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방법론] '먼 눈을 뜨기 : 자료수집시의 다른 관점' 아티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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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눈을 뜨기 : 자료수집시의 다른 관점

※ 모든 blindness는 통일성을 위해 '눈멂'으로 번역했습니다.

Celia는 “관계성에 대해 도움을 얻기 위해” 상담을 받으러 왔다. 그녀는 자신을 “어느 곳에서도 거절당하는 자”라고 불렀고, “믿을만한 친구” 단 한 명도 찾을 수 없는 자신의 무능에 대해 눈물 흘리며 설명했다. Celia는 애처롭게 확실히 복부에 펀치를 맞을 만큼 “자신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다”라고 주장했음에도 하나님은 그녀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나는 Celia에게 동정심을 가졌다. 그러나 또한 그녀가 자신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다. 거절(rejeCeliation)은 그녀의 삶에 있어서 주제였기 때문에 나는 그녀가 그 문제를 일으킬만한 행동을 했는가에 대해 우리가 알아봐야만 한다고 제안했다. Celia는 즉시 날카로워졌고 방어적이 되었다. 상담자로서, 그 다음에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나는 Celia에 대해서 좀더 아는 것이 필요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하게, Celia는 자신에 관해 좀 더 아는 것이 필요했다. 통찰이 필요한 개인적 무분별(blindness)의 벽들이 있거나, Celia가 결코 진정한 피상담자가 되지 않으려는 의도가 있었다. Celia는 상처 입었고, 좌절하였고, 기진맥진해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개인적 무분별 때문에 그녀는 아직 탐구자(seeker)가 되지 못했다.
타락의 비극적 영향 중 하나는 마음의 개인적 무분별이다.-그것은 일반적이다. 그것이 성경적 상담을 어렵게 만드는 것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빠른 속도로 자료수집(data-gathering)의 과정을 고쳐놓는다.
죄는 거짓되고 타락한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의 문제점에 대해 눈멀어 있기 때문에 자료수집은 항상 두 목표를 추구해야 한다. 첫째, 그 과정은 현명한 성경적 상담을 제공하기 위해 상담자에게 필요한 정보를 줘야만 한다. 그러나 더욱 근본적인 목적은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멀어 있던 눈을 뜨게 하기 위한 메시야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먼 눈을 뜨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메시야적 사역의 중심이다. 메시야의 오심을 기대하며, 이사야는 말한다.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사 35:5) 하나님께서는 더 큰 약속을 하신다. “내가 소경을 그들의 알지 못하는 길로 이끌며 그들의 알지 못하는 첩경으로 인도하며 흑암으로 그 앞에 광명이 되게 하며 굽은 데를 곧게 할 것이라 내가 이 일을 행하여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리니”(사 42;16)
메시야는 눈먼 죄인의 눈을 여시며 그들을 보게 하시는 분이시다. 이사야는 그 죄인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러므로 공평이 우리에게서 멀고 의가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즉 우리가 빛을 바라나 어두움 뿐이요 밝은 것을 바라나 캄캄한 가운데 행하므로 우리가 소경같이 담을 더듬으며 눈 없는 자같이 두루 더듬으며 낮에도 황혼 때같이 넘어지니(사59:9,10a)

산상수훈에서 그리스도는 진리의 빛을 죄악의 어두움으로 비추는 그의 메시야적 사역의 일부분을 우리에게 위임하신다. 이것이 정확히 상담에 있어서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목표는, 복음이 적용될 수 있도록, 관계성과 상황 내에 존재하는 어둠 뿐 아니라 마음의 어둠을 드러내는 것이다.
여러 가지 점에서 우리의 피상담자 모두는 “눈이 없는 사람들처럼 그들이 느끼는 방식을 따라서...그룹을 짓는다.” 우리의 자료수집은 이러한 욕구를 중대하게 여길 필요가 있다. 나는 피상담자가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는 것을 돕기를 원한다. 나는 피상담자가 전혀 질문해보지도 않았던 것을 질문할 것이고, 피상담자의 입장에서 알려고 하지도 않았던 것들을 탁할 것이다. 나의 질문들은 사람과 그들의 문제에 관해 성경의 성찰에서부터 흘러나올 것이다. 여기서 내가 어둠 속에서 그룹짓는 것을 끝내는 것을 추구할 때 나는 메시야를 상상한다. 나는 단순하게 나의 결론들을 진술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사랑과 깊음, 마음의 생각들과 동기들로서, 먼 눈들을 도와주고 있다.
이것이 자료수집의 기능인 “눈뜨게 함”에 초점을 맞추는 첫 번째 artiCeliale이다. 우리는 모든 죄인들이 경험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도구들로서 우리의 임무로 여겨야만 하는 무분별의 본질에 대해 연구할 것이다.

