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지] 2021년 6월 <41호> 학교문제*소원상담센터<소식지> 2021년 6월 <41호>
주제: 학교문제
<1>성경적상담의 용어설명 : “학교문제"
인생의 여러 가지 영역 중에서 학교영역은 사람이 태어난 후에 교회 다음으로 경험하는 사회생활입니다. 한 사람은 아기로 태어난 후에 가정에서 성장하고 자란 뒤 교회에서 사람들을 만나 환영받으며 또래의 친구들을 사귀게 됩니다. 여기까지는 가정과 교회의 영역을 경험한 것이고 그 다음에 경험하게 되는 영역이 바로 학교입니다. 유아원이나 가정보육원 같은 탁아기관이나 혹은 어린이집, 유치원과 같은 교육기관을 통해서 아이들은 학교라는 새로운 세계를 접합니다. 그곳에서 등하교를 경험하고 생활지도를 받으며 식생활이나 수면시간, 놀이활동 등의 다양한 체험과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경험하는 학교에서의 경험은 아이의 성장과 함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등으로 발전하게 되고 그렇게 몸과 마음으로 느끼는 많은 경험들은 한 사람의 성격과 유형과 인생관과 세계관 등을 결정하는데 영향을 미칩니다. 그 경험들이 좋은 것이 되기만 한다면 너무 좋겠지만 때로는 나쁜 것이 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심각하거나 치명적인 것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날 학교에서의 경험이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범죄의 기회가 되며 개인적인 삶의 종결까지도 이르게 한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여러 미디어와 매체를 통해서 접하고 있는 일들입니다. 그 학교라는 영역에서의 문제를 잘 극복할 때만이 그 다음에 펼쳐지는 직장과 사회의 영역을 맞이하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은 학교에서의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학교생활에서의 위험성과 두려움을 회피하고자 홈스쿨링이나 독학 등의 방법을 선택하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에서의 또 다른 위험성과 위기의 존재는 이 문제가 단순히 피한다고 해서 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홈스쿨링을 해도 그 속에 형태가 다른 작은 학교가 존재하는 것이고 독학을 한다 하더라도 학업을 연마해 나가는 방법과 과정은 유형만 다른 학교의 모습일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학교라는 영역은 단순히 유아원,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만을 지칭하는 공공교육기관 뿐만이 아닙니다. 모든 배움이 일어나는 장소와 시간과 환경을 의미합니다. 학원과 교육사이트와 교재와 서적과 배움을 지향하는 모든 형태의 영역이 전부 학교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노인들의 경우에도 데이케어 센터나 양로원 등에서도 다양한 학습의 시간이 존재할 때 그곳을 학교라는 영역으로 지칭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펼쳐지는 학교의 영역 속에서 생겨나는 문제는 영역을 달리해서 나타나는 직장이나 사회와 성격이 다릅니다. 배움이라는 하나의 활동이 있기 때문에 근로나 교제를 목적으로 하는 직장과 사회와 의미가 다릅니다. 그리고 배움의 활동 주변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문제들은 애초의 배움과 거리가 먼 것일 수도 있지만 그 속에서 학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무엇인가를 배우고 경험한다는 측면에서는 모두 학교 영역의 특별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적 상담에서는 그러한 점에 관심을 가지고 학교의 영역에서 생겨나는 모든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나이가 어리거나 젊거나 혹은 나이가 많거나 상관없이 동일하게 경험하는 학교의 문제 속에서 통일되게 나타나는 문제의 유형과 그에 대한 해결방법을 찾는 일에 주력합니다.
