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상담역사] 현대 성경적 상담에 있어서의 중요한 문제들, 번역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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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Pastoral Practice
현대 성경적 상담에 있어서의 중요한 문제들 / 김 종성 역 / e-mail: " rel="nofollow"> Crucial issues on comtemporary Biblical counseling by David A. C. Powlison. - a Ph.D.(candidate) at the University of Pennsylvania, is on CCEF`s faculty and counseling staff. [개요: 현대 성경적 상담활동은 6가지 중대한 문제에 직면해 있다. 하나는 우리의 근본에 관한 것이고, 다른 5가지는 그 기초 위에 어떻게 세울 것인가에 대한 것들이다. ①우리가 언제나 표현했던 ‘항상 있던 문제들’이 오늘날에도 상존하는 것이다. ②동기부여의 질문들은 성경적 상담에서 행위에 대한 질문들과 더불어 자세하게 표현되어야한다. ③우리는 서로에게 연관된 인간의 책임과 고난 속에서 방법들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④상담자와 내담자 사이에 있는 많은 요소들은 더 낫게 이해되고 실천되도록 해야한다. ⑤성경적 상담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야한다. ⑥우리의 세속심리학적 관점의 뉘앙스들을 개발시킬 필요가 있다.] 기독교상담교육재단(CCEF)은 1988년에 20주년 기념식을 가졌다. CCEF의 기념식은 전체 지성주의(nouthetic)-성경적 상담활동에 대한 상징적 기념식으로써, CCEF의 처음 출발에 대한 질문을 하는 시간들이다. 우리가 어디서 왔는가? 지금 우리는 어디에 와있는가? 우리의 미래를 결정함에 있어서 당면한 문제들은 무엇인가? 나는 지금의 성경적 상담에 있어서 6가지 문제들을 중대한 것으로 규정하였다. 이 6개들은 하나의 이슈가 아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이 ‘중대한 것’이라는 가치가 있는 문제들이라고 믿는다. 만약 우리가 그것들을 받아들이면 지혜로울 것이고, 우리가 그것들을 거절하면 침체되거나 심지어 하나님의 상담을 왜곡시킬 수 있다. 나는 작금의 성경적 상담(명료한 이론과 일반적 실천 모두)을 성경의 조명아래 예의주시하기로 하였다. 각자의 이슈는 이론과 실천 모두의 문제다. 우리는 어떻게 성경적으로 사람을 생각하며, 어떻게 그들을 성경적으로 상담할 것인가? ⑴ ‘항상 있던 문제들’은 아직도 우리가 직면하고 있다. 첫 번째 이슈는 오래된 것이다. 그것은 20년 전에 성경적 상담이 시작되었을 때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던 것인데 오늘날도 상존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회에서의 상담은 심리학과 정신의학에 의해 지배된 우리 문화의 영역과 세속적인 假定에 의해 심각한 타협을 계속 받고 있었다. 성경적-지성주의 상담은 두 가지를 준비하려고 제안하였다. 세속주의에 대한 납득할만한 비평과 분명한 성경적 대안 등이다. 지성주의적(nouthetic:지성을 독단으로 사용하는; 역자 주)상담의 전통적인 통찰력과 설득력과 언질은 계속돼야만 한다. 성경적 상담은 성경과 손잡고 성경적 세계관에서 작업을 한다. 그것은 심지어 사람에 관한 생각을 할 때도(독특하게) 하나님을 중심한다. 그것은 또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를 중심하며, 또한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상담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할 사명을 가진 그리스도의 백성을 중심으로 한다. 세속 심리학은 20세기 후반까지 교회의 주된 적으로 남아있었다. 우리는 오직 하나에 의해 조직된 조형물들의 동물원에 직면해 있다. 그래도 나은 것은 ‘하나님’이 인간심리에 위로하는 보조로 작용하는 것이며, 가장 나쁜 것은 그들이 기만의 착각 속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결핍된 상황에서의 인간의 문제(그리고 문제를 해결하고 이해하는 능력)는 인간관계나 인간 속에 거짓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뿐이다. (그들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허무하게 죽으셨다는 것이다. 적은 언제나 ‘거기에’ 있을 뿐 아니라, “거기에서 우리가 적을 만났고,.. 그리고 적을 만난 그들은 바로 우리였다.”고 포고(Pogo)는 말했다. 세속심리학적 사고의 양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에서 언제나 존재하고 있다. “행하는 곳에” 인간의 영혼이 있다고 하여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무시한 ‘자존감’과 ‘필요’의 심리학들이 가장 만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모든 심리적 드라마의 배우가 되도록 오그라트려 놓았다. 교회들은 근본적인 세속 심리학자들을 고용하였고, ‘인격적 문제들’과 ‘관계와 삶의 양식에 관한 이슈들’을 해결하기 위해 그들의 ‘지혜’를 참고하고, 경의를 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성경적 기독교와 세속심리학의 어떤 혼합으로 진리를 모색하려는 지적 절충과 혼잡이 진행되었다. 우리는 상담의 내용과 실제 모두에 대해 구별된 대안을 계속해서 제시해야한다. 성경적 상담은 그것의 구별된 지성적 내용으로 재확인하고 더욱 분명해야한다. 우리는 성경적 범주들이 우리의 이해를 이끌어 가도록 ‘성경적인 사고’를 계속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자의식의 가설로 세워진 세속적 범주들을 거부해야하며, 세속적 견해의 풍조는 결코 철저한 변화를 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세속심리학의 낡고 오래된 사고와 행위들이 기독교 상담세계의 책과 잡지, 논문, 세미나, 교수의 글 등에서 재탕되고 있는 것을 알아야한다. 성경적 상담은 또한 그것의 상담기법을 계속적으로 재확인하고 개발해야한다. 우리는 기독교 사역자로써, 인간의 죄와 예수 그리스도의 기쁘게 용납하심과 삶의 변화에 대한 상담개발을 해야한다. 성경적 상담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서의 교제와 양육, 훈련, 사랑, 교훈, 권위 등으로부터 구조적인 것과 지적인 것을 구별하려는 ‘전문상담’의 관념을 계속 거부해야한다. 기독교 상담세계에 있어서 세속적 방법의 기독교적 모조품들은 문학 못지 않게 행위에 지배적인 관심을 두고 있다. 이것은 그간 20년 동안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는 의미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상상으로 일관된 상담메시지에 대한 1988년의 수많은 방법들이 1968년 때보다 더 적절하다고 들려지고 있다. 지적 사조는 변화되었다. 토마스 쿤(Thomas Kuhn)과 다른 세속적인 과학적 심리학자들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일반적 지적 사고에 대한 假定적 양태를 비기독교인들과 같이 되도록 만들어버렸다. 중립적이고, 목적지향적이며, 과학적 진리처럼 보였던 심리학과 정신의학이 한동안 잘라졌던 그 곳에서 다시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라는 슬로건 아래 과학과 성경이 함께 한 관념으로 드러나게 되었고, 희석되지 않은 대량의 세속주의가 교회를 끌어당겼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객관성에 있어서 그들의 많은 핑계들을 잃어버렸다. 