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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레노바레 영성주제 성경(The Renovare Spiritual Formation Bible)’ 서문


서론

지난 5년 동안 나는 성경연구에 관해서 내 생애 가장 풍성한 경험이 되었던 일에 몰두했었다. 우리 다섯 명은(이후로는 공동저자들이라고 부르겠다) 성경의 주제(formation)에 집중하는 방법으로써 성경 전체를 살펴보기 위해 노력하면서 그 속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이며 그로 인해 우리 영혼의 근본적인 기저가 어떻게 형성되고 확고한 신념을 갖게 되며 또한 변화되는가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이 작업은  ‘레노바레 영성주제 성경(The Renovare Spiritual Formation Bible)’으로 출판되었다.
이일을 하면서 우리가 누렸던 감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선 확실하게 해두어야 할 것은 이 작업이 우리의 혼신의 열정을 다 쏟아 부었다는 점에서 진정으로 고된 일이었다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단지 ‘일’ 이상의 그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것은 서로 간에 오고가는 역동적인 통찰 가운데 순간순간 스쳐 지나가는 창조적인 생각들이 주는 어떤 강렬하면서도 짜릿한 깨달음이었다. 그렇게 다소 분주한 과정 속에서 나는 종종 전속력으로 달리는 거친 종마를 타고 있으면서 악착같이 말갈기를 붙들고 있는 듯 한 느낌이 들곤 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우리가 모은 학문적인 많은 정보들로부터 생겨나는 새로운 개념들로 인한 흥분만은 아니었다. 그렇다. 그것은 성경에서 나타난 그 모든 하나님의 말씀과 성전, 거룩한 정적, 고요한 경배, 그리고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간구의 엄위로움 앞에서 느끼는 경외심이었다. 그리고 많은 기도들, 아침에 드려지는 기도와 저녁에 드려지는 기도 그리고 거룩한 성경 말씀에 따라서 힘차게 살아나가는 삶의 모습들과 같은 것들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아, 즐거운 웃음소리도 있었다. 깊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울려퍼지는 감격의 웃음소리였다. 그것은  말하자면 ‘거룩한 유쾌함’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모든 것에 대한 경험은 기쁘고 창조적인 것이었으며 영혼을 새롭게 만드는 것이었다. 우리는 신앙의 위인들의 마음과 정신세계에 대한 어떤 크고 거대한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와 같은 역동적인 과정 속에서 어느 순간엔가 우리는 이 ‘레노바레 성경’을 읽고자 하는 사람들이 우리가 연구하였던 예를 들면, ‘임마누엘의 원리’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 대한주제가 주는 흥분과 놀라움과 같은 것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를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 에 대한 관점이 거대한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목표가 무엇인가에 대해 얼마나 잘 보여주는 지를 그들 스스로 깨닫게 할 수 있을까?  수많은 세기를 거쳐 여러 명의 성경저자들을 사용하시면서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그토록 확고부동하게 성경을 발전시켜 왔으며 그래서 진정한 삶에 대해서 우리에게 알려주고 삶의 복잡한 변천 속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법에 대해서 자세히 가르쳐 왔는가를 알게 할 수 있을까? 또한 역사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계획이 모든 사람들을 포괄하는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었으며 어떻게 이 공동체 안에 하나님 자신이 가장 주된 후원자요 가장 영광스러운 구성원으로서 거하신다는 것을 알게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성경의 일체성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할 뿐만 아니라 그분의 능력을 통해 이루어지는 가치 있는 삶을 살고자 하는 역동적인 공동체의 실재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알게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이와 같은 영적인 주제들에 대한 안내서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 모두를 성경에 대해  전체적인 조망을 할 수 있는 여행으로 인도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안내서를 통해서 우리는 구약이 하나님께서 자신이 선택하신 민족인 이스라엘과 사랑의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하시는 것을 어떻게 나타내고 있는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 세계의 모든 민족들이 축복을 받게 되었는가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랑의 관계를 추구하심’이 초기족장들의 삶과 그 이후에 노예로 있었던 애굽에서 나와 약속된 땅인 가나안으로 들어가서 각각의 지파가 분리되고 나라가 형성되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런 다음 신약은 하나님께서 그 ‘사랑의 관계’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얻은 신분을 통해 하나님의 소유가 된 사람들에게 이루시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19-22)

성경이 더 이상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 부분에서도 성경주제에 대한 이해는 인간의 역사 너머에서 인간본성에 대한 하나님의 목표가 성취되는 것을 바라보게 하는 새로운 창을 연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계 21:3)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의 원리가 결국에 하나님께서 창조와 구속 가운데 항상 적용하셨던 원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만이 현재 지구상에서 펼쳐지는 인간의 삶을 올바로 인도하는 것이고 뿐만 아니라 우주의 미래에 대해서도 밝혀준다. 물론 내가 여기서 언급한 몇 가지의 예들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흘러 나와서 인간 영혼의 메마른 부분을 적셔주는 생명의 원대한 강줄기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명절 끝날 곧 큰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요 7:37-38)
 