연령별로 다양한 세대 속에서 학교라는 영역으로 들어가면 대개 비슷하고 유사한 문제와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것을 고려하면 젊은 세대의 문제해결방법이 나이든 세대의 문제해결방법과 유사할 수 있고 나이든 세대의 문제를 이해하는 것은 젊은 세대의 문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그 연령대가 어떠하든지 어려움과 문제를 느끼고 고통스러워 하는 데에는 동일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연령과 상관없이 육체의 문제로 괴로움을 느끼는 것처럼 마음의 문제로도 괴로움을 느낍니다. 그 괴로움을 찾고 유사성을 발견해서 각자에게 필요한 해답을 제시하고자 할 때에 성경적 상담은 놀라운 도구와 길잡이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그렇게 인간의 시작과 진행과 마지막을 살펴보시기 때문에 성경을 통해서 가장 지혜롭고 효과적이며 실제적인 도움을 주고 계십니다. 성경의 원리 속에서 문제해결의 길을 찾으려고 한다면 학교의 문제는 이 세상에서 자신만이 경험하는 특별하고 불가해한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도우심 속에서 능히 해결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새로운 도전과 응전이 될 것입니다. 성경적 상담은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도움을 찾고자 하는 자에게 빛이 되며 나침반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도움을 통해서 학교문제를 해결하고 그 영역을 거쳐가는 동안 발견해야만 하는 가장 귀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적 상담을 통해서 학교문제를 해결하고 발전시켜서 하나님의 귀한 성도로 성장하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2>이 달의 학생인터뷰
1. 지금 어떤일?
6. 기도제목 https://swcounsel.org/b/notice-1050
<3> 상담 설교
20잠 8; 12-17 지혜를 찾는 자들이 얻게 되는 것들_1
*개요: 학교를 통한 하나님의 용서, 14학교-54용서, 4시가서, 2관점
[잠]8:12 나 지혜는 명철로 주소를 삼으며 지식과 근신을 찾아 얻나니 [잠]8:1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잠]8:14 내게는 계략과 참 지식이 있으며 나는 명철이라 내게 능력이 있으므로 [잠]8:15 나로 말미암아 왕들이 치리하며 방백들이 공의를 세우며 [잠]8:16 나로 말미암아 재상과 존귀한 자 곧 모든 의로운 재판관들이 다스리느니라 [잠]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배운 사람이라서 다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또한 ‘배운 사람인데 이상하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배우고 익힌다는 것은 지혜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인가를 배운다는 것이 항상 지혜롭게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 학교의 영역을 통해서 사람들이 얻게 되는 것은 지혜입니다. 모든 배움의 현장에는 어떤 식으로든지 지혜가 있습니다. 그 지혜를 얻게 되면 뭔가 삶에서 그 지혜를 활용하고 나타내리라고 생각합니다. 지혜를 배웠기 때문에 지혜로워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지혜를 배웠다고 해서 항상 그 지혜를 추구하며 그 지혜를 따라서 살아가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유로든지 그 지혜와 반대로 나아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는 항상 지혜를 따라 나아가고자 노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 속에서 배워야 하는 궁극적인 교훈이 바로 이것입니다. 학교의 영역을 통해서 지혜를 계속 추구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배웁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다시 어리석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어리석음에 빠질 때 사람들은 끊임없이 어리석은 죄를 저지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혜롭다는 것은 그 반대로 지혜롭지 않다는 것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지혜롭지 않음이 있기 때문에 지혜로움이 빛을 발합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지혜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와 함께 세상의 어리석음도 있습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가 있었지만 미련한 다섯 처녀가 있었던 것 같이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인생들은 끊임없이 슬기로움과 미련함 속에서 선택해야 합니다. 지혜로움과 어리석음 속에서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지혜를 깨달은 자들은 어떻게 그 지혜로 나아갈 수 있는지를 아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항상 지혜로 나아가고자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지혜로운 자들이 됩니다. 무엇인가를 배운다는 것은 그런 지혜를 얻게 합니다. 지혜를 배웠고 그 지혜를 습득하는 데에는 탁월하다 하더라도 그 지혜대로 살아가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여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에게는 죄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었고 죄를 짓고 있으며 앞으로도 죄를 지을 것입니다. 인간에게 죄문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그 생각하는 것과 판단하는 것에서 죄를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는 욕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1장에 나오는 대로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게 됩니다. 