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삶과 복음 사이
필의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정말로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단지 성경과 조직 신학에만 능통한 것이 아니라, 이름만 대면 누구다 알 수 있는 유명한 신학자의 방대한 주석도 모두 소장하고 있었다. 필이 모르는 신학 주석이나 성경 내용은 거의 없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전혀 뜻밖의 문제가 있었다. 그의 서재에서 눈을 돌려 일상의 면면을 직접 들여다본다면 우리는 앞서 들은 필과는 전혀 다른 필을 만나게 될 것이다.
필은 언제나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잘못된 일들을 지적하기에 바쁜 사람이었다. 그러나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신학적으로는 현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인간관계에서는 언제나 초보였다. 아내 엘리와의 결혼 생활이 날마다 위태로웠음에도, 그에게는 이 숨 막히는 갈등을 깨닫거나 해결할 힘이 전혀 없어 보였다. 이제 다 성장한 자녀들과의 관계 역시 소원했고, 항상 친척들과도 이런 저런 문제에 휘말리곤 했다. 그는 자신의 일에 결코 만족할 줄 몰랐고 30년 동안 4번이나 교회를 옮겨 다녔다. 자기의 문제를 해결하느라 늘 바빴기 때문에, 필은 다른 사람들과의 문제를 해결할 시간을 가질 틈이 없었다.
문제는 필의 이런 진짜 생활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그와 엘리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선 결코 싸우지 않았고, 별거를 한다거나 이혼 얘기를 꺼내지도 않았다. 그들은 교회에 열심히 출석했으며 봉사에도 언제나 열심이었다. 게다가 필은 주일학교 시간과 성경공부 시간엔 해박한 성경 지식을 가지고 헌신적인 모습으로 변했다. 그러나 집에 돌아오면 쉽게 짜증을 내고 불같이 화를 내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집에서 보내는 대부분의 시간은 컴퓨터를 하는 데 사용했다. 그와 엘리는 스케줄을 이야기하는 것 외엔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설혹 그런 이야기를 할 때조차도 필은 매우 거칠고 퉁명스러웠다. 사랑이나 용납, 그리고 감사와 같은 단어들은 필의 삶에서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엘리는 교회에 대해서도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도 진심으로 필의 본모습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남편이 겉으로 드러나게 나쁜 행동을 한 것은 아니었고 약물이나 성인물에 중독된 것도 아니었다. 또 필이 자기 가족들을 돌보지 않는 사람도 아니었기에, 그는 교회의 관심으로부터 숨을 수 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필을 존경하고 있는지를 지켜보면서, 엘리는 남편이 성경 공부를 인도해 달라는 부탁을 받거나 신학 관련 강의를 해 달라고 요청 받을 때마다 더욱 괴로워했다. 자신이 더 신랄해지고 냉소적이 되는 것을 견딜 수 없어 여러 가지 수단을 다 써 보았지만, 엘리는 점차 무기력해질 뿐이었다. 때로 그녀는 ‘남편 없이 홀로 살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고 부엌에서 혼자 멍하니 생각하기도 했다.
마침내, 엘리는 필에게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고 말했다. 그녀는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상담을 받으러 가자고 했다. 처음에 필은 완강히 거부했지만 결국에는 한번 받아 보자는데 합의했다. 처음 이 부부를 만났을 때 우리는 그들이 서로에 대해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도록 많은 시간을 할애해 주었다. 그런데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사실 무엇이 이상한지 처음에는 잘 알아차릴 수 없었는데, 상담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서야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깨달았다. 그들은 내게 장황한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거기에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아니 전혀 들어 있지 않았다. 신학적으로 무장된 남편이었고 신앙적으로 독실한 아내였음에도 그들의 이야기는 정말이지 너무나 세속적이었다!
필과 엘리는 복음에 대한 이해에 있어 현격한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그건 마치 집 한가운데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채로 살아가는 것과 같았다. 그들은 매일 그 주위를 비켜서 돌아다니고 있었을 뿐이다. 어떤 다툼이 생길 때마다 그 구멍은 더욱 커졌지만, 그들은 그런 구멍이 있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했다. 다른 가정에는 그런 구멍이 없다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 부부는 이 구멍을 메워야 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더욱이 필은 그 구멍을 어떻게 하면 완벽하게 메울 수 있는가에 대한 놀라운 ‘지침서’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그것을 사용해서 문제를 고치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엘리 역시 그 구멍에서 뿜어져 나오는 먼지와 악취와 고열로 인해 괴로워했지만,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어찌 해야 할지 전혀 가늠하지 못했다. 이 구멍은 바로 그들의 신앙심이었다.
나는 필과 엘리의 예가 단지 그들만의 경우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사실 우리 중에는 많은 필과 엘리가 가정을 이룬 채 살아가고 있다. 때때로 복음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는 커다란 괴리가 존재하는데, 그런 균열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정체성과 현재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이해력 모두를 무너뜨린다. 이러한 괴리는 우리 삶 속에서 매일의 인간관계를 파괴시키고 우리가 하는 모든 선택들과 다른 사람들을 섬기려고 하는 모든 노력들을 무색케 만든다. 그러나 우리는 마치 그런 구멍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스스로를 외면한 채 살아가고 있다.
괴리에 대한 이해
베드로후서 1장 3-9절은 다른 본문들보다 더욱 분명하게 이러한 괴리를 잘 보여 준다.
3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4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5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8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9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벧후 1:2-9).
븍음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 관해 적절히 비유하고 있는 이 내용을 살펴보자. 9절에서 베드로는 하나님을 알고는 있지만 그의 삶에서는 믿음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의 삶은 온유하고, 사람들을 넘치도록 사랑하며, 온화하고, 자연스러우며, 날마다 주님께 예배드리며, 세상의 것들에 대해 온전히 균형 잡힌 관계를 유지하며, 지속적으로 영적 성장을 이루는 것들과는 영 관계가 멀다. 대신 이런 신자들은 깨어진 인간관계 속에서 아파하며, 하나님을 알지만 그분과 진심으로 동행하지 않고, 세상의 것들과 씨름하며, 개인적인 성장에 있어서도 한계에 부딪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럼 분명 열매를 거두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더욱이 이런 식의 삶은 그들에게 근본이 되어 준 믿음과도 정면으로 배치된다.
