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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통찰해석] When People are big, God is small (당신은 누구를 두려워하는가) 2장

 
When People are big, God is small
(당신은 누구를 두려워하는가)
2장


(번역: 윤홍식)



1부 ‘어떻게’ 그리고 ‘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두려워하는가?

이 책의 1부에서는 당신이 다음의 세 단계를 따를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사람에 대한 두려움‘에 관한 성경의 관점을 살펴볼 것이다.

1단계: ‘사람에 대한 두려움’은 성경에서 그리고 당신의 삶에서 중요한 주제임을 인식하라

2단계: 당신의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과거 어디에서 어떤 사람들에 의해 강화되었는지 깨달으라

3단계: 당신이 가지고 있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어떻게 이 세상의 전제들에 의해 강화되었는지 깨달으라


2장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 29:25)

사람을 필요로 하는 것이나 두려워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문제임을 인식 하고나서 성경을 살펴보면 그 속에는 이와 관련된 많은 설명과 심오한 가르침이 가득 차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성경에서 자주 등장하는 질문 중의 하나는 “너는 누구를 두려워하는가?”(혹은 누구를 필요로 하는가, 누구의 지배를 받는가)이다. 당신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가, 아니면 사람을 두려워하는가? 성경은 우리가 왜 다른 사람을 두려워하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세 가지 이유를 말하고 있다.

1.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을 노출시키고 굴욕감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두려워한다.
2. 다른 사람들은 우리를 거부하고 놀림감으로 만들고 무시해 버릴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두려워한다.
3. 다른 사람들은 우리를 공격하고 핍박하고 위협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두려워한다.

이 세 가지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사람들을 하나님보다 ‘더 크게’ (혹은 더 강하고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속에 생긴 그 두려움 때문에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던 스스로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권리와 능력을 다른 사람들에게 내어주게 된다.


1단계: ‘사람에 대한 두려움‘은 성경에서 그리고 당신의 삶에서 중요한 주제임을 인식하라


수치심으로부터 온 두려움

우리가 다른 사람을 두려워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들이 우리를 노출시키고 굴욕감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태초부터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범한 즉시,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게 되었다(창 3:7). 이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처음 나타난 순간이었다. ‘수치심을 의식’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거룩한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의 눈에 수치가 드러나게 되고 그로 인해 상처를 받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그 다음에는 필사적으로 감추려 하고 보호하려고 하는 상태가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잘못을 보고 계시며 다른 사람들도 이것을 볼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은 우리에게 위협이 되었다. 이제 그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된다. 그러면서 성경은 인간이 필사적으로 자신을 숨기려 하고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보호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죄로부터 온 수치심

범죄한 순간, 아담과 하와에게는 누군가 다른 사람이 보았을 것이라는 마음으로 인해 수치심이 가장 먼저 분명하게 나타났다. 그리고 나서 그보다 더욱 날카로운 하나님의 눈길이 느껴졌다. 이 수치심과 하나님의 눈길이 너무나 부끄럽고 두려워서 아담과 하와는 숨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는 숨어 버린다. 분명 아담과 하와는 그들이 범죄 하기 전에도 자신들이 벌거벗었음을 알고 있었고 죄를 짓지 않은 그 순결한 상태에서는 서로의 나신(裸身)을 아름답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죄를 지은 후의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단순한 육체의 벌거벗음이 아니라 심각한 죄로 물들은 벌거벗은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둘 중 적어도 한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더 적나라하게 벌거벗고 있었다. 서로의 눈빛은 그냥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몸과 영혼을 관통하는 송곳이 되어 상대방이 저지른 죄의 추악함을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노출되고 있다는 느낌은 죄를 짓기 전엔 전혀 그들과 상관없는 감정이었지만 이제는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모든 것이 되었다. 아담과 하와가 서로에게 노출되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 그 다음부터는 상대방에게 벌거벗은 채로 보여 진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예전엔 그들의 순수함과 아름다움 속에서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었지만, 그 순간 그들의 영혼은 추악해져 버린 것이다.
그들은 뼈 속까지 파고든 수치심을 가리고자 하였지만 동물의 가죽으로도 그것을 가릴 수 없었다. 이전의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축복은 지금은 끔찍한 고통이 되어 버렸다. 예전의 그 사랑으로 넘치던 눈길이 이제는 결코 마주하고 싶지 않은 원망과 증오가 된 것이다.
아담이 죄를 저지른 후에 느꼈던 수치심인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와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실까’라는 생각은 인간들이 경험하는 다양한 감정의 근본이 되었다.
그리고 창세기의 범죄사건 이래로 벌거벗겨진다든지 또는 타인에게 자신의 부끄러움이 노출되는 것은 히브리 문화에서 가장 큰 모욕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것은 감추어져야 할 뿐만 아니라 감추기를 원하는 인간 내면의 영적인 벌거벗음과 수치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었기 때문에 가장 큰 모욕이었다. 또한, 이러한 벌거벗음은 하나님의 보호에서 떨어져 나와 그분 앞에서 초라하게 벌거벗겨진 채로 서있는 모습을 뜻한다. 노아는 둘째 아들 함이 자기의 나체를 보았기 때문에(아마 함이 자신을 비웃었거나 손가락질하였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함의 자손들을 저주했다(참고, 창 9:20-27).
욥은 가장 최악의 불행 가운데 있을 때 자기 자신이 느끼고 있는 두려움에 대해서 이렇게 부르짖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赤身)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욥 1:21) 그는 단순히 죽음에 대해 체념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진실로 자신이 벌거벗겨지는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었고 그것은 저주아래 있게 된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던 것이다. 아모스 선지자도 이스라엘에 대한 무서운 심판을 예언할 때 이와 동일한 이미지를 사용했다. “용사 중에 굳센 자는 그날에 벌거벗고야 도망하리라”(암 2:14-16).