그 욕심 때문에 아무리 지혜를 배워도 지혜롭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제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계속해서 지혜를 추구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지혜는 한번 배우면 항상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지혜를 추구할 때에만 죄를 버리고 의를 이룰 수 있습니다. 12,13절을 보십시오. “[잠]8:12 나 지혜는 명철로 주소를 삼으며 지식과 근신을 찾아 얻나니 [잠]8:1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지혜는 명철이 주소이며 지식과 근신을 추구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지혜가 깃드는 곳은 바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곳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할 때 지혜를 추구할 수 있습니다. 악을 미워하기 때문에 지혜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지혜로 나아갈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은 땅에서 멀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늘과 땅이 천지차이이기 때문입니다. 바다로 나아간다는 것은 육지에서 멀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육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는다면 바다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와 같이 지혜로 나아간다는 것은 어리석음에서 멀어진다는 것이고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함께 이루어져야만 올바른 것이지 하나만 이루어진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왜 지혜를 배워도 항상 지혜롭게 되는 것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 지혜를 배우는 이유가 자신의 욕심을 추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지혜를 배워도 어리석게 됩니다. 나중에는 ‘배운 사람이 왜 그렇게 하느냐’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다양한 배움의 터전을 통해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고자 하십니다. 모든 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만큼 지혜로우신 분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처럼 그 존재하는 모든 것이 운영되고 작동하는 원리도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사물들과 대상들과 존재들만 위치시켜 놓으시고 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을 다스리시며 운행하시고 섭리하십니다. 우리는 바로 그러한 영광스러우신 하나님으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그 영광을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권위로부터 깨닫습니다. “[잠]8:14 내게는 계략과 참 지식이 있으며 나는 명철이라 내게 능력이 있으므로 [잠]8:15 나로 말미암아 왕들이 치리하며 방백들이 공의를 세우며 [잠]8:16 나로 말미암아 재상과 존귀한 자 곧 모든 의로운 재판관들이 다스리느니라” 여기서의 나는 ‘지혜’입니다. 온전한 지혜는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는 계략과 참 지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명철과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로 말미암아 왕들이 치리하고 방백들이 공의를 세웁니다. 하나님의 지혜로 말미암아 재상이나 존귀한 자나 모든 의로운 재판관들이 세상을 다스립니다. 그 놀라운 지혜로움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허락하신 지혜와 명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들이 욕심을 내면서 지혜로움을 포기한다면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지혜는 무의미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정말 계략과 참 지식과 명철과 능력을 사용해서 치리하고 공의를 세우고 다스린다면 그들의 위치는 공교하고 모든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으면서 세상을 잘 다스리게 됩니다. 왕들은 많고 방백들은 다양하며 재상과 존귀한 자와 재판관들은 계속 등장하지만 지혜로운 자들만이 그 위치를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이전의 지혜로움은 이전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항상 지혜로울 때 항상 지혜로운 결정과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있는 위치와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지혜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다음부터 어리석음을 추구하게 됩니다. 어리석음을 추구하게 되면 그것은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영국의 유명한 지도자였던 윈스턴 처칠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2차 세계 대전을 연합국의 승리로 이끌었던 주역이었습니다. 그 당시 세계의 운명을 결정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프랑스가 2주만에 독일군에게 함락되었을 때 프랑스를 도우러 갔던 영국군 주력부대 35만명이 덩케르크(Dunkirk)반도에서 독일군의 총공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독일군은 영국 함락이 눈앞에 있다고 생각하고, 육, 해, 공군의 총공세를 준비하였습니다. 영국군은 큰 위기를 맞았습니다. 그 때 처칠(Winston L.S. Churchill)수상은 영국에 비상 방송 연설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우리 영국의 아들 35만명을 잃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합시다. 모두 일손을 놓고 하나님께 기도합시다." 방송을 들은 영국 국민들은 일손을 멈추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사모하며 기도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독일군 진영에 폭우와 폭풍이 몰아쳐 비행기가 뜰 수 없었으며 배도 출항할 수 없었습니다. 영국군은 도버해협(Strait of Dover)을 건너 무사히 탈출하였습니다. 그리고 재정비하여 반격함으로써 연합군이 승리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서 마침내 2차대전이 끝났습니다. 