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 TOPIC 연구: 고통
윤 홍 식
Ⅰ. 고통
1. 나의 상황
고통에 대해서 내 자신의 문제와 관련한 경험 중 가장 큰 것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재수할 때이고, 또 하나는 개척할 때이다. 재수는 다행히도 원하는 대학에 합격이라는 것으로 해소되었는데, 개척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고통의 기억은 재수 때에는 흘러간 과거가 되었지만, 개척은 현재 지속되는 어려움이 되고 있다.
왜 개척을 하면서 고통을 느끼는가? 원래 사역을 준비하면서 나의 계획은 유학을 떠나는 것이었는데, 갑자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개척을 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르는 것이 사역이기 때문에 부르심을 받았을 때 두말 않고 그대로 순종함으로 아내를 설득해서 개척을 시작하였다.
2. 나의 반응 & 나를 지배하는 것들
1)당황스러움
제일 처음 느꼈던 고통은 이러한 개척의 시작과 관련되었다. 내가 정말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한다는 괴로움이었다. 주의 일을 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닌데, 목회를 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닌데, 유학을 준비하다가 뒤틀어진 상황은 너무나 당황스러웠던 것이다.
2)좌절감
그 다음에 찾아온 고통은 좌절감으로 다가왔다. 정말 처절하게 좌절감을 맛보았다. 개척이 어렵다 어렵다 해도 이럴 줄은 도저히 몰랐다. 처음 시작할 때 함께 했던 사람들이 하나 둘 씩 사정이 있어 빠져 나가면서 어차피 오래 함께 하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너무나 좌절감이 드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한 사람도 전도하지 못했고, 아무도 교회 나오려고 하지 않았으며,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어느 순간엔 우리 가족만 조촐하게 남아있었다. 내가 정말 이 정도 밖에는 안되었던가? 스스로에 대한 강한 회의와 낙심이 엄습하였다. 무릎이 탁 꺾이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이 지속되기 시작했다. 한 주, 두 주, 세 주, 한 달, 두 달, 세 달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마음은 더욱 초조해 졌다. 이러다가 망하는 게 아닐까!
3)미래에 대한 두려움 & 악순환의 공포
좌절감은 자연스럽게 두려움으로 변해 갔다. 개척할 때의 그 의기양양함은 다 사라지고, 이제는 너무나 초라한 모습이 되고 말았다. 버스 정류장에 서서 전도하던 기세등등함은 다 사라졌고 이젠 대인공포증만 남았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머릿속에서는 완전히 망하게 된 교회를 상상하는 생각만이 떠돌았다. 얼마나 창피스러운가! 동기들에게, 아는 사람들에게, 가족들에게, 친척들에게 하나님이 시키셔서 개척을 시작했다고 떠들었던 나는 얼마나 부끄러운가 말이다! 상상 속에서 나는 완전히 실패자가 되어 있었다. 나로 사로잡고 있었던 불투명한 미래의 두려움은 도저히 헤어나오기 어려운 공포가 되어 있었다.
3. 하나님은 누구신가?
1)고통의 이유
이런 상황 속에서 자연히 모든 시선과 초점은 하나님을 향하게 되었다. 고통이 마치 깔대기 역할을 하면서 하나의 돌파구를 필사적으로 찾았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었던 것이다. 끊임없이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물었던 것은 이것이었다. “왜 저에게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 가장이면서 제대로 가장 노릇도 못하는 내 자신의 모습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고, 아무리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삶은 하루하루가 암흑으로 기어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가장 괴로웠던 것은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시작하셨는데 왜 이렇게 괴로움을 주시는가 하는 것이었다. “왜 제가 이러한 고통을 겪어야 합니까?”
a. 죄값인가?
나름대로의 해답을 필사적으로 찾으면서, 제일 먼저 생각했던 것은 내 죄값이라는 것이었다.
“창 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욥 4:7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욥 8:4 네 자녀들이 주께 득죄하였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붙이셨나니
8:5 네가 만일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며 전능하신 이에게 빌고
8:6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정녕 너를 돌아보시고 네 의로운 집으로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
내가 뭔가 잘못을 했던 것이다. 누군가를 괴롭게 했던 것이다. 하지 말았어야 하는 일을 했던 것이다. 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내가 어떤 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이렇게 되고 말았던 것이다... 뜻모를 자책감과 죄의식에 사로잡혀 나는 여러 번 울었다.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었다. 용서해 달라고 간구했다. 그리고 이 고통에서 꺼내 달라고 기도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럼 뭔가? 죄 때문이 아닌가? 그렇다면 무엇때문인가? 이유를 찾고자 하는 필사적인 노력이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어떤 글을 우연히 읽게 되었는데, 그 글에서는 ‘왜라고 묻지말고, 무엇이라고 물으라’고 했다.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려고 하지 말고, 지금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물으라는 말이었다. 좋은 말이었다. 공감되었다. 그래서 기도를 바꾸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그러나 그런 내 모습은 얼마 가지 못했다. 기도는 자꾸만 왜 그렇습니까를 묻는 것으로 되돌아 왔다. 하나님, 왜 저같은 자에게 개척을 시키셨습니까? 왜 내가 개척을 해야 합니까? 왜 내가 이러한 고생을 해야 합니까? 계속되는 악순환이었다.
