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하기 전에 사귀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대학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만나 교제를 하던 사람인데 첫사랑은 실패한다는 속설이 맞아떨어졌는지 3년을 사귀고 헤어졌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남편을 소개받아 교제를 시작했습니다. 연애 시절 남편은 “과거에 대해서는 탓하지 않겠다.” 며 자신이 과거에 연애하던 여성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남편은 과거에 대해 이야기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저는 이전 남자친구와 성관계를 가졌던 것도 아니고 남편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해 이제는 거의 잊어버린 대학시절 연애담을 말해줬습니다. 그런데 결혼 후 남편은 술만 마시면 농담처럼 이전 남자와 교제할 때 좋았냐고 묻더니 최근에는 “그 남자와 어디까지 갔었느냐“, ”같이 잠을 잤냐“는 등의 터무니 없는 트집을 잡으면서 괴롭힙니다. 저는 다 잊어버린 이야기를 갖고 왜 괴롭히냐고 하소연을 하지만 남편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기만 하는데 어떡해야 할까요?
상황:
피상담자는 남편과의 관계에서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 남편은 과거에 지나간 아내의 옛 남자친구에 관해서 어이없고 터무니없는 질문을 하고 트집을 잡으면서 괴롭히고 있다.
결과:
결과는 부부의 관계에 문제가 생겼다. 관계가 멀어지는 이유는 자신에게도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지 못 하는 것 같다. 자기 생각에는 아마도 남편이 이상한 말을 하므로 남편한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한다. 즉 자신은 아무 잘못도 없다고 생각하고 모든 문제 상황의 책임은 남편에게 있다고 믿는다. 이것은 악순환이 가져오는 결과물이다. 자신은 죄가 없음으로 모든 것을 남편에게 책임전가하고 있다. 물론 아내는 잘못이 없을 수 있다. 하지만 가져온 결과물에서 지금 하소연하고 있는 것이 잘못되었다.
반응:
보이는 반응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남편에게 하소연하고 있다. 즉 지금 남편에게 악감정을 가지며 화를 내고 분노하고 있다. 또한 아내는 과거에 지나간 얘기를 꺼내는 남편을 미워하고 있다. 동시에 모든 책임을 남편에게 넘김으로 자신의 죄를 부인하고 있다. 현재 보이는 반응이 얼마나 어리석고 잘못된 행동인지 인지를 못 하고 있다.
욕구:
아내는 자기기만하고 있다. 자신이 진심으로 요구하고 필요한 것은 자신의 쾌락과 편안이다. 행복하고 기쁘고 편안하고 싶은데 남편에게 화나고 그래서 남편이 밉고 이런 상황이 불편해서 싫은 것이다. 결국은 상황이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지배가 안 되니 짜증이 나고 있다.
은혜:
사람은 연약한 존재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고 싶은대로 안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지혜롭고 능력 있으신 분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붙들고 그분을 통해서 우리에게 부어진 충만함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원하는 욕구, 욕망은 절대로 채워지지 않는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제한 없는 은혜를 넘치게 주셨다. 그래서 아내 또한 그런 욕구를 버려야 된다.
결심:
사람은 고통과 고난 속에서 사는 존재다. 그 때문에 우리는 그런 상황을 지배 못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면 그 상황조차도 선순환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아내 또한 마찬가지다. 아내는 이 상황을 지배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보고 하나님이 그런 고난 속에서 선순환으로 이끌 것을 믿으면 마음 가운데서 인내심과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남편과의 관계에서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이웃사랑처럼 남편을 사랑하는 감정도 더 생길 것이다.
실천:
하나님의 뜻과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봐야 할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말씀을 더 깊이 봐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남편에게 가졌던 감정 또한 절제하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갈 수 있을 것이다. 남편에게는 사랑으로 덕을 행하게 될 것이다.
변화:
현재 상황은 하나님과 부부의 관계는 떨어지고 합의가 안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내의 변화된 모습은 하나님과 부부가 연합되어 하나가 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아내와 남편의 관계만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도 가까워지고 곧 하나가 되는 모습이다. 아내와 남편의 관계가 가까워진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문제에서 하나님이 개입하고 하나님이 주신 충만한 은혜를 바라볼 때 해결될 문제다.