다양한 종류의 기독교인들도 역시 일반적인 사고에 있어서 假定하는 스타일을 벗지 못하고 있었다. 쉐퍼(F. Schaeffer)박사는 사고의 전제적인 일반적인 형태에 對하는 복음적인 서적을 소개하였다. 루이스(C.S.Lewis), 케스터톤(G.K.Chesterton), 하리 블레마이어(Harry Blamires) 등은 매혹적인 풍조에 있어서 우리는 “기독교적 사고”를 해야한다고 설명하였다. 비츠(Paul Vitz)와 킬패트릭(W. K. Kilpatrick)은 세속 심리학의 저속한 종교적 특성에 대한 그들의 명쾌한 분석을 읽고 박수를 보냈다. 위에 있는 그 어느 누구도 세속주의의 잘못에 대한 힌트와 식별을 뚜렷이 하는 만큼, 그 代案으로써의 성경적 상담을 뚜렷하게 제시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위의 모든 분들은 땅을 개간한 분들로써, 성경적 상담의 메시지를 현대의 독자들에게 다시 말하고 있으며, 더욱 잘 들을 귀를 제공한 것이다. 성경적 급진주의라는 것은, 말이 많은 크리스천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귀들은 아직도 세속 심리학의 설득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또한 성경적 해석주의가 된다는 것이, 말이 많은 크리스천들이라는 것도 아니다. 성경은 여전히 마음과 상담적용에 있어서 부요한 풍부가 있다. 또 그것은 성경적으로 생각하는 만큼이나 실천하는 사람들은, 말이 많은 크리스천들이라는 것도 아니다. 성경적 상담은 교회생활의 한 표현이다. 목사들의 감독사역과 준비사역,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사역들은 본질적인 상담사역이다. 첫째 중대한 이슈는 우리가 지난 20년간 어디에 서있었는지를 재진술 해준다. 나머지 다섯 개의 중대한 이슈들은 그것에 따르는 좀 더 새로운 이슈들이다. 이것들은 성경적으로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에 대해 우리가 파악한 영역들인데, 좀 더 의미심장하게 확장할 필요가 있다. 이슈 1은 기초를 견고하고 붙잡는 것이고, 이슈 2~5는 그 기초 위에 세우는 것이다. 우리는 20년 동안 우리의 힘과 그리고 우리의 연약함도 보여주었다. 정직한 자기평가는 많은 문제점들을 들추어낸다. 짧거나 긴 고통들은 운동으로써 우리가 직면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첫째 중대한 이슈의 함축은 그 따르는 토론들 전반에 걸쳐 느낄 수 있어야한다. 어떤 변화와 발전이든지 성경적 상담운동 안에서 일어날 필요가 있으며, 이미 전개된 기초 위에서 발생해야 한다. 사고에 대한 성경적 범주는 사역에 있어서 성경적 방법을 만들어낸다. ⑵ 인간적 동기를 점검하는 질문들은 우리의 이론과 실천 둘 다를 좀 더 견실하게 탐색하고 통계를 나타내야한다. 지성주의적 상담은, 상담의 목표는 반드시 주님께 가시적인 순종이 있어야한다고 독특하게 이해하고 있다. 다른 상담 구조는 인간의 고통, 죄, 두려움에 직면했을 때 이것을 중심이슈로 감지(感知)하지 않는다. 우리 주위에 있는 상담의 세계(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이나 비슷하게)는 인간의 동기에 관해 사색과 추측들로 들떠있다. 성경적 상담은 진실한 변화에 대해 담백하고 진취적인 증거로써 행위(사랑과 선행)를 올바르게 강조한다. 그러나 성경적 상담은 바른 길을 가지 않으면 안된다. 잘못된 길에 ‘우리의 좌측은 위험하다’라는 표지가 있기 때문이다. 사색적인 심리적 구조는 인간마음의 동기부여에 있어서 분석적인 통찰력처럼 거짓 행세한다. 성경적 상담은 정신역학의 ‘설명들’에 대해 그것이 적법한 것인지 의심을 하고 있다. 이드(id:원아(原我) ; 자아(ego)의 기저(基底)를 이루는 본능적 충동)나, 자아나, 초월자아 같은 순전한 신화의 구성 개념들은 추상개념들을 구체화하여 생각한 것들이다. 자존심이나 ‘고집’은 모든 인생이 흘러가는 것 속에서 묘하게도 가혹한 시련이 되고 있다. 내 ‘자신의 말’은 내 인생과정에 있어서 결정을 하는데 막강한 능력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 가설에 있어서 우리의 경계심은 아마 동기부여의 전체적인 주제에 대해 신중함을 전해주게 될 것이다(비논리적으로). ‘좌측’에 있는 사람들은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과 함께 역동적으로 행한다는 것을 잊고 있다. 예외 없이, 거기에는 정신역학이 없으며, 동기부여도 없고,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사람들의 단도직입만 있다. 인간의 심리학이 신학인 이유는 인간은 하나님께 존경을 드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제일 으뜸가는 행위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 있는 것이지, 어떤 가정된 양태를 따라 서로 서로에게 연결되는 구성요소의 캡슐 속 영혼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영혼에서 계속 행해지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역동성(人神역학: 역자 주)을 표현하고 기록하는 것이지, 어떤 假定的으로 홀로 세운 영혼의 구성, 갈등, 필요 등이 아니다. 그러나 ‘좌측에 대한 위험’에 민감하며, 인간 마음의 동기들과 동기부여의 구성에 관한 독특성이 자리를 잡으려는 것에 민감한 우리들은 그 만큼 ‘우리의 우측에 있는 위험’에 대해 자주 망각을 한다. 만약 우리가 동기들을 모르거나, 인간의 외부적 관점에 대해 표류한다면 우리는 성경으로부터 떨어지게 된다. 우리가 ‘행동주의적’이라고 풍자한 것은 실상 우리가 인정하고싶은 것보다 더 자주 사실적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행동은 ‘동기들’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 모두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은 “사람의 안과 밖에서” 흘러나온다(막7:21). 그러나 우리의 이론과 실천 모두는 그것이 필요한 배려를 이 영역에서 갖지를 못했다. 우리는 실천에 능숙하게 되었고, 마치 우리가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의와 죄에 대한 행동들의 섬세한 항목들을 구분하듯이 ‘믿음과 우상’에 대한 섬세한 항목들을 날마다 알고 있다. 성경적 상담에 대한 변화는 내적인 것과 외부적인 것 모두를 목표해야한다. 나는 현재의 성경적 상담에 어떤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문제는 명확한 표현과 강조에 대한 부족을 지적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Jay Adams의 “욕망의 근거 對 명령의 근거”에서 동기부여에 대한 성경적 관점에 대해 가장 가깝게 가지고 있다. 그는 성경적 유형의 기본적인 구조인 지각의 양면을 묘사했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풍부한 세부항목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세부적으로 가득 찬 것은, 동기부여의 이슈들이 우리가 깨닫고 있는 것보다 우리가 개념화하고 상담사역을 한 것보다 훨씬 더 탁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도록 만들 것이다. 이 영역에 전념하는 것은 우리가 사람들을 생각하는 방법과 우리가 상담하는 방법을 변화시킬 것이며, 잃을 것보다는 얻을 것이 더 많다는 것이다. 나는 우리가 지금 우리의 상담전반에 매진하고 있는 영역들에 좀 더 오래 남아있을 것으로 믿는다. 사진에 의한 순간촬영들과 숯으로 한 스케치들의 콜라주(꼴라주 기법: 사진·철사·신문·광고 조각 등을 맞추어 선과 색을 배합한 추상적 구성법)인 인간에 대한 예술가의 설명을 당신에게 묘사해 보라. 성경적 상담가들인 우리들은 사진들처럼, 손과 발과 말에 대해 살아있는 색깔과 유사한 것이다. 