피해자 혹은 공범자가 되는 것에서 오는 수치심

인류의 모든 영적인 역사를 통틀어서, 두 번째 수치심이 그 다음에 나타났다. 최초의 수치심은 순전히 죄의 결과였다. 그것은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죄로 인해 더럽혀지고 벌거벗었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였다. 그 이후로 이러한 수치심은 대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경험되는 것이 되었다. 그런데 ‘죄로 인한 수치심’에 덧붙여져서 최초의 수치심을 더 고통스럽게 만드는 다른 형태의 수치심이 나타났다. 그것은 다른 사람으로 인해 함께 죄를 짓게 되었고, 동시에 피해자가 되었으며, 그로 인해 굴욕까지 받게 되었기 때문에 생기는 수치심이었다.
일반적으로 이 두 번째 수치심은 어떤 부정한 것과의 접촉에 의해 나타나게 된다. 예를 들어 디나가 하몰의 아들인 세겜에게 강간을 당했을 때 그녀는 ‘더럽혀졌다.’(창 34:5) 창 34:5 야곱이 그 딸 디나를 그가 더럽혔다 함을 들었으나 자기 아들들이 들에서 목축하므로 그들의 돌아오기까지 잠잠하였고
이 말이 그녀가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비록 그녀가 피해자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정결함은 손상되었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만약 어떤 남자가 다른 사람의 아내를 강간하였다면, 그 사람의 아내는 아무런 죄도 저지르지 않았어도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느끼게 되어 말 그대로 다른 사람의 죄로 의해 ‘벌거벗겨지게’ 된다(참고, 레 20:11, 17, 19-21). 또한 제멋대로 자란 자녀들은 그 부모가 수치와 망신을 당하게 만든다(잠 19:26) 잠 19:26 아비를 구박하고 어미를 쫓아내는 자는 부끄러움을 끼치며 능욕을 부르는 자식이니라
. 뿐만 아니라, 부정한 사람이 성전에 들어온 것만으로 성전이 더럽혀진다(시 79:1) 시 79:1 하나님이여 열방이 주의 기업에 들어와서 주의 성전을 더럽히고 예루살렘으로 돌 무더기가 되게 하였나이다
.
이스라엘 사람들이 부정하다고 판정된 동물의 사체를 만졌을 때에도 동일한 상황이 일어났다. 그것을 만진 자는 비록 그것이 우연히 일어난 일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옷을 씻어야 했고 밤이 되기 전까지 부정하게 여겨졌다(잠 11:24).
이러한 내용을 감안할 때 두 가지의 벌거벗음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우리의 죄악 된 본성과 개인적 죄로 인한 벌거벗음, 즉 ‘자신의 죄로 의한 벌거벗음’이다. 두 번째는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경험하게 되는 ‘다른 사람의 죄로 의한 벌거벗음’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다른 사람의 죄로 의해 피해당함에서 생기는 수치심은 그 원인이 자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죄 때문에 느끼는 수치심과 동일한 고통을 받는다. 피해자는 자신에게 피해를 준 다른 사람들의 죄 때문에 부끄러움과 모욕, 그리고 수치심을 느낀다. 그리고 부정함과 벌거벗음을 느끼게 되고 도저히 이러한 상태를 가릴 방법이 없음을 통절하게 느끼게 된다. 또한 피해자는 자신이 마치 모든 사정을 속속들이 아는 듯한 사람들의 매서운 시선 앞에 벌거벗고 서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사람들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신학적으로 볼 때에 이 ‘자신의 죄로 인한 수치심’과 ‘피해당함으로 인한 수치심’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이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 ‘자신의 죄로 인한 수치심’은 우리가 스스로에게 갖게 만든 것이지만 ‘피해당함으로 인한 수치심’은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갖게 만든 것이다.

