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지] 2021년 9월 <44호> 주제:직장문제
*소원상담센터<소식지> 2021년 9월 <44호>
주제: 직장문제 <1>성경적상담의 용어설명 : "직장문제" 직장은 모든 사람이 성인이 된 이후에 경험하는 노동과 소득이 발생하는 영역입니다.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한다고 감안하였을 때 학교의 영역보다 더 오래 지속되며 은퇴할 때까지 지속되기 때문에 말 그대로 한 평생 진행되는 영역이 됩니다. 또한 직장이 어떤 곳이었는가는 각 사람의 마인드와 사고방식을 결정합니다. 하나의 일을 오래 하게 되다 보면 그 일에 맞추어진 사고방식과 행동모습을 갖게 되기 때문에 그 일을 하는 사람 특유의 '직업정신'이 발현됩니다. 한 사람이 평생 하나의 직장만 갖게 되는 법은 없습니다. 다양한 직장과 직업을 가질 수 있고 이러한 직장의 영역은 풀타임, 파트타임, 아르바이트 등으로 시간 구성별로 세분되어서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2>이 달의 학생인터뷰: 이희만 목사님
1.지금 어떤 일을 하시며 현재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저는 목회자로서 신학교에 입학한지 40년이 되었네요. 은퇴준비를 하면서 주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2.어떠한 계기로 이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셨나요?
목회를 하면서 늘 아쉬운부분이 인간관계요. 신앙 생활이 사회생활에 어떻게 도움이 되게 할까 하는 질문이 마음속에 있었는데 아내가 어느날 공부하는 것을 어깨너마로 보았더니 니덧이 바오 내가 찾던보화였구나 라는 마음에 공주하게 되었습니다.
3.공부하는 부분에 있어 어려운 점은 없는지요?
공부하는데 지금까지는 없었는데 지금3학기 마치고 4학기 등록한 상태입니다만 기계를 만지는 일에 익숙하지 못해서 앞으로 숙제가 자유하지 못할 것같습니다.
4.성경적 상담을 공부한 후 삶 속에서 활용하고 계신 부분이 있으시다면?
공부하는데 지금까지는 없었는데 지금3학기 마치고 4학기 등록한 상태입니다만 기계를 만지는 일에 익숙하지 못해서 앞으로 숙제가 자유하지 못할 것같습니다.
5.앞으로의 목표는 무엇인가요?
앞으로 교회를 삼기는 분들에게 정규적으로 배워 신앙생활을 통하여 섬기는 삶에 도움주는 사람을 키우고 싶습니다. 6.기도제목을 말씀해주세요. 1) 영어로 기도하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익숙하도록 기도해주세요. 2) 중동복음화를 위해 아랍어를 배우고 있습니다. 잘 배우도록 주님집중력을 더하옵소서.
이 달의 인터뷰: 이희만 목사님 (swcounsel.org)
<3> 상담 설교
43눅 2; 41-47 예수님의 대답을 놀랍게 여긴 선생들_1
2019. 12. 29. 주. 주일오전.