4. 하나님의 말씀
1)하나님의 깨닫게 하심
하나님은 그러던 중에 내게 응답하셨다. 참으로 가슴이 후련한 응답이었다. 모든 것이 다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되는 말씀이셨다. 그것은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주님 한 분만 바라보라는 것이었다. 진실로 그것은 모든 고통을 잠재워주시는 치료였다.
“합 3: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3: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3: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지금까지 얼마나 내가 사람들에 집착했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사람들이 없다는 것에 괴로워했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셨다. 경제적 필요를 채워주셨고, 끊임없이 돕는 손길을 허락해 주셨다. 정말 아무 것도 없이 시작한 개척이었지만, 내가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아도 이미 내겐 모든 것이 있었던 것이다. 단지 사람만 없었다. 내 설교를 들어주고, 나를 칭찬해주고, 나를 위로해주고, 내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은 없었다. 그것 때문에 나는 심각한 괴로움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내 모습을 깨닫게 하셨다.
2) 하나님의 실제적인 도우심
정말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할 수 있을까? 그렇게 살아보기로 작정했다. 노력하고 노력하였다. 끊임없이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리라고 결심하고 다짐했다. 예배 때 아무도 없을 지라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심을 생각하려고 애썼다. 그렇게 또 몇 개월을 보냈다. 여전히 열매는 없었고, 여전히 상황은 안 좋았지만, 믿음은 좋아지는 것 같았다. 하나님을 더욱 간절히 붙들게 되었다. 하나님이 예배 때만이 아니라 내 삶의 중심으로 들어오고 계셨다. 다른 것들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마치 붙잡지 않으면 떨어져 버릴 것 같은 유일한 밧줄이었으며, 붙잡는 일 외에는 다른 할 일이 없었던 시간들이었다. 그 줄을 잡고 올라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미 다른 길은 다 막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줄을 잡고 조금씩 올라가면서 나는 세속에서 벗어나 하나님과의 만남을 즐거워하고 있었다. 하루라도 그 만남을 갖지 못하면 숨쉴 수가 없었다. 그 다음 날 해가 뜨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매일 매일 기도를 통해서 나는 하늘로 도피하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 속에서 나를 만나 주시고, 내게 소망의 말씀을 주시고, 위로하시며, 강하게 하시고, 내 스스로의 모습을 관조하게 하셨다. 그리고 그 다음날 실질적인 도움의 손길을 보내어 주셨다.
그 이후, 주님이 보내어 주시는 손길은 신기하게도 늘 일정했다. 더 많이 주시거나 더 적게 주시지 않았다. 마치 만나를 먹을 만큼 주셨던 것처럼, 나에게 주시는 도움도 항상 필요한 만큼만 주셨다.
“출 16:16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의 식량대로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인수대로 매명에 한 오멜씩 취하되 각 사람이 그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취할지니라 하셨느니라
16:17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16:18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더라”
“신 8:3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8:4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
한 명이 와서 함께 하다가, 떠나면 다시 한 명을 보내어 주셨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있어 걱정할 때쯤이면 또 다른 도움의 손길이 오곤 하였다. 이 모든 일들을 결코 한꺼번에 오지 않았다. 마치 바통을 넘기는 것처럼 차례차례 순서대로 왔다가 갔다. 그리고 항상 동일한 상황이 유지되었다. 이상하기도 했지만, 감사했다. 하나님께서는 먹을 만큼만 주셨던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셨던 것이다.