>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죄로 인한 수치심’을 경험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피해당함으로 인한 수치심’을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성적인 피해를 당함으로 생기는 수치심은 ‘피해당함으로 인한 수치심’의 대표적인 예이다. 성적인 피해를 받았던 여자들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이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을 받고 있다는 피해의식에 휩싸이게 된다.
“마치 ‘강간당한 여자’라고 쓰인 팻말을 머리에 이고 다니는 기분이었어요.” 이는 성적인 피해를 당했던 한 여자가 울먹이며 내뱉은 말이었다. 그녀의 이러한 고통은 이와 비슷한 일을 당한 수많은 다른 사람들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다.
또 다른 피해자들의 말을 들어보자. “주위 사람들에게 말을 걸기도 두려웠어요.”, “만약 입을 열어 뭔가를 말하려고 하면 입에서 끈적끈적하고 더럽고 냄새나는 것이 튀어나올 것 같았어요.”
이처럼 듣는 사람의 속까지도 메스껍게 만드는 반응들은 바로 ‘피해당함으로 인한 수치심’의 결과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경험들조차 이보다 더욱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 경험인 ‘자신의 죄로 인한 수치심’을 떨쳐 버리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피해당함으로 인한 수치심’은 이미 오래 전부터 존재했던 ‘죄로 인한 수치심’을 증폭시킬 뿐인 것이다.
지금까지 성경적 상담을 해오면서 나는 피해자가 되는 것으로부터 오는 수치심 그 하나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을 거의 만나본 적이 없다. 오히려 그 피해자들에게는 그들이 당한 피해만큼이나 그들 자신이 저지른 죄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성경적인 인도가 필요하다. 그들은 상담 중에 종종 회개해야만 하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해야 했고 또 때로는 죄 사함의 약속을 믿어야 된다는 것을 배워야만 했다. 어느 경우이든지 간에 그들 자신의 ‘죄로 인한 수치심’을 그냥 지나쳐버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상담자는 사명감을 가지고 그것을 다루어야 하고 또 상담이 어느 수준에 이르게 되면 상담자의 판단으로도 피해자에게 어느 정도의 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수치심에 대해 살펴볼 때에 ‘죄로 인한 수치심’과 ‘피해당함으로 인한 수치심’의 두 영역을 비교 분석하면서 연결시킬 것이다. 나중에는 따로 따로 분리시켜 다루겠지만 지금은 죄로 인한 수치심이 어떤 상황에서 피해 받음으로 인해 증폭되어 나타나는지를 다음의 설명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자.