*개요: 직장에 대한 하나님의 동행, 56동행,
[눅]2:41 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눅]2:42 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눅]2:43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눅]2:44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눅]2:45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눅]2:46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눅]2:47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한 해의 마지막 주가 되었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의 신앙생활의 의미를 생각해 볼 때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예수님을 알게 되었는가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많이 알게 되었다면 신앙생활이 큰 의미가 있었던 것이고 예수님을 많이 알지 못했다면 신앙생활의 의미가 별로 크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얼마나 많이 아느냐가 우리의 인생의 의미를 결정합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을 아는 사람들은 교회에서 예수님을 얼마나 아느냐에 따라서 그의 위치와 의미가 결정됩니다. 예수님을 많이 알면 알수록 교회에서 그의 위치는 중요한 자리에 있게 되고 다양한 역할을 맡게 됩니다. 반면 예수님을 잘 모르면 모를수록 차지하는 위치나 역할은 줄어들게 됩니다. 이전에 예수님을 잘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예수님에 대해서 점차 잊어버리게 되면 그 역할도 줄어들게 됩니다. 반면 이전에 예수님을 잘 모른다 하더라도 예수님에 대해서 더 많이 알게 되면 그 역할도 늘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적용될 수 있는 원리라고 한다면 직장에서는 어떨까요? 예수님을 아는 것이 직장에서의 위치나 역할에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요? 겉으로 보기에는 예수님을 아는 것이 직장에서는 별다른 의미를 가지지 못할 것 같지만 예수님을 안다는 것의 본질적인 의미를 생각해 보면 그것이 결국 직장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더욱 알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직장생활을 할 때에 얼마나 지혜를 필요로 하는지 모릅니다. 직장생활을 시작하려고 할 때에도 지혜가 필요합니다. 취직을 하려고 해도 지혜가 필요하고 취직을 해서도 지혜가 필요합니다. 맡은 일을 잘하기 위해서도 지혜가 필요하고 승진을 위해서도 지혜가 필요합니다. 직장인으로서 지혜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지혜가 없으면 일 자체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지혜를 추구하고자 할 때 예수님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지혜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믿고 끝나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믿고 시작하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인생의 방향을 결정해주시는 분이시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삶 속에서 계속해서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특별히 직장생활에서 그렇게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학교생활에서만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학교생활은 직장생활의 준비과정이기 때문에 중요하고 직장생활은 본격적인 자신의 삶이 펼쳐지는 시간이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지혜를 사모하고 그 지혜로 살아가고자 할 때에 그 직장생활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시간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지혜를 계속 의지하고자 할 때에 그 지혜로 계속 채워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지혜로우셨는지를 보여주는 오늘 말씀의 대목은 우리가 인생 속에서 계속 추구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나타내줍니다. 46, 47절입니다.
“[눅]2:46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눅]2:47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예수님은 가족들과 같이 유월절 절기의 관례대로 예루살렘에 갔다가 가족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성전에 남아서 선생들 사이에서 묻고 답하고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예루살렘을 떠난 지 삼일 후에 다시 성전에 돌아와서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예수님은 아예 3일전부터 선생들과 함께 말하고 대답하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대답을 듣는 사람들은 선생들도 마찬가지였지만 모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겼습니다.
선생들 중에는 오랫동안 배우고 익힌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평생 동안 그 일을 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예수님의 지혜와 대답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단지 놀라워할 뿐이었지 너무나 수준이 높아서 온전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직장에서 예수님의 지혜를 사모하고 그 지혜를 항상 놀랍게 여길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의 지혜를 계속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지혜에 대해서 잠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잠]8:14 내게는 계략과 참 지식이 있으며 나는 명철이라 내게 능력이 있으므로
[잠]8:15 나로 말미암아 왕들이 치리하며 방백들이 공의를 세우며
[잠]8:16 나로 말미암아 재상과 존귀한 자 곧 모든 의로운 재판관들이 다스리느니라
[잠]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잠언 8장에 나오는 이 지혜는 예수님의 지혜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 지혜의 소중함을 사모하는 자들은 날마다 그 지혜의 공급을 바라고 그 지혜로부터 배우게 되기를 원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한 자들이 예수님을 아는 자들이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예수님을 알아가는 자들입니다. 그것은 단지 예수님을 믿었고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인생에서 지혜를 얻게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알고 그분의 마음과 생각을 따라갈 때 지혜롭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특정 직업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아니 그럴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지혜는 모든 상황에서 다 적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에서도 그렇습니다. 결국 부모님이 사흘 만에 다시 돌아와서 성전에서 선생들과 함께 묻기도 하고 대답하기도 하시던 예수님을 발견하고 난 뒤에 놀라면서 물었습니다.
“[눅]2:48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눅]2:49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부모는 예수님이 왜 이렇게 했는가를 물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근심하여 찾았던 것을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 대해서 자신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느냐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섬김과 깨달음을 사모하고 있었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가장 지혜로운 것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 방향성을 깨닫고 움직일 때에 그것은 가장 좋은 결과로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지혜는 바로 그 가장 좋은 결과로 나타나게 하도록 하나님을 향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지혜를 사모하고 그 지혜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더욱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이렇게 지혜를 추구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아볼로입니다.