5. 하나님께 나아가는 나의 모습
지금까지의 2년여의 개척의 시간은 참으로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가끔씩 전혀 변함없이 사역을 하고 있는 동기들을 만나면 깜짝 깜짝 놀라게 된다. 시간이 그것밖에 지나지 않았나? 나는 한 10년정도 지난 것 같은데. 다들 조금도 변함이 없구나... 그만큼 힘든 과정을 지나쳐 왔기 때문이리라. 아파했던 시간만큼 하나님께서는 회복의 시간을 허락하셨다. 고통이 갑자기 확 사라졌던 것이 아니었다. 문제가 갑자기 확 해결되어 버렸던 것은 아니었다. 가끔씩 욥의 고난과 그 회복을 떠올리곤 했는데, 나에게 주신 회복은 하루아침에 주신 것이 아니라, 고통했던 시간만큼이나 천천히 오래도록 걸려 주셨다. 그리고 그러한 회복의 과정을 통해 상처가 회복된 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새로운 성숙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러한 성숙은 금새 목회활동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바로 하나님을 끝까지 기다리고 바라는 모습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모습이 형성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인내하는 모습’이었다.
6. 나의 삶의 결과
이제는 감사와 인내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목사고시 때 면접하시는 목사님께서 목회의 성공비결이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신 적이 있는데, 나는 ‘인내’라고 대답했다. 물어보신 그분도 바로 그것을 말씀하셨다. 아직 욥의 결말이 내 삶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 결말이 이루어지고 나면 재수 때의 고통이 합격으로 인해 다 씻겨진 것처럼, 개척에의 괴로움도 다 옛날 이야기가 될 것이고 하나의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남아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고통 중에서 깨닫게된 믿음과 인내의 성숙이다. 하나님은 정말로 훌륭하신 훈련교관이시라는 생각이 든다. 가장 뜨거운 불로써 가장 아름다운 금을 단련하신다.
“잠 17:3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 하시느니라”
“사 48:10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
고통 중에서 하나님을 만난 경험은 앞으로 끝까지 지속될 하나님의 연단하심이었다고 생각한다. 삶은 더욱 주님을 의지하게 되었고, 더욱 인내하게 되었으며, 더욱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다리게 되었다. 이러한 은혜가 계속되는 삶 속에서도 더욱 풍성하기 될 것을 소망한다.
Ⅱ. 사람에 대한 두려움
1. 나의 상황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주제를 생각하면서 떠오르는 사람이 한 명 있다. 이 사람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왜 이 사람을 두려워하는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더 나아가서는 내게 아직도 사람을 두려워함이 남아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어 서글퍼진다. 정말로 완전히 사람을 두려워함을 벗어버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례하게 되어야 하는 일일까? 왜 나는 좀 더 당당하게 대하지 못하고 늘 밀리는 듯한 느낌을 갖는 것일까? 내가 두려워하고 있는 이 사람을 통해 좀 더 이 주제를 생각하고자 한다.
1) 두려워하는 사람
그 분은 전부터 안면이 있거나 상관이 있었던 사람은 아니었다. 개척을 하게 되면서 알게 된 분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군대에서의 상관이었다. 군에서 꽤나 높은 위치에까지 올랐다가 은퇴하신 분이었다.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혈기 왕성했고 체력이나 모든 것이 여전하신 분이었다. 사회적으로나 환경적으로나 내가 그분과 연결을 맺는 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개척을 하게 되면서 그분은 나와의 만남을 원했다.
처음 만남도 아버지를 통해서였다. 아버지가 그분의 그러한 바램을 나에게 전해 주셨고, 그래서 나는 그분과 그 아내되는 분을 만나게 되었다. 나는 아버지가 그분을 부르는 호칭에 따라 ‘장관님’이라고 불렀고, 그 아내되시는 분은 ‘사모님’이었다. 부모님은 이미 몇 년 전부터 그분들의 소유인 빌딩에 무료로 들어가 살면서 그 빌딩을 관리하고 계셨다. 오래 전부터 그분들은 우리 가족과 깊은 관계에 있었고 많은 도움을 받으며 살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나와의 직접적인 관계는 없었기에 그분들에 대해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개척을 하고 난 뒤, 우연치 않은 기회에 그분들이 안수기도를 받기를 원하게 되었다. 나는 별다른 생각없이 안수기도를 했는데, 그 이후에 그분들의 마음이 움직여 개척교회에 상당한 액수를 지원하겠다고 한 것이다. 그 당시 나는 집에서만 개척을 하고 있었고, 마땅한 교회 장소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던 차에 그분들의 제의를 흔쾌하게 받아 들였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문제가 시작되었다. 관계가 꼬이기 시작한 것이다.