그러므로 이 안내서는 우리 각 사람이 성경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놀라운 우주적인 드라마 속에서 우리 자신의 이야기와 삶의 여정을 발견하도록 돕기 위해서 마련되었다. 부디 당신과 내가 이 생명의 은혜에 기꺼이 몷입하게 되어서 다른 사람들을 섬길 뿐만 아니라 그들을 도와 이 생명의 삶이 바로 우리 모두의 것이 되게 만들기를 간절히 바란다.


리챠드 J. 포스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이 글은 가일 베비(Gayle Beebe), 리챠드 J. 포스터(Ricard J. Foster), 린다 L. 그레이빌(Lynda L. Graybeal), 토마스 C. 오덴(Thomas C. Odean), 그리고 달라스 윌라드(Dallas Willard)에 의해 집필된 ‘레노바레 영적주제 성경’ 에서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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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를 설정하기: 새로운 삶

성경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간의 삶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것은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러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가능하게 만드셨는가와 그것을 어떻게 실현하시는가에 대한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라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인 ‘임마누엘’이라는 말은 독생자이시고 유일한 구세주이신 한 분에게 주어진 이름이다. 왜냐하면 이 말은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인간 삶에 대한 자신의 끝없는 열정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우리가 삶의 모든 순간순간에서 하나님의 거하시는 처소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였다. 분명 성경의 통일성은 이 세상에 존재하시는 실재이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 속에서 드러나고 있으며 예수님의 삶 속에서 절정을 이룬다. 우리는 이를 ‘삶에 대한 임마누엘 원리’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역동적이고 가슴 떨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성경에 거의 모든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과 항상 함께 계셨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들은 아브라함과 모세요, 에스더와 다윗이며, 이사야, 예레미야, 아모스, 미가, 학개, 말라기이고 마리아와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 또한 바울과 바나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루디아, 디모데, 에바브로디도, 뵈뵈, 그리고 그 이외에 일일이 이름을 다 적을 수 없는 수없이 많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셨다.
이로 보건대, ‘레노바레 안내서’ 의 가장 우선적인 목표는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 대한 실체를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이며 우리의 모든 인격과 모든 삶이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변화되는 과정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새로운 삶을 향해 들어감

만약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그곳에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 대해 알고자 한다면 우리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 대한 가장 친숙하면서 근본적인 전제들을 의심해볼 준비를 해야만 한다. 우리는 겸손한 마음과 항상 회개하는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성경을 읽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에만이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 속에서 모든 인간에 대해서 말씀하신 그 영적이고 풍성한 진리들을 온전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성경을 살펴볼 때에 성경을 알아야 하는 이유와 성경이 가르치는 모든 내용이란 바로 우리가 더욱 더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고 또한 사랑에 대해서 더 많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 속에서 이 사랑을 추상적인 것으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는 실제적인 것으로 경험하게 된다. 또한 모든 온전히 사랑하는 사람들이란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온전히 사랑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 하나님께 더욱 더 순종적인 사람들이 되어간다.
우리의 모든 노력의 목표는 성경을 판단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변화를 나타나게 하려는’ 노력일 뿐이다. 오직 성경의 생명을 우리의 삶 속에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 세계 속에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의 샘물을 신뢰한다. 또한 우리 자신을 그 생명 샘물에 잠기게 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그 생명이 세상에 넘치게 하며 그래서 그 길을 밝히 드러내고자 한다.



