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식] 이론과 실재를 시험해 보고 싶어 시작된 상담
예수님을 만난 이래, 주님의 신부가 된 이래 앞 만 보고 달려왔다. (내 입장에서 보면) 쉴 틈 없이 주님은 나를 그의 길로 인도하셨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좀 가혹하시다 할 정도로 쉴 틈을 주시지 않으셨다. 이렇게 25년이 지났다. 25년 우리 예수님의 신부로서 산 삶은 힘들고 고됐지만 고귀하고 값진 시간임에 틀림없다. 신랑 되시는 예수님과의 산 삶은 그 어느 것 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귀한 시간임에 틀림없다. 그야말로 기적의 삶을 살아왔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깊은 영혼의 터널을 빠져나와 보니 보여지는 모습은 눈부실 정도로 찬란하고 영화로운데 여기에 비쳐진 나의 모습은 피폐 그 자체였다. 내 몸과 마음은 완전히 지쳐 있었다. 이로 인해 더이상은 부부, 가정, 사역 현장에서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몸에 알 수 없는 이상 증상이 나타나면서 병원 응급실을 찾았고, 바로 완전히 통제된 공간에서 1주일 동안 검사란 검사는 다 받아봤지만 원인은 찾아지지 않았다. 하루 24시간을 48시간 처럼 살아도 부족할 만큼 일이 많은데 내가 일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3시간이 되지 못했다. 한동안 나의 일상은 일을 하기 위한 그 3시간 체력을 위해 나머지 21시간의 초점이 맞춰져야 했다. 많은 문제 중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될 수밖에 없고, 내 삶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부부 문제로 마음이 가장 힘들게 느껴졌다. 소원상담센터 원장이신 윤목사님은 이런 상황에 대해서 두 가지를 제안하셨다. 남편이 상담을 받게 하던가 아님 내가 강의를 듣고 공부해서 문제를 직접 해결하라는 것이었다. 남편이 상담을 받을 것 같지 않아서 내가 직접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개론을 들으면서 실제도 이론과 다르지 않다면, 이건 정말 엄청나고 대단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고 사역을 하면서 12일 안에 1학기 모든 강의를 다 듣게 되었다. 이건 기적이었다. 왜냐하면 25년 동안 오로지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만 교제하면서, 그 어떤 것으로도 내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학업을 포기할 정도로 모든 것이 시시했고 그런 것에 시간을 투자하는 게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12일 안에 4과목(개론, 이론, 역동성, 방법론) 32시간 강의, 잘못 들은 강의까지 합치면 40시간 강의를 무엇인가에 홀린 듯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내게 필요한 영양분들이 그대로 흡수되는 듯 하여 강의를 들으면 들을수록 더욱 건강해지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상담을 한번 받아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정말 실제도 이론과 다르지 않은 지 시험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비용 때문에 고민이 되어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때 마침 휴온스 기업후원이 제공되면서 상담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실제도 이론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시험해보고 싶은 마음에 시작된 상담.
매번 문제를 자신 있게 해결할 수 있다 확신한 상담사의 말에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왜냐하면 25년간 그 누구보다도 주님과 아주 가까이 지내오면서도 해결하고 싶었지만 해결 되지 않았던 문제들을 너무 쉽고 당연하게 해결될 수 있다 확신하니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내 모습은 이런 사라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매번 „이번에도 목사님이 승이십니다“ 라는 말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10월 15일 이후 한 주 한 주가 아니 하루 하루가 내겐 아주 스펙터클한 시간들로 채워지고 있다. 많은 문제들이 해결되었지만 이 지면에서 모든 걸 나눌 수 없는 관계로 책임감에 대한 주제를 나누고자 한다.
어린시절부터 내게 주어진 책임감. 공부 때문에 서울로 올라 와선 동생들을 책임지고, 한
집안을 책임지고, 결혼해서는 나로 인해 독일로 온 남편을 책임지고, 자녀들을 책임지고, 전체 실무를 맡고 있는 자로서 한 단체를 책임지고, 함께 일하는 동역자들을 책임지고… 이 책임감은 나를 완벽주의로 끌고 갔고 결국은 사역 과부화로
나를 옴싹달싹 못하게 옭아매는 것이 되게 하였다. 이 책임을 감당하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은 5살의 어린 나이부터 부모와 떨어져 살면서 ‚부모없이 자란 자식‘이라는 말을 들어선 안된다는 귀가 따갑도록 들은 부모님의 훈계에서 시작되었다. 이웃으로 계시는
부모님 친구분들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살게 되었고 그 시선은 인정을 받고자 하는 마음으로 내 안에서 자리하게 된 것이었다. 나도 모르는 어린시절부터 살짝 뿌려진
가라지들이 내 안에서 엄청 자라서 내 삶의 전 영역에서 뿌리를 뻗어 내리고 영향력을 행사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돌아보면 난 내가 굉장히 성경적으로 살아왔다
자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내 자신을 적나라하게 발견했고 지금도 상담을 받으면서 계속 발견 중에 있다.
여전히 한국사회가 만든 여성의 정체성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값 주고 산 주님 자녀에 대한 정체성을 온전히 가지고 있지 못한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내가 만든
율법과 한국 사회가 만든 율법에 얽매인 신앙 생활을 하면서 한번도 하나님이 누구인지 시험해 볼 생각을 하지 않으면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한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지금은 내 삶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정말 전능한 분이신 지,
불가능이란 없는 분이신 지 구체적으로 시험해보는 시간들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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