2. 나의 반응
그분들은 교회 이름부터 시작해서, 교회의 위치, 교회의 장소 등등 모든 것에 간섭하려 했다. 자신들이 지원하는데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이해하지만, 교회의 담임은 나인데 자꾸만 자신들의 의사가 관철되기를 바랬다. 갈등이 생기다가 결국, 그분들은 지원을 포기하기로 했다. 나 혼자 들떠서 이것저것 알아보고 꿈에 부풀다가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버리고 관계도 종결되었으면 오히려 좋았을 텐데, 묘하게도 관계는 계속 연결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교회장소를 얻고 시작한 다음에, 그분들은 꽤나 큰 액수를 헌금해 주셨고, 매달 얼마씩을 보내오셨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내게 짐이 될 수 밖에 없었다. 형편이 어려워 받기는 했지만, 못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더욱 더 일이 꼬인 것은 그 후 마음의 부담을 이기지 못해 더 이상 헌금을 하지 말아달라고 말한 이후에 일어났다. 그리고서 완전히 정리가 되는가 싶었는데, 교회장소를 옮겨야 하는 문제가 생겨서 급히 돈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고심 끝에 다시 그분에게 연락했다. 조금 더 도와달라고 말했다. 자존심 상하고 비굴하게 된 내 모습이 너무나 괴로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나서 다시 도움을 받게 되었다. 그 때, 왜 헌금을 하지 말라고 했다가 다시 도와달라고 하느냐고 핀잔을 들었다. 너무나 괴로웠다. 그럴 수밖에 없는 처지가 견디기 힘들었다.
그 뒤로 나에게 그분과 그 사모님은 두려운 존재가 되고 말았다. 주눅이 든다고나 할까? 굽신거리게 되고, 말도 함부로 하지 못하게 되고, 늘 신세를 지고 있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도움을 받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고, 그러면서 교회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해 보지만, 이상하게도 그럴 때마다 마음이 괴롭다. 그분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나를 지배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를 이렇게 힘들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3. 나를 지배하는 것들
1)부끄러움
첫 번째, 도움을 요청했다고 하는 부끄러움이다.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무엇이 부끄럽겠는가만은 그 자체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그분들에게 요청했다는 것이 걸리는 것이다. 이미 그분들과의 관계는 처음 개척지원이 좌절되었을 때, 끝을 냈어야 했다. 계속 이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는 어리석게도 도움을 받았고, 도와달라고 했으며, 도움을 받기 위해 애썼다. 처음의 당당함을 그대로 유지했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분의 도움을 얼마나 큰 유익이 있었는가? 물론 큰 유익이 있었다. 하지만, 없었어도 큰 문제는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있는 대로 교회를 운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판단이 들기 때문에 부끄러움은 더욱 깊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2)상처받은 자존심
두 번째, 굽신거리게 되는 내 자신에 대해 자존심이 상한다는 것이다. 굽신거린다는 것은 좀 심한 표현이긴 하지만, 내 마음이 그렇게 느껴진다. 특히 이분은 군대의 장성출신이기 때문에 그런지 좀 하대하는 경향이 있다. 내가 자신의 부하정도로 느껴지나 보다. 편하게 생각해서 그런지 아니면 정말 낮게 생각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대해지는 상황은 나로 하여금 피해버리고 싶게 만든다. 그러나 피할 수는 없다. 매달 헌금을 보내주시기 때문에 자주 연락을 드려야 하고, 그분은 직접 내게 연락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통해 교회사정이나 자신의 기도제목을 알려오신다. 결국, 나는 아버지 밑에 있고, 그분은 나보다 좀 더 높다고 생각하는 아버지를 통해 나에게 뭔가를 주문하는 것이다. 더욱 힘들어지지 않을 수 없다.
3)열악한 나의 모습
세 번째, 교회의 상황은 여전히 내놓을 만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내가 담임으로서 책임맡고 있는 교회는 이제 나의 성적표가 되고 있고, 나의 이력서가 되고 있으며, 나의 능력을 내보이는 장이 되고 있다. 그런데 여전히 교회의 상황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내 자신이 아무리 잘나고 자신있고 소망이 있다고 해도 교회의 상황이라는 성적표는 자꾸만 나를 위축시킨다. 이제는 얼마나 모이냐는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다. 이런 비참한 심정은 만약 교회의 상황이 자랑스러우면 좀 달라질텐데라는 아쉬움으로 발전한다. 교회의 성도들이 더 많으면 나를 쉽게 보지 않을텐데, 교회의 규모가 더 크면 나를 우습게 여기지 않을 텐데, 교회의 이름이 더 빛나면 내가 좀더 특별하게 보일 텐데....끊임없이 이런 생각이 나를 사로잡는다. 그렇지 못한 현실은 더욱 나를 초라하게 한다. 이러한 내 모습을 주님께서 바라보실 때 어떤 생각을 하실까? 불쌍하다고 생각하실까? 어리석다고 하실까?