말씀의 의미를 더욱 깨닫게 함: 성경 

하나님은 항상 성경과 함께 나타나신다. 성경은 하나님의 책이다. 하나님 자신 이외에 아무도 그 책을 소유할 수 없다. 그것은 눈에 보일 수 있고 이해하기 쉽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이다. 그리고 이 특별한 사랑의 메시지를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간절히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놀라운 특권이다. 성경을 읽고, 공부하며, 암송하고, 묵상하는 것은 항상 그리스도인의 신앙훈련의 가장 기본적인 토대가 되어왔다. 모든 신앙훈련은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받는 영적훈련은 성경에 꾸준하고도 깊게 집중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암송하고 묵상하는 것은 온전히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딤전 6:19)을 위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께서 그 풍성함 가운데 주시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더욱 알게 되기를 온 마음을 다해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우리를 돕기 위해서 주어진다. 하나님은 이 목적을 위해 특별한 성경 말씀을 전해주시고 성경은 우리의 영적인 성숙을 위한 가장 믿음직한 안내서로 사용된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이 세계에 나타내시는 일에 인간의 역할을 사용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인간에 의해서 성경이 기록되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떻게 성경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가와 또한 인간영혼을 영원한 삶으로 인도하는 방식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어떻게 성경을 전달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심사숙고해야만 한다.
이제 우리는 날마다 경험하는 삶 속에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삶의 모든 분야에 넘치게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에서 우리는 두 세 사람씩 정기적으로 모임으로써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의 삶에 나타나게 할 수 있다. 그 속에서 서로를 격려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우리의 날마다의 삶 속에서 발견하며 용기를 내어서 하나님과 함께 이전에 우리가 혼자서 해야 했거나 아니면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일들을 행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일의 진정한 목적은 겉으로만 종교적 계율이나 혹은 행위의 목표를 준수하기만 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는 속사람의 새로운 성숙을 위한 것이다. 이 속사람이란 우리의 영적인 본질이며 생각과 감정의 처소이자 의지와 인격의 핵심이 된다. 시편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6,10) 여기서 날마다 ‘새로워지는 정직한 영’이 바로 ‘속사람’이다(고후 4:16). 
많은 기독교적 전통들이 영적인 훈련과정의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서 각기 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지만 사실은 모두 동일한 근거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인격이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는 것이다. ‘영적성숙(Spiritual formation)’이란 한 사람의 내적인 실체가(시편에서의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의미) 변화되는 과정을 의미하고 이 과정이 성경에서 자주 등장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온전하게 나타난 하나님과 온전히 동행하는 삶의 방식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뜻한다. 우리의 속사람(은밀한 마음)은 예수님의 인도하심과 우리의 순종함에 의해서 그분이 거하시는 곳이 되어간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내적인 세계는 점자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아가게 되고 더 나아가 그분의 인격을 닮은 말과 행동이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주님의 내주하심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빌 2:5)을 갖게 되는 것이다.



신앙성숙의 방법을 이해함: 영적훈련

 우리가 성경에서 발견하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우리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삶이다. 사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고 말씀하셨을 때 의미하신 바로 그 삶이다. 그것은 성급하게 이루려고 하지 않는 평안과 능력의 삶이다. 또한 그것은 구체적이면서 안정된 것이고 단순하면서도 빛이 나는 삶이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삶의 순간순간에 영향을 미치면서도 따로 많은 시간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 삶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쉽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솔직하게 말해서 그것은 성경의 각 장에서 나타났던 믿음의 선진들에게서 이루어진 것에 비하면 결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삶이다. 그 풍성한 삶에 온전하고도 기쁘게 참여할 수 있었던 사람들과 교회공동체에게는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특별한 방법이 있었다. 이러한 방법은 근본적으로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딤전 4:7)에 나오는 말씀과 같은 원리를 포함한다. 이것은 영적인 생명을 위한 훈련의 목표이다. 이러한 영적성숙을 위한 안내서들의 근본적인 목표는 여러 가지 방법의 영성훈련을 발견하고 가르치며 실천할 수 있게 하는 우선적인 도구가 바로 성경이 되게 하기 위함이고 이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더욱 온전하게 행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영적 훈련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들을 통해 이루어지며 그 방법들 속에서 우리 각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연약하고 각기 제각각인 자원을 가지고(이것을 육체라고 부른다)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산 제사’(롬 12:1)로 드릴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영적인 삶에 대해 성숙하기 위해서 거치는 과정이다. 시간과 경험이 소요되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 5:22-23)를 자연스럽고 온전하게 나타내는 인격을 가진 사람이 되어간다.



많음과 다양함

이러한 영적훈련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그런 것들은 금식과 기도, 성경공부와 예배, 복종훈련과 수도생활, 고백과 찬양, 묵상과 명상, 생활의 간결함, 검소함, 침묵훈련, 그리고 절기를 지키는 것 등이 있다. 그러한 영적훈련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훈련하기 위해서나 아니면 하나님에 의해 경건함을 이루기 위해서 훈련되어졌다는 식으로 성경 속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성경에서 나타날 뿐만 아니라 교회역사 속의 성인들의 삶 속에서도 보여지고 있으며 심지어는 우리 당대의 시대에도 나타난다. 이를 통해 ‘은혜 안에서 성장하기’(벧후 3:18)를 위한 여러 가지 삶의 방식들이 실천되는 것이다.
영적훈련은 일종의 의도적으로 고안된 행동으로서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직접적인 노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들을 실제로 행할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으로부터 얻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행하게 된다. 