영적 무분별의 가면
육적 눈멂과 영적 눈멂 사이의 다른 점은 후자가 자주 눈에 띠지 않는 반면 전자는 현저하게 눈에 보인다는 것이다. 육적으로 눈먼 사람은 즉시 그의 존재 안에 자리 잡은 상태와 한정에 직면하게 된다. 영적으로 눈 먼 사람은 종종 그의 눈멂을 인식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가 훌륭한 비젼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한다. 근본적인 부분에서 영적인 눈멂은 당신이 당신의 눈멂에 대해 눈멀어 있다는 것이다.
영적 눈멂은 모든 죄인, 모든 피상담자의 상태이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그들이 자신들, 하나님, 다른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상황들이 손상되었다는 것을 인식하는 자는 거의 없다. 그들은 자신이 실은 어리석음에도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로마서 1장에서 묘사된 사람들과 같다. 그들은 그들의 마음의 생각이 어리석음과 무익에 의해 실제로 특성화되었을 때 그들이 옳게 생각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영적 눈멂은 거짓된 것이다. 요한이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 3:17)라고 쓴 것처럼. 영적 눈멂은 그것이 다른 것인 양 가장하기 때문에 거짓된 것이다. 만일 우리가 먼 눈을 뜨게 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려고 한다면, 우리는 영적인 눈멂의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한다.

자신에 대해 정확한 분별이라는 가면
Celia는 그녀가 자기 자신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녀의 삶에서 벌어진 것들에 대한 어느 정도의 책임이 그녀에게 있다는 제안에 대해 공격받았다. 그것은 단지 사람이 정확한 자기 자신을 보게될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을 들여다보는 자와 같은 것이다.(약 1:22-25)
대부분의 우리 피상담자들은 그들이 봐 온 “거울들”이 축제의 거울들 같은 것이었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해 왜곡된 시각을 가지고 있다. 그것들은 실제의 당신이지만 왜곡된 상을 반사한다. 축제의 거울은 당신의 외형을 작은 그루터기 같은 다리를 가진 극단적으로 긴 토르소처럼 만든다. 또는 그것은 당신을 거대한 머리에 작은 몸통을 가진 것처럼 만든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보고 있지만 당신 실제의 모습은 아니다.
같은 일이 우리의 피상담자에게 있다. 그들의 자아 인식은 다른 사람의 의견들, 또는 성공에 대한 문화적 관점, 또는 대중 심리학, 또는 과거의 경험(목록은 계속될 수 있다)의 축제 거울을 바라보는 것에 의해 발전되어진다. 피상담자들은 그 자신이 왜곡된 자아인식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은 종교적 사고의 백과사전이나 헌신의 도구로 더욱 사용한다. 심지어 설교말씀을 들을 때에도, 그는 자신이 처한 위치에 대한 계시마저 놓칠 것이다. 그는 상세히 해석되는 이야기와 원리들을 듣지만 그 말씀 안에서 반영된 자신을 보지 못한다.

악한 것에 대항한다는 가면
Celia는 다른 사람에 의한 지속적인 “남용”의 이야기들을 -총천연 칼라로 자세히-설명할 수 있었다. Celia가 그녀의 삶의 이야기들에 관한 비디오를 실행시키려고 했을 때, 그녀는 그것을 실행하지 않았다. 지배적인 초점은 그녀를 향한 다른 사람들의 행동이었다.
어떻게 영적 눈멂이 악한 것에 대항하는 감각인 양 가장하는 데 마태복음 7장의 “들보와 티끌”의 비유보다 더 강력한 비유는 없다. 자기 자신에게는 들보가 돌출되어 있는 채로 돌아다니면서 글자 그대로 다른 사람의 눈 속에 있는 한 조각의 먼지로 끙끙대고 있는 사람을 상상해 보라! 그는 그가 죄인된 존재라는 것보다는 악한 것에 대항하는 감각에 더욱 사로잡혀 있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요구되는 변화는 그 자신의 외적인 변화이다.

