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제 감사합니다. 좋은 질문들입니다. 이러한 질문들에 답하면서 역동성에 대한 이해가 더욱 풍성해지겠습니다. 하나씩 답변드리겠습니다.
1. 욕구는 얻고자 하는 마이너스 적인 마음이고 소원은 주고자 하는 플러스 적인 마음입니다. 그런면에서 욕구는 수동적이고 소원은 능동적이지요. 또한 욕구는 부정적이고 소원은 긍정적입니다. 항상 뭔가를 받고 누리고 얻어야 하면 욕구입니다. 항상 뭔가를 주고 베풀고 나누고자 하면 소원입니다. 일반적인 소원의 개념과는 조금 다를 수 있겠네요. 가능한 좋은 의지를 그렇게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고 그것을 성경적으로 '은혜'를 추구하는 마음이라고도 합니다. 욕구는 모든 것이 다 악합니다. 스스로의 마음의 구멍과 같아서 아무리 받고자 해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자 하는 것도 욕구입니다. 은혜이자 소원은 그 사랑을 나타내려는 것입니다. 이미 얻은 것도 만족이 안되는 것이라서 블랙홀처럼 한도 끝도 없습니다.
2. 하나님의 공의의 법칙이 적용된 것입니다. 인과응보는 불교적인 가르침이고(유사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이 심판자이시고 그러한 원리를 만드신 창조자이시라는 것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불교적 인과응보는 그 주체가 없지만 성경의 공의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 심판이자 그 행위의 댓가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인과응보라 말하지 않습니다. 업보라는 말도 쓰지 않지요. 사용하는 개념이 전혀 다릅니다. 기독교의 심판은 하나님의 주되심을 보여주고 불교의 인과응보는 그냥 인간의 어려움을 보여줄 뿐입니다.
3. 하나님의 계획은 더 크고 오묘한 수준에서 진행됩니다. 진로상담에서 다루겠지만 경륜-섭리-계획 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더 큰 의미에서는 모든 것을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작은 의미에서는 항상 어떤 상황에서든지 선순환을 이루기를 원하시는 뜻으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물리학이 미시-현시-거시에 따라 달라지듯이 하나님의 뜻도 범위에 따라 달라집니다. 인간의 반응에 대해서는 항상 선순환을 이루기를 원하시는 것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4. 욥의 고난에서도 욥이 두배의 축복을 받는 것은 하나의 결과였고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욥의 마음의 변화속에 있습니다. 결과가 달라지는 것은 간단하지만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의 마음이 달라지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변화를 결과의 변화보다 더 하나님은 귀하게 여기십니다. 보석이 돌보다 귀한 이유와 같습니다.
5. 말씀하신 대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선한 반응이 가능합니다. 평생 선하기만 하고 조금의 악도 없기란 불가능하지요. 오직 예수님만이 그러한 선을 이루셨고 우리는 늘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멀어집니다. 하지만 선을 이루기 위해서 애를 쓰다보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선에 이르게 됩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예수님을 닮기를 원하시지 예수님이 되라고 하지는 않으십니다. 주어진 상황속에서 늘 변화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중요하겠습니다.
과제 잘 해주셨고 계속적인 역동성에 대한 이해속에서 더 깊은 하나님의 뜻으로 들어가게 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