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방법론] 자료수집방법 아티클, 폴트립, 초벌 번역본

  Articles2.hwp 45.3K 0 10년전
자료수집 2부 : 상담자는 그 과정에 무엇을 가지고 가는가

우리의 지난번 아티클에서 우리는 영적 눈멂의 문제들과 그것의 거짓된 힘에 대해 보았다. 우리는 영적으로 눈먼 사람들은 자신이 눈멀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래서 상담자로서 우리는 영적으로 눈먼 자들이 쓰는 다양한 가면들에 친숙해져야만 한다. 영적 눈멂은 항상 상담과정의 요소이기에, 성경적 상담자로서 우리는 준비를 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피상담자에게만 적용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우리 모두는 죄인이고 본질적으로 눈멀었다는 성경의 경고에 주의할 때, 우리가 상담자로서, 신약이 교회 생활의 중심에서 묘사한 상호간의, 일대일의 사역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한다. 나의 거짓된 마음은 쉽게 나 자신의 죄에 대해 스스로 눈멀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의 관점으로 나의 삶을 인도할 만큼 충분히 나를 사랑하는 다른 신자들이 필요하다. 그들은 나로부터 같은 것을 필요로 한다. 우리의 인간적 본성은 우리 관계들 중 모든 사람을 위한 구속적 계획을 필요로 한다.
히브리서 3:12,13은 그것을 이런 식으로 정리한다.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이 절에 관한 것을 주목하라. 이 매일의 개인적 사역으로 나를 부르는 것은 상황-즉, 당신 안에서 내가 관찰한 변화를 요구하는 죄, 또는 문제-이 아니다.. 오히려, 연루되도록 나를 부르는 것은 조건-내주하는 죄와 마음을 눈멀게 하고 경화시키는 죄의 힘-이다. 죄가 오래 남아 있으면 남아 있을수록, 영적 눈멂은 정직과 사랑과 상호 사역을 증진하는 관계성에 헌신하는 우리에게 존재할 것이고 필요로 할 것이다.
이것이 성경적 상담사역을 하는 기독교인에게 특히 필요하다. 피상담자들은 그들 자신의 눈멂을 완전하게 깨뜨리도록 도와줄 경건한 시각을 가지고 그들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하여 우리에게 의존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을 우리 자신의 마음에 대해 바르게 알도록 우리를 도와주는 크리스천 형제 자매들에 의해 안내되는 성경의 서치라이트에 헌신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그들에게 도움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을 위탁받은 상담자들은 그들의 피상담자들을 근본적으로 돕기 위하여 몇 가지 자질을 개발할 것이다. 그 자질들이 이 아티클의 초점이다.