그런 위기에서 지도자로서 기도하자는 말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은 어쩌면 무기력한 모습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지혜로움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참된 능력이 있으신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정말 날씨는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상황을 도와주었고 그러한 선택은 옳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정말로 들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우리가 각자의 삶 속의 위치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겸손과 선한 행실과 지혜로운 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고 그럴 때 악을 미워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렇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엄격한 것으로도 나타납니다. 자신이 틀렸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처칠의 비서가 일간신문을 들고 들어와 처칠 앞에서 그 신문사를 맹비난했습니다. 처칠을 시가담배를 문 불독으로 묘사한 만평을 실었기 때문입니다. 처칠은 신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가 막히게 그렸군, 벽에 있는 내 초상화보다 훨씬 나를 닮았어. 당장 초상화를 떼어버리고 이 그림을 오려 붙이도록 하게." 그는 자신의 비판자들에게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명언을 남겼습니다. “비판이란 것이 별로 달가울 것이 아닐지 모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꼭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인체에서 고통이 하는 일과 똑같은 기능을 갖는 것으로 잘못된 상황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켜 주는 것이다.” 이러한 예화에서 다시 한번 발견하지만 우리는 삶 속에서 끊임없이 지혜를 찾아야 합니다. 그 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 가장 궁극적인 지혜를 만나게 됩니다. 잠언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잠]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지혜를 사랑하는 자들이 지혜의 사랑을 입게 됩니다. 지혜를 간절히 찾는 자들이 지혜를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단순한 지식이나 기술이 아닙니다. 지식과 기술도 지혜와 명철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악을 이루기 위해서 쓰일 수 밖에 없습니다. 중립적인 모든 도구는 그 이상의 선을 향하거나 혹은 악을 향하는 방향에 의해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지혜를 얻고자 할 때 우리는 진정한 지혜를 하나님으로부터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와 그 지혜를 얻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야고보서는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약]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하나님께서는 지혜를 구하는 자에게 지혜를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나아가서 용서를 받으며 지혜롭지 못한 내 자신을 후회하고 자책하면서 지혜로움을 얻어야 합니다. 그럴 때 이전의 악순환을 끊고 새로운 선순환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선순환 속에서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을 얻으면 모든 것을 얻는 것입니다.
지금도 무엇인가를 배우는 시간이 우리에게 펼쳐져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서 배울 수 있고 모든 상황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특별히 무엇인가를 더욱 배우게 되는 상황이라면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 속에서 용서의 은혜를 누리고 계속 지혜를 얻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가 얻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시면서 우리를 받아주십니다. 우리가 주님께로 나아오기를 주님은 기다리십니다. 그래서 그 지혜로 채워지고 주님과 함께 있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럴 때 주님은 우리를 얻으시는 것이고 우리는 주님을 얻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삶 속에서 이러한 배움과 가르침의 의미와 가치를 생각하고 항상 하나님께 나아가서 그 지혜로 채워지는 귀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swchurch.org/b/sermon-1307
<4> 인터넷 상담글과 답변
[학교문제] 친구관계로 힘들어하는 친구를 도와주세요
Q. 저랑 친한 친구가 다른 친구한테 자기가 들었던 다른 사람의 안좋은 이야기나 뒷담을 좀 자주 하고 다녔어요 성격이 막 나쁘고 이상한 그런 친구는 아닌데 가끔 그 때 느낀 감정에 따라서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욕하면서 말해버리는 친구거든요 그래서 몇번이나 다른 사람 욕 쉽게 하고 다니지 말라고 말을 했는데 결국 일이 터져버렸어요 제 친구한테 그런 이야기를 들었던 친구가 그 이야기들을 소문을 내버렸거든요 그래서 윗 학년 선배가 찾아와서 제 친구한테 뭐라고 말을 하고 갔고 저랑 제 친구랑 친하게 지내던 친구 두명이 있는데 그 친구 두명이랑도 사이가 멀어졌어요(저는 그 친구 둘과 아직 친해요) 이렇게 친구관계로 힘든 일이 겹치면서 친구가 많이 힘들어해요 그래서 ㅈㅅ하고 싶다 전한 가고싶다는 등 부정적인 이야기를 자주 해요 안 그럴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평소에도 자존감이 많이 낮은 친구라서 불안해요 어떻게 말을 해주면 좋을까요 전 지금까지 위로의 말보다는 제 친구가 자신의 잘못을 알아차렸으면 좋겠어서 솔직하게 객관적인 입장으로 친구가 잘못한 것들을 말해줬거든요 어떻게 말해야 친구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A. 안녕하세요. 소원상담센터 이명선 상담사입니다.