4. 내게 나타나시는 하나님 & 그분의 말씀
1) 주님의 종
하나님께서는 내가 누군지를 다시금 깨닫게 해주셨다. 내가 주님의 종임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셨다.
“사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43: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43:3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렇다는 것을 알게 하신다. 주님의 일을 하기 때문에 주님의 종이라는 것이 아닐 것이다. 주님의 명을 따르기 때문에 주님의 종인 것이다. 교회 일을 하면서도 내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도움도 내가 받는 것이고, 내가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고, 내가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러한 두려움에 지배당하는 것 같다. 이제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내가 나를 위해 일하는가? 주님을 위해 일하는가? 내가 주님의 나라를 위해 달리고 있는가? 나의 나라를 위해 달리고 있는가? 왜 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덮어쓰고서 나의 이름을 내세울려고 하는 것일까? 하나님께서는 나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해주신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란 사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이루어지고 있는 사람과 하나님사이의 역동성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신다.
2)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분은 나를 보고 헌금한 것이 아니다. 주님께 헌금한 것이다. 나를 보고 지원한 것이 아니다. 교회를 보고, 교회이기 때문에, 주님의 일이기 때문에 지원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왜 나같은 사람을 보고 그 같은 헌금이나 지원을 할 수 있겠는가?
“마 21: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그런데, 도움을 요청한 사람은 내가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 유익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내가 왜 도움을 요청했겠는가? 내가 나를 위해서 이러고 있겠는가? 내가 나의 필요를 채워달라고 요구했는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말했는가? 그렇지 않다. 오직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마음에서 그렇게 한 것이다. 그것이 나의 순수한 뜻이었고, 그러한 뜻이 있었기 때문에 그 때 그렇게 도와달라고 말이라도 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부끄러워 죽고 말았을 것이다.
“고전 9:14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9:15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5. 믿음과 순종가운데 사는 삶의 결과
이러한 깨달음 속에서 다시 한번 내가 얼마나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내 일과 혼동하고 있는지를 깨닫는다. 사람을 두려워하기 시작한 것은 하나님의 일을 내 일과 혼동하면서부터였던 것이다. 그것이 나를 더욱 얽히게 만들었고 불편하게 만들었으며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이제 앞으로는 하나님의 일이라는 사실을 계속 생각할 것이다. 두려운 마음이 들 때마다 이것은 내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라고 다시금 상기할 것이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하나님의 종인 것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부끄러움까지도 감수하고자 하는 열심있는 종임을 다시 한번 기억할 것이다.
다시 그분을 만난다면 어떨까? 그분은 또 다시 나에게 은혜를 베푼 자이며, 나에게 돈을 준 사람이며, 그래서 내가 그분의 말에 순종해야 하며 굽신거려야 하며 은혜를 갚아야 하는 자가 될 것인가? 그분이 받아야 하는 상급과 보상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호소할 것이다. 내가 갚아 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나는 단지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받아 사용했을 뿐이다. 나를 위한 것으로 쓰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께서만 그분을 기억해 주시고 보상해 주시기를 기도할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뿐이다. 그리고 난 자유로워질 것이다. 하나님의 종임을 잊지 않을 것이다.
Ⅲ. 분노
1. 나의 상황
분노의 경험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 가장 머릿속에 깊게 남는 것은 우리 가족에게 심하게 대했던 일이었다. 별로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화를 내본 적이 없고, 내려고도 하지 않기 때문에 ‘분노‘를 크게 의식하지 않고 살았는데, 이상하게 가족한테는 심하게 화를 낸 적이 많이 있었다. 아내한테도 심한 말로 대한 적이 있었고, 딸에게도 그렇게 대한 적이 있었다. 다들 사랑하는 가족인데 어쩌면 그럴 수 있을까 싶기도 했지만 이상하게도 가족한테는 다른 사람들에게보다 더 많이 화를 내었던 것 같다. 아내에게 화를 내는 것은 부부싸움으로 확대되어 심한 갈등을 겪기도 했고, 딸에게 화를 내는 것은 역시 그런 모습을 가만히 보지 못하는 아내가 끼어 드는 바람에 가정분란의 원인이 되었었다. 그러면서 아내가 나에게 비난하는 것이 이런 말이었다. 왜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온유하면서, 가족한테는 그렇게 심하게 대하느냐는 것이다. 왜 조금도 용납하거나 인내하지 못하고 가족한테만 유독 그러느냐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을 때는 그냥 넘겨버렸으나 지금 ’분노‘라는 주제를 생각할 때 나 자신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임을 깨닫는다. 왜 그렇게 나는 가족들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것일까?