앞서 베드로의 말은 필과 엘리의 상태를 잘 설명해 준다. 실로 그들은 많은 부분에서 ‘게으르고 열매 없는’ 자들이었다. 갈등의 상처는 서로 간에 존중을 잃어버리게 만들었다. 그들 사이에서 그 어떤 신뢰나 자발적인 애정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웃과도 잘 지내지 않았고, 좋지 않은 모습으로 교회를 세 번이나 옮겨 다녔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일에도 그저 최소한의 성의와 노력만 보였을 뿐이다. 그들의 신앙심은 진실한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마음이기보다는 비현실적인 것에 대한 지향일 뿐이었고, 자기 삶에 대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사명은 억지로 해야만 하는 의무였지 간절히 추구하는 기쁜 노력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필과 엘리가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이미 오래 전에 물질적인 가치가 영적인 가치를 대치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그들이 오랫동안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십 년 전에 서로에 대해서 내뱉던 원망들을 지금 그들이 하고 있는 논쟁 속에서도 고스란히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왜 그토록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게으르고 열매 없는’ 자들이 되었을까? 베드로는 9절에서 그에 대해 명확한 진단을 내리고 있다. 즉 그들은 소경이기에 멀리 보지 못하고 자신들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되었음을 잊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그들은 복음의 능력과 소망에 대해 소경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때-지금-그때”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그림 1.1을 보라). 먼저 과거의 ‘그때’가 있다. 내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고백했기에, 나의 죄는 완전히 용서함을 받았다. 그래서 이제 나는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서 있다. 또한 미래의 ‘그때’가 있다. 즉 죄와 갈등이 없는 곳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되리라는 약속이다. 교회는 복음의 이 두 가지 ‘그때’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아주 잘 설명해 왔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인한 ‘지금’ 이곳의 유익에 대해서는 설명이 미흡했거나 잘못 이해해 온 경향이 있다. 복음은 바로 지금,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어떠한 차이를 만들어 내는가? 복음은 우리가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직장인으로서, 그리고 교회의 성도로서 살아가는 것을 어떻게 돕는가? 복음은 어려운 일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게 하며 어떠한 결정을 내리도록 돕는가? 복음은 우리의 삶의 의미와 목적과 정체성에 대해서 무엇이라 말하고 있는가? 복음은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일에 나를 어떻게 격려하는가?
바로 ‘지금 이곳’에서 우리 대부분이 복음에 대한 무지를 경험한다. 우리의 시력은 우리를 재촉하는 급한 일들과 더 일찍 성공하고자 하는 조급성, 물질에 대한 중독적인 탐닉, 자기 자신의 문제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저항심, 그리고 우리가 오해하여 교제라고 부르는 교회 안에서의 세속적인 인간관계 등에 의해 어두워져 간다. 더욱이 이러한 시력 상실은 때로, 사람들이 직면하는 삶의 구체적인 도전들에 복음을 적용시키지 못하는 설교로 인해 더욱 가중된다. 사람들은 복음이 그들의 직장과 주방과 학교, 침실, 마당, 심지어 그들의 차 안에도 해당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한다. 그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들과 하나님께서 하고 계시는 일 사이를 연결 짓는 복음의 원리에 대해서 알아야만 한다. 그들은 자기 삶의 이야기가 하나님의 더 큰 이야기 속에서 재현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복음의 정신을 가지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세 종류의 시력 상실
우리 삶 속에서 생겨나는 ‘지금-바로-여기’라는 의식의 부재는 영적인 실명 상태의 세 가지 형태를 만들어 낸다. 그 첫 번째는 자기 정체성의 상실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누구인지에 대한 복음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예컨대 필의 경우 훌륭한 신학적 지식으로 무장되어 있었지만, 그의 자기 정체성은 복음보다는 자기 자신과 자신이 이룬 업적에 더 많이 근거하고 있었다. 복음에 근거한 정체성의 결여는 다음의 두 가지 현상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첫째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속에 있는 죄성의 존재와 그 능력에 대해서 쉽게 간과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이 세상의 여러 가지 죄의 그물에 자신들이 얼마나 쉽게 사로잡히는지를 깨닫지 못한다(갈 6:1). 또한 모든 믿는 자의 마음속에서 항상 일어나고 있는 전쟁의 본성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다(롬 7장).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우상을 얼마나 쉽게 잘 따라 가는지를 의식하지 못한다. 그들 스스로의 가장 큰 문제가 자신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속에 있다는 점을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십대들을 상담하면서 복음에 대해 냉랭한 청소년들의 주된 문제 중 하나가 자기들에게 복음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는 점임을 확신케 되었다. 많은 부모들이 알게 모르게 자기 의로 뭉친 작은 바리새인들을 키워 왔던 것이다. 아이들은 자기 자신이 절박하게 복음을 필요로 하는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 자연스레 구원자에 대해서도 별로 감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런 현상은 많은 부모들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많은 신자들은 또한 자기 속에 내재된 복음적 정체성의 또 다른 측면을 보지 못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진 자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죄 사함과 새로운 성품만을 주신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신분도 주셨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사실이 주는 모든 권한과 특권을 누릴 수 있다. 이 점을 깨닫는 일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 각 사람이 나름의 정체성에 따라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의 복음적인 정체성이 혼란스러워진다면 어떤 형태이든지 전혀 다른 정체성을 지니게 되기가 무척이나 쉽다. 다시 말해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는 사실이 자기 자신을 대면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나는 자연히 어떤 다른 정체성에 따라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이런 영적 실명 상태에 처했을 때 정체성의 문제와 마주하게 된다. 이혼의 위기나 우울증, 그리고 편부모 양육과 같은 일들이 심각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것들은 정체성에 직결된 문제들이 아니다. 또한 우리의 직업이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먹고 살게끔 내려 주신 중요한 부분이기는 하더라도, 그 일이 곧 우리의 신분을 나타내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럼에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게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인식은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스스로의 능력에 더 많이 근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일들에서 성공하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그러한 직업적인 성공을 자신이 누구인지를 설명하는 데 사용한다면 결국 왜곡된 자아상만을 갖게 될 것이다.
둘째로, 복음이 보여 주는 ‘지금-여기’에 대한 인식의 차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비전을 보지 못하도록 만든다.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받았다. 그런데 왜 하필 베드로는 ‘생명’과 ‘경건’이라는 두 단어를 사용했을까? 우선, 두 번째 단어인 경건이 첫 번째 단어인 생명을 유효하게 만든다는 데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베드로가 단순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에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다고 했다면, 우리는 손쉽게 그 앞에 ‘영원한’이란 수식어를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이 구절은 때로 그런 방식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 대개는 이것을 죽음 이전에 놓인 생명의 약속보다는 죽음 이후에 찾아오는 생명의 약속이라고 이해하기가 쉽다! 그러나 베드로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경건’에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다고 말했음을 감안한다면, 그가 바로 현재의 삶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여기서 경건이란, 내가 그리스도께로 온 이후부터 그와 함께 본향에 가기까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 그 자체를 말한다.
