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소감] 하나님의 동행에 관하여, 19시 3; 1-8 대적에 대해서 어떤 소원을 가져야 하는가[36 수치]@설교 소감문
시편은 설교 말씀 그대로, 성전이든 집이든 바깥이든 다양한 장소에서 그리고 주일 오전뿐만 아니라 저녁에도 주일이 아닌 날에도 다양한 시간 속에서 나오는 기도라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그 시편에는 찬양, 감사, 탄식, 간구가 정말로 나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시편이 제가 삶 속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와 유사합니다. 그리하여 저는 나만의 시편을 꼭 하나님 안에서 이루고자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제가 봤을 때에, 제게 요구되는 것은 고통 받을 때에 나의 시편이 탄식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저 탄식으로만 끝난다면 그것은 넋두리이자 고통만을 나열한 것이기에 하나님 안에서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저는 너무나도 잘 경험해 왔습니다. 얼마나 많은 고통과 괴로움에 대해서 하나님께 말씀을 드렸는지요.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저를 인도해 주십니다. 그런데 제가 그 인도하심을 못 보든 아니면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든 그저 저는 저의 고통을 해결해 달라고만 호소한다면 저에게는 정말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표면적 그리스도인으로만 남아 있는 것이지 절대로 이면적 그리스도인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연하게도 변화되는 편을 선택하였습니다. 저는 오랜 세월동안 심리치료, 정신치료를 받아 왔습니다. 그리고 지금 혁신주의 성경적 상담을 받고 있습니다. 제가 직접 경험하였기에 혁신주의 성경적 상담은 정말로 심리치료와 정신치료에 의지하고 있던 저에게는 콜럼버스가 미 신대륙을 발견한 것처럼, 물론 제 자신에게는 그보다 이상입니다, 매우 획기적인 발견입니다. 하지만 혁신주의 성경적 상담을 그저 앉아서 받는다고 하여 마음이 평안해지고 내가 가지고 있는 마음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혁신주의 성경적 상담에서 가르쳐 준 이해와 해석들을 제가 직접 적용하여서 절대로 넘지 못할 것 같았던 문제들을 넘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정말로 능동적인 자세가 되어야만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분명하게도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생각하여야만 상담에서 배운 이해와 해석들을 직접 적용할 수 있습니다. 저의 경우는, 하나님을 생각하지 못한다면 적용할 수가 없습니다. 적용을 한다는 것은 마치 저에게는 에베레스트 산 또는 화성에 있는 우주에서 가장 높은 올림푸스 산의 정상을 찍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여서 오직 탄식만이 존재했던 시편을 간구와 소망으로 그리하여 찬양과 감사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시편 3편은 제게는 너무나도 제 삶에 유사한 것이 많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명백한 죄악과 아들 암논의 죄악을 간과했습니다. 분명 본인은 하나님께 용서 받은 자로서 행동 했을지는 모르겠으나 압살롬에게는 그것이 상관없이 오직 간과한 것에 초점을 두어 분노와 수치를 경험한 것 같습니다. 여하튼, 다윗은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나이가 들은 때에 피신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한편, 욥은 자신의 죄로 인함이 아닌 것으로 크게 고통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죄를 지어서 이든 죄를 짓지 아니하였음에도 이든 그리스도인이라면 고통 속에서 시편을 쓰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분명 죄를 진 사람의 경우에는 믿지 않는 사람이든 그리스도인이든 여러 사람들에게 지탄 받고 용납 받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은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이라면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죄를 지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찾지 말아야만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것이 다윗의 모습이고 또 제 자신의 모습이어서 그렇게 말하는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죄를 지어 그 대가를 받고 있는 다윗이 그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는 것은 저에게는 너무나도 큰 위로와 소망을 보게 해줍니다. 저라는 사람도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고 그 안에서 회개하고 소망을 바라보고 감사하며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 도망 다녔던 때에 다윗은 자신의 죄악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타인의 죄악도 알았습니다. 주어진 모든 고통이 전부 다윗의 죄악으로 인함도 아니며 전부 타인의 죄악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분명 다윗은 너무나도 복잡한 심경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매우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욥의 인내는 당연하고, 그는 죄를 범하지 않았으니까, 미래의 다윗 자신에게 현재의 다윗이 도망 다닐 때에 내쉬었던 한숨과 겪었던 고통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분명 이 경험으로 더욱 하나님 안에서 성장하는 계기를 경험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도망 다닐 때에 그의 죄악으로 말미암은 것 외에도 그가 살아오면서 가지고 있던 본인의 고통들로 인하여서도 매우 괴로웠을 것입니다. 다윗은 그것들도 하나님 안에서 함께 극복하여 성장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은 제 자신을 다윗에게, 다윗의 시편에 이입하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인답지 않게, 형편없이 살아왔습니다. 죄를 지으며. 그러나 그 이면에 저도 너무나도 큰 고통과 괴로움을 안고 살았습니다. 그 큰 고통과 괴로움이 너무나 절대적이어서 죽음을 선택하려고 하였으나 그러지는 못했습니다. 저는 저의 고통과 괴로움을 그저 정신치료와 심리치료로 묵혀 둠으로써 해결이 안되는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이지만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모습들을 많이 행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편 3편이 너무나도 제 삶에 들어맞는 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설교에서 언급된 것처럼, 죄를 지어서 고통을 당하든 욥과 같이 지은 죄가 없어도 고통을 당하든 그 고통 속에서 성경은 전혀 읽히지가 않는 것 같습니다. 고통 속에서는 성경을 읽고 싶지가 않으며 내 고통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교회를 가는 것은 분명 싫어지고 그저 죽기만을 바라며 있게 됩니다. 당연하게도 예배를 드리는 것은 나의 인생과도 전혀 무관한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야박한 하나님, 긍휼이 없으신 하나님, 심판하시는 하나님, 진노하시는 하나님”만을 생각하니 예배는 저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분명한 것은 자학을 합니다. 좌절을 하고 절망에 절망을 합니다. “나는 패배자야, 쓰레기야, 낙오자야, 쓸모없는 놈이야, 저주 받은 영혼이야, 이제는 절대로 회생이 불가능 할 거야, 네 인생에 더 이상 웃는 일은 없을 거야, 대체 내게 왜 이런 정신질환이 있는 것일까 왜 대체 나는 정신질환을 앓아야만 하는 그 한 사람일까”합니다. 그런데 나의 시편은 거기에서 시작된다는 설교 말씀이 너무나도 제게는 귀중합니다. 제가 그러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설교 말씀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시편 3편이 ‘아이고 힘들어라’로 시작되지 않고 ‘여호화여’로 시작된다고.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라고. 하나님은 분명히 벽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계단이 되어 주십니다. 고통 받을 때에 하나님을 생각하기 싫은 것은 분명히 하나님을 벽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분명히 하나님은 계단이 되어 주십니다. 저는 그 통로로 혁신주의 성경적 상담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오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계단이 되어 주신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제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다면 저를 명백히 오르게 해 주십니다. 고통을 극복하게 해주실 것이라는 저의 믿음입니다. 저는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여야만 한다는 것을 지금 다시 저에게 새겨줍니다.
또, 하나님은 저를 붙드시며 도와주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시3: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6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이 말씀이 얼마나 제게 위로를 주는지 지금 알았습니다. 물론 이 말씀이 저의 정신과적 질환을 낫게 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 말씀은 제가 하나님을 의지하며 질환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고 성장할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나를 붙드심을 알고 내가 분명 고통스러우나 흔들리지 않는 것, 요동하지 않는 것. 결국에는 “시3:8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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