우리는 어떤 상세한 부분에 있어서 그 부분을 알고 있으며, 그러므로 우리는 상담하는데 있어서 이 영역들에 조금 쉽게 전념할 수 있음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머리와 마음에 까칠한 숯 스케치를 가지고 있으니, 그러므로 탐구에 대한 이슈들과 말에 대한 생각들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 그림 1은 성경적 변화의 구조를 그리고 있다. 마음은 걷도록 이끈다. 우상숭배는 불순종으로 이끌며, 믿음은 순종으로 이끈다. 마음의 변화는 걸음의 변화로 이끈다. 보이는 모든 죄는 더 음험한 보이지 않는 죄에 뿌리를 두고 있다. 무엇이 변화된 성경적 상담자의 목표인가? B → B*는 도덕주의로써, “하라는 것과 하지 말라는 것”이다. A-B → A*는 경건주의이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것”이다. B → A*-B*는 미묘한 잘못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버리는 것(B), 가지는 것(B*)과 믿음은 모두 현재적이다. 그러나 “거짓믿음들”의 구조(A)는 무시된 것이다. 이것은 내가 지성주의적 상담가들이 자주 표류하는 것을 걱정해서 그린 것이다. 우리는 확정적인 죄의 내적으로 가득한 충격을 다루는데 실패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필사적인 필요가 약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들에 의한 마음과 생각의 발전이 실제적으로 낮게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초기의 도덕주의자들이다. 성경적 변화는 A-B → A*-B*이다. 과도하고 지나친 육체의 욕망들은 육체의 결과들로써 동등하게 취급되며, 순수한 그리스도 예수의 성령의 소욕은 성령의 열매를 나타낸다. < 그림1 > (A) (A*) 죽음에 이르는 넓은 길 생명의 좁은 길 ~에 대한 독특한 양상 새롭게 된 특징 무절제한 욕망들 구주와 주님으로 그리스도를 믿음 사람을 경배, 우상들 주님을 경배 하나님을 무시함 회 개 하나님을 섬김 육체적 ══⇒ 성령의 소욕 세상과 짝함, 지상적 생각들 새로워진 마음 천상적인 마음 감각적 욕구들, 깊은 열망들 하나님을 의존함 하나님으로부터 자유 순종은 주님의 法안에서 기뻐하는 믿음 ‘마음’의 목표와 기대들, 거짓 신뢰들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음 통치 자리 자기의 의 등등. ‘들을 귀’ 등등 ⇓ ⇓ ⇓ (B) (B*) ‘멤버들’과 벗어야할 특별한 행위들 입어야할 특별한 행위들 혹은 ‘걸음’에서 육체의 일들 성령의 열매, 회개의 열매 나타난 일들 바깥을 향한 죄들 믿음으로부터의 순종 전형적인 행위들과 성경적 삶을 어떻게 사느냐 필수조건의 문제들 그리스도인의 삶의 훈련 죄의 反動, 반응, 자세, 생각들 사랑과 선행, 은사의 활용 동기부여에 대한 우리의 현재관점은 부정확하고, 비성경적인가? 그렇지 않다. 그러나 지저분하고 호화로운 많은 항목들은 육체를 입고있는 사람의 전체 그림을 이해하고, 보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적어도 동기부여 이슈들에 전념하는 것은 문제 분석에 대한 제이 아담스의 ‘표상, 언어능력(퍼포먼스), 그리고 필수조건의 수준들’로 변경될 것이다. 네 번째로 중요한 것으로 매우 풍부한 ‘욕망 對 명령의 근거’는 다른 세 가지에 대해 근본적인 조직을 구성할 것이다. 사람들은 자주 문제들 -분노, 욕망들, 좌절감, 두려움, 부도덕, 혼란, 방어, 잔혹, 대인관계의 불안, 우유부단, 슬픔, 불안과 부패에 대한 본질 등-의 걱정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들은 행동문제 목록에 대한 단순한 범위들을 무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혼란스러운 걱정은 묶여질 것이고 항목에 따라 사람들의 삶 속에서 주제들을 따로 구성하게 된다. 성경은 그러한 주제들을 많이 표현하고 있다. 자존심,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 돈, 육체의 욕망, 우상숭배, 사람을 신뢰하는 것 등등이다. 성경적 상담가들은 마음에 대하여 주제별로 생각하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다. 우리가 동기부여의 성격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때 내담자의 ‘하나님과의 관계’는 외부적 훈련들을 통해 단순히 접근되는 경향이 있다. 기부금을 내는 것과 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하는 정도 등등이다. 우리가 동기부여 이슈들을 성경적으로 표현할 때 내담자들의 하나님과의 관계는 우리가 얻고자 하는 상담이슈가 된다. “주님을 신뢰(상담에 있어서 가장 일반적이면서도 오용된 말!)” 한다는 것은 독특하게 특징 지워진 거짓된 신뢰의 배경에 대항하여 삶에 나타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주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인간의 삶에 대한 걱정 속에서 한결 같은 말을 던져 주고 있기 때문에 그 생각이 애매하고 무익한 것이다. 주님을 신뢰하는 내담자들은 자신들의 욕망 속에 숨겨져 있는 것들을 전혀 회개하지 않고 자신들의 욕망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이다. 그러나“다른 것들을 신뢰하는 대신에 주님을 신뢰하는 것”은 그것이 성경적이기 때문에 역사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경적 회개나 갱신된 마음의 두 부분을 응결시키는 것이다. 성경적 상담자들은 말할 것이다.“빌 당신이 샐리에게 화를 냈어요. 당신은 의기소침해 가지고 당신의 상사에게 공연한 소동을 벌이고, 그리고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당신이 스스로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약을 먹기도 했어요. 그리고 그 모든 것으로 샐리에게 화풀이했습니다.”전형적인 상담 활동은 상세하게 다룰 것이며, 그 후에 “빌, 당신을 움직인 것이 무엇인가요?”라고 할 것이다. 그의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그의 거짓 우상들과의 관계”는 마음에 착 달라붙는 구체적인 상담활동의 재료가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상담은 분명한 해석을 하며 빌의 삶을 특징지은 문제의 행동, 말, 생각, 자세 등의 혼란으로부터 빌이 감각을 갖도록 도울 것이다. 죄의 깨달음은 우상 숭배를 회개하는 것처럼 분노, 절망, 본질적인 악습들을 변화시키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 그를 정직하게 만들 것이다. 그가 자신과 그리스도의 은총과 필수적인 행동의 변화를 진실로 이해하는 것은 내면으로부터 “감각을 만드는 것”이 될 것이다. 만약 우리가 분노를 통제하고 절망을 뒤집고 배우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약물 중독을 제거하려고 인생을 재정립하고 좀더 바른 자세를 유지하는 성경적 방법들에 관해 먼저 이야기 해버리면 우리는 시간을(그리고 귀한 진리들을) 낭비하게 되는 것이다. 성경적 상담가들인 우리들은 많은 시간을 낭비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동기부여의 문제들을 잘 다루기 때문이다. 성경적 상담가들은 우리가 ‘둘째 큰 계명’에 대해 사역을 잘 하는 것처럼 ‘크고 첫째 되는 계명’과 하나님의 약속들에 대해서도 사역을 잘 하고 있는지 ‘거짓 신들’을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그것은 내게 지성주의 상담에 대한 비평들이 구별된 틈새, 혹은 동기부여를 다루는 우리의 부주의에 대해 바른 자세를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보여진다. 