현대 사회에서의 수치심

오늘날의 세속화된 문화 속에서 우리는 과연 어디에서 수치심을 발견할 수 있는가? 대형 서점에 한 번 가보라. 수치심은 현대문학 속에 너무나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고, 최근에 발행된 저서 중에도 주된 화두가 되고 있다. 레온 웜서 (Leon Wurmser)의 「수치심의 가면(The Mask of Shame)」, 도날드 나단슨 (Donald Nathanson) 의 「수치심과 자존심(Shame and Pride)」, 그리고 마이클 니콜라스 (Michael Nicholas)의「숨을 곳은 없다(No Place to Hide)」는 수치심에 대해 좀더 전문적인 연구를 보여주고 있는 책들이다.
아마 당신은 이러한 책들에 대해서 잘 모를 수 있다. 그러나 ‘자존감(self-esteem)’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우리 인간 문화에서 수치심이나 창피하다고 생각하는 마음은 자신은 무가치하다는 느낌과 함께 낮은 자존감(low self-esteem)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수치심과 낮은 자존감은 아담의 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 둘은 모두 다른 사람들이 내놓는 의견들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고 그로 인해 역시 둘 다 ‘자신에 대해 만족스럽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 둘 사이의 유일한 다른 점이라면, ‘자존감’은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사이의 관계에 존재하는 문제 정도 또는 자기 자신 속의 문제 정도로 보여 지는 반면에, ‘수치심’이란 말은 우리가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한다는 의미를 지속적으로 포함한다. 여하튼 ‘자존감이 낮다’라는 것은 지금까지 성경을 통해 살펴본 ‘수치심’이나 ‘벌거벗음’이라는 의미가 일반인들 사이에서 변형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세속화된 수치심인 것이다.
‘수치심’과 ‘낮은 자존감’은 거의 서로 바꿔 가며 사용할 수 있는 말이란 것을 깨닫는다면 이젠 이 주제들을 다룬 책보다 그렇지 않은 책들을 찾는 것이 더 어려워진다. 글로리아 스테이넴(Gloria Steinem)이 쓴 「안으로부터의 혁명: 자존감의 책(Revolution from Within: A Book of Self-Esteem)」으로부터 미국의 모든 초등학교의 교과과정에 이르기까지 미국은 모든 문제의 뿌리는 낮은 자존감이다라고 결론을 내렸다고 생각될 정도이다. 나는 내 딸이 다니는 초등학교에서 있었던 교사와 학부모가 참여하는 육성회에 참석했을 때 이 학교의 최우선적인 교육목표가 ‘자존감의 강화’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른 학부모들도 이것을 열렬히 환영했다.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자존감의 강화라는 교육목표를 통해 자신의 아이들에게 그 시기에 필요한 핵심적인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나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와 아내는 우리 딸을 그 학교에 계속 보낼 것인가를 고민해야만 했다. 자존감에 대한 가르침과 자기 자신(self)에 대한 강조가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드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가? 그것은 내 자신이 확실하게 경험한 것이었다. 나의 자존감을 높이려고 노력했을 때, 나는 오히려 더욱 고통스러운 자기인식과 더욱 침울한 개인주의로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제 일반 세속 학문의 관점에서도 자존감에 관한 강조가 과연 옳은 것인가 하는 자성이 일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그들이 이룬 것 이상의 지나친 칭찬을 남발함으로 그들에게 오히려 해를 끼치고 있지는 않는가? 학교가 학생들에게 이루어 주고자 애를 쓰는 ‘자긍심(self-respect)’이란 오직 각 사람이 어려운 일에 부딪치고 위험을 감수하며 장애물들을 극복함으로써 자기 안에서 끊임없이 샘솟는 능력을 개발할 때에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는 물건을 건네주는 것처럼 그렇게 손쉽게 다른 사람에게 자존감을 제공할 수는 없다. 오히려 자기 자신에 대한 관점을 다른 사람이 마음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먼저 마음속에 낮은 자존감을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열광적으로 우리의 자존감을 강화하려는 노력들 가운데에는 성경적인 메시지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고 보면 자존감과 자기 가치를 인정받으려는 것(자기가치평가, self-worth)에 대한 지대한 관심은 우리의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생겨난 것이었다. 그 ‘현실적인 문제’라는 것은 우리가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여도 사실은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없는 자존감을 억지로 가지고서 스스로에 대해 훌륭하고 대단하다고 느낄 필요는 없다. 분명 현실 속에서 우리는 정말 흠이 많은 자들이다. 그렇지만 자존감에 대한 빈약한 근거에 기초해서 세워지는 교육은 결국에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문제가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삽시간에 붕괴되고 말 것이다. 우리의 근원적인 문제는 바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벌거벗고 있다는 것에 있다.
또한, 지금까지 살펴본 ‘낮은 자존감’이나 ‘자기 가치를 인정받으려는 데 집착하는 것’ 이외에도 수치심을 의식하게 되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경우들이 있다.