2. 나의 반응
1) 성급한 분노의 표출
내가 분노에 치닫게 되는 것은 그리 오래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다혈질이라고 하던가? 쉽게 흥분하는 사람. 내가 그런 것 같았다. 아이가 울거나 보채거나 짜증내거나 투덜대거나...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인데, 그럴 때 나는 얘를 버릇을 잡아야겠구나 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혼을 낸다. 이렇게 혼을 내기 시작하면, 좀처럼 울음을 그치지 않거나 말을 듣지 않을 때에 점차 화가 더 난다. 조금씩 목소리가 높아지고 거세어진다. 어떤 때에는 소리를 버럭 지르는 때도 있다. 그러면 애는 더욱 자지러지고 무서워서 엄마에게 달려간다. 상황이 심각해지고, 왜 그렇게 애한테 심하게 대하느냐고 아내의 공격을 받고 나면, 갑자기 한 풀 꺾인다. 급격히 감정이 정리되면서 후회가 밀려온다. 내가 왜 그랬을까? 왜 그렇게 심하게 했을까? 다시 아이를 달래보지만, 아이는 이미 겁을 먹고 무서워하며 피한다. 나는 이미 심각한 분노를 표출했던 것이다.
아내에게 화를 내는 것도 비슷한 과정이다. 기분 나쁜 일이나 사건이 생겼다. 나는 그것에 대해 말한다. 내 기분이 어떻다고 말한다. 그러면, 아내는 다시 그 일에 대해 반격한다. 나는 일차적으로 지금 기분이 나빠지려고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일종의 신호이다. 내 기분에 대해 어떻다고 말하는 것, 특히 나빠지고 있다는 것은 경고이다. 그러나 그러한 경고는 무시되고 언쟁은 싸움이 된다. 순식간에 몇 마디 말이 오가고, 거기에 기분 나쁜 말투라도 들어 있을라치면, 나는 당장에 흥분하게 된다.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악한 말을 하고 분노를 폭발시킨다. 이러한 분노는 대개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최고조에 달하게 되면, 아내는 말을 안 하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이불을 뒤집어쓰거나 한다. 그러면, 다시 나는 풀이 꺾인다. 또 다시 후회가 들고, 수습하려 애써보지만,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지만, 쉽게 해결이 되지 않는다. 그러면서 냉전으로 접어들게 된다. 분노는 순간이었지만, 오랜 시간의 반성과 잘못을 비는 것과 혹은 어떤 대가를 치룸으로써(밥을 산다든지, 설거지를 한다든지) 그제서야 상황은 정리가 된다.
3. 내 반응의 결과:원인의 탐구
내가 생각하는 문제는 너무나 빨리 흥분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감정은 나름대로 생각하는 갈 때까지 가야 멈춰 선다는 것이다. 이러한 감정의 성급한 패턴은 자꾸만 반복되고 있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러는 것일까? 뭔가 맺힌 것이 많이 있나? 과거에 어떤 나쁜 기억을 가지고 있는가? 아버지한테서 배웠던 것인가? 아니면 유전된 것인가? 환경이 나를 이렇게 만들어 버렸는가? 개척이라는 짜증나고 불평나며 만족하거나 감사하지 못하는 상황속에서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쉽게 화내는 사람이 되고 말았던 것인가?
하지만, 이유는 수십가지를 댈 수 있지만, 명확하게 이것이다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오히려 혼란은 가중되고 문제의 본질을 찾을 수가 없었다. 문제의 원인을 찾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 같았고, 이에 반하여 현상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의 원인을 찾아보려 하지만, 찾을 수는 없고 여전히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4. 하나님은 누구신가?
부모님 탓을 하기 이전에, 가정교육의 문제를 들기 이전에, 환경이나 상황이나 그 어떤 외부적인 요인을 말하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을 생각해보기로 했다. 하나님은 이러한 나를 어떻게 생각하실까? 내가 어떻게 행동하기를 원하시며, 어떻게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 주님이 나를 도우시는 것은 무엇인가?
1) 오래 참으라
세상의 심리학적인 지혜는 분노에 대해서 쌓아두지 말고 적절히 풀어버리라고 했다. 그런데 그렇게 해보니 오히려 풀리기는커녕 더 강화되기만 한다. ‘나는 지금 기분이 나빠질려고 해’라는 사전경고는 단순히 경고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나는 기분이 나빠질 거야, 화를 낼 거야라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오래 참으라라는 것이었다.