베드로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주시는 공급을 이해하지 않으면 현재를 올바로 살아갈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은 이러한 공급이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따르는 계명이나 원리, 약속들보다도 더욱 심오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심지어 성령의 감동이나 우리의 죄 사함보다도 우리 믿음에 대해 훨씬 더 근본적인 요소이다. 현재에서 이루어지는 경건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공급하심이란 곧 그리스도 그 자신을 주셨음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기 자신을 주셨으므로 우리는 그분과 닮아 갈 수 있다.
바울 역시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예수님은 임마누엘이시다. 단지 그분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사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실제로 그의 영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그분이 함께하심으로써 우리가 되어야만 하는 모습에 다다르고 행해야만 하는 일을 하기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 받을 수 있다.
그리스도의 거하심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늘 불안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야 한다. 어려운 일은 피하고만 싶어 하며 쉽게 두려움에 휩싸이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자기 정체성과 주님의 공급하심은 소망과 용기를 북돋움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삶의 길목에 찾아오는 갈등과 유혹에 당당히 맞서도록 한다.
복음에 대한 이해의 격차가 가져오는 세 번째 형태의 영적 소경됨은 하나님의 사역 과정에 대한 무지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으로 받아들여진 이 사건이 우리 속에서 전개되었던 하나님의 일들의 ‘마침’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사실을 신약은 분명히 보여 준다. 하나님은 우리를 단순히 ‘나는 영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렀다’거나, ‘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다’는 문장들의 삶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를 끊임없는 사역과 지속적인 성장, 계속적인 고백과 회개의 삶으로 부르셨다. 그러므로 우리의 거룩해짐이란 그분과 함께 영원히 살아갈 본향에 이르기까지 지속되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흔들림 없는 목표이다. 우리 속에 경건함을 이루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하시고자 하는 모든 것을 행하실 것이다. 그분은 우리가 기쁨의 공동체를 꾸리길 원하시는 한편,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시기 위하여 각각의 일시적인 즐거움마저도 적절히 조절하실 것이다.
언제든지 우리는 어려움이나 시련 속에 거할 수 있다. 그럴 때마다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졌거나 거부되었다고 생각하기가 쉽다. 그러나 그것은 현재의 하나님의 사역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단지 우리의 안위나 편안함만을 위해서 일하시지 않는다. 주님은 우리의 성장을 위해서 일하신다. 우리가 그분의 신실하심을 의심하려는 유혹에 빠져드는 바로 그때, 주님은 우리 속에서 구속의 약속을 온전히 채워 주신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과정은 정말로 변화를 원하던 어떤 사람들만이 남게 되는 그런 이야기 같은 것이 아니다. 변화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준거이며, 하나님은 사역이 우리 속에서 완성되도록 하시도록 일하신다.
무엇이 그 공백을 메우는가?
실생활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공백이든 영적인 공백이든지 간에, 그 속에는 공통으로 존재하는 한 가지 특징이 있다. 그것들이 결코 오랫동안 공백의 상태로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바닷가 모래 속의 공백은 금방 물로 채워지고 들판에 패인 구멍은 나뭇가지와 나뭇잎으로 채워지듯, 모든 공백은 언제나 무언가로 채워지기 마련이다.
우리 집 계단 밑에는 사람이 들어갈 만한 커다란 벽장이 하나 있다. 내 아내는 그 장소에 매우 신경을 쓰는데 6개월에 한 번씩은 꼭 대청소를 한다. 그동안 처박아 둔 것들을 내용물에 따라 분류하고, 바닥을 청소하면서 그곳을 완전히 비워 놓는다. 그런 다음 아내는 “우리 가족이 항상 이렇게 말끔히 정리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 주길 바란다”라고 말한다. 나도 그렇게 정리되어 있는 것이 좋기 때문에 별다른 반대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벽장은 다시금 온갖 잡동사니들로 가득 찬다. 아이들은 자기들이 왔다갔다는 흔적을 남기기라도 하듯 들락거릴 때마다 여러 물건들을 놓고 나온다. 또한 집에 소포가 오기만 하면 이상하게도 상자들이 영락없이 그 창고 안에 쌓이곤 한다. 말하자면 온갖 ‘잡동사니’들이 죄다 그 벽장 속에 자리하게 되는 것이다. 머잖아 벽장문은 간신히 닫히는 정도가 되고 아내는 마침내 다시 그곳을 향해 돌진하게 된다.
대다수 사람들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복음적 공백도 그 상태로 머무르지 않는다. 만약 우리의 신앙이 복음의 원리에 충실하고 그리스도를 온전히 닮고자 하며 늘 변화하고자 다짐하는 신앙이 아니라면, 그 공백은 이내 다른 것들로 메워지고 말 것이다. 이 신앙의 구멍을 메우는 것들은 아마 매우 그럴 듯하고 심지어 성경적인 것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실상 그런 식으로 메워진 삶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정체성을 상실하게 만들 것이다.
나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10장 5절에서 이러한 위선적 면면을 언급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들을 좋아한다. 그는 그런 모습들을 ‘이론’이라고 말한다. 물론 모든 거짓말들이 곧 이론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이론은 정말이지 그럴듯해 보이는 거짓말이다. 내가 전에 여자 올림픽 대표선수였다고 말한다고 하자. 그것은 거짓말이다. 하지만 이 말이 속임수가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내가 남자라는 사실이 너무나도 확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양복을 입고 서류 가방과 몇 가지 건축도면을 들고서 어느 사무실을 방문했다고 해 보자. 아마도 나는 내 자신이 건축 회사의 계약 담당자라고 생각하게끔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진실한 신앙인 양 위장하고 있는 이 가장 위험한 이론들은, 우리로 하여금 복음의 핵심인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지향하는 삶을 살아가지 못하도록 만든다. 어떤 면에서 그것들 역시 진리 위에 근거를 두고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이 이론들은 완전한 것이 아니다. 이 이론들의 결과물은 그저 표면적인 신앙심일 뿐이다. 우리가 우리를 점진적으로 변화시키시는 그리스도의 내주하시는 사역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순간마다, 우리 신앙의 공백은 마음보다는 외면에 더욱 초점을 맞추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으로 채워진다. 나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과연 무엇인가’에 관한 싸움이 우리 주변의 모든 삶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이 싸움은 자꾸만 우리로 하여금 본질적인 데서 벗어나 외면적인 모습에 치우치도록 유도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종류의 기독교적 외면화가 이런 복음적 공백을 메우고 있는가? 외면화의 고리들은 모두 일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이 각각은 여러 가지 경우에 여러 가지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어디 한번 스스로를 잘 살펴보라. 나는 이미, 알고 있는 복음과 실생활의 사이에 커다란 간격을 지니고 있을 것이며 그 간격은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어떤 방식에 의해 채워지고 있을 것이다. 어떤가, 정말 그런가?