예를 들면 우리의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 본성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원수들을 사랑하기 위해서 억지로 노력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비참한 실패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언제나 말이다. 이렇게 원수를 사랑하는 능력이나 강함은, 다시 말하면 순수하고 무조건적으로 우리를 저주하고 이용하는 자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우리 자신의 타고난 능력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그렇게 할 수 없다. 결코 그럴 수 없다.
하지만 앞서 말한 삶의 진실이란 우리가 그렇다고 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전혀 그렇지 않다! 그 반대로 의지적인 노력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영적인 삶을 훈련할 수 있도록 결정할 수 있다. 이러한 훈련은 몸과 마음과 영혼에 관련된 모든 행동에 대해서 가능하고 이 모든 것들은 우리 자신의 능력 안에 있다. 분명 그런 일은 언제나 있는 것도 아니고 정말로 완전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임에는 틀림없다. 선택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다. 금식하고 공부하고 혼자 있는 것 등등의 행동을 선택하는 것처럼 역시 이러한 일들도 선택을 통해 가능하다.   


훈련의 목표

영적 훈련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유익을 갖지 못한다. 그런 것들은 어떠한 의로움도 얻게 하지 않고 아무런 올바름도 갖고 있지 않다. 오직 그 훈련들의 목표는(유일한 목표이기도 하다)  하나님 앞에 우리들을 세우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그런 훈련은 의미가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그 뒤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오고 주님은 자기 자신을 드린 이 간단한 헌신을 통해 그로부터 우리 속에 하나님의 신성을 간직한 새로운 인격을 창조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인격은 진실로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자가 되는 그런 인격이다.
다시 말하면 영적 훈련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행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주님은 해야 할 일이 있을 때 그 일을 자동적으로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도록 하시기 위해서 이러한 훈련과정을 은혜롭게 사용하신다.
이제 필요한 일을 해야만 할 때에 그것을 정말 행할 수 있는 이러한 능력을 갖는다는 것은 삶 속에서 누리는 진정한 자유이다. 자유는 억제하고 있던 것이 사라지는 데서 얻는 것이 아니라 훈련받음을 통해서 얻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어려움에 있을 때에, 혹은 위기 속에 처해있다고 생각될 때에 훈련을 받는 것은 너무 늦은 일이다. 영적인 훈련을 받는 일은 인간의 본성을 형성하고 변화시키는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방법이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어떤 위기 속에 있을 때에라도 ‘책임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 또한 적절하게 상황에 반응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기: 노력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과 역사하심의 역사 속에서 이러한 모든 영적인 훈련을 살펴보는 것은 우리들에게 매우 중요한 유익을 가져다준다. 이점은 위대한 사도였던 바울이 우리에게 말한 바와 같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 당연하게도 이것은 종종 사람들 사이에서 말하여지는 것과 같은 ‘의로운 일을 행하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우리의 욕구조차도 벌써 은혜를 받은 자의 반응이다. 그것은 신학자들이 종종 말하는 ‘선행적 은총(prevenient grace)’이다. 우리는 단지 은혜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은혜로 인해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은혜로 인해 기도하고 은혜로 금식하며 은혜로 공부하고 은혜로 주를 섬기며 은혜로 예배를 드린다. 모든 훈련은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촉진된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날마다 해야 할 일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은혜로 된다는 것은 결코 우리가 아무 것도 행하지 않는다든지 혹은 완전히 수동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날마다의 삶 속에서 우리는 많은 결정의 순간들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그럴 때 우리는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행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방법에 ‘예’라고 말하면서 그 일에 동참해야만 한다.
은혜의 반대는 단지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일하는 것(work)’이다. ‘스스로 일하는 것(work)’은 소득을 거두는 일과 관련되어 있는데 간단하게 말하자면 우리 중 아무도 하나님의 사랑이나 용납하심을 이렇게 스스로의 힘으로 얻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리고 물론 우리는 그렇게 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온전하고도 완전하게 사랑하시므로 우리가 전적으로 용납 받을 수 있는 것은 우리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움직이며 존재의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정말로 ‘은혜 속에서 성장하기’를 소원한다면 더욱 열정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은데 우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눅 13:24) 힘써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도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하였다.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벧후 1:5-7)
이것이 바로 우리 모두가 간절히 바라는 진정한 변화의 모습인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들과 함께 발전하기: 여정 
 