You Can Bring Objectivity(당신은 객관성을 가지고 갈 수 있다.)
많은 피상담자들은 그들의 주관에 눈멀었다.-그들의 삶을 보는 방식은 그들이 원하는 것들에 의해 형성되었다. 그들의 요구가 근본적으로 이기적일 때, 그들은 그것을 볼 수 없다. 그들은 그들의 목소리의 톤, 얼굴의 생김새, 그들의 이야기의 설명이 그들의 욕망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자기 스스로에게는 용서한 일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는 비판할 때, 그들이 다른 사람의 죄 용서하기를 거절하고 사람들이 그들을 직면하는 상황에서 방어적일 때를 보지 못한다. 만일 그들이 희생정신에 여념이 없게 되었다면, 그들은 그것을 보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또한 그들의 섬김이 속임수가 되는 때도 보지 못할 것이다.
상담자로서 다른 사람에 대해 당신의 마음을 경화시키지 말라. There but for the grace of God go you! 당신의 피상담자들은 자신들을 분명히 보도록 하는 도움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것은 상담자로서 당신의 성경적 객관성이 매우 필수적일 것이다.
상담자가 피상담자의 세계 안으로 들어갈 때, 그는 피상담자를 지배하는 자기도취에 의해 눈멀어 있지 않다.(.......) 그는 피상담자의 영적 덫에 “잡혀있지” 않기 때문에 그의 피상담자를 “회복시킬” 수 있다.(갈 6:1) 그는 성경적 객관성을 가지고 말할 수 있다.
반대로, 영적으로 눈멀어 있는 피상담자는 그런 객관적인 시각을 잃었다. 그는 (비성경적인)시각에 사로잡혔고, 이 시작점은 그에게 일어난 그가 경험하는 모든 것 외의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대부분의 피상담자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시작점은 그들 자신의 경험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개인적 역사, 가정, 그리고 욕망의 렌즈를 통하여 모든 삶을 보는 경향이 있다. 여태까지 그들의 인생을 만들었던 해석은 또한 모든 미래의 해석을 색칠할 것이다. 그것은 심지어 그들이 성경을 이해하는 방식도 색칠할 것이다! 그들 자신의 경험을 통해 삶을 해석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행할 것이다. 성경이 아닌 개인적 경험은 그들의 세계관은 통제한다.
그런 사람은 관점이 다른 사람, 성경으로 시작하고 삶을 향하여 움직이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 성경은 삶을 해석하는 기초가 되어야 하며, 부차적인 것이 아니다. 성경적 상담자로서 당신은 성경적 시각을 피상담자에게 전달하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연구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진리가 렌즈가 될 때, 삶이 변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결혼 상담에서, 상담자는 “하나님이 뭐라 말씀하시는가?”로 계속되는 “그가 말했다-그가 말했다”를 완전히 깨뜨릴 수 있다.
Ralph와 Shirley는 결혼한지 15년이 되었다. 그들은 관계성에 있어서 비난의 전쟁으로 어그러진  대화 외에는 어떤 논의를 하는 것도 불가능해진 상태에 있었다. Shirley는 그녀의 최고의 시절(year)이 세상와 타협하기 위한 Ralph의 이슈와 바램에 대한 회피에 의해 강탈당해왔다고 확신했다. Ralph는 스스로 의롭다하고, 무정하고, 판단하기 좋아하는 사람으로 Shirley를 보았다. 그들의 대화 속에서 그들은 서로에게 수년동안 마음속에 쌓아 두었던 고통스러운 수류탄을 던졌다. 그들은 그들이 함께 한 삶에 대해 극단적으로 반대되는 시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Shirley와 Ralph는 세 개의 수준에서 성경적 시각의 급속한 중재를 필요로 했다.
행동적 수준에서, 그들은 “우리가 서로 말하는 방식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셨을까?”라고 질문하는 것이 필요했다. 의사소통에 관한 그들의 스타일은 사랑, 이해, 소망, 그리고 해결을 증진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것이 그들의 중요한 문제들 중 하나가 되었다. 에베소서 4:25-5:2에 분명한 의사소통의 원리가 있다. 그것은 이 문제를 향해 새로운 시각 뿐 아니라 지속적인 변화도 가져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생각의 수준에서, Shirley와 Ralph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를 위한 그분의 목표가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을까?”라고 질문하는 것이 필요했다. 롬 8:28,29, 갈 5:16-26, 골 3:1-14, 그리고 벧후 1:3-9와 같은 곳에서, 신약성경은 Ralph와 Shirley에 대한 하나님의 목표는 개인적 사역 성취를 위한 Shirley의 욕망이상의 것이고, 공손한 아내라는 욕망이상의 것이라고 가르친다. 오히려, 그분의 목표는 그들이 점점 그의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것이다. Ralph와 Shirley는 크리스천의 삶의 이슈에 관해 그들이 싸웠던 방식이,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그들의 삶 속으로 가지고 들어간 모든 것을 통해 성취하시기를 바라신다는 것에 대해 그들이 적은 비전(또는 헌신)을 가졌다는 것을 설명하였다는 사실에 눈멀었다. 그분은 그리스도의 형상에 대해 그들의 비슷한 점을 찾고 계셨다.
마지막으로, 그들의 욕망들의 수준에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심령에게 간청하시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질문하는 것이 필요했다. Ralph는 “단지 약간의 존경”을 갈망했다. 그것은 Shirley와 매번 만날 때 소리 없이 요구했던 것이었다. Shirley는 “자신이 하는 것만큼 주님을 섬기기 원하는 남편”을 갈망했다. 약 4:1-10, 빌 3:1-16, 그리고 골 3:1-17에서 이어지는 질문들은 그들의 관계성에 관해 “그가 원하는 것-그녀가 원하는 것”의 형태를 드러내었다. 이것이 그들의 문제 해결을 불가능하게 하는 원인이었다.
Shirley와 Ralph은 성경의 관점으로부터 시작하고, 그러한 시각으로부터 그들의 관계를 지속시키는 것을 해석하는 어떤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들은 누군가가 성경의 빛 안에서 그의 행동, 사고, 그리고 욕망들을 시험할 때, 해결책으로 인도하는 바른(성경적) 질문을 하는 법에 대해 모델이 될만한 사람이 필요했다.
내가 자료를 수집할 때, 나는 피상담자들이 전혀 의도하지 못한 방식으로 나의 질문들의 뼈대를 세우고자 했다. 왜냐하면 피상담자가 스스로에게 질문하고자 했던 가장 현저한 의문은 여전히 그의 눈멂에 의해 공격받았기 때문이다. 결코 의문시되지 않았으나 반드시 했어야만 하는 어떤 질문들이 있다. 그가 자신들에 대해 의문을 가져야 할 다른 사람들에 대해 질문해야 할 다른 질문들이 있다. 내가 질문할 때, 그들이 그들의 삶에 관하여 성경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배우는 그런 방법을 제외하고는, 나는 나의 피상담자들로서 동일한 묶음의 사실들로 다루기를 원한다.