그리스도인들의 외면주의
: 복음적 공백을 메우는 것들
형식주의
만약 교회의 연중행사 스케줄이 궁금하다면 짐의 계획표를 들여다보라. 어떤 모임이나 사역의 현장이든지 그는 항상 성경책을 지닌 채 그곳에 있다. 주일학교 교사인 짐은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철저히 해냈으며 정기적으로 단기 선교에도 참여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것을 기꺼이 베풀었고 봉사할 일이 있을 때면 스스로 자원해서 열심히 동참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짐의 세계와 하나님의 세계는 일치하지 않았다. 짐의 모든 사역 활동은 그의 마음과 그가 살아가는 방식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형식주의를 질책하셨고(사 1장), 그리스도께서는 바리새인들의 형식주의를 비판하셨다(마 23:23-28). 그 이유가 무엇일까? 바로 이 형식주의가 자신의 삶과 자신의 시간, 그리고 자신의 계획을 자기 자신이 지배하도록 조장하기 때문이다. 형식주의는 우리로 하여금 자기 영적 상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이 사라지게 만든다. 짐에게 있어 교회에 출석하는 일은 그저 건강한 삶의 한 부분일 따름이었다. 즉 삶의 다른 영역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짐에게 있어 복음은 그저 ‘모임에 참여하고 교회 행사에 빠지지 않는 것’ 정도에 국한되어 있었다.
율법주의
샐리는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에 관한 걸어 다니는 사전이었다. 그녀는 모든 일에 대해 일련의 법칙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 법칙들은 또한 그녀가 자기 자신과 다른 이들을 평가하는 잣대가 되었다. 그녀의 자녀들은 늘 샐리의 율법주의가 짓누르는 무거운 중압감 속에서 살아가야 했다. 그들에게 있어 하나님은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기준들을 강요하는 냉혈한 심판자였고, 그 기준들을 지키지 못했을 때에는 가차 없이 벌을 내리는 엄한 분이었다. 사소한 잘못도 결코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던 샐리 때문에 그녀의 집에는 즐거움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샐리는 자신의 행동 규칙들을 준수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에게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받았던 은혜에 대한 아무런 감사도 찾아볼 수 없었다.
율법주의는 아무도 하나님의 기준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는 없다는 진리를 잃어버리게 만든다. 또 한편으로 샐리의 경우가 그랬듯 엄격하게 자신의 기준과 자존심과 욕망, 그리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마음 등이 드러나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율법주의는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사실에 근거한 죄성의 심각성을 무시한다. 또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당연한 신앙의 요구마저 잊어버리게 만든다. 요컨대 율법주의는 복음을 단순히 희석시키는 정도가 아니라, 전혀 다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갈라디아서를 보라). 율법주의는 구원이 규칙들을 지킴으로써 얻게 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신비주의
크리스틴은 각각의 감정적 체험 사이를 위태롭게 오가고 있었다. 언제나 그녀는 영적이면서도 고차원적인 하나님과의 극적 체험을 갈망하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크리스틴은 결코 한 교회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녀는 교회의 책임 있는 일원이기보다는 끊임없이 새로운 경험을 추구하는 사람에 가까웠다.
그러나 극적인 체험만을 추구하는 가운데 크리스틴의 믿음은 점차 약해지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 속의 절망감과 싸웠고 때로 자신이 정말 신자이기는 한 걸까 하며 스스로를 의심했다. 이처럼 강력한 영적 체험을 거듭했음에도 그녀는 믿음과 새로운 성품 속에서 전혀 성장하지 않았다.
성경적인 믿음은 결코 금욕주의가 아니다. 진정한 기독교 신앙이란 인간 감정의 모든 경험 속에서 더욱 성숙한다. 그러나 복음을 하나님에 대한 극적이고 감정적인 체험 정도로 국한시킬 수는 없다. 실로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강권하실 때, 우리의 마음과 삶 속에서 순간마다 변화가 일어난다. 그런데 신비주의는 그리스도를 따르기보다는 체험 그 자체를 더 따르게 만들 위험이 있다. 신비주의는 복음을 감정적이면서도 영적인 극적 체험 정도로 축소시켜 버린다.
실천주의
셜리는 ‘똑바로 살라’는 구호가 적힌 나무판을 들고 서 있으면서, 왜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행동에 나서지 않는지를 의아해 한다. 물론 셜리는 음란 서적을 파는 서점 앞에서 데모하는 일이나 다가오는 지방 선거에 선거운동 하는 일이나 모두 동일하게 생각하고 행동한다. 셜리가 지닌 이런 의문점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정의 내린다. 그녀가 끊임없이 주장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옳은 일을 위해서 행동하라. 어떤 장소나 어떤 시간에서도 그렇게 행동하라.” 시간과 열정과 돈을 옳은 일을 위해 기꺼이 헌신하는 그녀의 태도는 정말이지 존경할 만하다.
그러나 좀더 자세히 그녀의 삶을 들여다보자. 사실 셜리의 믿음은 즐거이 그리스도께 헌신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옳은 일들을 지키려는 행위에 더 가깝다. 이런 방식의 기독교 실천주의의 초점은 언제나 외면적인 악에 맞춰져 있다. 말하자면 현대판 수도원운동의 한 형태인 것이다. 수도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은 악하다. 악과 싸우는 길은 오로지 그로부터 분리되는 것뿐이다.” 그러나 수도원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수도원 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수도사들의 마음속에 있는 악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신의 밖에 있는 악이 자신 속에 있는 악보다 더 크다고 생각할 때,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따르려는 노력은 우리 주변의 악과 싸우려는 마음으로 대체되어 버린다. 즉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가 주변의 죄악으로부터 교회를 구원해 내겠다는 책임감으로 대체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숙함이란 악으로부터 선을 보호해 내기 위해 애쓰는 행위로 한정되고 만다. 그리고 복음 역시 그저 그리스도인들의 문제 제기 활동에 참여하는 것 정도로 국한되어 버린다.