성경에서 자주 등장하고 있는 신앙의 위인들은 그들 자신이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으로 만드는(진정으로 변화시키는) 다양하면서도 여러 가지의 영적인 훈련들(삶의 고비들)을 거쳤다. 하지만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일상적인 삶 속에서도 그러한 변화를 경험하였다. 성경은 그들이 에덴동산을 나와서 가나안에 이르고 애굽으로 갔다가 다시 약속된 땅과 바벨론으로 갔고 다시 돌아왔던 그 모든 삶의 여정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 끝까지 이르러’(행 1:8) 자신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그리고 그들이 마지막 목적지에 도달하기도 전에 ‘새 하늘과 새 땅’(계 21:1)이 도래할 것이라고 하셨다. 그들의 여정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방식을 통해서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 어떤 사회적인 상황에 놓여있든지에 상관없이 자신을 나타내셨다. 그들은 많은 방법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여 나갔고 때로는 즐거워하였으며 때로는 불순종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여정은 ‘레노바레 영적주제 성경’의 공동저자들에 의해 집필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 대한 15가지의 주제들 속에 잘 드러나고 있다(다음의 표를 참고하라). 당신이 읽고 있는 이 책은 한 가지 측면을 분명하게 강조할 것인데, 그것은 ‘개인적인 경건생활 속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우리는 이 책이 당신으로 하여금 어떻게 하나님께서 모든 세대를 통해서 그분의 백성들과 함께 하셨는가를 이해하고 그분이 오늘날에도 그 여정 속에서 우리와 계속 함께 하셔서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에 이를 때까지 도우신다는 것을 알게 되기를 소망한다.
 
 


1.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중심본문: 창세기 3:1-13


경건노트 (Devotional Reading)
 
-프랭크 로바흐(Frank laubach), 현대 신비주의자가 쓴 편지

1930년 4월 22일, 오늘 아침 나는 신선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였다. 해가 뜨는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풍성한 임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나는 세수를 하고 옷을 입고 아침을 먹는 동안 하나님이 내 육체를 다스리시도록 의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제 나는 하나님께서 내가 이 글을 적고 있는 동안에도 나의 손을 다스려주시기를 간구하고 있다.... 우리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내어드리지 않고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지금까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 보다 그분에게는 앞으로 주실 수 있는 훨씬 더 많은 유익이 있고 또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습관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유익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럴 때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하나님, 만약 제가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다면 지금 저의 마음속에 무엇을 넣어주시고자 하시나이까?” 그러한 기다림과 간절한 태도를 가지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분이 원하시는 기회를 사용하실 수 있게 해야 한다.

1930년 5월 14일,  오, 하나님과 끊임없이 교통한다는 것은 또한 그분을 내 모든 생각의 주관자로 모시고 그분과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내가 이전에 경험했던 것 중에서 가장 놀라운 일이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일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하루의 반나절도 제대로 그 일을 못한다. 그러나 나는 하루 종일 그 일을 하게 될 날이 오리라고 확신한다. 그것은 새로운 생각의 습관을 갖는 것에 관한 문제이다. 이제 나는 하나님의 존재를 너무나 간절히 원해서 단지 30분 동안 만이라도 그분이 내 생각에서 사라지게 되는 때에는(사실 하루에도 여러 번 그런 적이 있지만) 나는 마치 내가 그분을 버린 것 같은 생각이 들면서 내가 내 삶에 가장 귀중한 어떤 것을 잃어버린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각주1 

-모임의 구성원들이 사전에  ‘읽을거리와 성경본문’을 읽고 나서 이 교재를 공부하는 것이 유익하다. 잠깐 동안의 묵상기도를 하고서 모임을 시작하고 곧바로 아래에 있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 에 대한 연구로 들어가도록 하라.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  연구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는 성경을 읽는 시간이 끝남과 동시에 끝이 난다는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다. 역사를 통해서 프랭크 로바흐 뿐만 아니라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와 노르비치의 줄리안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의 고백을 통해 볼 때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라는 점이 나타난다. 달라스 윌라드는 ‘하나님의 음성(Hearing God)’ 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하나님과 계속된 대화를 나누면서 그분께 말을 하기도 하고 말을 듣기도 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한다는 것을 계속해서 믿고 있다. 이를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이일이 경험을 통해서 매우 풍성하게 검증될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찾아가셨고 에녹은 하나님과 함께 거닐었으며 모세와 여호와 하나님은 얼굴을 마주보면서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모두 종교적인 인류 역사상 가장 특별한 순간이었다고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분명하고도 독특한 역사적 위치를 제외하고 나면 그 사건은 그들이 전혀 예외적인 존재였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가장 자연스러운 삶을 보여주는 사람들이었다. 그것은 바로 인격적인 신뢰와 교제를 통해 그분의 백성들 속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삶이었다. 우리는 기본적인 본성에 따라 살아가도록 되어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오직 우리 영혼에 대해서 언제나 말씀해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서만 살아갈 수 있다.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가는 자들 인 것이다. ((각주2

