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교회는 성경을 가르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고 성경을 가르치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때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자료들을 간절히 찾고 있습니다. 홀맨 구약주석은 쉽게 배울 수 있는 방식을 통해 영적인 갈급함을 채울 수 있는 도구들을 교회에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각 교회에서는 간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새로운 영적인 원동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배울 때에는 배운 것으로 인해 말씀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더 많은 성경적인 지식과 구체적인 영적인 원리들을 발견하며 관련된 실제적인 적용과 그에 따른 역동적인 삶이 나타나야 합니다. 홀맨 구약 주석의 독특한 구성은 모든 구약성경에 대해서 이와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게 만드는 체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도입질문들은 구체적인 고민을 하게 하면서 개인이나 그룹단위로 이루어지는 성경공부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더욱 인도되도록 하는 개론적인 설명과 토론을 장려합니다. 한절 한절 살펴보는 주석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현재의 삶 속에서 그에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준비시킨다는 목적으로 각 구절을 해석합니다. 하나의 결론은 토론을 통해 각 구절에서 깨닫게 된 주제들 속에서 연결시키며 삶에 대한 적용을 제시합니다. ‘삶의 적용’항목은 이해하기 쉬운 추가적인 자료를 제시해줍니다. ‘깊은 연구’는 독자들에게 단어와 구절 그리고 본문배경에 대한 더 구체적인 이해를 하게 할 것이며 이러한 내용을 통해 성경본문의 의미를 더욱 밝히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심층연구’는 성경공부 그룹 내에서 더 깊은 연구를 확장시켜주는 도구입니다. 그리고 나서 마지막으로 ‘기도’가 주어집니다. 성경교사들과 목회자들이 각 단원들을 배우거나 설교를 할 때에는 티칭 가이드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부디 바라기는 이러한 새로운 교재를 통해서 지역 교회의 성경연구가 그룹성경공부를 더욱 풍성하게 하고 개인적인 성경연구를 의미있게 만들어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진심으로 그분의 말씀의 사람들이 되고 우리에게 원하시는 대로의 삶을 살아나가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책을 완성하기까지 학문적인 연구를 도와주었던 존 베치틀 박사에게
이 책을 드립니다.
홀맨 주약 주석 집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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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맨 신약 주석 집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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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맨 구약 주석 편집자 그룹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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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서문
저자와 연대
잠언은 일반적으로 몇 가지 부분을 제외하고 나면 거의 전체의 내용을 솔로몬이 지었다고 생각되고 있다. 제외되는 몇 가지 부분은 잠언 22장 17절부터 24장 34절까지의 지혜자의 말과 30장, 그리고 31장의 내용이다. 그가 지혜자의 말들을 모아서 편집하였을 수도 있겠지만 그가 그 부분을 직접 쓴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 대체적으로 공감되고 있다. 우리는 사실 그것들을 누가 지어냈는지 알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잠언 30장부터 31장의 저자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전혀 없다. 그들은 아굴과 르무엘이라고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그들이 어떠한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다. 어떤 학자들은 르무엘은 단지 솔로몬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닐까라고 생각해 보기도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학자들도 있다. 어떤 학자들은 잠언 31장에는 아라비아어의 영향을 받은 부분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르무엘이 아라비아에서 온 사람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솔로몬은 기원전 971년부터 931년까지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마음이 돌아서기 이전인(왕상 11:1-11) 자신의 초기 통치기간 동안에 잠언을 썼던 것으로 보여진다. 왜냐하면 이 책은 하나님께 완전히 헌신된 마음을 보여주기 있기 때문이다. ‘지혜있는 자의 말씀’은 이보다 더 이전에 구체적이지 않은 시기에 쓰여졌던 것으로 보인다. 잠언의 내용은 히스기야의 시대 이전이나 혹은 잠언 25장 1절에서 ‘이것도 솔로몬의 잠언이요 유다왕 히스기야의 신하들이 편집한 것이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히스기야 시대 이후에 완전한 형태로 구성된 것이다. 히스기야는 기원전 약 715년부터 686년까지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이 책의 목적