성경주의
존은 성경과 신학에 있어서는 전문가였다. 그는 해박한 성경 지식을 바탕으로 희귀한 고전 기독교 저서를 섭렵했으며, 최신 신학 서적들을 구입하는 데 열정을 쏟았다. 그러면서 ‘성경적인 세계관’이나 ‘신학적인 관점’ 그리고 ‘그리스도인다운 사고방식’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했다. 그는 성경을 사랑했다. (이 얼마나 좋은 점인가!) 하지만 실제 삶 속에서는 그렇지 않은 면들이 더 많았다.
기독교 신학에 대한 존의 열정적 연구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라 할 수 없었다. 존은 거만하고 비판적이었으며, 자신이 잘 정리한 기독교 신앙의 지식 체계를 모르는 사람들을 무시했다. 존은 끊임없이 담임목사님의 설교를 비판했을 뿐 아니라 함께 섬기는 주일학교 교사들을 낙심시키곤 했다.
존의 신앙 속에서 성도간의 교제, 헌신,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경배는 성경의 내용과 조직 신학의 원리를 숙지해야 한다는 의지로 대치되었다. 그는 신학적으로 전문가였고, 기술적 정확성을 가지고 “은혜”를 정의 내릴 수 있었지만, 그 은혜에 따라 살지는 못했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말씀을 연구하는 데 투자했지만, 정작 그 말씀을 통해 자신을 훈련시키지는 못했던 것이다. 요컨대 성경주의 속에서 복음은 단지 성경의 내용과 신학을 섭렵하는 정도로 국한되고 말았다.
심리주의
젠에게는 항상 그녀를 챙겨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교회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자신을 괴롭게 하는지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얼마나 교회가 그들을 변화시키지 못하는가에 대해서도 성토했다. 기독교 상담 서적의 열렬한 애독자인 그녀는 항상 누군가에게 새로 나온 책을 적극적으로 권했다. 그러면서 기독교 신앙이 진정한 도움과 치유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라고 강변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 신앙을 통해 스스로를 치유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젠은 많은 시간을 절망 속에서 보냈고, 가끔은 교회 친교 모임에 나와 눈물을 흘리곤 했다.
젠은 우리의 궁극적인 필요가 그리스도 안에서만 채워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리스도가 구원자이기보다는 심리 치료자에 더 가깝다고 여겼다. 자기 자신의 가장 궁극적인 필요가 무시당하고 거부당했던 경험으로부터 나온다고 확신했기에, 젠은 스스로에게 구원보다는 치유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요구가 많고 비판적이며 자기 함몰적인 사람인지를 알지 못했다.
젠은 복음이 말하는 문제를 나름대로 재해석했다. 우리의 문제를 도덕적이고 영적이고 관계적인 것으로 보기보다는(곧 창조자를 섬기고 경배하기보다는), (이 세계의 것들을 더 경배하고 섬기는 우상 숭배적인 마음의 결과인) 채워지지 못한 필요들이 많기 때문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젠과 같이 자신의 죄보다는 다른 이들이 자기에게 행한 죄를 더 큰 문제로 인식할 때, 누구라도 그리스도를 구원자로서가 아니라 심리 치료자로서 따르는 우를 범하고야 만다. 그렇게 되면 기독교 신앙은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치유를 추구하는 것이 되어 버린다. 요컨대 복음이 감정적 필요에 대한 치유책 정도로 국한되고 마는 것이다.
관계주의
조지는 새로 나간 교회에서 맺은 성도 간의 교제에 대해 매우 감사하게 생각했다. 이 관계는 이전에 경험했던 어떤 친구 관계와도 달랐다. 그는 자신이 참여하게 된 새로운 기독교 공동체로 인해 커다란 기쁨을 누렸고, 덕분에 많은 신자들과 교제하게 되었다. 조지는 자신이 속한 20대 청년 성경공부 모임을 사랑했다. 하지만 모임 그 자체보다는, 모임 이후에 사람들과 함께 밖으로 나가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는 또한 수련회와 야외 캠프, 단기 선교 등도 사랑했다. 조지는 난생 처음으로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느꼈으며 누군가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경험했다.
그러나 조지의 문제는 가장 친한 친구 하나가 다른 주로 이사하고, 또 다른 친구는 결혼을 하면서 불거지기 시작했다. 때마침 교회에 새로 목사님이 부임하면서 미혼 청년들에 대한 투자와 관심을 좀 줄이기로 결정했다. 그 대신 교회에서의 소그룹을 새롭게 조직했는데, 조지는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나이 든 기혼 성도들과의 모임에 갇혀 버린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조지에게 교회는 더 이상 이전과 같은 곳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성경공부 모임에 나가는 것을 그만두었다. 머잖아 주일 예배도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조지는 교회에 가는 일이 다른 사람의 집에 식사 초대를 받아 가는 일과 같은 느낌을 준다고 말한다.
조지가 깨닫지 못한 사이 교회에서의 교제와 나눔, 돌봄 그리고 어떤 위치를 점하는 일 등이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마음을 몰아내고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해 버렸다. 교회는 영적인 사교 모임으로 전락했고, 그 모임이 깨지자 더 이상 교회에 나갈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다시 말해 성도 간의 교제가 자아 정체성 및 삶의 목적과 소망을 주시는 분인 그리스도를 대치해 버린 것이다. 더불어 복음은 성도 간의 교제를 이루게 만드는 기능 정도로 축소되고 말았다.