> 음란물이나 나체는 이제 서양문화의 일부로서 자리 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금기(taboo)는 아직도 남아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영적으로 숨겨짐(coverings)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옷을 입는 이유도 이 성경적 가르침을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 우리는 차로 출퇴근할 때 카오디오의 볼륨을 최고로 올려놓고 혼자서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노래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 우연히 우리를 본다면 갑자기 창피함을 느끼게 된다. 우리를 본 사람이 전혀 모르는 사람이고 다시는 그를 만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역시 그렇다. 그 사람이 우리를 이상한 듯 쳐다봄으로써 우리는 잠깐 동안이지만 우리 마음 속 깊이 들어 있는 ‘노출에 대한 두려움’을 다시 깨닫게 된다.

> 다른 사람을 얼마나 오래 쳐다볼 수 있는가에 대해서 어떤 규칙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분명한 방식이 있다. 잠깐 동안 눈이 마주치는 것은 정중한 표현이지만 오랫동안 노려보는 것은 무례한 일이며 상대방을 무안하게 만들거나 어떤 경우에는 분노를 일으킬 수도 있다. 여성들은 남성들이 자신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행동은 마치 자신을 물건처럼 취급하는 것 같다고 불평을 한다. 그런 일을 당하는 것은 자신이 벌거벗겨지는 듯한 기분이라는 것이다.

> 뿐만 아니라 환각상태에 빠진 사람조차도 이러한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대한 두려움에 관해 이야기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환각상태에 빠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해칠 것만 같은 시선이 끊임없이 따라 다니며 노려볼 뿐만 아니라 속까지 꿰뚫어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 복음주의 교회들이 얼마나 반복적으로 정직하고 자신의 마음을 개방하는 삶에 대해서 가르치는지를 살펴보라. 우리는 본성적으로 마음 열기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가르침이 계속해서 반복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스스로를 가려주는 벽 뒤에 숨고 싶어하는 것이다.