You Can Bring Wisdom(당신은 지혜를 가지고 갈 수 있다)
로마서에서, 어두워진 죄인들의 어리석은 마음에 대해서 말한다. 어리석은 자는 영적으로 눈먼 자다. 진정 그가 눈멀고, 오리석고, 혼란스러울 때, 그가 보는 것을 생각하고, 그가 지혜로운 것을 생각하고, 그가 이해하는 것을 생각한다. 잠언에서 그리는 어리석은 자는 이런 사람이다.
그가 옳다고 확신하는 자(12:15);
그의 괴로움을 속히 보이는 자(12:6);
성급하고 무모한 자(14:16);
훈련과 징계를 회피하는 자(15:5);
돈을 낭비하는 자(17:16);
자기 의사 드러내기를 기뻐하는 자(18:2)
다툼에 민첩한 자(20:3)
지혜를 경멸하는 자(23:9)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26:5);
자기 자신을 믿는 자(28:26);
분노하고 조롱하고, 그의 주변에 평화가 없는 자(29:9);
그의 노를 다 드러내는 자(29:11)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중재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의 선택, 응답, 시각, 행동, 그리고 태도들은 그가 눈멀었다는 것을 모두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처럼 그가 보고 이해하는 것을 도와주는 성경적 지혜의 렌즈가 필요하다.
성경적 상담자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지혜로운 시각을 제공할 수 있다. 그는 단지 의견이나 조사나 경험이나 훈련 이상의 것을 가져온다. 그는 피상담자의 눈멂을 드러내고 꿰뚫어 보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신뢰(그리고 복종)를 가져온다. 그가 제공하는 성경의 지식은 순결하고, 평화를 사랑하고, 동정심이 있고, 복종하고, 자비가 풍성하고, 선한 열매가 풍성하고, 인내심이 많고, 성실하게 할 것이다.(약 3:17) 간단히 말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그는 어리석음의 완전한 반대가 된다.
우리가 상담하는 많은 사람들은 왜곡된 균형감각과 왜곡된 가치관으로 어리석음을 드러낸다. 실제적 수준에 있어서, 그들은 무엇이 진정 중요하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가를 알도록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성경적 가치체계가 부족하다. 오직 성경만이 피상담자가 그런 것들이 그의 삶에서 진정으로 상호관계를 갖는지를 이해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
상담자는, 피상담자가 그의 주관적 시각 밖에서 삶을 바라보도록 요구하는 것을 질문할 수 있다. 그는 진정 중요한 것과 참된 관계는 하나님의 관점으로부터 그의 삶 안에 다양한 것들 사이에 있다는 것을 그에게 질문할 수 있다. 이러한 질문들은 하나님의 관점으로 그가 복종하도록 용기를 줌으로 인해 피상담자의 낡고, 익숙한 관점에 도전할 수 있다.
Ralph와 Shirley를 다시금 살펴보자. Ralph는 Shirley가 그의 문제라는 확신이 있었고, 그가 자신에게 하는 그의 모든 질문들은 그런 해석으로부터 나왔다. Shirley는 Ralph가 그녀의 문제라 확신했고, 그러한 시각으로 그녀는 모든 특징적인 생각을 행하였다. 그들의 문제는 그들이 인생과 목표에 대한 접근이 너무 다르다는 믿음을 그들은 함께 나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잠언은 Ralph와 Shirley가 경험하고 있는 분노, 불일치, 차이점의 결과가 아니라 그들의 다른 점을 다루는 어리석은 방식의 결과라 지적한다. 성경은 이러한 응답이 그들 서로의 만남 가운데로 가져오는 마음의 욕망으로부터 흘러나왔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동일성과 동의는 연합의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라, 차이점과 분노에 직면했을 때 겸손하고 온유하고 인내하고 용납하게 하는 (하나님을 향한, 그밖에 무엇보다도 나를 사랑하듯이 다른 사람을 향한)사랑이다.(엡 4:1,2)
예를 들어 만일, Ralph가 어리석음(위에서 언급한)에 대한 잠언의 묘사로부터 유출되는 자기 자신에 대해 질문함으로 그의 자료들을 모으기 시작한다면, 그는 그의 중요한 어려움들을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계획들을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Ralph가 자신에게 질문할 수 있는 몇 가지 실례가 있다 : 그가 Shirley의 시각이나 그의 자신의 관점을 재조사하는 것을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이 바르다는 것을 어디에서 그렇게 확신하게 되었는가? Shirley가 그의 생각이나 그의 의견에 도전했을 때, 그는 어떻게 전형적으로 반응을 하였는가?(잠 12:15) 분노의 상태에서 그가 충동적으로 반응할 때, 어떠한 상황에서 그가 속히 짜증나거나 분노하는 경향이 있었는가? 어떠한 충돌이 Shirley와 그리고 대화에 있어서 계속해서 열려있고 정직하기를 바라는 그녀의 바람이 야기한 이러한 분노에 대한 표출을 가져왔는가? 그에게 주지도 않고 있고 그러므로 그를 그렇게 화나게 한다고 그가 인식했던 Shirley로부터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Shirley가 빼앗아가고 있다고 그가 생각하는 그가 갈망하는 “보물들”은 무엇인가?(마 6:19이하, 약 4:1이하) 그러한 질문들은 Ralph로 하여금 예수의 자비를 갈망하는 그의 필요를 보기 위해, 그 자비를 찾기 위해, 하나님 앞에 있는 자기 자신을 만나도록 인도할 것이다. 그는 많은 차이점들을 확인하기 시작할 것이다.
삶에 관한 성경적 관점을 철저하고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는 사람은 그의 낡은 가치체계 그리고 무능, 혼란, 또는 그것이 종종 만들어내는 잘못 인도된 열성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다. 그래서, Ralph가 성경적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을 배울 때, 그는 변화를 위한 신선하고 새로운 조건들을 본다. 그는 더 이상 그 자신의 주관에 얽매어 있지 않다. 그는 불가능하고, 승산 없는 결혼 상태에 빠져 있다고 더 이상 믿지 않는다. 그는 그의 문제들에 뿌리를 두고 있는 마음의 생각들과 욕망들을 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는 어떻게 이러한 욕망들이 모든 상황에서 Shirley에게 모든 반응을 형성하였는가를 본다. 그는 더 이상 그가 잡혀있거나 그가 옳다고 판단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의 결혼생활을 변화시킬 마음과 행동의 “취할 것들”과 “제거할 것들”을 분명히 본다.