시련과 시험의 가면
Celia는 그녀자신과 그녀의 죄에 대해 정확한 의식을 가지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선택과 행동의 자연스런 결과를 시련이라 부르고자 하였다. 바울은 말한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7,8)
우리의 대부분의 피상담자는 이런 수확에 관한 정신성(mentality)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의 씨뿌림의 결과로서라기 보다는 그들이 받지 않아야 할 고통스런 시련으로서 수확해온 것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또한, 죄인들은 “창조주에 대한 경배와 섬김을 피조물에 대한 경배와 섬김으로 바꾸는”(롬 1:25)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창조주가 그 상황에서 행하고 계시는 좋은 일들을 놓치는 경향이 있다. 대신에, 초점이 “피조물”의 상실에 맞춰져 있다. 시련은 나에게 있어서 이해관계에 달려 있기 때문에 시련인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일 아침의 만나의 제공에 의해 설명되는 언약적 사랑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애굽에서의 메뉴의 맛과의 비교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천국에서 떨어진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는 시련이 되었다!
그들의 눈멂 안에서 피상담자들은 자신들의 행동의 결과를 “시련들”(trials)이라 부를 것이며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선한 일은 “시험들”(testings)이라 부를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구속적으로 좋게 행할 목적으로 시련들을 보내신 것에 눈 멀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존재요 환경을 통하여 성자의 형상에 합치된 존재로 자신을 보는 것 대신에, 그들은 어려움들에 홀로 내버려진 존재로 자신들을 본다. 그들에게 있어서 인생은 공정하지 않다. 그들에게 고통은 구속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지 않는다는 표시이다.

필요의 가면
Celia는 그 자신을 곤궁하게 보았다. 그녀는 그녀 자신을 인생의 대부분을 탕진해버린 사람으로 보았다. 그녀는 종종 말했다. “만일 나에게 ______가 있었다면, 나는 ______할 수 있었을텐데.” 필요에 대한 그녀의 이해는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문화만큼이나 희미했다. 그러나 이 기간에도 그녀의 삶에 대한 그녀의 해석은 천국에 의지하고 있었다. 근본적으로 그녀의 인생에 있어서 문제는 그녀의 필요의 직접적인 결과였다고 그녀는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인생의 해석에 있어서 “만일 오직...”이라는 고전적 문구를 사용했다.
Celia가 보지 못한 것은 그녀의 욕구가 죄의 비극적인 영향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에 대한 경배자에서 “우리의 죄악된 본성의 갈망을 만족시키고 그것의 욕구와 생각들을 좇는”(엡 2:3)자들로 변하게 하였다. 그녀의 곤궁은 그녀가 놓치고 있었던 것에 관해서 보다는 그녀 자체에 관한 것을 더욱 드러낸다. 필요에 대한 Celia의 의식은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 배신을 드러내었던 것보다 훨씬 많이 그녀 마음속의 강한 욕망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그녀가 실제로 필요했던 것은 그녀가 결코 갈망하지 않았던 것이었다-하나님. 만일 당신이 사람에게 중요한 것을 이해하기를 진정 원한다면 그가 필요로 느끼는 것을 알아내라. 가치(values)는 욕망(desires)이 되고, 욕망은 요구(demands)가 되고, 그리고 요구는 “필요”(needs) 때문에 상담 받는 것으로 표현되어진다.
Celia는 그녀가 자신의 세계의 중심에 잇는 태양이라는 사실과 인생의 전부는 그것이 그녀에게 제공하였던 것에 대한 관점으로부터 보여졌다는 것에 눈멀어 있었다. 그녀는 이 “필요들"의 시각을 그녀가 들어가 있는 모든 공간 안으로 운반하였다는 사실에 눈멀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모든 상황과 관계를 형성하였다. 그녀는 침묵의 요구로 짐을 진 채 상황 속으로 들어왔고 그녀나 그녀의 필요를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에 대한 분노의 비판으로 응답했다. 사실 그녀 자신의 자기 중심적인 깊이를 설명할 때, 그녀는 그녀의 욕구가 그녀 주변의 모든 이기심과 마지못해 하는 것을 증명했다.