“[행]18:24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
[행]18:25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행]18:26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
아볼로는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했습니다. 그가 주의 도를 배워 예수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면서 가르쳤지만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알려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세례를 가르친 것입니다. 그럴 때 아볼로는 더 잘 배울 수 있었습니다. 지혜를 사모하고 자신이 부족한 것을 더 배우고자 할 때 그는 하나님께서 연결해 주신 다른 사람에게서 더욱 중요한 것을 겸손하게 배워나갈 수 있습니다. 그로 인해서 아볼로는 더욱 발전해서 예수님은 그리스도라고 더욱 담대히 전파하였고 유대인의 말을 이길 수 있는 자로 성장하였습니다.
직장에서의 예수님의 지혜가 중요한 것은 더 큰 지혜가 있고 그 지혜를 사모하고자 하는 마음이 그 사람의 삶의 한 구석에 여전히 남아 있는 한 부분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 부분을 자신의 자만심과 거만함으로 채우고 나면 다시는 아무 것도 더 집어 넣을 수 없게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지혜를 사모하면서 자신이 완벽하지 않은 것과 자신에게 여전히 모르는 것이 있다는 것과 여전히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을 때 그 지혜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그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 반대로 어리석은 자는 자신이 아는 것이 전부이고 그 이외에 지혜로움은 없다고 단언해 버립니다. 잠언에서는 어리석은 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잠]1:22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어리석은 자들은 그 어리석음을 좋아하고 거만한 자들은 그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해서 어리석고 거만하고 미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지혜를 사모하고 지혜로 나아가고자 하는 자들은 어리석음을 멀리하고 거만을 싫어하며 지식을 사모합니다. 그래서 변화와 발전이 생기게 됩니다. 예수님을 아는 자들은 바로 예수님의 지혜로우심을 알기 때문에 그 지혜를 간구하고 의지하면서 항상 새로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살아가는 것 자체가 그 지혜를 얻는 과정이 됩니다. 직장생활이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발전이 됩니다. 이전에 몰랐던 것을 알게 되고 이전에 하지 못했던 것을 하게 되고 이전에 이루지 못했던 것을 이루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항상 놀라움과 새로움 속에 살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지혜를 발견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성전에서 예수님과 대화를 하던 선생들은 한낱 열 두 살 아이에 불과하던 예수님과 만나서 이야기를 하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교만하고 자만심에 불타는 자들은 결코 열 두 살 소년과 깊은 대화를 하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 그때에 예수님과 대화하던 선생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진지했고 심각했으며 놀라워 하면서 예수님과의 대화를 기뻐하였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삼일 동안이나 예수님을 그 부모님이 데리고 가기 전까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 지혜를 듣고자 할 때 그 지혜 속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지혜 속에 들어가 있다는 것은 주님과 함께 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과 대화를 나눌 때 선생들이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나준 것이 아니라 성전되신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이 더 높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분야에서 예수님은 어쩌면 열 두 살 소년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하는 일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마음 속에 있는 어리석음을 내려놓고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지혜를 사모하고자 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더 크고 모든 곳에 계신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그럴 때 주변의 다양한 곳에 예수님의 지혜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다양한 종류의 겸손함과 무지함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채우고자 하는 노력 속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고 깨닫고 감사하고 놀라워 하게 될 것입니다. 그 모든 만남과 애씀과 조언과 지식 속에 예수님의 인도하심이 있습니다. 그것을 발견할 때 우리도 성전에서 예수님과 이야기하던 선생들이 될 것입니다.
