 말은 균형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의 죄에 구속적인 사랑으로 대처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죄에 동참하게 된다. 이를 피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파수꾼의 마음이 필요하다. 그것은 시기적절한 경고를 해주는 것이며 자신의 경고가 충분히 이해되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넷째, 사역의 현장은 사소해 보이는 일상생활임을 잊어버리지 않는다. 우리는 대개 사역의 현장이 크고 광대하며 거창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빛의 자녀들로서 살아가는 일상생활의 삶을 가르치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사역의 현장이다. 이점을 기억한다면 어느 곳, 어떤 상황에서도 모든 사명을 내려놓고 마음대로 쉴 수 있는 곳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명을 행하고자 할 때 끊임없이 하나님의 구속적인 사랑을 기억하게 되고 그 사랑에 동참하고자 하는 자원함으로 채워지게 된다. 그렇다면 말을 통해 사명을 이루는 목표 안에서 질책이란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명으로 부르는 것이다. 권고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그리고 직면이란 선언이 아니라 죄를 피하도록 미리 경고하는 것이다. 이와같은 적절한 대화의 형식과 의미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주변의 사람들에게 이룰 수 있다. 그러한 대화는 온전한 하나님의 사역활동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