지혜로운 상담의 가면
우리의 모든 피상담자들과 같이 Celia는 그녀 주변에 많은 목소리를 내었다. 욥과 같이 그녀가 받았던 많은 상담은 도움이 못되었고; 그것이 성경적이지 않았기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Celia는, 단지 한 계절만에 그녀의 상담자의 말들을 통해 평안을 발견했다.
그녀가 상담을 위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Celia는 종종 그녀의 주변 사람들로부터 조금씩 들었던 “지혜”들에 대해 반복하였다. 그러나 Celia는 그녀의 삶의 관점에 대해 동의하고 그녀가 내린 결정을 지원해주는 사람들만을 인용했다. 그녀는 그녀에 관해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인용하지 않았다.
영적 눈멂에 대한 다른 성경 구절은 “어리석음”(fools)이다. Celia의 지혜로운 상담은 실은 어리석은 것들이었다. 그녀가 그녀의 삶의 진정한 문제에 눈멀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단지 그녀에게 지혜만을 나타낼 뿐이다. 잠언은 어리석음이 “지혜에 대해 욕망이 없는 것”(잠 17:16)이라고 말한다. Celia는 실제로 그녀의 관점에 대한 지원을 추구했을 때, 그녀는 자신이 지혜로운 상담을 추구한다고 생각했다.

개인적 성찰의 가면
모든 인류와 같이 Celia는 항상 그녀의 삶으로부터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녀는 그것이 그녀가 빠져드는 것과 그것에 대해서 해야 할 일을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범주 안으로 조직화되기를 바란다. 그녀는 어떤 것들을 분석하는데 그녀의 많은 시간을 허비했고 그것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탐색은 개방적이지 않았다 : 만일 내가 Celia의 해석들을 질문하기 시작한다면, 이내 그 방안에는 긴장이 감돌게 될 것이다.
영적으로 눈먼 것은 심지어 지혜로 가장할 수 있다! 지적으로 밝아지고 행동적으로 분석적이 되는 것은 당신이 지혜로운 것에 필수적은 아니다. 진정한 지식은 겸손, 나 스스로는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전혀 가질 수 없다는 인식으로 시작한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만 발견되어지는 진리에 대한 탐구자가 될 필요가 있다. 진정한 성찰은 분석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경에 의한 것이다. 시편기자의 말을 들어보라
주의 계명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이 나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증거를 묵상하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승하며
주의 법도를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니이다
                                                    (시 119:98-100)

Celia는 그녀의 통찰에 대한 감각이 그것이 그녀의 상황에 행하는 것보다 그녀의 마음에 관해 더욱 드러난다는 사실에 눈멀었다. 그녀의 통찰은 그녀 주위를 맴돌고 있는 것에 대해 그녀의 왜곡된 해석의 욕망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것은 객관적인 분석보다 더 욕망을 이끌어가는 관점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신앙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우상숭배의 표현이다. 그러나 눈멂은 종종 통찰의 가면을 쓰고 있기 때문에 Celia에게 그런 면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가치 인식의 가면
Celia는 그녀가 무엇이 중요한지를 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그녀에 대해 들은 것보다 더 많이, 내가 확신했던 것보다 더 많이 그녀를 움직이는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여기서 또다시 Celia는 눈멀었다. 그녀는 그녀의 상황을 평가하고 그녀의 가치에 따라 일관되게 행동해 왔다. 그러나 그녀의 문제는 계속되었다. 여기에 그녀의 좌절과 혼란이 있다.
Celia에게 동기를 유발하는 모든 “보물들”은 인간관계와 관계있다. 그녀는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친구관계, 존경, 수락, 그리고 사랑을 보았고 그녀가 회피하고자 했던 모든 것들은 그녀가 결과적으로 말했던 거절, 외로움, 그리고 낮은 자아상이었다. 그러나 Celia는 더욱 사람들과 그들의 반응들에 대해서 연구했고, 더욱 그들로 인해 기뻐하려고 했고, 더욱 화가 났다. 그녀는 침묵과 요구의 긴 목록을 가지고 그녀의 관계성 속으로 들어갔으나 그녀는 사람들이 그들에게 적합하게 사는 것을 실패했을 때, 어떻게 판단하고 용서하지 말아야 하는 지 알지 못했다. 마태복음 6장은 나의 보물이 무엇이든 간에 나의 마음을 지배할 것이며, 나의 마음을 지배하는 것은 나의 행동을 지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른 말로 하면, 나는 나에게 가치 있는 것들을 얻기 위해,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즐기기 위해 살 것이다.
Celia의 문제는 그녀의 가치들이다. 그녀는 그녀의 정체성을 사람들에게 맡겨버렸다. 그분 자신에게 그녀를 부르시는 하나님은 그 밖의 다른 일에 관하여 일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녀는 계속해서 좌절과 실패를 만난다. 그분의 초점은 관계성이 많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자의 형상으로 위로를 얻고자 하는 Celia에게 있다.
피상담자들은 옳은 것과 그른 것들의 강한 의식에 가리워졌기 때문에 종종 그들의 눈멂을 인식하지 못한다. 수년동안 그의 폭력적인 대응으로 그의 가족들에게 상처를 입힌 화내는 사람은 오직 자신이 그들에게서 분리됨으로 인해 상실감을 느꼈다고 본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의 자녀들을 보는 권리이고 그가 부양하는 집에서 사는 것이다. 그는 상담할 때 계속해서 이야기한다. “이것은 옳지 않아요, 그것은 정말 옳지 않아요” 그러나 그는 가족들이 적절하게 회복될 수 있도록 그에게 요구되어지는 변화에 대해 눈멀어 있다.
아내의 초점은 그녀의 남편의 냉대와 거리감이다. 그녀는 상담자가 남편이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도록 돌려놓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가 떠나가도록 만든 비판의 지속적인 물결에 눈멀었다. 상담자가 변화가 요구되는 사람으로 그녀에게 초점을 맞추기 시작할 때, 그녀는 분노한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그녀 안에서 영원토록 역사하기를 원하는 것들에 대해 완전히 눈멀었다.