“살전 5:14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勸戒)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간혹 에베소서 4:26의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라는 말씀이 화를 내어도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겠는가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뒤에 이어지는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는 말씀은 결코 틈을 보이지 말라는 뜻으로 분을 내지 않는 것이 옳은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2) 분노함이 주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못함
또한 성경말씀의 계속되는 권면은 한번이라도 성을 내는 것으로써 주의 일을 그르친 사람들의 경우(지팡이로 반석을 내리친 모세의 이야기)를 통해 결코 화를 내지 말 것을 말씀하신다. 화를 내는 것이 죄를 짓는 것임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민 20: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20:8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으로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울지니라
20:9 모세가 그 명대로 여호와의 앞에서 지팡이를 취하니라
20:10 모세와 아론이 총회를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20:11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20:12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 하리라 하시니라”
그렇다면 성스러운 분노는 무엇인가? 예수님도 성전에서 분노를 보이시지 않았는가?
“마 21:1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21:13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3) 마음을 다스리라
물론 성스러운 분노가 필요할 때가 있을 것이다. 예수님처럼 그러한 분노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정에서 아내와 딸에게 보일 수 있는 성스러운 분노란 없다. 내 스스로 그들에게 성스러운 분노를 표출한다고 하면서 죄를 짓게 되는 많은 경우를 경험하고 있다. 좀 더 온유하고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내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너무나 부끄럽다.
“잠 16:32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5. 하나님께 나아가 도움을 구함
이제 앞으로 더욱 주님을 의식하면서 살아야 하겠다는 결심을 한다. 실제로 부부싸움 중에도 어느 한편의 입에서 ‘하나님이 당신을 어떻게 보시겠는지 생각을 좀 해보세요’라는 말이 나오면 급속도로 열기가 식어드는 것을 경험하였다. 하나님이 보신다는 생각을 못해서 그렇지, 그 생각이 들면 흥분하던 마음이 가라앉고 죄를 지을 수 있는 감정적인 혼란이 정리되는 것을 느낀다. 하나님을 생각하면 그렇게 분노를 표출하는 내 모습이 부끄러워진다. 온유하며 겸손하게 살라고 가르치면서 그렇게 살지 못하는 내 모습이 너무나 죄송스럽다. 주님을 더욱 묵상하며 생각하며 살아야 하겠다.
“시 19:14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그러면서 주님께 기도하는 바는 더욱 내 마음을 도와달라는 것이다. 주님께서 내 마음을 다스려 주시면 좀 더 인자하고 온유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그것은 그 어떤 깨달음이나 분석이나 충고보다도 실제적으로 나를 돕는 힘이기 때문이다.
Ⅳ. 죄의식
1. 나의 현재의 상황
죄의식의 가장 큰 고통은 반복된다는 것에 있다. 죄의식은 앞으로 죄를 떠나겠다는 선언이 아니다. 죄에서 이제 빠져 나왔다는 표현도 아니다. 그저 죄중에 있음을 나타내는 것 뿐이고, 앞으로도 죄 중에 여전히 있을 수 있다는 암담한 상태일 뿐이다. 그래서 죄의식은 괴롭다. 현재가 괴롭고 미래가 괴롭다.
반복되는 죄에서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 반복되는 죄의식에서 어떻게 하면 도망칠 수 있을까? 나에게 있어 반복되는 죄는 게으름이다. 육신을 이기지 못하는 연약함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새벽기도를 잘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이러한 죄의식은 새벽기도를 해야 한다는 목표가 생기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새벽기도를 할 필요가 없었을 때에는 전혀 죄의식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침에 늦게까지 잠을 자는 것은 으레 당연한 일이었고, 간혹 괴로움을 느끼는 것은 할 일을 하지 못했거나,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을 때의 경우였다. 하지만, 개척을 하게 되고 새벽기도회를 인도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여전히 새벽에 제때 일어나지 못하는 것은 심한 자책과 괴로움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2. 나의 반응: 변명과 위로
생각해보면, 나름대로 새벽기도회를 인도하지 못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첫째로 성도가 없다. 이것은 과거의 한참 어려울 때의 경우였다. 그때에는 정말 새벽은 혼자서 기도하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젠 몇 명의 성도들이 함께 나아와 기도하고 있다. 그런데도 나는 새벽기도회를 빠지는 경우가 있다. 얼마나 그분들이 보시기에 한심한가! 개척교회 교역자가 새벽기도를 못한다니. 간혹 그분들도 아무도 안나오시고 나만 나와서 기도하는 때도 있다. 그러나, 어떻게 하다보면 꼭 내가 빠지는 때에는 그분들이 오신다. 나의 모습은 항상 나와 있어야 하는데, 나는 어리석게도 내가 빠지는 날에는 그분들도 안나오시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늦게 자게 된다. 이유는 밤에 산기도를 하기 때문이다. 밤에 산기도를 하고 늦게 돌아오기 때문에 늦게 잠을 자게 되고, 그래서 새벽기도를 못가는 때도 있을 수 있다고 스스로 용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생각해도 참으로 한심하다. 산기도를 아예 가지 말든지, 산기도를 갔다 오면 꼭 새벽기도를 하든지 해야 하는데 그 기도를 핑계로 새벽기도를 하지 못하는 내 모습을 합리화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로, 너무 무리를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든다. 잠 못자고 그렇게 몸을 혹사시키면 장기간의 목회를 그르칠 수 있다고 스스로 위안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남들도 다 하는데 나라고 해서 하지 않을 수는 없다. 모든 목사님들이 다 새벽기도를 하고, 부교역자로 사역하는 동기들도 다들 새벽기도를 인도한다는데 나 혼자 몸생각 한다면서 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일이다.