우리의 부족한 점에 대한 그들의 대안들은 너무 끔찍해서 아마 우리가 그들의 비판들을 유의하지 않은 것에 대해 변명을 늘어놓으려 할 것이다. 나는 우리가 그들의 대안들을 피하려 했었다는 그들의 비평을 꼭 들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또는 그것을 진실로 말하자면, 나는 우리가 성경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고 제안하고 싶다. 물론 우리는 성경적 대안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아직 잘 사용하지 않는 범위들이 바로 성경적 범위들이다. ⑶ 인간의 책임과 고통 사이의 관계는 보다 분명한 명확함이 필요하다. 중대한 이슈1은 믿음과 실천에 대한 우리의 기초를 놓았고, 이슈2는 우리로 하여금 성경적 변화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도록 했으며, 이슈3은 지금 우리에게 내담자와 내담자의 상황에 대한 우리의 비전을 다시 생각하도록 도전을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상담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보고 이해할 것인가? 내담자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주목해야 할까? 내담자의 과거와 현재 상황들은 얼마나 중요한가? 지성주의 상담의 가장 신선한 특징 중 하나는 인간의 책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을 상담한다는 것은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양쪽 모두를 상담한다는 것이며 외부적으로 그들의 통제를 강요함으로써 생긴 근본적인 희생자들을 만든 것에 의한 그럴듯한 죄의 정밀한 조직들은 조합해 보는 것이다. 현대의 희생된 이론들은 심리학, 의학, 사회학과 크리스천의 영역들에 포진되어 있다. 그러한 모든 이론들은 인간의 도덕적 책임들을 빼앗았으며 인생의 기초에 어떤 결정론을 심어 놓는다. 성경적 상담은 사람들을 결정론적으로 보는 것을 거부한다. 유전적으로 되었다든가, 다른 사람의 죄를 가졌다든가, 조직 불균형, 낮은 형질, 부족된 필요 등등의 ‘질병’이나 악마가 거한다는 것으로 우리에게 정신적으로 충격을 주는 것 등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희생자’ 라는 공격적 개념에 있어서 성경적 상담 사역은 인간의 책임에 대한 성경적 개념을 재확인시키는 것이다. 가장 생생한 용어로 말하자면 심판의 날에 하나님이 물으실 것이다.“너는 무엇을 했는가?” 그는 대답할 것이다.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지성주의 상담은 어디에나 나타나는 인간의 합리주의 경향을 분명하게 똑바로 다루어 나갈 것이며 문제들과 범죄들의 희생이 본인의 잘못인지 타인의 잘못인지를 그려 나갈 것이다. 희생 이론은 우리의 고통과 우리의 ‘필요들’ 속에서 우리의 죄를 배경 삼고 있다. 죄들은 파생되며 그래서 어떤 다른 이들의 주된 문제가 되며 사람들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 예수의 모습으로 변장하는 것은 희생적 감정을 더 가진 채 필요를 구하는 사람이 될 뿐이다. 그의 예수는 자기의 피로 죄인을 값 주고 산 구세주가 아닌 것이다. 우리는 사람이 희생자라는 것을 강조하는 어떤 것에도 경계를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주변에 있는 모든 해석들은 죄를 인식하는데 있어서 죄의 혐오에 의해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은 우리가 만약 성경과 인간의 삶 사이에 균형을 갖는데 충실한다면 사람들은 고통을 당하는 자이며 그리고 또한 완전한 책임을 가졌다는 여러 방법들을 분명하게 평가하고 구분할 필요가 아직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그 육체의 역할”로써 인간의 책임에 대한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세상과 악마의 많은 영향만큼 그들이 주인이고 인생을 조정하였다는 것에 토론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확실하게 성경적으로 풍부한 마음들과 과정들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가진 그밖에 다른 풍부한 것들은 주도 면밀하게 검사되지 못하고 있다. 사람에 대한 성경적 관점은 고통을 당하는 자이다. 우리가 심지어 그것이 더 고통스럽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인간에 대한 성경적 관점이 희생자라는 것이다. 성경적 상담 사역은 그 모든 문제들이 개인적인 죄의 결과라고 말함으로써 반복적인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왜 오해하는가? 확실히 우리는 욥의 경우를 들면서 사탄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를 해왔다. 확실히 지성주의 문학과 실천은 대항하고, 부패되고, 비판하고, 유혹받고, 거북한 죄를 지은 사람들을 엄격하게 취급했었다. 물론 삶의 다른 ‘일반적인 어려움’- 가난, 불공정, 심리적인 불안, 과민 반응, 질병, 사별- 등의 충격들은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지성주의 상담이 성경에 민감하기 때문에 이 영역들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놓쳐서는 안 된다. 그것은 최소한 인간은 책임이 있고 인간은 고통 당하는 자라는 것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성경적 상담에 대한 어떤 오해는 그 모든 것을 역시 잘 알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인간이 책임을 가지고 있다’ 는 것은 그들의 전체적인 상담이론과 실제의 근본을 파고 있는 것으로 풍자되고 있다. 어떤 오해는 복음이 성경적 변화를 일으킨다라는 사실을 단순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으로부터 온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사람의 책임’은 사람을 정당하게 판단하는 것이며, 힘찬 의지의 권유로 변화를 위해 그들에게 끊임없이 말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말하기를, 인간의 책임은, 인간들에 대한 예수의 친절을 정당하게 표현해야하며, 변화에 대한 성령의 능력을 간구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오해는 현재의 성경적 상담 사역에 대한 중대한 이슈를 극명하게 드러내었다. 사람에 대한 성경적인 그림의 희생적 측면에 대한 우리의 처리는 조직적이진 않지만, 때때로 이야깃거리가 되기도 했다. 이슈2에서 우리는 인간의 동기부여는 그 동기부여의 질문들을 성경적으로 붙잡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지키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무성한 고찰을 나타내었다. 이것과 동일하게, 맹렬히 조직화된 비난의 방향전환은 어떻게 그 일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 고통이 되었는지를 생각하는 성경적 관점의 발전을 저해하지 못했다. 확실히 성경적 관점에서 죄는, 우리가 사탄이라는 주인의 종노릇한 것임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눈이 멀었고, 힘을 잃었으며, 코가 꿰었고, 유혹을 받았으며, 공격을 받고, 속임을 당한 것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우리는 사탄의 희생자가 된 것이다. 