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자녀교육 프로그램에서 엄마를 때리는 아들의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습니다. 엄마는 아들이 때리는 대로 맞고 있었고 아들은 자기 마음이 내키는 대로 엄마를 때리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상담자가 등장해서 아들을 제압하고 엄마 때리는 거 아니라고 엄하게 말해주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심리학에 근거한 자녀교육은 맞는 엄마는 어쩔 수 없고 때리는 자녀도 어쩔 수 없어서 결국에는 중간에 제3자의 개입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메세지를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식의 방법은 그 엄마와 아들이 다시 집으로 돌아가서 평상시의 삶을 살고자 할 때에 별로 효과적이지 못합니다. 상담자가 함께 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상황과 장소를 변경해서 엄마와 아들을 떼어 놓아야만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한다면 이 역시 생산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이 장면을 보는 모든 사람들이 정말 기대하는 결과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의 문제와 결과가 계속 악순환되는 이유는 엄마의 잘못과 아들의 잘못을 찾지 않고 엄마의 잘함과 아들의 잘함만을 찾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에는 아무도 바뀔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별 효과없는 장소와 상황과 환경만 계속 바꿀 수 밖에 없는 악순환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법을 개정하고 제도를 정비하고 대안을 제시하고 방법을 제공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문제있는 사람들 자신에게나 앞으로 문제가 있을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아무도 잘못한 사람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의 마음만 후련하게 할 뿐입니다. 그로 인해서 가정이 해체되고 관계가 단절되고 개개인의 미래에 대한 비전이 다 사라진다 하더라도 현재의 불편한 장면만 더 이상 생기지 않는다면 빈대 잡으려고 초가삼간을 다 태워도 후회하지 않는다는 악순환이 지속됩니다. 이것은 문제 당사자들이나 아니면 그 문제를 보는 외부인들에게나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적 상담은 이와 다릅니다. 문제의 본질이 무엇이고 그 문제의 본질에 어떻게 접근하느냐를 고민합니다. 문제의 본질은 죄에 있고 그 죄를 찾으려고 할 때 비로소 가장 좋은 해결책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주는 지혜이고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 인생의 방향성입니다. '담대함'은 바로 그러한 방향성을 보여줍니다. 왜 엄마는 아들을 두려워할까요? 왜 아들의 잘못을 강하게 나무라지 않을까요? 왜 그 죄에 대해서 함구하고 있는 것일까요? 또한 아들은 왜 엄마에게 그렇게 화를 낼까요? 왜 자신의 잘못과 어리석음을 보지 않을까요? 그것을 보면 나타나게 되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일까요?
담대함의 근거에는 더 이상 숨기거나 감추거나 피하려고 하지 않는 욕구의 중단이 있습니다. 만약 여전히 숨기려고 하고 감추려고 하고 피하려고 한다면 계속해서 그러한 행위를 통해 얻고자 하는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욕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간절히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소원이 있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 용서받고 돌이키고 앞으로는 그렇게 살지 않으려는 간절한 바램이 있습니다. 그럴 때 거짓말을 고백할 수 있는 것이고 자신의 죄를 털어놓을 수 있는 것이며 자신의 추구하는 것을 버릴 수 있고 자신이 얻고자 했던 유익이나 즐거움이 아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정의와 공의를 위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잘못에 대해서 말할 수 있고 그렇게 한 것에 대해서 책임을 질 수 있고 그럴 때 올바른 행동을 제시하고 실현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행동을 나무랄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잘못이기 때문이고 아들이 더 잘 할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어머니를 때리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다루고 인내해서 행동으로 표현하지 않는 것이 올바르고 그 올바름을 나타내고 싶기 때문입니다.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버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버리지 않으면서 바르게 할 수는 없습니다. 공정과 공의를 위해서는 자기 편의 유익을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상대 편에 치우치지 않고 자기 편에도 기울어지지 않는 온전한 판단을 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대신 심판을 봐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인생에서 그렇게 완전한 제3자란 존재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의를 위해서 자기편의 희생을 감수할 때 가장 올바를 수 있고 그것을 이루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들을 아끼려고 했다면 결코 구세주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담대함을 묵상하면서 성경적 상담이 보여주는 욕구와 소원을 생각할 때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가장 담대할 수 있을까를 알 수 있습니다. 욕구를 버리고 소원을 이룰 때, 내가 원하는 것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선택할 때 이 세상의 그 어떤 담대함보다도 가장 담대한 모습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던 것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게 담대할 때 가정에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아들은 아들대로 가장 담대한 모습으로 벌을 내리고 벌을 받으면서 가장 올바른 모습을 만들어갈 것입니다. 성경적 상담은 정말 변화되어야 하는 사람들을 변화시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