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장님이 코끼리를 어디를 만지느냐에 따라서 코끼리에 대한 묘사가 다른 것처럼 불신자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 보면 타락한 인간이 자기 스스로 복음을 듣었다고 해서 복음을 받아들인 능력이 있느냐 할 때, 신학자들은 한결같이 그러한 능력은 전혀 없다고 봅니다. 이것은 신학에서는 당연하겠지만 상담학에서는 다른 관점의 문제가 됩니다. 신학에서는 자기 힘으로 복음을 받아들일 수는 없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하심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지만 상담학에서는 그러한 변화에 성령께서 작용하지 않으셨다는 증거는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성경적 상담은 인간의 본성을 선하다거나 긍정적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소원을 찾게 하는 것도 그 근원이 '은혜의 소원'을 갖게 하는 것 뿐입니다. 한 죄인의 주변에는 그를 변화시키려는 노력에 의해서 많은 선이 존재합니다. 그 안에 선이 있었다면 도움을 요청할 필요가 없었겠지만 다만 주변에 그 선이 있어서 도움을 요청했고 성경적 상담에 상담을 받고자 했던 것입니다.(성경적 상담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논외로 합니다) 성경적 상담을 받으려고 할 때 그 사람에게는 주변에서의 선이나 은혜가 있습니다. 중풍병자를 네명의 친구가 예수님께로 데리고 왔듯이 그렇게 부모나 자녀나 배우자가 상담을 권해서 마지못해 오게 됩니다. 본인이 올 때에는 더욱 성경적 상담에 대한 소망이 있는 경우입니다.
그럴 때 그 상황에서 '은혜의 소원'을 갖게 합니다. 도움을 받으려고 하는데 그를 박대해서 내보내는 것이 아니고 그에게 준비가 안되었으니 변화를 이룰 수 없다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변화되기 위해서는 변화의 소원, 은혜의 소원을 가져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붙들면서 그는 변화될 수 있고 은혜를 사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성경의 인간론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방법론을 적용하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것이 전도이든 혹은 변화이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어떤 식이든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