확실히 성경적 관점에서 죄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만큼 그것을 우리에게 행한 것이다. 그리고 죄는 타인에 의해 배워졌고, 세상에 의해 격려되고 자극된 어떤 것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우리는 압제의 희생물이 되었다. 확실히 옛날의 곤란들은 우리 모두에게 최고의 유혹들을 많이 제공하였다. 그 우연치 않은 유혹과 시련들은 헬라원어(purasmos)가 동일하다. 다른 말로 말하면, 우리는 고통으로부터 구원이 필요한 희생자들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심지어 하나님의 저주의 희생자들이며, 그리스도의 자비에 의해, 진노로부터 구원을 얻어야한다. 이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은, 확실히 죄는 그것의 욕망과 정욕과 더불어 육체의 산물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우리는 완전히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세상, 육체, 음모자로써의 악마, 희생과 책임을 함께 가진 인간에 대해 말하면서 당황해하지 않는다. 성경은 죄책과 압제받은 인간의 구세주로써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면서 당황해하지 않는다. 인간이 희생자라는 성경적 관점은 결국, 그의 고통받는 백성에 접근하신 우리의 구원자와 더불어 풍부한 긍휼의 근거를 가지는 것이다. 고난 당하는 자들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은 또한 죄인들이 고통에 대한 그들의 반응에 대해 책임을 물으시며, 심지어 그들 자신들에게 고통을 허락하시기도 한다. 지성주의 상담은 비난의 방향전환을 격려하는 두려움에 대한 내담자의 고통에 동정하고 들어주는 것에 대해 불필요하게 겁이 많지는 않은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아직도 내게는 나의 내담자, 나의 친구, 나의 동역자들의 삶으로 접근하는 중앙의 한 길은 그의 고통을 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몸은 고통 중에 있다. 사탄은 그의 믿음에 대해 갑작스런 급습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는 그의 현존 속에서 비경건한 영향을 받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상황의 불확실한 경험-그의 직장의 미래, 그의 아내의 건강-을 하는 중이다. 그러한 인식과 그것을 들어야하는 인내, 심지어 그것을 따라야 하는 것 등은 그의 책임에 대한 인식을 파괴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도리어 그의 책임의 견고함과 실제적인 배경을 만들 것이다. 그의 특징적인 죄들은 고통에 대한 反動으로, 대항하여 죄를 짓는 것으로 서서히 나아가는 것이다. 비성경적인 관점들은 사람은 희생자라는 것으로 근거 있게, 변명을 대며, 우리의 잘못에 대한 저주와 소극적인 행위들로 해석하고 있다. 사람은 고통을 받는 자라는 성경적인 이해는 “내가 왜 죄를 범했는지” 전혀 답을 주고 있지 않단 말인가? 그것은 “언제, 어디서, 누구를, 누구의 영향아래?”라는 답을 주고 있다. 그것은 사람이 유혹 받고, 시련당한 것의 처한 상황을 묘사한다. 새로운 안목으로, 고통의 상황은 그가 믿음과 순종을 배울 말씀 안에서 “언제, 어디서, 누구와 더불어, 무엇에 대해”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크게 말했었다. “책임지라고!” 그러나 성경적인 균형으로 ‘책임은 고난의 한복판에’ 있다는 것은 더욱 작게 말해졌었고, 더 추정되었었다. 그러나 무엇이 쉽게 이해되고 사실인지 아는 것은 무익한 것이 된다. 나는 우리가 제때에 우리의 상담세계관에 단순히 불충분한 것이 있으며, 성경적인 이름아래 성경적이지 못한 것들이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지성주의’ 상담실제가 고통 당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의 예민함이 성경적이지 못하다는 것으로 누가 그것을 거부하는 있는가? 성경적 상담가들은 사람들이 그들의 고통을 해석하고 경험하는 방법에 충분히(말과 행동에 있어서) 전념하지 않고 고통에 대한 反動하는 방법 속에서 자주 변화에 대한 사역을 해왔다. 한가지 이유는 ‘인간은 고통 당하는 자이며, 그리스도는 그를 구원한다’는 성경적 교리 때문에 ‘사람은 책임이 있고, 그것에 대해 그리스도는 용서한다’는 교리가 명백하게 이해되지 못해왔다. 우리가 고통 당한 것은 우리에게 강하게 영향을 미치는데, 심지어 우리를 강철같은 손으로 통치한다. 우리가 고통 당한 것은 인간의 책임과 자유케 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 둘 다를 움직이는 배경이 된다. 우리는 우리의 다른 한 쪽에 있는 잘못들에 민감하며, 사회적 충격, 상황적 긴장, 심리적 원인과 마귀들에 항소하는 것으로 생긴 인간 책임의 축소에 대해 민감하다. 우리는 다른 한 쪽에 있는 잘못들에 민감하며, 인간의 책임이 근본적으로 도덕적이 되고, 힘을 가진 견고한 믿음의 증거가 되고, 마음을 통제하고 자아절제를 한다는 관점들에 민감하고 있는가? 거기에는 ‘책임’에 대한 비성경적인 형태들이 바로 ‘희생시킴’에 대한 비성경적 형태들만큼이나 멸망적이다. 우리가 인간에게 힘있기를 바라는, 이해하기 힘든 소망이 가능할까? 우리는 내담자들이 ‘매우 반역적이며’ 그리고 동시에 ‘매우 상처를 준다는’ 사실과, 후자를 해결함 없이 다만 우리의 내담자들과 우리의 문화가 그것을 초기에 만들었다는 것을 어떻게 함께 두어야하는지 아는가? 우리는 열심히 일하며, 내담자들이 고통에 대한 성경적 관점과, 그들의 책임과 하나님의 은총 모두를 이해하는 배경으로써의 유혹을 파악하도록 인내로 돕고 있는가? 우리는 사람에 대한 사탄과 그의 공격을 감소시키는가? 우리는 단지 비난의 방향전환으로써 상황적인 어려움들에 대한 토론을 연하게 칠하겠는가? 우리는 즉시 내담자가 자신의 反動에 대한 책임을 붙잡으려고 과거의 신체적, 또는 감정적 상처를 빨리 이동시키는가? 우리는 인내하는가? 내담자들이 우리는 어떻게 그들이 삶을 경험하는지 이해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의 성경적 세계관이 사람들은 힘으로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하나님의 능력과 은총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으므로 진지하게 祈禱하는가? 내담자들은 전형적으로 그들의 상황들이 변하기를 원한다. 지성주의 상담은 전형적으로 그 상황들 속에서 내담자의 행위가 변화되기를 원한다. 이 두 가지는 불필요한 소리들을 닫아버릴 것이다. 내담자의 상황의 인내와 동정의 입구는 그 상황들을 재해석하는 성경적 범주들을 위해 문을 자주 열어 놓을 수 있다. 고통이 하나님의 눈을 통해 보이는 동안, 성경적 범주들은 그때 은사들과 약속의 수여자로 드러내는 것보다 도리어 특별한 상황적인 축복들을 추구하는 마음의 욕망들을 드러낸다. 그러한 기본적인 특별한 순종의 단계들은 계획을 세울 수 있다. 행위의 변화들이 제안한 것들은 선하게 해야할 일들의 일반적인 목록을 제멋대로 뽑아놓은 것이 아니다. 대신에, 그 개인적인 것(하나님에 의해 앞서 준비된 선한 사역들)에 대한 적당한 행위는, 성경적 이해의 세 가지가 서로 뒤엉킨 요소들-내담자의 행위, 동기들(이슈2), 상황(이슈3)-로부터 독특하게 흐를 것이다. 둘째와 셋째는 발전의 단계에서 끌어 올려야하는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첫째 요소가 즐거워했던 것이다. 우리의 실천인 비평적 인식력은 자주 정확하게 불완전해지는데, 비록 그들의 대안들이 일괄적으로 잘못 안내된다 하더라도 그렇다. 현대적 성경적 상담에서 중대한 또 다른 이슈들인 성경적 대안은 그것의 모든 능력, 영역, 동정과 민감함 안에서 인간과 인간의 상황 모두에 대한 충분한 성경적 관점을 명료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후에,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우리는 그러한 진리의 빛 안에서 상담사역의 실제에 성숙한 지혜가 있게되는 것이다. ⑷ 우리는 상담자와 내담자의 관계에 대한 성경적 자료를 이해하는데 좀 더 긴장 을 가져야할 필요가 있다. 