신학적 지식의 가면
Celia는 성경과 신앙의 교리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사용하고자 하는 성경-신학적 용어들 중 그녀에게 낯선 단어는 거의 없었다.
불행하게도, Celia의 신학적 지식은 그녀에게 네 가지 일을 행하였다. 첫째, 그것은 그녀의 삶의 해석에 있어서 확신의 수준을 양산하였다. 그녀는 그녀의 생각들과 행동들이 그녀의 믿음으로부터 흘러나온다고 가정하였다. 둘째, 그것은 성숙에 대한 판단을 만들어냈다. Celia는 자신을 성숙한 신앙인이라 생각했고 누군가가 기본적으로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요구하면 공격적이 되었다. 세 번째, 상담할 때 그녀의 지식은 Celia에게 “나는 이미 알고 있고 나는 이미 노력하고 있어”하는 태도를 주었다. 넷째, 그것은 그녀 안에 그녀의 문제는 그녀의 실수가 아니라는 생각을 만들어냈다. 그녀는 “무엇이 올바를 것이고 무엇이 최선의 행동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려움의 원인은 그녀의 바깥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지식은 개인적 책임과 죄의 판결을 가리웠다.
그 사실은 Celia가 그녀의 신학을 그녀의 갈등의 의식을 만드는 매일을 삶에 적용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지혜가 없는 여자였고,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눈멀었다. 영적인 성숙은 매일의 삶에서 마음속에 있는 진리에 대해 아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연습한 결과이다.(히 5:11-14) 그러나 Celia는 그녀의 기독교 상담자의 모두에게서 잘못된 것이 그녀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계속해서 말한다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신학적으로 충분한 이 생각을 결부시키는 것은 잘못된 질문들에 대한 Celia의 경향이었다. Celia의 질문들은 그녀의 상황에 대한 더 깊은 이해, 하나님 안에서의 더 충분한 소망, 또는 변화를 위한 실제적 목록으로 그녀를 이끌지 못했다. 계속되는 아티클(artiCeliale)에서 우리가 더 충분히 고려할 원리가 여기 있다. 그것은 이것이다 : 통찰력있는 사람은 그들이 바른 대답을 갖고 있어서가 아니라 바른 질문을 하기 때문에 통찰력있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바른 질문을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결코 올바른 대답을 할 수 없다. Celia는 소망의 상실과 우울로 인한 갈등으로 이끌면서 분석적인 막다른 길에서 자신을 계속해서 발견했다.
여기에 Celia의 잘못된 질문들의 예시가 있다. 그녀는 말할 것이다. “나는 기도하고 기도했어요. 나는 성경을 읽었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돕지 않고 있어요. 그분은 나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고 계세요.” 그리고 나서 그녀는 질문할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나의 삶에서 역사하지 않으실까요?” 이것이 좋은 방향으로 이끌 수 없는 비성경적인 가정에 근거를 둔 잘못된 질문이다.
Celia의 질문은 그녀를 두 대답으로 이끈다. 때로 그녀는 하나님께서 단지 그녀를 사랑하시지 않기 때문에 그분은 행동하지 않으신다고 결론 지을 것이다. 그분은 그녀의 보잘 것 없는 삶에 대한 근심보다 더 좋은 일을 행하셨다. 다른 경우에 그녀가 그런 불쌍한 죄인이고 그분이 역사하지 않는 것이 그녀의 부정에 대한 응징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그녀의 삶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지 않으셨다고 결론지었을 것이다. 잘못된 질문들에 대한 잘못된 대답은 그릇된 열매를 산출할 것이다. 욥의 악명높은 상담자들같이, Celia는 그녀의 신학으로부터 상황에까지 그녀의 삶의 성경적 해석을 지속적으로 이끌어줄 다리를 건설하지 못했다.
성경적으로 Celia에게 질문하기 위해, 사람들은 다음의 성경적 가정으로 시작해야만 한다: 하나님은 영원토록 나의 삶에서 역사하신다(시 46, 롬 8:18-39). 왜 그분이 역사하고 계시지 않는가라고 질문하는 것은 잘못 가정한 것이다. 바른 결론은 그릇된 가정에서 말미암지 못한다. 질문하는 더 좋은 방식은 “하나님께서는 나의 삶 속에서 구속적으로 역사하신다. 그런데 그분이 행하시는 것은 무엇이며 왜 나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가?”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질문은 더 위대한 통찰, 성경적 변화, 그리고 좋은 열매의 수확으로 이끈다.