우리는 더 이상 문자적으로 에덴동산에서 거니시던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수는 없을 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과 대화할 수 있는 많은 다른 방법들을 가질 수 있다. 당신 자신이 하나님과 교통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들을 생각해 보라. 예를 들면 예배를 드리고, 성경공부를 하며, 교제를 나누고, 기도하는 것 등이 있을 것이다. 이번 주 당신이 창조자이신 하나님과 교통하는 모든 시간들을 주의해서 의식해보도록 노력해보라. 이에 더하여 더 새로운 방법들이 떠오른다면 그것들을 추가해보라. 어떤 방법들은 정말 기상천외한 일일 것이다. 당신은 좋은 친구들과 대화를 나눌 때에나 일몰을 바라 볼 때에 혹은 당신이 하고 싶지 않은 일에 대해서 불평을 할 때에라도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당신의 대화의 유형을 잘 생각해보라. 당신은 때로 하나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자신을 생각할 때 외로움을 느끼는가? 혹은 당신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 더 쉽게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경건시간이 도움이 되는가? 야외로 나가는 것이 뭔가 다른 느낌이 들게 만드는가?
한 주 한 주가 지날 때에 하나님과 당신의 대화를 가로막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라. 예를 들면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듣고자 노력하는 동기가 올바른 것이 아닐 수 있다. 우리는 마치 점쟁이에게 나아가는 것처럼 하나님을 찾아서는 안 된다. 우리의 미래를 확인하거나 우리 자신의 유익을 얻기 위해서 나아가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로부터 들은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뽐내기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들으려고 해서도 안 된다. 더더군다나 우리가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내용은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본성과 우리에 대한 그분의 뜻을 오해한다면 왜곡되어버릴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의 관계를 원하시지 우리의 꼭두각시가 되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를 인도하기를 원하시지 단지 우리가 내린 결정을 따르게 되기를 원치 않으신다. 이점을 잘 생각해보라. 당신에게 이러한 모습이 있는가, 아니면 또 다른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로막는 또 다른 장애물이 있는가?
당신이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방법들은 무엇이 있는가? 당신이 느끼고 있는 하나님과의 대화를 방해하는 장애물이란 무엇인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돌아봄
각 사람이 이 질문에 대해서 대답할 수 있도록 적절한 시간을 주도록 하라.


본문이해(Scripture Reading)      창세기 3:1-13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 내가 너더러 먹지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각 사람들이 이 질문에 대해서 대답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하고 성경에서 이 구절을 찾아 읽어보게 하라.


이 익숙한 단락을 볼 때에 당신에게 드는 생각은 무엇인가?

-묵상질문(Reflection Question).
각 사람이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도록 시간여유를 주도록 하라.



내용이해 (Getting the picture)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는 에덴동산에서 일어나는 평온해 보이는 삶에서 시작되고 있다. 아담이 혼자서 살아간다는 것을 보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위해 짝을 만들어 주셨고 그의 특권과 의무를 함께 공유할 수 있게 하셨다.

-간단하게 이야기를 나눈 뒤에 이 단락을 읽을 사람을 지정해서 읽게 하라.

그들은 함께 동식물로 가득한 세계를 다스릴 권세를 갖게 되었다. 아담과 하와의 유일한 일은 그 동산을 잘 돌보는 것이었고 이곳은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음식물을 공급해 주는 곳이기도 하였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의 육체적인 필요를 공급해 주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다. 주님은 그들에게 다양한 주제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고 여기에는 그들이 받을 축복에서부터 그들이 할 수 있는 일과 동산에서 먹을 수 없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까지 해당되었다(1:28, 2:16-17). 아담이나 혹은 하와가 보여준 그들의 반응에 대한 유일한 성경에 나오는 기록은 우리가 방금 읽은 부분 앞에 나오는 하나님께서 하와를 아담에게 이끄셨을 때에  아담이 한 말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 살 중의 살이라 !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2:23)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다양한 주제에 대해서 알려 주셨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성경본문을 볼 때에 단순한 가르침이나 혹은 인도하심 이상의 것을 알게 된다. 이 구절은 쌍방향으로 오고가는 대화를 보여준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실제로 일어났던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친밀한 대화에 대해서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이 이야기가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물리적으로 아담과 하와와 함께 하셨다는 것이며 이는 거의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는 것과 같았다. 아담과 하와는 실제로 동산 가운데서 거니시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실제로 하나님의 눈을 피해 숨을 수도 있었는데 이는 그들이 자신들의 벗었음을 깨닫고 불순종했음을 부끄러워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분은 여전히 그들을 부르셨고 비록 불순종하였던 일일 찌라도 그들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고자 하셨다.