변질이 그토록 유혹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고린도후서 10장 5절에서 바울은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스스로 높아진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가장’이 거짓일지라도, 언뜻 그럴듯한 진리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를 사로잡는 거짓말은 대개 기독교 신앙의 기준을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자신에게 매우 잘 들어맞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포스트모더니즘이나 성적 타락만이 이 시대의 교회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우리가 복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에 대한 미묘하고도 사소한 거짓말들이 우리를 더욱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진리를 완전히 잊어버린 것은 아닐지라도, 성경에 나와 있는 복음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복음을 재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잘못, 곧 복음에 대한 재해석은 일순간에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교회 내의 신학적인 공개 토론장에서도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재해석은 성도의 교제와 그들의 삶 그리고 목회 사역이라는 실제적인 영역의 경미한 단계들에서 일어난다. 그리스도만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은 기독교적 사회 참여와 감정적인 체험주의, 기독교인들 사이의 교제 등으로 대치되어 버린다. 어느 누구도 복음을 의식적으로 재해석하거나 잊어버리려 하지 않는 데도, 이런 일들이 계속해서 벌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살펴본 모든 종류의 ‘∼주의’는 복음의 어느 한 부분만을 강조하면서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가 경건한 삶을 살아가야 할 뿐 아니라, 예배를 위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서로 모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특정한 시간에 어떤 특별한 방법으로 우리를 만나 주실 것이다. 복음은 우리가 선을 추구하고 진리를 사랑하며 그를 실천하는 과정을 통해서 세상에 영향을 끼쳐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슬픔 가운데 우리를 친히 만나 다독이시는 위로의 하나님이시다. 그러기에 우리 역시 성도들과의 교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만 한다.
우리가 복음을 그 여러 요소 중의 하나만으로 국한시킬 때, 어김없이 위험이 발생한다. 이럴 때엔 나의 신앙심이 날마다 그리스도의 도우심으로 살아간다는 겸손과 순종, 그분의 은혜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통해 더 이상 자극 받지 못한다. 대신, 이 간절한 바람을 이루는 도구나 과정들이 곧 목표가 되어 버린다. 예컨대 복음의 진리를 이해하고자 하는 목표는 그리스도와 더 깊은 관계를 맺음으로써 이루어지지만, 신학적 지식이 그 목표가 되면 그리스도는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의’가 그토록 매력적인 데는 또 다른(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각각의 주의는 우리가 숨길 수 없는 영적인 문제들을 자극한다. 첫째, 그것은 우리의 ‘자기 의’를 불러일으킨다. 복음이 말하는 대로 자신이 얼마나 악한 자인지를 생각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그저 자신에게 신학적 이해가 더 필요하다거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수준에 맞추기 위해 좀더 열심히 교회에 나와야겠다고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복음은 그 어떤 신학적 체계나 신앙생활도 우리가 원하는 바를 온전히 이루어 주지는 못한다고 말한다. 우리의 죄가 너무 크기에,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사역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주의’는 우리의 ‘이기심’을 자극한다. 죄인인 우리는 우주의 중심에 있기를 매우 좋아한다. 우리 자신이 모든 계획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복음은 진정으로 사는 유일한 길이 먼저 죽는 길이며, 살고자 하는 자는 결국 죽게 되리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혹시라도 복음을 자신에게 가장 매력적이고 편안해 보이는 어떤 ‘주의’에 관한 선택적 목록의 집합이라고만 생각한다면, 거기에 아무리 열정적으로 참여하고 모든 일의 중심에 설지라도 변화는 전혀 없을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주의’는 우리의 ‘상황주의’를 자극시킨다. 우리는 우리 밖에 있는 죄가 우리 안에 있는 죄보다 더 위험하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남편이 아내에 대해 매정하게 대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없고, 아내가 남편에 대해 한탄하는 것이 용인될 수 없으며, 자녀가 부모의 경제적인 실패에 대해 반항하는 것이 당연시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처럼 자기의 상태가 얼마나 절박한지를 간과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은혜에 의지하기보다 외적인 신앙 활동에 더 치중하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 속에 그리스도가 거하심으로 말미암아 복음이 생긴다고 믿으면서 삶의 변화를 위해 애쓰기보다는, 그저 세상을 변화시킨다고 생각하는 일들에 더욱 몰입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련의 주의는 계속해서 우리의 ‘독립심’을 자극한다. 우리는 죄가 얼마나 우리를 약하고 눈멀고 불안정한 상태로 만들었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날마다 자신에게 지혜와 훈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 자신이 충분히 자립적이라는 거짓 속삭임에 솔깃해진다. 그러면서도 다른 이들의 어리석음만큼은 기가 막히게 짚어낸다. 하지만 이 모든 기준에서 자신만은 예외라고 생각한다. 스스로를 도움이 필요한 연약한 사람으로 파악하기가 불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정말로 그러한 자이다. 바로 이 사실로 인해 그리스도께서 우리 삶의 유일한 해답이 되시는 것이다.
온전치 못한 시각으로 진리를 배우고 교회 활동에 참여하는 일은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왜곡된 관점을 가져다준다. 교리에 대한 지식이 그리스도인의 인격적 성숙이나 죄의 유혹을 이겨내는 일 등과 동일시 될 수 없듯, 기독교적인 문제 제기에 참여하는 일로써 자기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죄와의 싸움을 희석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자신이 죄인임을 잊어버린 한, 나는 그 수준에 함몰된 채 그리스도를 향한 날마다의 필요를 망각할 것이며, 또한 변화에 대한 하나님의 도구이자 그의 몸인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도 간 교제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제대로 인지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어느 수준에서든 그리스도가 우리의 본질이고 의미이며 목표이고 소망이자 푯대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럴지라도 우리의 ‘자기 의’가 완전히 사라지기란 어렵다. 우리는 여전히 세계의 중심이 되기를 원하며, 스스로가 영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자이기보다는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자들이라고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좀더 편한 요소들 안으로 국한시키려는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은혜의 말씀에 합당한 한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이 그 공백을 메울 수 있는가?
복음이 무엇인지를 정말로 이해하기까지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것은 참으로 믿기 힘든 일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하듯, 나는 내 죄가 사함을 받았으며(과거의 은혜)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영생을 보내리라는 점(미래의 은혜)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의 현재적 사역의 유익이 나에게 얼마나 필요한지(현재의 은혜)에 대해서는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나의 외면적인 믿음은 복음의 현재적인 능력으로 채워져야 한다.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그리스도의 약속만 받아들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죽기 전까지의 삶에 대한 그분의 약속도 받아들여야 한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오늘날 우리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시기에 현재의 은혜를 누릴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이 책은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하심으로 인해 우리 것이 된 죄 사함의 은혜에 영광을 돌리는 책이다.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영원한 세계의 소망을 지향한다. 요컨대 이 책의 우선적인 초점은 바로 현재의 문제이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성장시키고 변화시키시는가? 지난 화요일 밤 아내와 심하게 다투었던 일을 해결하시려 그리스도께서는 내게 어떤 은혜를 베푸셨는가? 절망감과 두려움에 맞서 싸우는 한 사람의 삶 속에 주님의 은혜는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 자녀 양육과 직장일로 심한 압박을 받고 있는 나를 돕기 위해 그리스도는 어떤 은혜를 베푸시는가? 탐욕이나 두려움 혹은 물질에 대한 욕심과 씨름하고 있는 나를 위해 그분이 마련하신 새로운 소망은 무엇인가? 회개와 변화가 실생활에서 일어날 때 그 모습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우리는 왜 다른 여러 가지 죄보다 유독 한 가지 영역의 죄에 대해서 그토록 고군분투하는가? 그것도 우리가 절대로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일을 하면서 갈등하고야 마는가?