숨기 그리고 엿보기

미국에서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상태를 나타낼 때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은 ‘부끄러움 때문에 얼굴을 가린다(covering the face in shame)’는 뜻에서 변형된 다음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장벽 뒤에 있는 사람들이야(We are people behind walls).” 그리고 그 장벽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이 장벽은 폭 3미터의 두께로 아무도 들어오거나 나갈 수 없어.” 이러한 숨 막힐 듯한 은신은 우리 자신을 고립시키지만 한편으로는 우리를 다른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보호해준다. 현실적으로 이렇게 자신을 가려주는 장벽은 돈이나 명성, 성공, 직장, 바쁜 삶 등 기타 수많은 다른 요소들로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 만든 그 어떠한 장벽으로도 마음속의 수치심을 가릴 수는 없다.
이러한 장벽의 특이한 점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보는 것은 가능하도록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이 장벽에는 밖을 볼 수 있도록 내어진 작은 틈이나 좁은 창문이 있다. 우리는 스스로를 가리고 싶어 하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들을 엿보고 싶어 한다. 그렇게 다른 사람을 엿보면서 그들의 취약점을 발견하게 되고, 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거나 혹은 우리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수치심은 동행하는 자를 원하기 마련이다. 또 어떤 때에는 자신보다 훨씬 더 강력해서 자기만의 영웅이 될 수 있는 사람을 찾기도 한다. 그럴 때에는 그 영웅을 통해 자신만의 행복한 환상을 꿈꿀 수 있기 때문에 고립되었다는 느낌을 덜 가지게 된다.
여기서 환상이란 앞에서 말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장벽들 속에 존재하는 가장 행복했던 과거의 시간이다. 예를 한 번 들어보자. 폴라는 자신의 삶을 온통 환상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결코 알 수가 없다. 그녀는 성공한 독신 그리스도인으로서 직장 내에서 유력한 지위를 가지고 있으면서 사장으로부터도 인정을 받는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 또한 교회 일에 열심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녀는 밤마다 자신의 환상속의 가정 즉 환상 속의 남편과 공상 속의 자녀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녀가 이렇게 공상 속의 삶을 사는 유일한 이유는 그것이 그녀가 원하는 것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부끄러움이 노출될 우려가 없는 인간관계를 가질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빌 또한 비슷한 상황으로 갈등을 겪고 있다. “나는 내 욕구가 충족되길 원합니다. 하지만, 내 진짜 모습이 노출되기는 원치 않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속속들이 알게 되는 것이 싫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안전해 보이는 자신만의 세계를 추구하다가 그만 음란물과 자위행위에 빠져 버렸다.
솔직히 고백하지만 공상의 세계는 내 삶의 일부이기도 했다. 최근에 있었던 일이다. 나는 늘 내 몸의 상체와 손을 사용하는 기술은 뛰어났지만 발놀림은 형편없다고 생각하곤 했다. 아마도 상체를 주로 사용하게 되는 수영을 많이 해서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내 아내 샤론은 손이나 발 어느 부분이나 다 잘 사용하였고, 그래서 그런지 춤도 정말 잘 추었다. 내 생각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겸손하게 낮추시려고 그렇게 만드신 듯 하였다.
어느 날인가 어떤 댄스파티에서 아내와 멋지게 춤을 추어보려고 노력했지만 잘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파티가 끝나고 우리가 집에 돌아왔을 때 나는 춤을 잘 못 췄다는 좌절감에 괴로워하다가 어느 순간엔가 내가 멋있는 댄서가 되어있는 모습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 공상 속에서 나는 처음엔 그저 평범한 남자로 춤을 추려고 무대로 걸어 나왔는데 갑자기 너무나 멋있고 화려하게 춤을 추는 것이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내 아내는 내 모습에 반해 버린다...
여러분이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나의 환상은 우습기도 하고 처량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비교적 아무런 해가 없는 이러한 공상조차도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과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 그리고 헛된 자존심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참 재주도 없는 사람이네’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완전히 빠져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분명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또한 좀더 세상 사람들의 관점으로 말하자면 내 자신에 대해 완전히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분명 수치심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춤추는 곳에서 그렇게 한심한 모습을 보이는 건 오직 바보밖에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나는 정말 사람들 앞에서 바보가 된 기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이번만큼은 잘한다는 말을 듣고 싶었기 때문에, 그것은 헛된 자존심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었다.
이것이 자존감의 확립을 목표로 할 때에 생겨나는 모순이다. 자존감이 낮다는 것은 대개 사람이 자신의 모습을 너무나 지나치게 높게 요구하는 데서 생겨난다고 한다. 자신에게 너무 깊게 몰입되어 현재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더 많은 것을 열망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몇 분 동안만이라도 대단해지고 싶어 한다. 그래서 비록 그 어떤 평민이라도 잠시 동안만 왕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이다(그러나 그렇다고 정말 낮은 자존감이 본질적인 문제인가?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그 낮은 자존감을 키워놓아야 하는가?). 당신이 낮은 자존감을 가지고 있을 때 그것은 괴로운 일이고 스스로에 대해 불만족스런 느낌이 들게 만든다. 그러나 나는 분명 그것도 역시 자존심의 어둡고 음침한 면이라고 확신한다. 바로 왜곡되고 뒤틀려진 자존심인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스스로를 숨기고 다른 사람을 엿보는 동안에 마음속은 혼란스러워진다.
남의 사생활을 들추는 TV 토크쇼나 연예잡지가 왜 그렇게 인기가 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그런 것들은 우리 자신의 수치심의 벽 뒤에 숨어서 다른 사람들을 엿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프로그램들은 다른 사람들의 수치만 보게 하고 우리 자신의 문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유명한 사람들과는 스스로를 동일시하도록 만들어서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 잠시나마 만족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현대인이 ‘문구멍을 들여다보는 톰(peeping Tom)’이 되는 것(역주-소설 ‘엉클 톰스 캐빈’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톰이 구멍을 통해 다른 사람을 엿보는 사이에 어떤 다른 사람이 그를 엿보고 있으며 그 사람을 또 다른 사람이 비밀스럽게 엿보고 있다.


모든 가면이 벗겨지는 시간

1800년대 초엽의 덴마크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사람들의 삶은 자신은 숨기고 남은 엿보는 두 가지 행위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다. 사람들은 더 이상 벽 뒤에 숨지 않았고 그 대신 가면을 사용하였다.

가면무도회에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가면이 벗는 자정이 다가 오고 있다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는가? 인생이 항상 남을 속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자정이 되기 전에 이를 피해 빠져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전혀 이것을 두려워하지 않는가? 나는 오랫동안 자신을 남들에게 속이다가 마침내는 자신의 진실마저 잃어버리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 왔다.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다른 사람을 숨어 엿보다가 끝내는 그 동안 자신이 자랑스럽게 숨겨둔 은밀한 생각들을 다른 사람들이 따르도록 강요하는 광기를 보이는 사람들도 보아 왔다... “Either/Or" 중에서, in A Kierkegaard Anthology, ed. Robert Bretall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46), 99.