자신의 직업 속에서 예수님의 지혜를 사모하고 추구하고 발견하여서 더욱 예수님과 동행하게 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3눅 2; 41-47 예수님의 대답을 놀랍게 여긴 선생들 (swchurch.org)
<4> 인터넷 상담글과 답변
Q. 지속되는 우울 불안
안녕하세요, 20살 직장인입니다. 제목을 보셨겠지만, 저는 요즘 정신적인 부분과 관련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답니다. 20살이 된 올해 새로운 곳에 속해서 일을 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학교에서 벗어나 경험하는 새로운 환경들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저에게 주어지는 책임들을 견디고, 새로운 타인들과의 신뢰를 쌓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이래봤자 이제 고작 한달이 지났지만요. 물론 시작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 생기는 복잡한 생각들인 걸 인지하고 있지만...이 직장이 많은 면에서 서툴고 부족한 저에게 너무나 과분한 직장인 것 같다는 생각이 멈추지 않습니다. 소속된 다른 분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성장하려 노력해야한다는 걸 당연히 알고있지만, 저에겐 그분들이 한없이 커보이네요. 좋지 않은 말들을 들을 때마다 제 자신이 너무너무 작고 무능력하게 느껴지는 요즘입니다. 아 나도 20살인데... 이 정도 지식은 있어야 할텐데, 저분처럼 손이 빨라야할텐데, 더 독립적이어야할텐데. 나 정말 잘하고 있는걸까? 난 노력해도 이렇게 안좋은 소리를 듣는데너무 부족한 거 같아. 이 환경과 새로운 업무에 적응하기까지 한달이 충분한 기간인걸까? 내가 정말 무능력한걸까? 등등 저를 향한 무한한 비난 아닌 비난이 무의식적으로 이뤄지고 있어요. 이 모든 것이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라고 다짐하고 다짐하지만, 워낙 정신적으로 강하지 못한 사람인지라 이따금씩 무너지는 게 현실이랍니다. 하루빨리 적응하여 이 모든 불안함을 없애고 싶어요. 이것이 지속되어서 끊임없이 의식하니 제 인생이 일 가는 날과 가지 않는 날로 나뉘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요..
A. 안녕하세요. 소원상담센터 송인경상담사입니다.
<5> 상담 칼럼
제목이 좀 거창하지만 사실은 아주 간단한 내용입니다. 각 문제 속에서 상담을 어떤 방향으로 진행할 것인가에 관한 내용입니다. 성경적 상담에서 상담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것은 성경적 상담이 정말 성경적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예를 들어서 게임중독인 학생을 상담할 때 상담방향성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게임을 하게 하는 것으로 해야 할까요, 하지 않는 것으로 해야 할까요? 이혼을 고민하는 부부를 상담할 때 이혼을 하게 하는 방향으로 해야 할까요, 하지 않는 방향으로 해야 할까요?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는 것이 바로 상담의 방향성입니다. 이러한 상담방향성에서 성경적 상담은 심리상담과 다릅니다. 심리상담에서는 상담의 방향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습니다.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피상담자가 괴롭지 않는 것이고 문제가 만족스럽게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과정은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적 상담에서 이러한 과정이 어떠해야 하는가는 큰 문제입니다. 과연 성경적 상담에서 과정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성경적 상담이 성경적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경에 일치하는가 일치하지 않는가를 도대체 누가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적 상담 판사라도 있어서 이것은 성경적이다 혹은 성경적이지 않다를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적 상담이 성경적인가 성경적이지 않은가를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그 어떤 다른 사람이 성도나 목회자나 신학자가 성경적 상담이 성경적인지 아닌지를 판단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적 상담사가 자기 자신의 기준으로 스스로 정당화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성경적인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만 판단됩니다. 다만 그 하나님의 판단 앞에서 부끄럽지 않고 후회스럽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성경적 상담사는 그 과정이 성경적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중차대한 의미와 가치를 가지고 성경적 상담에서는 상담의 방향성을 결정합니다. 성경적 상담사 자신이 결정한 상담의 방향성이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방향인지를 고민합니다. 그리고 그 방향성이 맞다고 생각하고 확신할 때에 그 방향성을 피상담자와 함께 나눕니다. 그리고 피상담자가 이 방향성을 따르려고 하는지를 생각합니다. 만약 피상담자가 그 방향성을 거부하거나 그 외에 다른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을 찾아보겠지만 다른 가능성을 찾을 수 없고 그 방향성 마저도 거부한다면 성경적 상담은 더 이상 진행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성경적 상담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려는 궁극의 방향성을 갖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죄악으로 나아가려는 것이 방향성일 수는 없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지혜를 가지고 서로 자기 아이라고 주장하는 두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그의 판결 속에서 솔로몬의 핵심은 그들을 조용히 시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그들을 적절히 만족시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솔로몬은 그들 속에 있는 선과 악을 끄집어 내는 것이었고 솔로몬의 지혜 속에서 숨어져 있었고 한 아이를 놓고 서로 자기 아이라고 주장하는 가운데 가리워져 있던 진실이 드러났습니다. 