소감
지금까지 수업 중에서 역동성을 가장 재밌고 흥미롭게 듣고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성경적 상담이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재밌었다. 그리고 심리상담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한계가 무엇인지 처음으로 이해가 된 것 같다. 심리상담의 한계가 무엇인지 적절하게 설명된 것 같다. 그래서 개인적인 생각은 개론과 원리 수업 때는 심리상담을 아예 언급을 안 하는게 더 좋지 않을까 싶다. 그러면 이해하는 데도 불편함을 안 줄 것 같다. 이전에는 ‘심리상담의 한계가 있고 필요 없다.’ 이렇게 말했지만 설명이 없었다. 하나의 Inference만 있었고 이것의 설명이 필요한 premise는 존재하지 않았다. 어떤 것이 나쁜데 왜 나쁜지 설명이 없으니 이해하기 조금은 어려웠고 불편성을 줬다. 하지만 역동성 ‘성경적 고찰’ 시작 부분에 이것이 잠시 설명되어서 좋았다. 하지만 여전히 이 부분에서 궁금한 부분은 많지만 앞으로 많이 배울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궁금한 것이 한 가지 있다. 악한 뿌리를 설명할 때 이것을 욕구라고 설명되었는데 지금까지 이해한 것으로는’ 욕심’이 더 알맞은 단어이지 아닌가 싶다. 지금까지 이해한 것으로는 영어 단어로도 greed라는 말이 더 맞지 않나 싶다. 영어 논문을 찾아보니 Bad Root 또한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In the counselee’s heart there are expectations, wishes, desires, and other things producing bad fruit. [...] All these things become his idols, the bad root of his problems. [...] He denies and rejects God in order to fulfill his own purpose. Thus, the counselee responds to God wickedly when he is indecisive or confronted with unbearable circumstances.” (p.42-43) 사람의 욕망과 욕심 때문에 하나님과 떨어져서 죄를 짓고 고난을 받는다고 이해했다. 하지만 욕구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이것을 너무 순화시키지 않나 싶다. 사람 또한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욕구가 존재한다. 성욕, 수면욕, 식욕. 이것이 모두 과장되고 심해지면 문제이지만 이것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 자체는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영어 논문을 봐도 expectations, wishes, desires 이 모든 것이 his idol 즉 자기가 우상숭배 할 만큼 욕구가 커졌을 때 문제가 된다고 이해했다. 그 때문에 욕구라는 말이 너무 순화되고 있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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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동성에 기초한 구체적인 내용들로 과제를 잘 해주셨습니다. 역동성의 원리를 자가상담과 주위의 가까운 사람들에게 적용해보세요. 점점 성경적 상담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흥미를 느끼게되어서 좋습니다. 계속해서 더 깊은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운데로 나가길 기도합니다.
질문에서 욕구를 욕심으로 바꾸어도 좋지만, 성경적 상담에서 말하는 욕구는' wrong heart motivation'으로써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위한 것이 아닌 자신, 즉 self-kingdom을 이루기위한 잘못된 마음의 동기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욕구는 단순한 expectations, wishes, desires가 아닙니다. 이점을 생각해보세요.
하지만 윤홍식 목사님 논문을 읽어보면 이것을 desire라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논문을 검색해보니 desire라는 단어를 총 88번 사용되었고 dynamics of biblical counseling을 설명할 때도 욕구를 영어로 계속 desire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궁금증이 생긴 이유는 제가 한국어 실력이 조금 달려서 욕구라는 의미를 잘 몰라서입니다… 만약에 제가 잘못 이해했다면 성경적 상담에서 말하는 욕구가 desire가 아니면 영어로 뭐라고 하나요? 설명하신 것처럼 욕구가 ‘wrong heart motivation'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것이 아닌 자신 self-kingdom을 이루기 위한 잘못된 마음을 설명하는 것이라면 욕구가 커지는 현상을 설명하고 이것이 변형되어 욕구의 한 단계 더 나아가 욕망 아니면 욕심을 설명하는 것 아닌가요? 그래서 저는 영어로도 desire가 아닌 greed라고 생각했는데 혹시 제가 캐치 못 한 부분이 있을까요?
용어선정을 할 때 '욕심 / 욕구'를 생각해 보면 욕심이라는 말이 너무 일상적이라서 사용하지 않습니다. 학문적이어야 해서 '욕구'라고 합니다. '욕구/탐욕'을 생각해 보면 desire/greed 가 되는데 (greed를 욕심보다는 주로 탐욕이라는 말로 많이 씁니다.) 탐욕은 너무 지나친 의미를 담고 있어서 사용하기가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욕심/욕구/탐욕' 중에서 욕구를 선택한 것입니다.
논문에서는 대략적인 뜻을 담고 있기 때문에(그때에는 용어를 정확히 규정을 하지 않았던 때라) 여러가지 표현을 썼습니다. 그 중에 나온 desire 라서 논문주제를 표현하는 것에만 참고해야 하겠습니다. (wish는 소원으로 나중에 사용합니다). 다시 말하면 논문에서 Bad root를 설명하기는 하지만 그건 일부분이고 중요한 것은 evangelism 이기 때문에 거기에 더 중점을 두어야 합니다.