이런 실제적인 의문점들을 바로 이 책에서 다루고자 한다. 우리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이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적용되도록 하는 데 있다. 이런 작업의 당위성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있을 것이다. 이미 우리는 자기 삶에 변화가 필요한 부분이 어디이며 그 변화가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는지를 분명히 이해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현재 하고 계신 일이 무엇이며, 나 자신이 어떻게 그 일부분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깨달을 수도 있다.
글을 본격적으로 써 내려가기에 앞서 한마디 첨언을 해 두려고 한다. 사실, 이 책엔 별로 새로울 것이 없다. 아무런 비밀도 없고 마술 같은 원리도 없다. 다만, 이 책은 모두가 이미 알고 있지만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거나 실생활에서 깨닫지 못한 것들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사실 나는 이 점을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우리의 목표는 어떤 방식으로든 복음의 오래되고 익숙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 이야기는 마음과 삶을 바꾸는 능력을 발휘했다. 우리가 믿는다고 말하는 신학과 날마다 우리가 씨름하는 삶 사이에는 사실 커다란 이해의 차이가 있다. 바로 이러한 차이에 다리를 놓는 것이 이 책의 목표이다.
다섯 가지 복음의 관점
다음의 다섯 가지 복음의 관점은 앞으로 이 책에서 다룰 내용들의 면면을 보여 준다.
1. 우리 죄의 본질과 심각성
일반적으로 죄의 교리는 각자가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교리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이를 가능한 한 축소시키려 한다. 신혼 초, 나의 아내 루엘라는 그녀를 사랑하는 방식에 있어 나의 부족한 점들을 부드럽게 짚어 주곤 했다. 이때 그녀는 극도로 비판적이 되거나 하지는 않았다. 내 마음의 잘못된 태도 가운데 자리 잡은 죄의 실제적 영역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루엘라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녀가 내게 분노를 터트리지 않았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그녀가 내게 나 자신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을 때, 내가 얼마나 악한 상태였는가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나는 과거를 돌아보았고 내가 얼마나 자기 의가 강했는지를 깨달으며 몸서리를 쳤다. 실로 자기 의는 가장 열정적인 자기변호의 수단이다. 스스로를 변호해야만 하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교회에 있는 95퍼센트의 여성들은 다 나랑 결혼하고 싶어 할 거야!”(퍽이나 겸손한 말이 아닌가?) 그러자 루엘라는 웃으면서 자기는 나머지 5퍼센트에 속해 있다고 대답했다!
그때 나는 그 교회의 목사였다. 나는 정기적으로 부부들을 상담하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원하시는, 사랑이 넘치는 연합에 방해가 되는 죄를 다스리도록 돕고 있었다. 다른 이들이 자기의 죄를 깨닫고 고백하도록 하는 데엔 일가견이 있었다. 하지만 정작 내 자신의 죄를 깨닫는 일이 절박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쉽게 납득하려 들지 않았다. 아마도 나는 스스로의 신학 지식과 목회 기술에 의해 눈이 가려져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그 이유가 무엇이었든 이 한 가지는 분명했다. 바로 내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어 버렸다는 사실 말이다. 나는 루엘라가 나에 대해서 그렇게 형편없이 평가하는 데 화가 났던 것이다!
이 일이 다만 나 혼자에게만 해당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넘치는 죄악성을 인정하는 일에 대한 씨름은 그리스도의 몸된 모든 교회에서 동일하게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전적 타락의 교리를 믿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죄를 다룰 때만큼은 스스로를 자기 의라는 비단 천으로 두른 채 강하게 저항하기 시작한다.
성경은 이러한 자기 의에 대해서 명확하고도 권능 있는 말씀을 통해서 강한 도전을 던지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죄의 영향력은 모든 생각과 동기와 욕구와 말과 행동에 미쳐서 이 모든 것들을 다 뒤틀어 버린다. 마음의 병이 초래하는 결과는 정말이지 참담할 뿐이다.
이를 기억하는 일은 정말이지 중요하다. 오직 복음의 슬픈 소식을 받아들일 때에만, 우리는 또한 복음의 기쁜 소식이 지니는 의미를 알아차릴 수 있다. 복음의 은혜, 재건, 회복, 용서, 긍휼, 인내, 능력, 치유, 그리고 소망은 모두 죄인들을 위한 것이다. 이 모두는 스스로에게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고 상황이 절망적임을 깨달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 자신에게 의미 있는 선물이 된다.
2. 마음의 중심적 역할
일반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대개 죄를 행동에 대한 것으로 정의 내린다. 예컨대 대부분의 기독교인 부모들의 목표는 무엇인가? 자녀들이 올바른 일을 하도록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자녀들의 행동을 바로잡고 옳은 길로 인도하기 위해 모든 종류의 관계적, 동기 유발적, 교육적 체계들을 세워 놓았다. 이러한 체계들의 가치야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이것이 자녀들의 불순종과 죄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혹시 그렇다면 죄에 대해서 그들을 무방비 상태로 놓아두는 것이나 다름없다. 언젠가 자녀들은 집을 떠날 것이고, 체계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행동에 대한 힘겨운 싸움의 이면에는 전혀 다른 싸움, 보다 근본적인 싸움이 자리한다. 그것은 바로 마음의 생각과 동기에 대한 싸움이다.
마음은 본질적이면서도 필수적인 영역이다. 성경이 속사람에 대해서 일컫는 모든 표현들(생각, 감정, 정신, 영혼, 의지, 등등)은 모두 이 마음이라는 한 단어로 축약된다. 마음은 인간의 모든 존재를 좌지우지하는 운전대와 같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들은 마음이 원하는 바에 따라 형성되고 조절된다.
성경이 분명하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원하신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소유하실 때만, 그분이 우리를 소유하신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타락한 이 세상과 우리에 대한 다른 이들의 죄에 영향 받는 것 이상으로, 가장 큰 문제는 우리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죄다. 이 때문에 복음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킴으로써 우리의 삶을 바꾸신다’로 집약하는 것이다.