그의 말대로 매일 매일이 가면을 쓰고 다니는 할로윈 역주-할로윈(Halloween): 어린이들이 과자를 요구하면서 악의없는 장난을 벌이는 축제일. 날짜로는 10월 31일(모든 성인의 축일 전날). 초기에는 죽은 영혼이 다시 집을 찾는다는 불길한 날이며 결혼, 건강, 죽음, 행운을 점치는 날로 여겨졌으나 이교도 의식의 영향을 받아 많은 관습이 생겨났다. 미국에서 할로윈은 어린이들이 가장복을 차려입고 할로윈의 상징물인 호박등을 들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과자를 달라고 장난을 친다. 날이다. 가면을 쓰는 것은 매일 이를 닦고 아침을 먹는 것과 같이 날마다 반복되는 일인 것이다. 그러나 이 가면 무도회는 단지 잠깐 동안의 축제일뿐이다. 가면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가면이 벗겨질까봐 두려워한다. 하지만 언젠가는 정말로 그 가면과 함께 그 이외 자신을 가리고 있었던 모든 것들이 제거될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에는 어떠한 가리움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아니다. 키에르케고르는 더 깊은 두려움, 즉 하나님의 시선을 말하고 있다. 만약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 안에 있는 두려움을 일깨우는 정도라면 하나님의 시선은 어느 정도일까? 만약 사람들의 시선에 의해 우리가 벌거벗겨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면 하나님 앞에서는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말 것이다.
이런 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두려움에 휩싸인다. 우리의 마음은 떨리며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을 피하기 위해 할 수 있는 한 모든 일들을 하려고 한다. 그 중에서 하나님의 시야에서 벗어나 살려고 하는 하나의 방법은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본질적인 모습인 것처럼 생각하며 사는 것이다(즉,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이 당연히 더 크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잘못된 생각이다. 하지만, 실제로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보다 더 많이 우리의 생각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두려워한다. 물론,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인간의 실제적인 반응이다. 정말로 다른 사람들의 생각들과 의견, 행동들을 두려워하게 되는 때가 있다. 그러나 사람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더 크고 더 절박한 두려움을 최대한 숨기고 있는 것이다. 한 예로, 키에르케고르의 ‘가면 무도회’에서 인용하고 있는 성경의 한 대목을 살펴보자.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누가복음 23:28-30)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 벌거벗은 자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시선 앞에 서느니 차라리 예루살렘 산들과 바위들이 그들의 몸을 덮어서 가려주기를 더 간절히 원할 것이다.


하나님의 대답

당연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종류의 두려움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계시다. 이제 이것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보려고 한다. 어떤 면에서 복음이란 죄로 인해 벌거벗은 하나님의 대적들을 진멸하시기보다는 오히려 그 부끄러움을 가려주고 혼인잔치에 참여시켜서 그들과 결혼을 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이다. 다윗은 이러한 복음의 의미를 깨닫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시 139:1)