정리하면, 욕구는 욕심이 아닙니다. 또한 탐욕도 아닙니다. 그냥 욕구로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바꿀 수 없습니다. 인간의 생물학적인 기본욕구와 감정을 갖는 욕구는 충분히 구별이 가능하니 이후의 학업을 통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추가로 심리학에 대한 것은 그렇게 배우는 사람들을 고려해서 앞에 배치하거나 뒤에 배치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혼란을 더 가중할 뿐입니다. 반대로 처음에는 심리학에 대해서 아무 말도 안하다가 나중에 형제님이 이해한대로 심리학의 한계를 말해주고 비판하기 시작하면 더 큰 혼란을 줄 것입니다. 처음에 심리학을 배격함으로써 그것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더 이상 성경적 상담 안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합니다. 왜 예수님께서 부자청년에게 네 모든 것을 팔고 나를 따르라고 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을 먼저 따르다가 나중에 네 모든 것을 팔라고 했다면 기분 나쁘지도 않고 한 사람이라도 더 모을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는데 그 속에 있는 깊은 의미를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본질을 말해주는 것이고 나중에는 본질의 가치를 설명할 뿐입니다.
아직도 모르는 부분이 많이 있겠지만 인간의 마음에 관해서 이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으니 소망을 가져보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greed(탐욕)가 그렇게 지나친 표현인가요? 맞습니다. 학문적으로는 최대한 중립적으로 설명해야 하고 greed는 어떤 위치며 의견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라서 사용을 안 하지만 여기서는 되는 줄 알았습니다. 성경적 상담에서는 욕구가 사람의 죄를 설명하고 있어서 어떤 확실한 생각과 의견을 가지는 것이라서 괜찮을 줄 알았습니다. 또한 성경책(NIV)에서도 greed라는 표현을 쓰고 하나님도 쓰신 표현이라 괜찮을 줄 알았습니다. 일단은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세상이 말하는 욕구와 성경적 상담이 말하는 욕구가 다른 줄 알고 그렇게 이해하겠습니다.
심리학에 관한 이야기는 제 설명이 조금 짧고 정확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은 죄송합니다. 저는 심리학 설명의 배치를 두고 말한 것이 아니고 설명과정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 심리학의 한계를 설명하는 것도 좋지만 그 부분에 알맞은 설명이 없고 안 좋다고만 설명되어서 조금은 아쉬운 부분을 설명하고 싶었습니다.
또한 부자청년 이야기도 맞습니다. 부자청년은 모든 것을 버리지 못하고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보면 예수님의 다른 모습을 더 자주 목격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끊임없이 바리새인과 유대인들과 토론하는 모습을 목격하는 것 같습니다. 이자들은 자기들이 생각하는 신앙심이 진리라고 생각해서 예수님은 끊임없이 이 사람들을 붙들고 많은 비유와 설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하려고 노력하셨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 심리학의 문제점 설명은 단순히 한 사람을 더 모으려고 설명해달라는 말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이해시키고자 하는 차원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이 세상 사람들 모두는 심리학을 더욱더 붙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도 아직 왜 심리학이 필요 없고 그게 왜 죄 된 모습인지 이해가 잘 안 됩니다. 하지만 이번 역동성을 통해서 앞으로 이것이 설명되고 이해될 것을 믿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상담의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진입구를 찾는 것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성경적 상담은 심리학이 죄 된 모습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을 받아들이기 싫으면 가세요’ 이렇게 이해가 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진입구를 차단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것은 모두 제 생각이고 의견이고 성경적 상담, 목사님, 그리고 누구도 깎아내리려고 쓰는 것이 아닙니다… 제 말이 조금 공격적으로 보인다면 죄송합니다… 그냥 하나의 피드백으로 받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 좋은 피드백입니다. 지금은 좀 의아하기는 하겠지만 그동안 이렇게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면서 현재까지 최종적으로 내린 결론적인 입장입니다. '진입구'도 중요하고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이해시키고자 하는 차원'도 중요한데 실제로 해보다 보면 '이 세상 사람들 모두가 심리학을 더욱더 붙들고 있음'을 벗어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왜 제자들에게는 '네 것을 다 팔고 나를 따르라'고 하지 않았고 그냥 나를 따르라고 하셨는지, 왜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에게는 자상하게 대화를 나눠주셨는지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좀더 시간이 지나가면 개론이 아니라(심리학과의 관계는 그냥 넘어가고) 그냥 기본원리만 혹은 그냥 역동성만 방법론만 전달할 수 있을 때가 올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과역에서는 그렇게 한 것이 별로 였기 때문에 그렇게 하게 되었습니다. 계속 피드백을 부탁드립니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서 강해질 부분은 더욱 강해지고 약해질 부분은 더욱 보완되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