You Can Bring the Gospel's Clarity(당신은 복음의 명확성을 가지고 갈 수 있다)
사람들은 그들의 본성에 의해서 항상 삶에 대한 인식을 만들기를 추구하는 해석자가 된다. 피상담자들이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왜 발생했는지, 그 결과는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할 때, 그들이 매우 혼란스러워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들이 혼란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는 많은 혼동 속에 있는 피상담자들도 있다! 그들은 그들의 해석이 통찰력이 있고 그들의 행동은 논리적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들이 그들 자신과 상황을 분명하게 보지 못한다는데 있다.
내가 상담할 때 관찰한 영적 눈멂의 가장 의미심장한 영역 중 하나는 피상담자의 삶 속에서 복음의 실체에 대한 눈멂이다. 그는 그의 해석적 체계에서 기인한 의미심장한 사실을 두었기 때문에 그 사람은 혼란과 마비상태에 빠졌다.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인간의 갈등에 대한 세 가지 필수적인 관점이 있다. 이런 관점의 기능적 인식 없이, 삶은 의미 없어지거나 비성경적이고 부정확하게 해석될 것이다. 복음은 나에게 참된 자아인식, 하나님에 대한 인식, 그리고 과정의 인식을 준다.

자아인식
어떠한 상황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우리의 인식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의해 항상 공유된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정보를 제공하고 우리의 존재와 우리의 분쟁을 진정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를 교정하는 복음이 필요하다. 복음이 나에게 가르치는 것은 나의 갈등이 나의 과거, 현재의 관계성 내에서의 어려움들, 그리고 내가 매일 접하는 상황들의 문제들보다 깊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세상의 타락이 마음의 죄악된 욕망에서 기인되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변화의 발생이 요구되는 곳이다.
내가 상담하는 많은 사람들은 내주하고 있는 죄의 존재와 능력에 대한 인식을 거의 하지 못한다. 그들은 그들의 개인적 어려움에 뿌리를 두고 있는 마음의 생각들, 욕망들, 그리고 선택들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과 상황들을 계속해서 비난하고, 그들이 매일의 삶의 상황으로 가져오는 마음의 갈등에 눈멀어 있다. 복음은 하나님의 구속적 관심의 주된 목표로서 그 안에서 전쟁을 제공한다.(벧후 1:2,4)