하나님의 시선은 벌거벗은 자에게는 저주가 되었지만 다윗에게는 오히려 축복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숨겨진 은밀한 죄가 드러났지만 그 죄를 용서받은 자들에 대해서는 보호하심을 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함은 분명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이유 때문이다. 예수님의 피로 자신들의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들은 이제 자신들이 진멸 당하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그 두려움은 높으신 하나님 앞에 그들이 죄인임을 알고 떨고 두려워했던 다윗(시 119:120)이나 이사야(사 6)와 같이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 두려움의 원인은 고백되지 않은 죄, 또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의 결여로 오는 것일 수 있다. 그리고 또한 다른 사람의 죄로 인한 피해자가 됨으로 인해 ‘더럽혀진 자’가 된 느낌에서 오는 두려움일 수 있다. 우리가 죄인인 한, 부끄러움은 영원히 떨쳐버릴 수 없는 느낌일 것이다. 우리 모두는 어쩔 수 없이 장벽과 가면 뒤에서 타인으로부터 숨어 있는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해답은 간단하다.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승천을 믿는 신앙을 통해 하나님께서 당신을 의로운 옷으로 덮으셨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분이 당신의 수치를 제거해 버리셨다. 어쩌면 이것은 두려움 많은 우리 인간들이 필요로 하는, 유일하게 우리를 자유롭게 만드는 가르침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상담을 하거나 개인적으로 여러 일들을 경험하면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을 단순히 상기시키는 것에서 더 나아가야 할 필요를 느낄 때가 많다.
예를 들면 앞에서 환상 속에 빠져있던 폴라나, 은밀한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있던 빌, 그리고 수줍음 많던 나에게는 평상시 알고 있는 복음의 진리들 이외에 다른 것들이 좀 더 필요하다는 말이다. 여기서 나는 예수님의 복음이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복음 안에는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더욱 함축된 가르침이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가?”, “나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있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나를 지키는 데에만 더 관심이 많은가?”, 혹은 “어떻게 하면 자기중심적이 되지 않기 위해 내 자신에 대해서 덜(내용과 시간에 있어서) 생각할 수 있는가?”와 같은 것들이다.
이밖에도 수치심에 대한 성경적인 치료방법에 대해서 아직도 알아야 할 것이 많이 있지만, 일단 여기서 지금까지의 내용을 정리해 보자. 성경이 ‘사람을 두려워함’을 바라보는 첫 번째 관점은 그것이 죄로 인한 벌거벗음의 결과라는 것이다. 또한 여전히 죄가 우리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움, 부끄러움, 사람들 앞에 나설 때 주눅드는 마음 등을 느낀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시선을 피하려 한다. 이럴 때 궁극적인 문제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인 것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 진정한 문제는 우리 내면속에,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 자신 사이의 관계에 있다. ‘동료 압박감(Peer pressure)’이라는 말은 바로 이것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궁극적인 문제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아니다.
또 이러한 죄로 인한 두려운 마음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더 확실히 나타나기 때문에 이것을 포괄적으로 ‘다른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앞에서 이야기했던 졸업식에서 만약 그 강당에 아무도 없고 나 혼자 있었다거나, 교감 선생님이 미리 누가 상을 받을지 미리 내게 알려 주었더라면 나는 그렇게 두려움에 조바심을 내며 떨지 않을 수는 있었을 것이다. 확실히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사실은 우리 존재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음을 느끼게 만든다. 그러나 비록 다른 사람들이 우리 자신을 그렇게 적나라하게 드러나도록 만들었다고 느낄지라도 사실은 그들이 수치심을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수치심이 이미 예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단지 다른 사람들은 그 수치심이 밖으로 드러나도록 자리를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수치심으로 인해 다른 사람을 두려워하는 마음의 근원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 우리는 지극히 거룩하시며 속마음까지 꿰뚫어보시는 하나님의 시선을 피할 수 없다. 특별히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위반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우리 죄를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10:10)는 말씀에 따라 믿음으로 죄사함을 확신하지 않는다면 여전히 하나님의 시선은 우리를 정죄할 것이고 우리는 다시 두려움에 떨게 될 것이다.
또한, 다른 사람의 죄로 인해 더럽혀짐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러한 경우, 부정하게 된 것에 대해 우리가 직접적으로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벌거벗은 상태에 있기에 오직 하나님만이 제공하실 수 있는 죄의 가려주심을 필요로 한다.


더 자세한 연구를 위한 묵상

1. 만약 자신은 다른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의 삶에 대해서 이런 것들을 한번 생각해 보라. 하나님께 고백하기는 쉽지만 다른 사람과 나누기 힘든 죄가 있는가? 사람들이 알기를 원치 않는 어떤 은밀한 죄가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답하는 것은 당신의 삶에서 사람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수치심의 근원들이 무엇인지 드러낼 것이다.

2. 당신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하는 여러 가지 기술들을 생각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을 가리기 위해 여러 겹의 장벽을 사용한다는 점을 곰곰이 생각해 보라.

3.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떤 마을에서 다섯 사람이 짓궂은 장난인줄 모르고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당신이 저지른 일을 모두 알고 있으니 즉시 이 마을을 떠나시오.”라는 통보를 받았다. 놀랍게도, 그날 저녁까지 네 사람이 그 마을을 떠났다! 그들이 이런 장난에 속은 이유는 그들의 양심이 그들의 죄를 깨닫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당신도 스스로의 양심이 당신의 죄를 깨닫게 하지 않는가?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께 당신의 죄를 회개하고 변화할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구하라. 깨끗한 양심을 갖는 일은 하나님의 큰 축복이며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나기 위한 한 방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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