어떠한 증거도 목격자도 없었지만 진정한 증거와 목격자가 있었고 그것은 바로 진짜 어머니의 타는 듯한 괴로움이었습니다. 솔로몬에게는 애초이 이러한 심판의 방향성이 있었고 그 방향성에 따라서 참된 진실을 드러냈을 때에 사람들은 비로소 여호와의 지혜가 그 속에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성경적 상담은 바로 이것입니다. 성경적 상담이 마음 속의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다만 성경을 가지고 겉으로 드러난 거짓과 위선을 덮는 것이라면 어떻게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 하나님의 지혜가 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성경은 모든 부정과 부조리와 거짓과 합리화와 정당화를 방조하는 악한 방법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그 속에 있는 선과 악, 진실과 거짓 속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진실을 드러낼 때에 죄인이 자신의 죄를 용서하시는 구세주를 만나게 되며 악인이 그 죄를 중단하기를 바라시는 창조주를 만나게 되고 연약한 자가 그 연약한 마음을 돌이켜서 의를 향하여 담대하게 하시는 보혜사 성령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이 성경적 상담의 방향성이며 우리가 추구하는 상담속에서의 인생의 진실입니다. 그럴 때 종종 피상담자들이 이러한 성경적 상담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생각의 의미도 드러납니다. 왜 이렇게 마음의 본질을 드러내는 성경적 상담을 하지 않으려고 할까요? 그 이유는 마음 속에 감추어진 진실을 드러내기 싫었고 숨겨놓은 거짓을 고백하고 싶지 않았고 익숙해진 악순환을 바꾸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피상담자들이 성경적 상담을 하지 않는 것이고 그럴 때 아쉽게도 성경적 상담은 더 이상 진행될 수 없습니다. 정말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었지만 더 이상 건드릴 수 없고 도와줄 수 없게 되어 버립니다. 왜냐하면 성경적 상담은 드러내고 싶지 않은 진실을 드러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진실의 존재가 있기 때문에 성경적 상담은 오늘도 또 다른 문제에서 가장 선한 방향성을 고민합니다. 그리고 성경적 상담사는 또 다른 피상담자와 함께 하나님께서 알게 하시는 것과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과 성령님의 힘주시는 것을 힘입어 문제해결을 위해 나아가며 사랑과 희락과 화평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적 상담의 방향성입니다. 그 방향으로 나아갈 때 비로소 성경적 상담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진실한 과정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적 상담을 하는 사람들은 이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방향성 속에서 하나님 앞에 서고자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갈 때까지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고자 합니다. 오직 이러한 방향성이 존재할 때에 그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 펼쳐집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간절히 찾고자 하는 상담사와 피상담자를 만나 주십니다. 동방박사들이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의 계신 곳을 찾아가고자 했을 때 별을 다시 만나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모든 문제 속에서 하나님의 길을 찾고자 할 때 그 길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성경적 상담의 시간이 진행됩니다.
여러 가지 문제 속에서의 상담방향성에 대한 고찰 (swcounsel.org)
<6> 이 달의 상담소감 -이문숙 상담사
상담사님과 상담을 진행한 뒤에 그 전에 알지 못했던 다른 관점으로 저와 제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귀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 다른 상담사님과 다른 관점으로 접근할 때 제가 알지 못했던 다른 부분들에 대해서 알 수 있었습니다 물론 전에 상담을 진행할 때 나왔던 문제와 같은 내용의 문제들이 다시 불거져 나와서 그에 대한 해결방안들고 말씀들을 들었는데 중복된 내용중에서 제가 잊고 있었던 부분을 다시 리마인드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점들을 다시 회상할 수 있었고 또한 다른 상담사님과 진행하면서 전에는 알지 못했던 부분들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습니다
성경적 상담을 통해서 정신적인 치료를 진행하고 귀한 기독교적 가치관으로 제 본질적 가치관을 다지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게끔 도와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주님께 감사드리고 센터를 관리하시는 목사님 그리고 구체적으로 치료를 돕는 이문숙 상담사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7>이 달의 센터소식
2021년 센터후원 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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