개인적 거룩의 가면
비록 Celia가 거룩한 성경적 언어로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엄밀하게 그녀가 가졌다고 생각하였다. 그녀는 바른 것들을 원했고 바른 것들을 행했고 일들이 그렇게 잘못되는 이유를 계산하지 않았다고 믿었다. 그녀의 개인적 거룩 속에 있던 그녀의 믿음은 “너의 주 내가 거룩한 것처럼 거룩하라”라는 하나님의 부르심과는 관계없는 율법적 자기 의로움에 의존했다.
Celia는 그녀가 전통적인 바리새인이라는 사실에 눈멀었다. 바리새인들과 같이 그녀는 하나님의 율법을 행할 수 있는 인간의 표준으로 낮추어버렸다. Celia가 강조했던 것들은 그리스도에 의지하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그것들은 마음속의 요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행동적인 표준들이었다. Celia는 천국과 지옥에 관계 있는 복음을 보았다. 그녀가 달성한 “의”는 인간적으로 도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그녀의 삶 속에서 현존하는 구속적 능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느꼈다.
Celia는 계속해서 더 작은 것을 강조했고 그것들을 이루었다고 자만했다. 그러나 그녀는 율법의 더 무거운 문제들은 간과했다. 그녀는 그녀의 멋진 집에서, 정확함에서, 모든 친구들의 생일을 기억하는데서, 그녀가 읽은 기독교서적에서, 재정적 경계심에서, 그리고 자원봉사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질투가 많았고, 분노했고, 냉혹했고, 복수심이 강했고, 그리고 자비가 없었다.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이라고 말씀하셨다. 바리새인들에게 그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의는 충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추하고, 교만하고, 인간적인 자기-의였다. 이런 종류의 의는 항상 인간적으로 행할 수 있는 것을 강조하고 풍성한 그리스도의 은혜의 강물을 통해서만 성취할 수 있는 것은 무시한다.
아마 이것이 영적 눈멂의 중심점일 것이다. 그것의 핵심에서 영적으로 눈멀었다는 것은 당신이 의롭지도 않으면서도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을 발산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내가 만일 의롭다면(내 생각에), 나는 그리스도가 필요없고 변화할 필요도 없다. 이것이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성전안의 두 남자의 이야기에서 명백하게 설명되어진다. 바리새인은 성전안에 있었고 그는 하나님이 필요없다고 하나님께 말했다. 그는 죄인과는 거리를 두고 주님 앞에서 그의“의로운 행위”들을 열거하면서 자신이 훌륭하다는 것을 설명하고자 거기 있었다.
비숫하게, Celia도 상담받으러 와서는 그녀가 훌륭하다는 것에 내가 동의하기를 바라면서 그녀의 좋은 행위들을 열거하곤 했다. 마음의 중요한 주제들을 놓치고 행할 수 있는 행동만을 강조한 채, 그녀는 자신을 깨끗한 존재로 보았다. 그러나 내면에는 “송장의 뼈”가 있었다.