감정적으로 말을 한 것이 문제네요. '몸에 좋은 약은 쓰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듣기 좋지 않은 말이라도 감정이 실리지 않으면 그것이 약이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본인의 감정이 실리면 비꼬는 말로 들릴 수 있고 독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그 때 느낀 감정에 따라서 이야기를 하면서 사건이 왜곡되어 전달이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에게 감정을 자극하게 되면서 더 큰 감정을 일게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일이 터져버린 것이지요. 그러니 이런 상황을 지혜롭게 설명해 주세요. 그리고 왜 감정을 따라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욕하는지를 잘 살펴보세요. 그 친구가 마음 깊이 뭔가 원하는 게 있는데 그것이 채워지지 않아서 그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차피 채워질 수 없는 블랙홀로 빠져들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친구의 이야기는 다른 사람만 힘들게 한 것이 아니라 결국은 본인에게도 엄청난 악순환으로 몰고 가게 된 것입니다. 그 친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그 원하는 것들을 극복하기 위해서 선한 것으로 채워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친구에게 좋은 도움이 될 수 있길 바라고 질문이 있으면 메세지 남겨주세요. <5> 상담 칼럼
내리쬐는 태양과 뜨거운 동풍(욘 4:8-9)
모든 갈등의 시작은 항상 어려움이 닥치면서부터입니다. 영화를 보아도 드라마를 보아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도 갈등은 대개 주변 상황이 어려워지면서부터 시작됩니다. 하지만 그러한 어려운 상황이 닥쳐온 이유에는 그전에 선행되는 근원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그 근원을 따질 수는 없습니다. 그 근원은 좀더 깊숙한 곳에 있기 때문에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밝혀집니다. 그래서 먼저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힘든 상황이 찾아오는 것이 시작이고 그 힘든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갈등이 커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커져간 갈등으로 인해 안좋은 결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애초에 왜 그런 힘든 상황이 시작되었는가는 알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어떤 ‘욕구’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렵고 힘든 상황이 시작되었을 때 중요한 것은 그 상황에 어떻게 반응하느냐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반응 속에 감정이 있고 그 감정을 잘 들여다 보면 모든 일의 근원인 욕구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누군가 우리를 화가 나게 합니다. 그럴 때 중요한 것은 화가 날 때 우리는 어떠한 반응을 보이는가 하는 것입니다. 화가 날 때 그 분노를 아무 주저 없이 그냥 폭발시킵니까, 아니면 그 분노를 인내하고 참습니까? 아니면 자신의 분노를 가라앉히고 나서 더욱 좋은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애를 씁니까? 이런 식으로 문제에 대해서 반응이 어떠한가를 살펴볼 때에 우리는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감정적인 반응이 무엇인가를 살피고 그 반응을 바꾸기 위해서 노력하고 그 반응을 좋은 것으로 변화하게 만들기 위해서 애를 쓸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됩니다.
그렇다면 왜 처음 시작된 힘든 상황 자체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볼 수가 없을까요? 왜 문제 상황을 변화시켜 주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시험이 어려워서 괴로워하는 학생에게는 시험을 보지 않을 수 있게 해주고, 친구가 없어서 외로워하는 청년에게는 친구를 구해주며, 직장을 구하지 못해 좌절하고 있는 구직자에게는 직장을 갖게 해주고, 재정적인 문제가 있다면 그 재정적인 어려움을 무조건 대신 감당해주고 도와준다면 당장에 문제상황이 사라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악한 결과도 사라지고 악한 열매도 사라지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상황자체를 바꿔버리는 것이 더 효과적이고 더 요긴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래서 사람을 변화시키고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다면 이 말씀을 잘 읽어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려고 하고 그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이 말씀의 의미를 꼭 잘 기억해두어야 하겠습니다. 본문 말씀에는 사람에게 왜 상황적인 어려움이 닥치는지 그 이유가 나타나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등장하는 요나의 힘든 상황은 날씨와 관련한 것이었습니다. 그에게 '뜨거운 동풍'과 '내리쬐이는 햇빛'이 생겼던 것입니다. 8절 상반절입니다.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욘4:8)" 그 뜨거운 동풍과 내리쬐는 햇빛은 어디서부터 온 것입니까? 그 동풍과 햇빛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목적과 계획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요나의 무엇인가를 드러내고자 하셨고 요나의 마음속의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로 하여금 그 자신이 부인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도록 그런 어려움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그 문제상황을 없애려고 한다고 해보십시오. 