열왕기상 4장 30절은 솔로몬이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훨씬 더 지혜로왔다고 말한다. 잠언의 내용은 짧은 경구 내지는 핵심들을 모아서 만든 모음집으로서 기억하기 쉬운 형태로 그 중요한 진리를 전파하기 위해 계획되어졌다. 히브리어로 지혜라는 말은 ‘삶의 기술’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잠언의 목적은 독자에게 하나님의 관점에 의해서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술들을 전하는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지혜로운 자들에게 더 큰 행복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 지혜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시작한다(이것은 공포가 아니라 경외심, 존경의 의미이다). 그리고 지식과 이해, 판단, 분별, 그리고 순종을 담고 있다. 잠언은 다음 세대에게 그들이 인생에서 성공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사용되어졌고 이를 위해 특히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 사이의 비교를 통해서 깨닫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잠언을 이해하는 방법
지혜문학으로서 잠언은 특별한 주의를 가지고 해석되어야 한다. 잠언은 일반적인 진리를 말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때로는 모든 상황에서 문자 그대로 실행되어지기를 의도한 것이 아닐 수가 있다. 예를 들면, 잠언 22장 29절은 이렇게 말한다. “네가 자기 사업에 근실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자기 사업에 근실하였던 대다수의 사람들이 문자 그대로 왕 앞에 서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오늘날에는 왕도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이 잠언의 내용이 가리키는 더 큰 진리가 있다. 즉 만약 어떤 사람이 자기 일에 전문가가 된다면 그는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 것이고 보상을 받게 되기도 할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일종의 설명법의 하나의 예로서 잠언을 해석할 때에 항상 사용되어야 하는 방법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 책은 단지 실현가능성 없는 헛된 약속들로 뒤범벅되어 있는 책일 뿐이다.
잠언은 믿음을 전해주고 진리가 정돈된 내용을 보여주며 최대의 감화를 통해 삶에 영향을 주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다음과 같은 미국 속담이 있다. “하루 하나의 사과는 의사가 필요 없게 만든다.” 하지만 사실 하루의 사과를 하나씩 먹는 것이 말 그래도 의사가 필요 없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당신이 잘 먹는다면 건강을 유지하게 될 것이라고 말해주는 간결하면서도 오래 기억이 남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진리인 것을 간단하게 축약한 말은 너무 간단해서 그러한 진리에 관련된 잠재적인 다른 예외사항들을 다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만약 격언이 진리에 연결되어있는 모든 잠재적인 예외사항들을 다 설명하려고 했다면 그렇게 간결하지 않고 오래 기억에 남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은 정말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된다. “하루에 하나씩 사과를 먹고 또한 다른 신선한 과일들을 먹는 것은 항상 의사가 필요 없게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건강이 좋게 만들 것인데 이는 당신이 설익은 사과나 혹은 살충제가 남아있는 채로 씻지 않은 사과를 먹지 않는 경우에만 해당한다.” 이런 식의 격언은 간단명료함을 잃어버리게 된다.
동일한 원리가 히브리어인 잠언에도 해당된다. 그것들은 때로 모든 상황에서 전문적으로 진리가 무엇인가를 나타내려는 의도가 없고 이전에 나타난 진리에 대해서도 모든 것을 다 말하고 있지 않다. 그것들은 만약 모든 상황들에 적용되어서 문자 그대로 실행된다면 항상 진리가 되지만은 않는 그런 일반적인 진리를 담고 있다.
잠언은 약속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구체적인 약속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것은 성공적인 삶을 살기 위한 전반적인 지침서와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예를 들면 잠언 22장 6절은 이렇게 말한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그렇지만 많은 부모들은 자신들이 해야만 하는 방식으로 자녀를 가르쳤지만 그 자녀들은 자라고 난 다음에는 신앙을 포기해 버리고 말았다.
나는 네 딸을 둔 교계에 유명한 목사님을 알고 있다. 그와 그분의 아내는 모든 면에서 아주 훌륭한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이었다. 딸들 중에서 세 명은 아주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자라났다. 하지만 네 번째 딸은 신앙심이 없었다. 네 번째 딸이 신앙을 버린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그것이 ‘주의 교양과 훈계’(엡 6:4)로 양육하고자 노력하였던 부모들 측면에서의 어떤 심각한 잘못으로 인해 생긴 것은 전혀 아니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와는 반대로 별로 신앙적으로 투철하지 못했던 다른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난 아이들 중에는 더욱 신앙심이 깊은 자들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런 일들은 잠언 22장 6절이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잠언의 내용은 포괄적인 약속으로서 보아서는 안되고 일반적인 진리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교회역사가 증거하는 바는 부모가 확실한 신앙에 따라 살아갈 때에 그들의 자녀도 역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국의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서 18번째 생일을 맞기 전에 그리스도를 영접한다. 그것이 바로 잠언 22장 6절이 지적하고 있는 그 일반적인 진리이다. 만약 솔로몬이 오늘날에도 살고 있었다면 그는 아마 이 잠언의 내용이 어떤 예외도 존재하지 않는 절대적인 원리로 받아들여지게 되기를 원한 것이 아니었음을 설명할 것이다.