이슈1은 우리의 인식론과 실천적 기초를 다시 견고케 하며, 이슈2는 변화의 본질을 엄밀히 조사하며, 이슈3은 내담자와 그의 상황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다시 실시하도록 하고, 이슈4는 “상담자와 내담자 사이의 관계에 대한 본질이 무엇인지?” 질문을 한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상담하는 사람들을 사랑해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성경적 상담은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며,..”(엡4:15). 실천에 있어서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지성주의 상담은 독특하게 성경적인 사랑 안에서 신뢰적이고, 목회적이고 그리고 진리를 말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들은 성경이 반복적으로 증거한 상담의 지시적이고, 대치적이며, 권위적인 스타일을 추구하는 것으로 다른 사람들에 의해 알려져 있다(아마 이런 식으로 이름난).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모두 비슷하게 상담세계에서는 ‘권위’를 대단히 싫어한다. 그것은 권위주의자와 함께 권위는 동등하다고 생각한다. 대신에, 치료요법사들은 내담자 자신에게서 의지력으로 고치게 하려고 그를 이끌어내어 받아들이는 관계성을 사용한다. 성경적 상담사역은 예수그리스도의 주되심(lordship)과 그의 말씀의 권위는 만약 그것이 사랑이라면 상담은 권위가 되도록 요구한다는 것을 바르게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그것이 전이(轉移)의 기미가 보인다는 두려움 때문에, 무조건적인 절대 존중과 사람 중심의 상담의 관계를 강조하는 것은 피해야한다. 상담자와 내담자의 관계에 대한 여러 가지 세속적인 구조들 속에 있는 ‘우리의 좌측에 있는 위험’은 어떤 공공연한 권위라도 열심히 피해야한다.(물론 은근한 권위도 모든 상담 구조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거기에는 또 다른 면에도 위험은 있다. 상담 관계에 대한 성경적 관점은 비권위적인 요소를 가지며 ‘내담자’ 안에서 역할을 하며 ‘그 관계’는 조직적인 상담이 이루어지는 그 중심에 있다. 성경은 권위와 건강한 성경적 관계의 성숙한 특징 사이의 상호 작용을 증거 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다양한 상담자와 내담자의 모습들을 거울로 보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성경이 주님의 말씀을 운송수단으로 하여 그린 것이다. 우리에게 역사적으로 주어진 방법들을 비성경적 개념들을 대항하여 싸운 것들인데, 그것은 아마 의심할 여지없이 지성주의 상담일지라도 내담자에 대해 한번쯤 의심하는 경향이 있으며, 역할의 통계는 계속 강조하며 신속하고 분명한 변화를 목표하고 있으며, 지나친 관심을 경계하며, 장기간의 상담관계는 조심스러워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재고해 봐야 한다. 사실 권위주의적 목회자가 결정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성경적 상담의 유일한 유형이다. 심지어 그것은 초기 유형이 아니다. 그것은 초기 유형이 실패했을 때를 대비한 유형이다. 가장 특징적인 성경적 상담관계는 장기적인 친교이며 서로에 대한 상호 의존 구조처럼 하나님께 대한 의존을 일으키며 상호적인 상담에 임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권위주의의 단기간 개입은 응급처방式이며 단기간의 삶 일뿐이다. 이것이 지성주의 상담의 새로운 메시지인가? 아니다. 그것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 거기에는 언제나 단기간 ‘회복시키려는’ 상담과 ‘예방적’ 상담을 진행시키려는 이 둘 사이에서, 지성주의 상담은 특별한(그러나 성경적인) 긴장을 가지고 있었다. 직접적인 표현으로는 지성주의 상담은 말씀의 권위주의적 사역을 강조하고 있다. 제이 아담스는 “하나님의 교사”로써 목사의 상담 역할에 관한 것과 치유상담과 교회훈련 사이의 관계에 대해 긴 글을 썼다. 상담방법에 관한 그의 책들은 특히『기독교 상담자의 교본과 회복을 위한 준비』라는 책에서 지향해야할 상담 모델인데 그것은 역할을 잘 규정한 관계의 형태라는 것이다. 상담자는 인도하며 책상 뒤에 앉으며, 역할을 설정하고, 성경으로부터 권위적인 것들(믿을만한 것들)을 해석하며, 대면하며, 용기를 주고 안내한다. 내담자는 정직한 자료를 제공하며 자신이 상담과 치료 단계절차에 따를 것에 동의하는 것이다. 간접적으로는, 지성주위 상담의 처음부터 ‘동등한 상담’ 은 전문화된 상담활동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것은 모든 현명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서로에게 상담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상담을 하기에 충분하다’ 는 강조점을 상담활동에 두는 것은, 그 내적 함의와 외적 함의가 상담활동은 필요가 요청되는 피보호자를 섬기는데 능숙하다는 고정관념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사실상, 상호 관계가 있는 상담의 평범한 일상생활은 성경이 미리 그것을 알려준 것이며 지성주의 상담의 영향을 받은 교회에서 격려되는 실재가 되는 것이다. 이 ‘동등 상담’ 유형의 상담활동은 사무실로부터 모든 사람들의 삶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상담은 진실한 친구 관계 속으로 자녀양육, 결혼, 훈련, 소그룹과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하나가 되는 지체 속으로 옮겨지려고 한다. 성경적 상담은 “6-12주의 강도높은 개입과 직접적인 상담과정”을 함축할 뿐 아니라, 그것은 또한 내 가장 좋은 친구와 내가 서로에게 30년 넘게-또한 장기간(일생토록!) 서로를 격려하고, 서로에게 정직한 상담관계-를 어떻게 잘 할 수 있는 지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상담은 타인을 대면한 사람에게 드물게 요구하는 것이다. 기초는 자율적 대면이다. ‘역할’은 서로에게 격려하고, 서로를 알도록 추구하는 주고받는 상황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현재의 성경적 상담에 있어서 중대한 문제 하나는 더욱 ‘믿을만하게 솔직한 치료의’요소들과 더욱 ‘상호적이며 격려를 하는’요소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더 뚜렷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제이 아담스의 강조는 전자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그의 상담 책『회복에 대한 준비』에서 나타나있는 ‘형식적’ 상담에 관계된 것으로써 가장 명백하게 증거가 된다. 아담스는 말하기를, 상담을 준비하는 것은 예방과 치료를 모두 해야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 우리는 지성주의 또는 치료적인 상담활동에 거의 배타적으로 연관되어있는 것이다(p.10). 우리의 목표는 조직적인 성경적 상담사역이며,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진리로 사역하는 것이다. 성경적 상담의 ‘지성주의’ 부분은 ‘울타리’이다. 그것은 성경적 상담의 예비적 형태이다. 그것은 양들이 푸른 초장을 떠나 광야에서 방황할 때를 위한 것이다. 성경적 상담의 ‘위로(중재)’하는 부분은 ‘들판(현장)’이다. 