그것은 누구를 막으려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막으려고 하는 것이며 그분을 거역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접근방법은 문제해결에 효과가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됩니다. 시험을 앞두고 괴로워하는 학생에게 시험을 아예 안볼 수 있게 하는 것은 시험을 통해 실력을 쌓게 할 수 없게 만듭니다. 친구가 없는 청년에게 친구를 대신 구해주는 것은 그 자신이 직접 친구를 사귈 수 있는 노력을 하지 않게 만듭니다. 직장을 구하는 사람에게 대신 직장을 갖게 해주는 것은 스스로 직장을 갖기 위해서 해야 하는 자기 자신의 발전과 능력의 개발에 대한 의지를 잃어버리게 합니다. 재정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에게 아무런 깨달음도 없이 당장의 재정적인 어려움만을 없애준다면 근본적인 재정의 문제는 계속 될 것입니다. 결국에는 이와 같이 단순하게 문제상황을 없애주고 바꿔주는 것은 그 사람을 변화시키려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충돌하게 됩니다. 도와주려고 하는 의도는 좋았지만 대개 나중에는 도움을 주는 사람이나 도움을 받는 사람이나 서로를 원망하고 관계가 악화되는 일이 생겨납니다. 오히려 도와주었다고 해서 안좋은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상황만을 바꿔주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마음의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배가 고픈 자에게 고기를 주는 것이 아니라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앞으로는 배가 고픈 삶을 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문제상황을 서둘러 바꾸려고 하지 않고 진정한 변화를 이루기 위해서 그 상황 속에서 각 사람의 반응에 집중하려고 할 때 맨 처음으로 해야 하는 일은 여러 가지 문제 속에서 그 사람에게 정말로 괴로운 문제가 무엇인가를 찾아내는 일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도와주고 그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려고 한다면 그가 괴로워하는 전반적인 문제를 잘 이해해주고 들어주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대하면서 동시에 그가 정말로 괴로워하는 진짜 문제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림에서 보는 힘든 상황은 마치 뜨거운 태양처럼 고통을 줍니다. 그런데 보기에는 그 자체로 어렵고 괴로운 것 같지만 사실 그 속에 진짜 더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괴로움을 호소하는 사람이 겉으로는 이런 저런 문제로 괴로워하는 것 같지만 사실 알고 보면 혹은 조금 더 이야기를 해보면 정말 더 괴로워하는 구체적인 문제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때에 문제상황에 대해서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하나님의 변화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성경본문에서 요나는 자신이 처한 문제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스스로 죽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욘4:8)”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요나에게 정말 괴로운 것은 무엇일까요? 그가 진짜로 뜨거운 동풍과 내리쬐는 햇빛 때문에 괴로워했을까요? 그래서 죽고 싶다고 한 것입니까? 그건 죽을 이유가 안되지 않습니까? 그건 누가 봐도 이해가 안되는 말이지 않습니까? 좀더 타당하고 합리적인 요나가 죽고 싶어하는 이유를 찾아봅시다. 그래서 우리가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해봅시다. 그래야 그가 죽고 싶어 하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생각해도 뜨거운 동풍과 내리쬐는 햇빛으로 인해서 그가 죽고자 했다고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그건 진실이 아닙니다. 정말 요나가 죽고 싶어했던 이유는 사실 박넝쿨이 죽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또한 박넝쿨이 의미하는 무엇인가를 그가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앞서 6,7절에는 이런 부분이 나옵니다.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욘4:6,7)" 그는 자신이 아끼던 박 넝쿨을 잃어버렸을 때 슬퍼했습니다. 자신이 기뻐하였던 박 넝쿨을 빼앗겼을 때 괴로워하였습니다. 자신에게 유익을 주었던 박 넝쿨이 사라져버렸을 때 분노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요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아끼던 무엇인가를 잃어버리면 슬퍼합니다. 자신이 기뻐하던 무엇인가를 빼앗기면 괴로워합니다. 자신에게 유익을 주던 무엇인가가 사라져버리면 분노합니다. 심지어 자신이 마땅히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얻지 못하면 화를 냅니다. 기대했던 선물을 받지 못하면 슬퍼합니다. 배고플 때 밥을 못 먹거나 혹은 맛이 없으면 화를 냅니다. 남편이나 아내나 자녀가 자신의 말대로 하지 않으면 화가 납니다. 이와 같이 모든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던 것, 아끼는 것,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하고 정반대로 잃어버리고 빼앗기고 사라져 버리면 그들은 화를 내고 괴로워하고 슬퍼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진짜 괴로워하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것 때문에 생겨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에 대한 일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러한 감정을 갖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원리로 사람들의 진짜 문제상황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많은 돈을 잃어버렸는데 그가 별로 화를 내지도 않고 괴로워하지도 않는다고 해보십시오. 