하나님에 관한 의식
여기서 또한, 나는 종종 나의 피상담자들이 영원히 존재하시고, 항상 역사하시고, 전능하시고, 약속을 지키시는 복음의 하나님이신 구속자에 대한 의식이 거의 없는 것에 대하여 깊은 인상을 받았다. 복음은 어려운 때에(시 46편), 나의 유익을 위해(엡 1:22,23) 나의 영존하는 도움으로서 모든 것(심지어 명백히 혼돈스럽고 목적도 없는 것까지)을 통치하시는 그분에게 존재한다. 그분은 마음속의 죄악의 굴레로부터 나를 구속하기 위해, 그리스도안에서 나에게 아낌없이 후하게 주시는 은혜의 풍요로움을 경험하도록 돕기 위해, 그리고 그분의 아들의 형상으로 나를 확증하시고자(롬 3:28이하 그리고 엡 1:3-7) 모든 상황 안에서 역사하고 계신다. 그분은 용서하는 분이시고, 화해케하는 분이시고, 구원자이시고, 위로자이시고, 회복자이시다.
그분의 구속적 사역 때문에. 인생의 각각의 상황은-나를 어둡고, 혼란스럽고, 두렵게 하는 것까지도- 성화되어지고, 의미와 목적이 충만해지고, 소망으로 고취되어진다.
피상담자들은 자주 그분이 우리 각자와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는다는 그러한 방식으로 그분의 세계를 통치하시는 복음의 하나님에 대한 의식을 거의 가지고있지 않다. 그분은 어떠한 순간에도 우리가 그분을 추구하고 도달하고 그분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이것을 행하셨다.(행 17:26,27) 그래서 그들은 그들 자신의 지혜와 힘의 마지막에 도달했을 때, 소망을 거의 갖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의 기능적 하나님은 작고, 약하고, 돌보지 않고, 거리가 있다.-당신의 인생의 좋은 도자기를 위탁할 만한 대상이 아니다. 그들의 삶에 대한 반응, 그들의 혼동은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의식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과정에 관한 의식
복음은 단지 하나님께서 활동하신다는 것을 선언할 뿐 아니라, 그것은 그분이 행하시는 것과 그분이 그것을 행하시는 방법을 묘사한다. 그것은 내가 상담한 많은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이러한 구속의 과정에 대한 의식이다. 그들은 그들의 현재의 삶과 문제들을 이해하기 위한 혁신적인 성화의 모델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아래와 같은 목표를 가지고 과정을 세워오셨다.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빌 1:9-11)
그분의 기본적인 목표는 내가 현재의 개인적 행복을 경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의 목표는 내가 그분의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는 것 외에는 없다.(벧후 1:4) 게다가, 내가 싸우고 있는 바로 그 관계성들과 내가 도망가기를 바라는 것으로부터 오는 어려운 상황들은 그분의 영광으로 열매맺는 결과를 낼 근본적인 마음의 변화를 만드시기 위해 그분이 사용하고 계시는 도구들이다.
고통은 놀람으로 오지 않을 것이며, 그것은 그분의 거리와 돌봄의 결핍의 지시로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그분의 구속적 사랑의 목적있는 도구이다. 우리의 피상담자들은 하나님의 역사, 그들이 그들의 문제에 관해 성경적 생각을 만들기 위한 점진적인 성화 과정 안에서 그들의 확신을 키우는 것이 필요하다.
내주하는 죄와 그 안에서의 갈등에 대한 이해 없이는, 하나님과 그분의 성화과정의 현존, 성격, 그리고 사역에 대한 이해 없이는, 삶은 인식(sense)을 만들 수 없을 것이다. 지혜, 통찰, 우리가 우리 자신과 우리의 상황을 복음의 관점으로 볼 때 기인하는 실제적 계획 수립의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피상담자들은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Shirley는 사람들을 받아들이며 살았다. 그러나 이것은 그녀를 상담으로 이끄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연속되는 관계의 붕괴로 인한 압박 때문에 왔다. 그러나 Shirley는 그녀의 요구, 그녀의 공포, 그리고 사람들에 대한 그녀의 속임수에 눈멀었었다. 그녀는 그녀를 실패하게 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난과 복수의 대응에 눈멀었다. 그녀는 그녀의 필요로 인해 다른 사람을 숨막히게 했다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녀의 친구들은 그녀의 삶의 제공자이자 기능적인 신들이었다. 그녀가 상담을 바랬을 때, 그녀는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버림받았다는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모든 일이 일어난 이유를 혼동하고 이해하지 못했을 때, 그녀는 믿지 못할 정도로 자기중심적이고, 압박 받고 있었다. 그녀는 지속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에 대하여 어떠한 소망도 보지 못했다. 그녀가 서 있는 곳에서부터 그녀가 가지고 있는 모든 좋은 일들은 그녀로 하여금 망신을 당하도록 하는 것처럼 보였다.
Shirley는 하나님이 어떻게 그녀를 미워해야만 하는가에 대해 말했다. 그녀는 그녀가 그리 나쁜 사람이 아니고, 그런데, 왜 사람들이 그녀를 “이용(use)하고 오용(abuse)”하느냐 말했다. 그녀는 성경읽기와 기도를 중단하고, 그녀의 교회 출석도 산발적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고통 때문에 부당하게 따돌림당했다고 믿고 있었다. 그녀가 진정 원했던 것은 그런 것이 중단되는 것이었다.
분명히, 복음은 Shirley의 삶으로부터 의식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그녀는 주권을 가지시고, 거룩하시고, 회복시키시고, 화목케 하시고, 영원하시고, 영원히 역사하시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그녀가 누리도록 하기 위해  따라 모든 것을 지배하시는 복음의 하나님에 대한 기능적인 의식을 갖지 못했다.(엡 1:3-9)
그녀는 복음이 의도하고 있는 죄인으로서 그녀 자신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녀로 하여금 이기적인 기대들과 침묵의 요구들이 쌓여진 상황과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우상숭배적인 마음을 보지 못했다. 그녀는 어떻게 이러한 우상숭배적인 기대들이 그녀가 경험한 지속적인 실망을 일으켰는지 보지 못했고, 그녀는 그녀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들에 대한 그녀의 반응인 은밀하고 명백한 복수에 대한 의식의 시스템에 대한 의식을 갖지 못했다. 그녀는 그녀가 율법을 주는 자(law-giver)와 심판자(judge)로서의 하나님노릇을 하고 있었다.
결국, Shirley는 점진적인 성화의 복음에 대한 의식이 없었다. 그녀의 환경 안에서 하나님의 손길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 매 상황과 매 관계 속에서 그분은 구속적인 사역을 하고 계시다. 그러나 그분은 그녀가 갈망하는 것에 대해 그녀가 받아들이는 것을 전해주시기에 전념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죄악된 마음과 행동을 드러내기 위한 그녀의 고통스러운 경험들 안에서 역사하고 계셨고, 이런 것들은 줄곧 그녀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형성하도록 경험하신다. 바로 “하나님께서 불성실하게 Shirley를 돌보시는 것 같은 환경들"은 사실 그의 사랑, 그녀의 이익을 위한 언약적 돌봄에 의해서 관리된 것들이었다. 그녀는 그녀의 삶에 대한 그녀의 평가, 즉 복음의 실제에서 떠났기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Shirley는 우리가 상담하는 모든 사람을 대표한다. 만일 그들이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사실,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 그분의 자녀로서 받는 유업, 계속되는 구속(성화)의 과정에 눈멀어 있다면, 우리의 상담자들이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해석할 수 있는 길은 전혀 없다. 그들이 성경적으로 적합한 행동을 할 수 있는 길도 없다.
이것이 성경적 상담이 구별되어지는 핵심이다. 성경적 상담자는 성경을 단지 행복한 삶으로 이끌고 가기에 필요한 삶의 원리에 대한 백과사전으로 보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성경은 우리에게 복음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삶에 대한 급격한 시각을 제공한다. 모든 성경적 시각과 원리들은 거기에 근거하고 있다.
이러한 삶에 대한 시각은,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그분의 가족으로 입양하시는 주권적이고, 사랑의 하나님에 의해 선택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이 행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것을 행하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하시며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으로 확증하시는 모든 상황 속에서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독립적으로 강하고, “건강하고”, 빈틈이 없고, 그리고 행복한 개인들이 되기 위해 그 잘못된 소망을 살 필요가 없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과 우리가 소망하는 모든 것은 우리가 하나님 임재의 모든 놀라운 힘이 채워져 있는 연약한 토기라는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우리는 더 이상의 질병과, 슬픔과, 죄, 또는 죽음이 없을 것 때가 우리를 위해 예비되었다는 것과 우리는 그분과 함께 있고 영원히 그분과 같이 된다는 소망을 가지고 미래를 바라본다. 그것이 심지어 개인적인 고통의 어두운 날들에도 우리가 마음을 잃지 않는 이유이다.(고후 4:7-18)
당신은 성경의 원리에 대한 침해 없이는 성경의 원리를 “de-Christophy"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행하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신 모든 것은 그분이 행하신다는 것에 뿌리를 둔다. 만일 피상담자가 그의 해석적 체계의 중심에 복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성경의 원리들은 그로 하여금 아무런 의식을 갖지 못하게 할 것이며, 그는 적당한 응답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피상담자의 삶으로 가지고 가야하는 분명한 것은 복음 그 자체이다. 복음은 가능하면 처음에 그들이 보기를 우리가 원하는 것이다. 모든 문제는 그리스도에 대한 여러 가지의 준비를 통하여 만나진다. 에베소를 위한 바울의 기도를 염두에 두라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 1:18-23)