잠언은 문자 그대로 실천하는 것을 목적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다. 잠언 6장 27절부터 29절까지를 읽어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야 어찌 그 옷이 타지 아니하겠으며 사람이 숯불을 밟고야 어찌 그 발이 데지 아니하겠느냐 남의 아내와 통간하는 자도 이와 같을 것이라 무릇 그를 만지기만 하는 자도 죄 없게 되지 아니하리라”
휘(Fee)와 스튜어트(Stuart)는 자신들의 책인 ‘어떻게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읽을 것인가?(How to Read the Bible for All Its Worth)'라는 책에서 그 잠언의 내용에 대해서 이런 설명을 하였다.
누군가 이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이제 마지막 윤리기준은 불투명해졌다. 우편배달부가 편지를 배달하면서 다른 남자의 아내와 우연히 눈이 맞게 된다면 어떻게 되는가? 그는 처벌될 것인가? 그리고 그곳에 간음을 저지른 사람들이란 존재하지 않고 모두 그 죄에서 벗어나게 되는가?” 하지만 그러한 해석은 요점을 빗나간 것이다. 잠언은 비유적인 어법을 사용하여 어떤 것을 구체적이 아니라 개략적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당신이 잠언으로부터 얻어야 하는 요점은 간음을 저지르는 것은 불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언젠가 이점을 주목하실 것이다. 이생이나 내생에서 간음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괴로움을 받을 것이다. 마지막에 나와 있는 ‘만지기만 한다’는 것은 만약 성령의 영감된 말씀이 왜곡되어서 해석되지 않는다면 비유적으로 표현된 것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참고, 고전 7:1) 그러므로 잠언은 그 내용이 정말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문자적으로 엄격하게 받아들여지거나 지나치게 광범위하게 해석되어서는 안된다(Fee and Stuart, 218-19).
잠언은 문화적으로도 현대의 의미로 재해석되어야 한다. 잠언에는 우리가 문화적으로 그것들이 말하는 것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해할 수 없는 어떤 내용들이 있다. 예를 들어 잠언이 임금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왕정이 없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할 수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삶 속에 어떤 지도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왕을 받아들인다면 그 내용은 분명한 진리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는 덕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잠 22:11)을 읽을 때에 임금이라는 말을 삶속에서의 중요한 지도자라는 의미로 대치할 수 있다.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그 말씀은 다음과 같이 해석되게 된다. ‘우리가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덕이 있게 말을 한다면 우리는 정직하고 덕이 있는 말에 대개 좋은 인상을 갖게 되는 지도자들과 각종 책임자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줄 수 있을 것이다.’
잠언은 오래 기억되기 쉽기 위해서 상상력을 많이 자극한다. 때로 잠언의 내용은 마음 속에 어떤 그림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당신은 그 근본적인 진리를 오래 기억하게 된다. 우리는 그 그림을 이해하고 그 속에 담긴 상징적인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잠언 20장 26절에서 잠언 20장 26절에서 우리는 "지혜로운 왕은 악인을 키질하며 타작하는 바퀴로 그 위에 굴리느니라"는 말씀을 읽게 된다. 여기서도 물론 실제로 지혜로운 왕이 악인을 키질하며 타작하는 바퀴로 그 위에 굴리는 일이란 없다. 만약 어떤 중한 벌이 반드시 내려져야 한다면 그는 다른 방법을 사용할 것이고 또한 중한 벌을 내려야 할 필요성이 없다면 그에 대해서 타작하는 바퀴를 굴린다는 것은 너무나 잔인한 방법이다. 요점은 지혜로운 왕은 악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에 그것을 그냥 못본체 하고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왕국에서 악이 사라지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