이러 저러한 이유들로 나는 스스로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것들 때문에 내가 저지르고 있는 죄의 모습을 합리화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들 속에서 점차 더욱 게을러지고 있다. 그러나 합리화나 게으른 모습들은 결국엔 또 다시 죄의식으로 이어진다. 아무리 해도 새벽기도를 못했다는 자책감은 합리화나 그 어떤 생각으로도 깨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굳게 결심을 하고 다시 새벽기도를 시작해 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시 새벽기도를 빠지고 만다. 형편없는 죄악의 악순환이 계속되어지고 있다.
3. 하나님의 말씀
1)위로와 용서
여기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반복되는 죄의식만큼이나 반복되는 위로와 용서의 말씀을 해주신다. 그리고 다시 달려들어 보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오늘 새벽기도에 실패했다고 해서, 내일도 실패하리라는 보장은 없으니, 오늘 밤 새롭게 준비해서 내일은 꼭 성공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마 18: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18: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고후 2:7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저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저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2:8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저희에게 나타내라“
진실로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죄를 용서해 주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다시 새 힘을 주시는 것이다. 이 놀라운 은혜를 깨닫고 나니 하루의 조망이 완전히 바뀌었다. 예전엔 새벽기도를 승리했느냐 실패했느냐가 하루의 분위기를 좌우했다. 승리하였으면, 하루 종일 만족스럽고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으며 모든 일이 잘 될 것 같은 기쁨이 있지만, 실패하면 하루 종일 우울하고 좌절스럽고 모든 일은 저주를 받아 다 안될 것 같은 두려움에 싸여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새롭게 하심을 통해 내 죄를 사함 받고 다시 한번 주님의 일을 위해서 노력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기게 되었다.
“시 32:1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4. 하나님께 나아가 도움을 구함
이제 내가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은 내일 밤 새벽에 일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어렸을 때에 자기 전 베게에 머리를 묻고 무릎꿇어 기도하고 자던 습관을 다시 살려서 앞으로도 자기 전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다. 그리고 새벽기도를 통해서 나는 더욱 성장하며 변화되고 성숙해질 것이다.
또한 그저 단지 기도만 하고 자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과연 어떻게 하면 새벽에 쉽게 일어날 수 있을까 지혜를 주신다. 자명종시계를 더욱 보강하고, 새벽에 내가 못 일어나면 발로 차서라도 일으켜 세워달라고 아내에게 부탁하고, 가능한 산기도를 갔다와서 빨리 잠을 자도록 한다. 이 모든 일은 결심이 흐트려지지 않기 위한 방법들의 연구이다. 비단 이러한 방법만이 있겠는가? 생각해 보면 더 많은 방법들이 있을 것이다. 이 모든 방법들은 더욱 주께 헌신되고 충성스러운 삶을 살기 위해 그 노력이 경주되는 것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하루를 마감하고 잠자리에 들기를 원하시는 것인 줄도 모른다.
5. 믿음과 순종가운데 사는 삶의 결과: 은혜의 순환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고 사함을 받고 고통스런 반복적인 죄의식을 벗어버리고 사는 것은 이 세상에 완전히 실현 가능한 것을 아닐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여전히 죄를 고백하고 사함을 받고 죄의식을 이기며 살려고 하는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결국 스스로의 깨끗함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고후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7: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이러한 죄의 경험들은 주께 의지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주께 더욱 순종하고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변화하게 만드는 도구가 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언젠가 죄의 산이 바다에 빠질 것을 바라보고 한 삽씩 퍼내다 보면, 언젠가는 그 죄악의 산을 바다에 빠지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더욱 하나님 뜻에 맞는 죄의식을 통해 하나님의 원하시는 모습을 나 자신에게 이루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