바울은 그 기독교인들이 복음의 근본적인 진리에 의하여 그들 스스로와 전 생애를 볼 수 있기를 기도하고 있다. 그의 기도는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유업의 능력과 풍요로움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피상담자들은 만일 그들이 그들의 삶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과 현존에 눈멀었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살게 하시려고 부르신 것처럼 살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그들의 삶은 “효과없고 생산성 없는”것이 될 것이다.(벧후 1:8,9)
이 복음의 명쾌함은 우리가 또한 “[우리의 피상담자의] 마음의 눈이 밝아지기를”위해 기도할 때, 우리의 자료수집으로 형성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피상담자가 바라보지 않았던 것들을 그들이 바라보게 하는 원인이 되는 복음으로부터 어떠한 것이 흘러 나오는가라고 질문한다. 그들이 이러한 질문에 대답할 때, 복음의 명확성은 혼란의 구름을 제거하기 시작할 것이다.
인간의 영적 눈멂은 그들이 잘못된 질문-잘못된 대답으로 인도하는 질문-이라는 요소의 하나라고 첫 번째 아티클에서 시작했다. 우리의 자료수집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의 피상담자들에게 진리에 바탕을 둔 성경적 진리와 질문으로 시작하는 법을 가르칠 수 있다. 예를 들어, 만일 성경이, 남의 삶의 “모든 것” 안에서 하나님께서 구속적으로 역사하신다고 말한다면,(롬 8:28이하) 나는 그분이 그렇지 않다거나 의문스러운 이유를 가정한 질문하지 않는다. 나는 말할 것이다. “이러한 고통스러운 사건 속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선한 일은 무엇인가?” 또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선한 역사를 봄으로서 내게 무엇을 지키시는가?” 또는 “나의 삶의 일정(계획)과 하나님의 계획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또는 “무엇이 나의 보물들(나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것들)인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러한 것들이 가장 가치 있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만드시기 위해 역사하고 계신 것인가?” 이런 것들은 성경적 진리에서 흘러나오고 성경적 자기인식과 성경적 변화로 이끌어 주는 질문들이다.
예를 들어, 남편이 그의 가정에서 벌어지는 일과 하나님께서 이러한 질문들을 개인화 하는 필요에 계시지 않다고 가정함으로 인해 낙심하고 있다. 무엇이 그의 가족을 위한 그의 목표인가? 그것들이 하나님의 목표인가? 이러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전형적인 방식은 무엇인가? 그는 하나님의 도구로서 작용을 하였는가 또는 마치 그가 가족을 소유한 것처럼 작용하였는가?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뿌릴 씨를 수확하는 장소는 어디인가? 그의 가족 안 어디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인식하는가? 남편과 아버지로서 그는 하나님의 일정과 상충한 적이 있는가? 어디인가? 각각의 관계성으로부터 그가 가장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것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원하시는 것인가? 오직 하나님만이 생산하실 수 있는 것을 생산하기 위해 애쓰면서, 그가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곳은 어디인가? 그의 아내와 아이들을 향한 응답 안에서 그 스스로의 연약함과 유혹과 죄를 인식하는 데 실패한 곳은 어디인가? 그가 성내고, 비난으로 채찍질하고, 고소하고, 협박하는 말을 하곤 했던 것은 언제인가? 어디에서 그가 낙담과 소망 없음으로 갈등하곤 했는가? 자신, 하나님, 다른 사람들, 그리고 그의 상황에 대해 어떻게 말을 하는가? 이런 것들이 성경적 진리에서 흘러나와 성경적 인식과 성경적 변화로 인도하는 질문들이다.