그것은 성경적 상담의 기본 형태이며, 서로의 모든 계발을 내포하며, 상호 격려하며, 돌보며, 기도하며, 사랑하는 것 등으로 그리스도인의 일반적인 삶이다. 그것은 가능한 한 양방향 모두이며, 가능한 한 평등주의이다. 그림 2는 믿을 만한 ‘울타리’와 상담이 이루어지는 서로의 ‘들판(현장)’ 사이의 관계를 그리고 있다. 우리는 주어진 울타리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아마 사랑이라는 울타리를 가진 것을 깨달았다는데 입각하여 단지 격식의 상담구조를 가지게 된다. 거기에는 솔직하게 내담자를 대면하는 시간이 있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들판(현장)’에 대해 동등하게 잘 알려져 있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견해에 따른다. 결국 그것은 상담이 이루어지는 곳에서 대부분 기쁨과, 변화와, 건설적인 장소가 되는 것이다. ‘예방’은 사랑의 현장을 묘사하고 있음으로 너무 유약해 보인다. 아마도 우리는 ‘초청된’ 그리고 ‘현명한 동등자’상담모임의 센터로 불러야 할 것이다. 사랑의 현장 내에는 존경하는 사람으로부터 초청된 상담과 더 완전한 동등자 관계 사이에 스펙트럼이 있다. 부모, 훈련자, 목사, 장로 그리고 지혜로운 사람들은 자주 교사역할(Mentor role)을 해야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존경하고, 신뢰할 사람들을 찾는데, 그들이 자신들을 돌보아 줄 사람들로 알고 있다. 주님의 권위 아래서 완전한 서로의 관계는 언제나 바람직한 목표가 된다. 물론 그것은 아이들과, 새로운 개종자들과, 이미 개종한 자들의 훌륭한 聖化와, 갈등과 고난의 세상에서 성취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모두 ‘충분히 배울’때, 이것은 바로 우리가 모두 닮게 될 것이다. 실제적인 동등은 부분적으로 깨닫게 될 것이고, 그것은 성경적 상담의 핵심적 의도에 대한 우리의 비전에서 완전하게 전체로 합쳐져야 한다. 울타리는 삶의 범주이고, 현장은 삶이다. (그림 2) 사랑의 울타리: 신뢰하고 지혜로운 친구이며, 성령 안에서 삶의 보호에 목자와 더불어 상담 대한 필요한 영역들 ⇑ 사랑의 현장: 일반적인 활동장소와 성령 안에서 삶의 바라는 실제 ⇓ 지혜로운 동등자들의 상호상담 나는 상담자와 내담자 관계에서 무시된 요소들의 개발로부터 나온 일련의 유익들을 알고 있다. 나는 간단히 4개의 유익들을 스케치할 것이다. ① 우리는 다른 내담자들의 차별에 관계되어있는 융통성에서 큰 것을 얻을 것이다. 이것들은 상담관계를 구조하는데 있어서 다양한 방법들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높은 구조인 개입(6-12주 이상)은 ‘사람A’라는 사람의 삶의 어떤 확실한 무대에서 그를 위한 적당한 전략이 될 것이다. 그것은 ‘사람B’에 대해서는 전체적으로 적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더욱 책임있게 진행하는데서, 우정과 친구로써 더욱 좋은 상호관계(동등한 상호상담) 등으로부터 유익이 될 것이다. ② 가장 유력한 ‘동등형태’를 명료하게 표현하는 것으로 그것의 범주들은 우리가 모든 기독교인들이 상담할 수 있도록 넓게 문을 여는 ‘믿을만한 형태’가 되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많은 상담의 은사들이 하나님에 의해 주어짐으로 사람들은 다른 이들에게 권위 있는(믿을만한) 위치를 가진 사람으로 불려질 것이다. 성경적 상담에서 명료하게 표현하는 방법은 ‘사랑의 울타리현장’이며, 이것은 성경적 상담의 중요한 마음은, 지혜로써 모든 것을 여는 것임을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알도록 할 것이다. ③ 성경적 상담은 상담관계로부터 흘러나오는 많은 잠재가능한 힘들을 겨우 암시하는 것이다. 그 ‘관계성’은 상담에 있어서 강한 도구이다. 우리는 전이(轉移)에 대한 세속적 강조와 무조건적으로 적극적인 관심이, 우리로 하여금 풍부한 성경적인 맥을 탐구하려는 것에서 멀리 피하게 만들어서는 안된다. 바울은 그의 독자들에게 그의 개인적인 관계를 배경으로 계속적인 성경적 상담과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 그의 기쁨들, 기도들, 고민들, 두려움들, 시련들, 기도에 대한 요구들, 그의 독자들에 대한 경탄, 눈물들, 태도들, 기억들, 계획들, 소망들, 그리고 분명히 보이는 곳에서 계속적으로 더 많이 있는 것들이다. 우리의 상대적으로 비인격적이고 객관적인 성경적 목회 상담이 여기에 있는가? 우리는 우리문화의 정신요법형태에 대해 전문적인 탈피를 단순하게 비쳐보고 있는가? 상담자와 내담자의 관계들에 대한 강화된 인식의 결론은 상담과정 그 자체 안에 있는 사건들에 더 유의해야할 것이다. 직접적인 자료와 상담자와 내담자들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 대한 특징들은 그 방에서 완전히 다 써버려야 하며, 그것들은 성경적 상담의 제분기(製粉機)에서 특별하게 유용한 제분(製粉)이 될 것이다. 내담자는 표면적 삶의 습관들을 가져와야 할 뿐 아니라, 상담활동 내에서도 적극적인 참여가 되어야하며, 상담자들은 표면적 삶과 상담활동 사이에 계속적으로 세심해야 할 것이다. 우리들은 서로 어떻게 교섭하고 있는가? 상담의 친교(양쪽 부분에서) 속에서 완전히 일어난 태도와 행동의 성경적 변화는 남은 여생에서 작은 파장이 일어날 것(분명히 좋은 이후의 삶)이다. ④ 우리가 성경적 상담관계에 대해 우리의 관점이 부요하다는 것으로, 우리가 행하는 많은 상담의 ‘맛’을 변화시킬 것이다. 성경적 상담의 거대한 규모는 믿을만해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그것은 목회자가 그의 상담 안에서 權威적이며, 형식적이며, 대면적이며, 일방적인 요소들을 강조하지 않은 목표로써, 손에 장갑이 적당하게 어울리는 것처럼 소망하는 것들이다. 우리는 그것이 실제로 필요하다는 울타리를 쳐야하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내담자들이 만약 철저히 탐구하고 마음을 끈 문제로 질문을 받았었다면 자신들을 대면할 때 불필요하게-아마 방어하려고- 대면했었을까? 성경적 상담은 건강한 가족의 삶처럼 아주 작은 수효의 대립되고 훈련되야할 사건들을 가지고 있다. 다른 모든 구조적 관계의 형태들은 아주 월등한 상태를 만들고 있다. 요약하자면, 성경적 상담은 언제나 상담에 있어서 두 개의 상호 보완하는 전망의 씨앗들을 포함하고 있다. 하나는 상대적으로 더욱 권위적이며, 다른 하나는 상대적으로 더욱 상호적이다. 전자는 상세하며 세부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후자는 언제나 더욱 함축적이며, 서로를 돕는 지혜로운 사람들의 능력에 대해 더욱 논리적인 함축이다. 상담자와 내담자 관계의 다른 중요한 것들은 명백하게 표현될 것이 틀림없다. ⑸ 성경적 상담은 새로운 사람들에게 상황을 설명해 주는 것이어야한다. 동기부여와 고통들과 그리고 상담관계에 대한 중대한 이슈들은, 우리의 균형 잡힌 개념과 우리의 상담이 나아갈 방법에 서로 관계된다. 중대한 이슈5는 다른 종류의 이슈이다. 그것은 우리가 말하는 이가 누구이며, 우리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초점을 두고 있다. 성경적 상담은 좀 더 폭넓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참호 속에 갇혀 있는 보수주의 목회자들’ 과 ‘사람을 상담기질로 다루려는 사람들’ 에게 말해야 한다. 우리는 그들에게 상담하는데 있어서 더 확신적이고 효과적인 도구들을 주었다. 우리가 대상하는 사람들은 지역교회에 있는 성도들이다. 성경적 상담은 다른 사람들을 잘 번식시켜야 한다. 우리는 성경적 진리 운동으로써 우리의 향상을 위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다른 사람들을 교화하기 위해 그렇게 해야 한다. 나는 어느 특정한 한 성도에게 성경적 상담은 상황을 설명해야 한다는 것을 제안하기 원한다. 