그렇다면 그 많은 돈의 손해는 그에게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는 그렇게 돈을 많이 갖게 되기를 원하고 바라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같은 원리로 부모님이 자녀의 비행과 문제행동에 대해서 별로 화를 내거나 슬퍼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부모는 자녀가 비행을 하지 않거나 문제행동이 사라지게 되기를 바란 것이 아닙니다. 학생이 시험을 못 봐서 성적이 떨어졌는데 별로 기분이 나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학생은 성적이 떨어지는데 큰 의미를 두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다른 원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원하지는 않던 일이 실패할 때 별로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진짜 문제는 힘든 상황 그 자체가 아니라 그런 힘든 상황으로 인해서, 또흔 어떤 상실이나 손해나 실패로 인해서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생기고 그로 인해 화를 내고 절망하고 괴로워하는 것에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자신이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화를 내지도 않고 절망하지도 않고 괴로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가 정말로 감정적이 되는 분야에 주목해 봐야 합니다. 바로 그곳에 그 사람이 정말 원하고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마음을 변화시키고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노력을 할 때 엉뚱한 것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변화시키지 않아도 될 것을 가지고 씨름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부분을 변화시키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픈 이빨을 치료해야지 안 아프고 멀쩡한 이빨을 치료하려고 한다면 시간낭비입니다. 안 아픈 부분을 치료하려다 보면 도리어 문제를 더욱 크게 만듭니다. 예전에 어떤 병원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왼쪽 발에 심각한 병이 생긴 어떤 환자는 그 왼쪽 발을 절단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수술 당일 날 의사는 커다란 착각을 해서 멀쩡한 오른쪽 발을 절단하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나중에 그 환자는 원래 심각한 병이 있었던 나머지 왼쪽 발마저 절단을 해야만 했기 때문에 결국 두발을 다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별다른 고통을 느끼지 않는 문제상황에 집중하게 되면 그러는 동안 진짜 문제상황이 진행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해서 정말로 고통스럽고 중요한 문제는 제쳐두고 엉뚱한 문제만 계속 살피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의 변화는 이루어지지 않고 별로 괴롭지 않은 문제상황만을 가지고 씨름하다가 아무런 소득 없이 끝나고 맙니다. 이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문제상황을 이해할 때에 무엇이 그 사람에게 가장 괴로운 점인가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나라의 전래동화 중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산속에서 나무를 하며 혼자서 살아가는 나뭇군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이 나뭇군에게 커다란 호랑이 한 마리 나타났습니다. 나뭇군은 이제 죽었구나하고 눈을 질끈 감았는데 이상하게도 호랑이는 자신을 잡아먹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눈을 떠 보니 그 호랑이는 자신의 앞에서 입을 쫙 벌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을 잡아먹지는 않는 것을 보니 필시 무슨 사정이 있겠다 싶어서 나뭇군은 가만히 그 입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이빨 사이에 커다란 뼈가 하나 박혀있었던 것입니다. 나뭇군은 손을 넣어서 그 뼈를 빼주었습니다. 그러자 호랑이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다음날 아침 나뭇군이 집밖으로 나와보니 커다란 죽은 소가 한 마리 집 앞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그 호랑이가 자기가 받은 은혜를 보답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문제상황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도와주려고 하는 사람에 대해서 그가 정말로 괴로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살펴봐야 합니다. 입을 쫙 벌려서 무섭기는 하겠지만 주의 깊게 살펴보면 그 사람의 마음 속에 무엇인가가 걸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성질을 내고 화를 내고 절망하고 괴로워하고 하소연을 하지만 그를 괴롭히는 것이 정말 무엇인가를 알기 전까지는 우리는 제대로 된 상황파악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때로는 아무리 도와주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주어도 별다른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문제는 그에게 정말 괴로웠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다시 말하면 그 문제가 정말로 해결을 원했던 부분은 아니었다는 의미입니다.