회개의 가면
많은 피상담들과 같이 Celia도 “상담받는다는 것”이 회개의 행위라 생각했다. 이것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우리가 상담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행하는 말들을 고백으로 보고 상담을 받고 있는 것을 회개의 과정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Celia에게 있어서 상담은 참회 이상의 것이었다. 그녀는 자기 속죄의 사역에 그녀 스스로가 참여하고 있다는 것에 눈멀었다. 나는 이것은 “Protestant absolute"라고 부른다. 피상담자는 참회하고, 문제점을 연구하고, 자신과 상황에 대해 진행중인 토론에 참여하고, 매주 속죄되어지고 깨끗해지고 정당함을 느낀 채 상담의 시간을 떠나간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일들은 본질적인 마음이나 행동의 변화가 없는 행위들일 뿐이다. 피상담자들은 회개할 존재로 자신들을 본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상담이 문제에 관하여 하나님의 계획하시는 사역을 피하려는 길이 될 때가 있다.
Celia의 삶은 회개의 열매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첫째, 그녀는 스스로 시작하는 자가 되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그의 셀 수도 없는 경우에 대해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죄악되고 파괴적인 행동을 계속했다. 그녀는 혼란에 빠졌을 때, 마지못해 잘못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고백은 응답의 새로운 방식으로 귀착되는 일은 드물다. 둘째, Celia는 방어적 태도를 유지했다. 그녀는 내가 하는 그녀에 관한 성경적 평가를 받으며 계속해서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그녀를 믿지 못한다고, 또는 다른 면에 관해 말한다고 나를 비난할 것이다. 셋째, Celia는 가르칠만한 정신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그녀가 성경으로부터 가르침 받는 그녀의 필요를 인정하는 것과 그것을 그녀의 삶에 적용하는 것을 배우는 것은 어려웠다. 그녀는 나의 신학, 성경에 대한 나의 해석, 또는 나의 그녀의 삶에 대한 성경적 원리의 적용을 검토할 것이다. 넷째, Celia는 그녀의 상담 숙제를 그 과제의 목표였던 열중, 성찰이나 변화 없이 마지못해 끝내었다.
Celia는 그것에 관해 매우 적은 것을 보았다. 그녀는 상담할 때에 그녀의 율법적 태도, 개인적 이슈를 의논하는 그녀의 욕구, 그리고 주어진 성경 본문의 연구에 의해 눈멀었다. 불행하게도, 그러한 모든 것들(그녀가 회개라 생각했던)은 Celia의 마음을 지배하는 고통과 자기 의를 만들어냈다.
성경에서 회개는 급격한 마음의 변화로 인한 급격한 삶의 방식의 변화로 제시된다. 마음이 다른 방향으로 변화하여 움직일 때, 삶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에 못 미치는 것은 어느 것이든 간단히 말해 회개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속죄를 목표로 하여 상담하러 온다. 그들은 자신들이 행하는 것들을 지지해 주기를 원한다. 그들은 자신들에 대해 좋게 느끼기를 원한다. 그리고 상담의 과정 이후에 더 좋게 느꼈다고 여긴다. 그래서 그들은 계속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급격한 부르심에 대해 헌신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시편 139편의 시인과 함께 기도하고 있지 않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시 139:23,24)

“상담에 임하는 것”은 Celia의 고집과 회개하지 않는 마음의 눈멂을 유지시켰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그녀가 고백할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을 고백한 존재로 생각했다. “왜 내가 계속 상담해야 하지요?”라고 그녀는 말할 것이다. 영적 눈멂이 심지어 회개의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 그것은 아마 쇼킹한 일일 것이다!
영적 눈멂이 모든 죄인과 그의 삶의 시각에 심각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을 아주 중요하다. 우리가 수집한 데이터는 피상담자가 볼 필요에 의해 동기화되는 것이 필요하다. 더 나아가, 우리는 영적으로 눈먼 사람들은 그들이 눈멂이라는 많은 가면들을 쓰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눈멀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러한 가면들을 인식하고 피상담자가 진정한 자기 실체로 눈을 뜨게 하는 자료수집의 과정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먼 눈을 뜨게 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것과, 자료수집의 필요한 기능으로서 이것을 보기로 헌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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