더 깊은 묵상(Going Deeper)

-또 다른 사람이 이 단락을 읽게 하라.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와 나누셨던 대화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자랑스러운 순간일 수 있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이 받았던 오직 유일한 한가지 법칙을 의도적으로 어겼고 그로 인해서 그들은 그 즉시로 자신의 불순종으로 인해 다른 모든 사람을 비난하기 시작하였으며 여기에는 하나님 자신도 포함되어 있었다(간접적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창 3:12)라고 말한 부분을 생각해보라). 여기에서 만약 우리가 그곳에 있었더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우리는 당연하게 그 유혹의 열매를 거부했을 것이라고 쉽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로 인해서 아담과 하와는 가장 좋은 유익을 날려버린 셈이니까 말이다. 그들은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 않은가? 친밀한 관계, 맛있는 음식, 의미 있는 삶,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고 나누는 대화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아담과 하와에게 너무 비판적이 되기 전에 그들이 자신들의 끔찍한 죄를 저지른 후 나무 사이에 숨었던 것처럼 그렇게 숨어있는 우리를 동산에서 바라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생각해보라. 우리의 모든 잘못과 실패를 모두 다 알고 계시면서도 말이다. 우리는 아담과 하와와 얼마나 다를 수 있는가?
아담과 하와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자유였고 하나님의 다른 모든 좋은 선물들도 다 날려버릴 수 있는 자유였다. 하지만 그들이 가지지 못한 것은 그 자유의 능력에 대한 이해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따르지 않는 행동의 결과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또한 금지된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얻게 되는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을 감당할 수 있는 인격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들과 하나님의 관계의 성격은 계속적인 인도함을 받으면서 지도를 받는 것이었다. 아담과 하와에 대한 하나님의 대화의 목표는 그들의 인격을 성숙시키는 것이었으며 어떻게 그들 자신에게 있는 자유의지의 책임을 잘 감당할 수 있는가를 그들에게 알려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게 될 때에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나누는 친밀함 속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었다. 아담과 하와는 완전한 성인의 모습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인격과 영혼은 가정이나 또는 종교적인 공동체의 틀 속에서 자라며 점차 성숙하게 되는 과정을 건너뛰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친히 가르쳐 주셨던 것이다. 세상을 지배하려하지 말고 다스리고 돌보라. 동물들을 압제하려 하지 말고 그들과 친구가 되라. 자손을 통해 세상에서 번성하게 되라. 식물과 열매를 먹으며 살아가라. 에덴동산에 사는 동안 너희들은 먹을 것을 풍성하게 공급받을 것이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이 세계를 놀라운 곳으로 만들어나가기 위해서 나와 연합하라...그런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무조건적인 순종을 하는 로보트를 만들고자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살아가는 법을 설명해 주시면서도 아담과 하와가 자신에게 억지로 순종하게 만들지 않으셨던 것이다.
우리의 인격과 같이 그들의 인격도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것들에 대해서 오직 하나님께서 그들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을 때에만 발전되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끔찍한 결과가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도 동반되었다. 만약 그들이 잘못된 선택을 하였을 때에는 그 결과에 책임을 져야만 했고,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들이 불순종했던 이 명백한 사실로 인해서 그 다음에 이어지는 대화의 중요성은 더욱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하나님께서는 범죄 이후에도 여전히 그들을 찾고 계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불순종을 알고 계셨다. 그분은 또한 그들이 숨어 있다는 것도 알고 계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불러 찾으셨고 그들이 자신에게 고백할 수 있는 기회도 주셨다. 그들의 반항적인 태도는 대화가 계속되는 동안에도 여전히 누그러지지 않았고 심지어 그 다음 세대에서도 마찬가지였고 이는 안타깝게도 아주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시대에 존재하고 있다.

-묵상질문(Reflection Question)
각 사람이 이 문제에 대해서 충분히 대답할 수 있도록 시간여유를 주도록 하라.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나누었던 관계는 우리자신이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에 대해서 무엇을 깨닫게 해주는가?




하나님을 바라봄 (Pointing to God)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사실은 결코 하나님과의 친밀한 일대일의 대화가 중단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그러한 대화에 대해서 수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있지만 여기에 관한 현대적인 예화들도 역시 많이 있다.

-한 사람에게 이 단락을 읽게 하라.