지속적인 변화는 항상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온다. 이것이 곧 성경이 가장 자주 언급하는 주제 중 하나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의 심오한 의미를 놓치고 있다. 우리는 잠언 4장 23절의 깊은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3. 그리스도의 현재적인 유익들
그리스도인들이 갖는 소망은, 삶을 변화시킬 만한 실제적인 원리들이 내재된 구원에 관련된 체계를 넘어선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은 단 한 분, 곧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분은 모든 성경적 원리 이면에 존재하는 온전한 지혜이시며 우리가 따라 살아야 할 진정한 능력이 되신다. 그리스도께서 오늘도 우리 안에 거하시기에,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모든 일들을 주관하고 계시기 때문에(엡 2:22-23), 그리고 그분이 지금도 그분의 발아래 모든 원수들을 누르고 계시기 때문에(고전 15:25-28), 우리는 용기와 소망을 가지고서 살아갈 수 있다.
우리의 소망은 신학적인 지식이나 교회에서의 경험에 근거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에 대해서 감사하면서도 오직 한 가지 소망만을 붙들고 산다. 그 소망은 바로 그리스도시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바로 이 순간 이곳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얻는다. 바울의 말은 이 점을 너무나 잘 보여 준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4. 성장과 변화를 위한 하나님의 부르심
어떤 지속적인 흐름에 따라 계속 움직이기는 너무나 쉬운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부르심을 받았고 언젠가는 그분과 함께 영원히 거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까지 삶 속에서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가? 우리가 그리스도께로 온 그날부터 그분과 함께 집으로 가게 될 그날까지 하나님은 우리를 변화로 부르신다. 우리는 그분의 은혜로 변화되었고, 그분의 은혜에 따라 변화되고 있으며, 그분의 은혜에 의해 앞으로도 변화될 것이다.
주님께서 이루시는 그 변화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더 나은 결혼 생활이나 잘 교육 받은 자녀들, 직업적인 성공, 혹은 몇 가지 거슬리는 죄로부터의 자유 그 이상이다. 하나님의 목표는 우리가 실제로 그분을 닮도록 하는 데 있다. 하나님은 단지 우리가 지옥의 불구덩이를 피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하시진 않는다. (물론 그리스도를 통해 지옥을 피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그분의 목표는 우리가 죄의 종노릇에서 벗어나고 스스로에 의한 얽매임에서도 자유로워지며 순간순간의 우상 숭배도 버림으로써 진실로 그분의 형상을 입게 되는 것이다!
베드로는 이러한 변화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벧후 1:4).
5. 회개하는 믿음의 삶의 방식
하나님은 그분의 은혜로 우리에게 축복을 주셨다. 그분의 함께하심으로 우리에게 재능을 주셨고, 그분의 능력으로 우리를 강하게 하셨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를 그분의 영원한 사랑의 대상으로 삼아 주셨다. 우리가 그분께 속해 있기에 우리는 그분의 계획을 위해 살아간다. 그러므로 변화가 그분의 계획이라면, 그 후에 이어지는 회개와 믿음은 부르심에 의한 삶의 방식이다.
은퇴가 가까울 무렵 마이클 조던은 유명 선수가 되기 전부터 항상 그랬듯 경기 전 연습을 위해 왜 그리도 일찍 오는지에 대해 질문을 받았다. 이미 그는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농구 선수로 불리던 중이었다. 하지만 조던은 자신의 골 성공률이 그저 50퍼센트를 갓 넘길 뿐이라고 대답했다. 이 말은 곧 선수 생활 동안 그가 성공한 만큼이나 실패도 경험했음을 뜻했다. 그는 자신에게 성장할 여지가 있는 한 연습을 지속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항상 고백해야 할 새로운 죄가 있고 물리쳐야 할 새로운 대적들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변화에 대한 하나님의 사역을 아예 삶의 한 방식으로 삼음으로써 이를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할 수 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딛 2:11-13).
찬양과 경배
이 책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설명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여기에 있는 모든 문장들은 우리 주님과 그분이 날마다 베푸시는 은혜에 대한 찬양이다. 우리와 더불어 그 은혜를 찬양하기를 청한다. 그 은혜는 단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심에 관한 것일 뿐 아니라 우리 마음의 가장 은밀하고 어두운 부분에서부터 가장 사소한 행동과 의미 없이 내뱉는 모든 말들까지 모두 변화시켜 주시는 은혜이다.
지금 어떤 문제로 씨름을 하고 있든지 간에, 자기 자신을 얼마나 성공적이거나 얼마나 몰락했다고 평가하든지 간에, 믿음 안에서 얼마나 성숙했거나 얼마나 어린지 간에, 남자인지 여자인지 소년인지 소녀인지 간에, 당신이 그리스도의 자녀라면 바로 당신에게 소망이 있다! 그러한 까닭이 당신 자신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당신이 알고 있는 방법에 근거한 것도 아니다. 당신의 소망은 오직 그리스도시다! 그분이 당신 속에 살아 계시기에 날마다 하나님께 감사 드려야 할 이유를 가지게 되었다. 더 이상 당신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라 당신 속에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는 것이다! 바로 이 말이 의미하는 바를 통해 당신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새로운 삶의 방식에 초대된 것을 환영한다.
제 2장
위조된 거짓 희망
변화의 필요성보다 더 분명한 것은 없다. 반면 변화를 위해서 필요한 사항들, 그 변화가 일어나는 방식들보다 더 분명치 않은 것도 없다. 1장에서는 교회 안에 자리한 문화와 복음 사이의 차이점을 짚어보았다. 이 장에서는 좀더 광범위하게, 문화적 영향력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변화의 다른 길을 모색하고자 성경 밖으로 나가게 하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일상의 시련
크레이그는 30대의 독신 남성이다. 그가 열 살 때 아버지가 가출했기 때문에 그는 어머니와 할아버지,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 다섯 번 정도 이사를 했던 경험 때문에 크레이그는 늘상 “새로 이사 온 아이”로 지내야 했다. 그러다 20대에 줄리를 만났고,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관심을 느끼고는 이내 동거를 시작했다. 하지만 2년 후, 줄리와의 관계는 깨어지고 말았다. 그 후로 6년간 크레이그는 줄리가 자신에게 돌아오기만을 바라며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크레이그는 자라는 동안 성경을 배우고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자신을 신자라고 생각하지만, 삶에 너무 기운이 빠질 때면 성경 말씀과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