우리는 기독교 학문들을 통해 말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크리스천 대학과 신학교에서 학생들과 교수들에게 의미 있는 대화를 겨우 시작하는 단계에 와 있는 것이다. 성경적 상담은 건강한 지역교회 안에서 그것의 집을 찾는 풀뿌리운동이다. 이것은 그러나 큰 힘이 되었다. 성경적 상담이 지역교회들 속에서 기초를 놓게된 이유는 그것이 삶들을 변화시키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삶들을 변화시키는 이유는 그것이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패턴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진리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일반적으로, 또 불행하게도 지성과 교육 기관들로부터 가로막혀 있었다. 우리는 그 사람들을 표현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자신들을 가로막았었다. 성경적 상담은 지적 성실과 능력에 있지만, 그러나 아직 기독교 문명의 지적 분열에 대해 더 말하지 않고 있다. 실상 그것은 자주 반지성적이며 단순한 마음을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이것을 설명하여 책임에 답할 것인가? 나는 그 대답이 근본적으로 청중분석의 문제를 줄어들게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제이 아담스는 지역교회에 글을 쓰고 있다. 그는 의식적으로 청중들을 선택했다. 그는 그 청중들에게 설득의 용어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어떤 선한 목자처럼 그는 분명한 설명과 실천적 가르침으로 그의 지적 ‘뼈대들’을 잠복시키는 것이다. 그는 반응하고, 믿고, 행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무엇을 주었다. 그는 제한적인 것들과, 경우와, 뉘앙스의 반대 상황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명확하고 간단하고 설득하는 말을 하려고 애썼다. 물론 그는 지나치게 일반화하였고 지나치게 간소화하였다. 이것은 제이 아담스가 활발히 토론하고 복잡한 질문들은 믿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확실히 중심적인 기본적 중요성으로 삶의 변화와 근본적인 단순한 진리들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평들은 단순한 것들을 단순하게 읽지 않는다. 성경적 상담은 신학적 전통들을 크게 개발시킴으로써 구성된 것이다. 그것의 뿌리는 그들이 실천했던 ‘지성’들이다. 그러나 성경적 상담은 성경처럼 반지성주의적이다. 이것은 세속적인 전문성과 비평적 학계의 확실한 기초를 제공한 꼴이 되기도 했다.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모두 상담세계에서는 상담자가 주도적이 되어야 한다는 포부로 기술적인 단어들과 전문적인 구조들을 만들어 냄으로써 그것의 잔디를 보호한다. 성경적 상담이 성경의 모든 페이지마다 지혜로 가득 차 있음을 강조하는 것은 상담에 있어서 독단적인 기준일 뿐이다. 우리는 상담의 활동장소에서 지식과 효능 전반에 대해 선제적 권리를 가지려는 그들의 의도를 반대하며, 대부분 ‘기독교 상담활동’으로 비쳐진 엘리트들인, 세속 심리학을 계승한 전문적 집단을 반대한다. 우리는 또한 ‘심리학적, 감정적, 행동주의와 대인관계 문제들’의 잔디를 노련하게 깔고 있는 비성경적인 개념도 반대한다. 우리는 또한 평범한 말에 기술적인 용어를 대신하며, 진리의 지식에 대한 특성이나 구별을 혼란케 하는 계몽주의를 반대한다. 심지어 우리는 그 학계가 상담을 토론하는데 있어서 주된 활동장소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잘 조직되어 으뜸인체 하는 두 번째 활동장소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적 상담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매일 살아가는 의미인 교회로 주소를 삼고있는 것이다. 그 잔디의 풀뿌리(성도들)는 성경적 상담의 중요한 후원자가 언제나 될 것이며, 또 돼야한다. 제일먼저, 상담의 조직들 가운데 지성주의 상담은 독특하게 성경의 중심과, 주님께 순종함과, 인간의 책임과, 사랑과 지역교회 사역의 울타리를 보고있는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중대한 이슈들 속에서, 우리는 불균형을 바로잡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교육적 날개로 뻗어나가야 한다. 만약 우리가 크리스천 학계를 무시한다면, 성경적 상담의 발전과 확대는 엄한 방해를 받게될 것이다. 크리스천 학계 안에서 성경적 상담의 많은 거부는 메시지의 방어적 공격 때문이다. 우리는 세속적 전문주의의 知的이며 실천적인 습관과 기독교 상담의 전문집단과 교육적 연구소의 만연하는 습관들에 도전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많은 거부, 또한 우리가 아직 그들의 언어로 말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 공격은 메시지가 아니고 수단이고 스타일이다. 진실한 대화의 배경에서 우리는 문화적으로 ‘들을 수 있는’ 형태 속에서 같은 진리들을 명백히 표현할 필요가 있다. 최소한 우리는 지성적으로 우리와 동의하지 않지만, 풍자의 기초는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을 원한다. 나는 자주 성경적 상담이 우리가 생각하는 정도의 기초적인 헌신으로부터 멀리 있지 않은 사람들에 관한 것이라고 많이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었다. 나는 CAPS(심리학을 연구하는 크리스천연합회)-그것은 상담이 생길 때 우리의 敵將이 된다.-출신의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은 우리를 조잡한 행동주의적 사람들로, 심지어 내적 삶과 동기부여의 관점에 기초가 부족한 사람들로 생각한다. 그들은 제이 아담스의 ‘감정所在인식(feeling orientation)’에 관한 언급들이, 성경적 상담은 바로 시대에 뒤지고 옳지 않은 것으로 감정들을 오히려 감소시키는 것처럼, 그것이 동기부여와 생각에 대한 모든 것을 감소시킨다는 의미라고 그들은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감정所在인식’은 실제로 길거리 언어로 진술된 마음에서 우러나온 동기부여 개념이다. 그것은 감정들이 좋은지 나쁜지, 중요한지 하찮은지를 가지고는 어떤 것도 행하지 않는다. ‘감정所在인식’은 분명하게 내담자, 아이들과 어른들, 문맹자와 문명자에게 관계를 가지는 의미이다. 우리의 삶은 갈등 속에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나는 ~라고 느낀다”라는 실험해보지 않은 주관적인 경험을 통해 삶을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며,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바, “나는 ~처럼 느낀다”를 위해 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의 가장 난해한 이슈는 그가 ‘감정所在인식’인지 ‘주되심의 所在인식’을 가졌는지 이다. 그는 세상과, 육체와, 욕망과, 우상숭배에 의해 상세하게 다스림을 받는가? 아니면 그는 우리가 믿고 기뻐할 사랑과 은총의 주님의 통치로부터 벗어났는가? ‘감정所在인식’은 자주 신자들이 앉는 등받이 긴 의자나 상담 사무실에 있는 사람들에게 잘 관계되어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둥절한 학자들이 인간의 동기부여와 감정들을 더 정확한 의미로 만들려고 갈등하는 것이다. 그 용어는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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