누군가를 도와주려고 할 때 가장 먼저 시작은 그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괴로운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그게 되면 그 괴로움이 어디서부터 왜 왔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알면 그 괴로움을 어떻게 할 지에 대한 방법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방법을 실제로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진정한 변화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 단계를 다시 말하면 '문제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문제 자체를 깨닫는 것이기도 하고 여러 가지 문제 중에서 무엇이 가장 심각한 문제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의 문제로 괴로워하는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문제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한 스스로 그 문제를 깨달았다 하더라도 정말 중요한 것은 놓치고 있는 경우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자기 생각 속에서 그 문제를 당연하게 여기면서 그건 별로 문제가 아니라는 어리석은 오해를 하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삶의 문제로 인해 괴로워하는 자를 돕고자 하는 성경적 상담자는 그 사람의 문제를 들어보고 그 사람이 정말로 괴로워하는 부분이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그 사람에게 정말 괴로운 문제를 찾아서 그 문제를 다룹니다. 그 속에 그의 다루어져야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그 속에 그의 연단되어야 하는 약점이 있습니다. 그 속에 그의 변화되어야 하는 부족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연단시키십니다. 또한 우리의 가장 사랑하는 것으로 연단 받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강한 부분은 연단하시지 않습니다. 그 부분은 원래 강하기 때문에 연단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돈에 약하다면 돈으로 연단하십니다. 우리가 명예에 약하다면 명예로 연단하십니다. 우리가 사람들의 평판에 약하다면 사람들의 평판으로 연단하십니다. 우리가 음란함에 약하다면 음란함으로 연단하십니다. 우리가 간음에 약하다면 간음으로 연단하십니다. 그래서 연단이 시작되고 그 연단에 따라서 문제상황이 시작됩니다. 요나는 박넝쿨에 약했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그 무엇인가 사라지는 상실감에 약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부분을 연단하심을 통해 그에게 무엇인가를 알려주고자 하셨습니다. 요나에게 하나님께서 무엇을 알려주시고자 했을까요? 그것은 다음에 다시 살펴볼 것입니다. 일단 중요한 것은 문제상황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가장 중요한 문제상황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단계를 통해서 여러분들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성경적 상담자로 준비되고 마음을 변화시키는 성도들로 하나님의 변화의 도구로 훈련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https://swcounsel.org/b/column-169
<6> 이 달의 상담소감 [오선미상담] 오선미 선생님 상담후기오랜시간동안 제 상태를 방치해오다 처음으로 상담을 받는데 사실 상담받은 날은 이유도 모른채 내내 울어요 이게 괜찮아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한번도 정리한적 없었던 마음을 들여다보고 생각해보는 시간이 신기한거같아요. 제가 나이도 어리지 않은데 어렸을적 상처를 말하는 것도 상담하면서 우는것도 사실 너무 쑥쓰러운데 그래도 친절하게 상담해주시는 오선미 선생님께 감사하다는 말씀 드리고 싶어요. 감사합니다.
https://swcounsel.org/b/impression-426
<7>이 달의 센터소식
2021년 7월부터 새롭게 3급강사실습지도와 3급상담사실습과정이 시작됩니다. 실습을 원하시는 분들은 아래 사이트를 통해 신청해주세요.
3급 상담 과정 신청 https://swcounsel.org/b/register1-442
3급 강사 과정 신청 https://swcounsel.org/b/register1-527 2021년 1학기 10회 자격시험 https://swcounsel.org/b/notice-1061
<8> 이 달의 신간소개
윤홍식원장님의 신간인 '성경적 상담이 중독을 바꾼다'가 나올 예정입니다. 현대인의 중독문제를 다룬 내용으로 학생들과 센터 회원분들께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 기대됩니다. 온라인 서점을 통해 구매가능하니 많은 구독바랍니다.
'성경적 상담이 중독을 바꾼다' (swcounsel.org)
<9> 후원금 내역
2021년 센터후원 내역
https://swcounsel.org/b/letter-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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