You Can Bring Purpose(당신은 목적을 가지고 갈 수 있다)
상담하러 오는 모든 사람은 이유가 있어서 온다. 그들은 성취된 것을 보고싶어하는 일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상담자로서 당신은 영적 눈멂은 피상담자가 본질적으로 그들의 일정이 폭이 좁고, 이기적이고, 지나치게 임시변통적(현세적)이라고 보는 것을 방해한다는 것을 다시금 기억해야 한다. 그들의 상담의 목적이 그들이 “조물주에 대한 경배와 섬김을 피조물에 대한 경배와 섬김으로 바꾸는 것”(롬 1:25)이라고 드러날 때, 그들은 당신의 도움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의 아내와 별거하고 있는 사람은 그의 가족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상담하러 온다. 아내는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남편을 바라기에 온다. 청소년들은 “줄곧 함께 해 왔던” 그의 차가 없어졌기 때문에 온다. 압박을 받은 젊은 청년은 단지 약간의 행복을 갖기 원한다. 목사는 그의 사역이 성공적이지 못한 이유를 이해하기를 원한다.
각각의 사람은 상담하러 오는 이유가 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들의 목적이 자기본위라는 것을 보지 못한다. 실제적으로, 그들은 그들을 행복하게 할 피조된 세계의 특정부분 정도만을 바랄 뿐이다. 그러나 그들은 더 큰 것, 그들을 위해 더 큰 것을 바라시사 그들을 보호하시고자 그분 자신의 아들까지 희생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그런 피상담자들은 그의 일정이 공포, 자기만족, 지배, 개인적 행복 또는 “피조물”의 어떤 다른 국면을 위한 욕망에 의해 채색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눈먼 채로 상담하러 온다. 그의 문제는 주님으로부터 너무 큰 것을 원한다는 것이 아니라 너무 작은 것에 집착한다는 것에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들이 순전히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벧후 1:4)가 되기를 원하시는 때에, 피조세계의 임시적인 보물을 추구한다.
피상담자는 목적-그러나 자기 만족의 좁은 목적이 아니다-을 함께 하고 나란히 가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는 자기 만족과 개인적 취득의 욕망에 의해 불구자가 되지 않은 구속적 목적을 소유한 어떤 사람이 필요하다. 그는 그가 자신을 위해 바라고 계획했던 것보다 더 높고, 더 풍성하고, 그리고 더 깊은 하나님의 장대하고, 구속적인 일정으로 그를 인도할 어떤 사람이 필요하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행복한 결혼과 착한 자녀들보다 더한 것을 주시고자 역사하신다고 말한다. 그분의 사역은 내가 그분의 신의 성품에 참예하게 하는 것이다.(벧후 1:4)! 또는, 바울이 에베소서 3장의 마지막에서 말한 것과 같이, 그분은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측량할 수 없게 행하실 수 있다”. 우리의 상담에서, 우리는 근시안적이 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너무 작은 것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마치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계획하신 더욱 위대한 기쁨에 동참하기 위하여 그들의 개인적 꿈을 버리는 지점으로 그들의 계획을 성취하시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들을 쾌락의 존재로부터 이동시키기 위하여 하나님께 사용되기를 원한다.
성경적 상담자는 하나님께서 피상담자에게 원하시는 것을 원한다. 그분의 일정은 성경에 의해서 형성된다-시들고 멸망한 것들에 투자하는 피상담자를 돕기 위해. 그것을 이루기 위해, 그는 피상담자가, 그의 눈을 그를 위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목적들로 뜨게 하는 동안, 그 마음속에 있는 진정한 의도를 드러내도록 도울 필요가 있다. 상담자로서, 내가 이러한 목적을 성취하였는가 라고 질문하고 싶다. 나는 이 세상의 순간적 즐거움 이상의 것에 굶주려 있는 그들 안에, 진정 살아 있는 것과 창조하는 것을 향해, 그들이 나의 피상담자들의 눈을 뜨게 하기를 원한다. 나는 구속적 목적을 가진 피상담자의 일정을 환영하고 싶다.
우리의 자료수집 방법론은 이러한 목표를 신중히 취해야 한다. 어떻게 우리의 질문들이 그것을 성취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우리의 세 번째 아티클의 초점이 될 것이다.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사 42:7)
그분의 종으로서 우리는 그 밖에 다른 것을 드릴 수 있겠는가?

