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기본원리] 과제3) 6,7장 읽고 질문 만들기<고통은 변장한 하나님의 은혜인가?>
고통은 하나님의 은혜가 변장하고 찾아 온 'greac disgised' 라고 한다. 신앙인들도 고통을 하나님의 은혜의 관점으로 보는 것을 꺼려하는 경향이 있다. 지난 삶의 고통 가운데서 많은 유익을 경험했음에도 고난은 내게도 늘 달갑지 않은 주제다. 고난, 하면 생각나는게 욥기이다. 지난 수년동안 욥기서를 의도적으로 회피해왔다. 물론 혹자는 욥기는 젊은이들이 가르칠 수는 있지만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고 말한다. 자칫하면 욥기32장에 등장한 엘리후라는 젊은이처럼 '이 고통은 너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라고 일장 훈시를 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성경적 상담을 공부하다가 '고통'이라는 주제 앞에 곁눈질만 하다가 안되겠다 싶어 정면으로 응시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왜 고통의 의미를 애써 외면하고 있는가?' 자신에게 질문해보았다. 고통은 위장을 하고 찾아오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지식적으로 알고 있으면서 왜 그 말씀 언저리에서만 머무르고 싶어 했는지.......
이스라엘 백성들의 애굽노예생활에서의 자유와 해방이 그들의 행복을 보장해주지 않았다. 그들 앞의 광야는 불평거리였고 노예생활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고통거리였다. 또 그들이 70년 포로 후에 고토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모든 것이 잘되고 행복했다고 성경은 말하지 않는다. 바벨론 땅에서 지위있고 정착한 자들은 그 땅이 좋기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고토로 돌아간 자들은 바벨론 땅에서는 별로 가진게 없거나 하나님 앞에 특별한 소명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들은 꿈을 앉고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그들 앞에는 포로로 끌려가지 않고 70년을 황무한 땅에서 버텨낸 자들이 있었고, 어느날 갑자기 70년 만에 나타난 자들이 옛 선조들의 땅을 내놓으라면 그 땅을 넘겨주겠는가? 그리고 하나님의 성전을 수복하고자 했던 비전을 품었던 자들은 혼열족들의 방해공작으로 성전 착공이 어렵기만 했고, 힘들게 성전을 지었는데 그 성전은 초라하기 그지 없었고 16년이나 지연되었다.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여 70년을 기다려 고토로 돌아와 성전을 짓겠다는데, 내가 하나님일, 교회일 좀 하겠다는데 왜 방해하는지, 왜 하는 것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틀어져야 하는지, 왜 내가 물질이 없어서 하나님을 섬기는 걸림돌이 되어져서 못 넘어가는지, 왜 남편과 자녀들은 자기들 좀 돌아봐 달라고 치맛자락 붙잡고 늘어지는지......이해가 안될 때가 너무 많은 것이다. 이럴 때 찾아오는 것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절망,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젖과 꿀이 있어 모든 삶이 보장될 줄 알았는데 내 기대하고는 완전히 다른 삶으로 인해 시험이 들고 절망을 하게 된다. 내가 가야 될 세상에 나가면 크리스찬으로서 복도 받고 가난한 삶이 부유해지고, 지위도 높아지고 할 줄 알았는데 막상 나가보니 너무 힘든 전쟁터였고 내 기대와는 너무 달라 더 이상 세상에 나가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 하고 있다. 교회에서도 예전처럼 열정적으로 사역을 하는 것을 꺼려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본다. 어떻게 보면 지금의 나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한다는 이유로 관계 속에서 고통 받았던 것들이 이해되어지지 않은 부분들이 남아 있는 것 같다. 앞으로 또 그런 고통이 올까봐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두려워하고 있는 부분들이 있다. 그래서 욥기서는 나에게 뜨거운 감자였던 같다. 품자니 아프고 버리자니 아깝고!
맑은 시냇물 소리는 청아하게 들리지 않는가? 흐르는 물이 뾰족하고 모가 난 돌들과 부딪히며 내는 소리라고 한다. 우리 인생의 돌들은 물의 흐름을 가로막는 존재가 되기도 하고 절망과 고통이기도 하다. 욥이 32-38장에서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께 던진 77개의 질문에 대해 구체적으로 답했다는 말씀이 없다. 얼마 전 팀 켈러 목사님이 '고통에 답하다' 라는 주제로 강연을 한 내용 중에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기 때문에 고난 받는 것이 아니다' 라고 했다. C.S 루이스는 '고통 안에 있는 사람에게 사랑의 하나님이란 말은 어떻게 들릴까요?' 라고 물으며, 사랑의 하나님을 '하나님의 겸손'이라는 말로 풀어내면서 '자신을 강제로 사랑하고 믿도록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창조주가 우리가 최고의 선한 상태로 스스로 돌아오도록 참고 기다리시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피조물에게 선이란 자신을 창조자에게 양도하는 것, 찬탈자인 자아, 본래부터 내 것으로 여기던 것을 다시 창조주에게 되돌려 드리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우리에겐 가혹한 고통이 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피조물이 지, 정, 의를 창조주께 양도는 것을 실현시킬 때 피조물은 비로로 선해지고 행복해진다.'고 했다.
성경적 상담을 공부하면서 직면했던 '고통'의 문제에 대해 앞으로 더 관심을 갖고 대면하고 싶은 주제이다. 고통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통해 피상담자들의 고통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겠다. 나는 사람들이 겪는 고통에 대해 조금 과소평가했고 피상적으로 관심가졌다. 현재의 고통에 대한 욥의 이해는 회개로 나타나면서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게 되었다'고 고백하면서 선순환의 삶을 살게 되었듯이, 우리도 고통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통해 온전한 성숙함으로 나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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