필독서1
필독서2


1.신체문제 상담챠트

2.뇌구조 상담챠트

3.정신구조 상담챠트

4.마음이해 상담챠트

5.변화과정 상담챠트


번호 분류 이미지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조회
219 504정신질환상담
벤조디아제핀 센터원장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7-08-29 2 3518
218 105가정상담
부모님과 싸운 후 혼자 화푸는 방법(유머) 센터원장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7-05-08 6 1211
217 105가정상담
남편이란 무엇일까요?(예화) 원장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7-03-22 2 1017
216 107진로상담
이별통보시 남녀간의 선호방식 차이 센터원장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6-10-25 6 1424
215 504정신질환상담
리스펜 1 센터원장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6-10-07 10 3950
214 504정신질환상담
EFT 치료법 센터원장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6-09-26 12 3310
213 504정신질환상담
로라반정 1 센터원장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6-06-24 6 5491
212 504정신질환상담
디아제팜 센터원장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6-06-24 5 4817
211 202성경연구법
상담에 사용하는 성경구절 모음 1 센터원장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6-06-15 8 2329
210 301상담역사
현대 성경적 상담에 있어서의 중요한 문제들 리뷰 센터원장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6-06-10 5 1204
209 301상담역사
심리학이란 무엇인가? (발췌) 센터원장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6-06-10 2 1226
208 101개론
성경과 상반된 탈무드의 가르침들 1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6-04-12 2 2273
207 504정신질환상담
트라조돈캡슐25mg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6-04-09 9 4992
206 504정신질환상담
쿠에타핀정25mg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6-04-09 3 5174
205 108고통
동성애 관련자료: 잡지기사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6-04-01 9 2244
204 504정신질환상담
심발타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6-03-29 7 2954
203 106대화법
부부의 결혼기간별 대화의 변화(예화) 원장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6-02-23 4 1549
202 504정신질환상담
페르페나진정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5-11-26 4 4699
201 504정신질환상담
메리움정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5-11-26 7 2949
200 504정신질환상담
자나팜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5-11-08 7 5051
199 101개론
총신대 상담대학원 커리큘럼 안내입니다.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5-11-04 8 2713
198 504정신질환상담
토파맥스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5-10-28 6 3460
197 504정신질환상담
플루누린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5-10-28 6 3267
196 504정신질환상담
메칠페니데이트(리탈린, 콘서타, 페니드) 1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5-10-22 11 9848
195 504정신질환상담
레보세틴정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5-10-13 6 3353
194 504정신질환상담
리스페리돈 1 원장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5-10-07 6 4919
193 504정신질환상담
연명 치료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5-10-01 6 3061
192 203상담훈련법
케쿨레의 꿈 원장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5-09-17 3 1582
191 504정신질환상담
수면제의 종류와 특징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5-08-28 8 12024
190 102기본원리
성령님-우리가 계속해서 나아가도록 하심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5-08-01 1 1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