프랭크 로바흐은 이 장의 경건노트(Devotional Reading)에 수록된 글을 쓰기 전에 특별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의 입술을 통해서 자신에게 말씀하셨다고 믿게 만든 경험이었다. 그 때 로바흐는 필리핀에 있는 한 외진 섬인 민다나오에서 선교사로 사역하고 있었다. 이 지역은 너무나 외지고 위험하다고 알려져 있어서 그의 가족들은 좀 더 큰 도시에 머무르고 있었다. 혼자 떨어져 있던 그는 자신의 사역이 잘 진행되지 않음으로 인해서 너무 낙심이 되어있었다. 그가 함께 사역했던 사람들은 이슬람교도들이었고 특히 기독교에 대해서 회의적인 자들이었던 것이다. 어느 날 밤 그는 자신의 숙소 뒤에 있는 작은 언덕에 올라가 그곳에 앉아서 자신의 사역이 잘 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킨 하나님과의 놀라운 교제의 경험을 하게 되었다.

내 입술은 움직이기 시작했고 마치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듯 했다.
내 입에서는 이런 말이 흘러 나왔다. “내 아들아, 너는 이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실패하고 있는 거란다. 너는 단지 백인이라는 이유로 그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만약 네가 미국인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오직 내가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만을 생각한다면 그들은 반응을 보일 것이다.”
나는 저물어가는 해를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하나님, 나는 주님이 내 입술을 통해서 제게 말씀하셨는지 아닌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정말 그렇게 하셨다면 그 말씀은 진리입니다.”

로바흐는 그 경험이 자신의 모든 편견을 떨쳐버리고 인종을 따지지 않게 만들었던 놀라운 경험이라고 표현하였다. 그것은 그의 사역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하나님과 항상 교통하며 살아가는 삶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심화연구 (Going Forward)

-또 다른 사람이 이 부분을 읽게 하라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은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와 나누셨던 것과 같은 친밀한 관계를 하나님과 맺기 위해서 노력하는 방법에 대한 모든 것이다. 우리도 아담과 하와처럼 우리 자신을 위해서나 혹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일들을 행하도록 많은 유혹을 받고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또한 어떤 때에는 잘못된 선택을 정말로 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을 읽거나 연구하면서 혹은 주님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또 그분으로부터 들으면서, 그리고 그분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인도함과 교훈은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는데 도움을 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로 인해서 우리는 어떤 시험이나 문제가 일어났을 때에 우리가 해야만 하는 대로 반응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하나님과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단지 위기의 순간에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깨닫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우리가 하나님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누면 나눌 수록 프랭크 로바흐의 간절한 목표였던 끊임없이 살아계신 하나님과 교제함에 점차 가까워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그가  “하나님, 만약 제가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다면 주님은 제 마음 속에 지금 무엇을 넣어 주고자 하시나이까?”라고 물었던 것보다 더 의미 있는 질문을 할 수 있다.

하나님과 함께 동행한다는 것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묵상질문(Reflection Question)
다시 한 번 각 사람이 이 질문에 대해서 대답할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주라.

-모든 사람들이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도록 시간을 준 다음에 인도자는 아래 단락을 읽어주라.

이 결론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다. 다음 장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연결되는 새로운 방법인 기도에 대해서 살펴보게 될 것이다.

마침기도(Closing Prayer)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나이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바라나이다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나의 말에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사를 통촉하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시 25:1, 4-5; 27:8; 5:1-2)

-각 사람들이 묵상내용과 성경본문을 읽고 다음번 모임 시간을 갖기 전에 다음 장에 나오는 활동을 실천하도록 서로 격려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하라.
그런 다음에 모임 구성원들이 몇 분 동안 묵상기도를 할 수 있게 하고 그런 다음에 다함께 큰 소리로 마침기도를 읽게 하라.

-마침기도를 끝낸 다음에 인도자는 구성원들이 다음 번 모임을 인도할 자원자를 결정하게 한다.


심화학습 (Taking it further)

-추가적인 활동

아담과 하와처럼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기를 원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그분께 말씀을 드리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사용하거나 혹은 그 시간 전부를 사용하고 있다. 우리의 기도생활을 다시 한 번 점검해 보라. 당신은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아니면 당신은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가 대체로 한 방향으로만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번 주에 주님의 응답과 인도하심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대화에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특별한 노력을 해보도록 하라.


-추가적인 자료
Brother Lawrence, The Pratice of the Presence of God. New Kensington, PA:Whitaker House, 1982.
Brother Lawrence and Frank Lauback. Practicing His Presence. Goleta, CA:Christian Books, 1963.
Lauback, Frank C. Letters by a Modern Mystic. Syracuse, NY:New Readers Press, 1979.
Willard, Dallas. Hearing God. 3d ed. Downers Grove, IL:InterVarsity, 1999.

 


-추가적인 묵상 질문

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자신들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것을 읽었다. 그들이 스스로 숨은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볼 수 있었거나 혹은 적어도 주님이 그들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느끼는 일에 대해서 어떤 감각을 사용하고 있는가? 당신은 때때로 그분을 느끼거나 들을 수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그런 일이 이루어지는가?



아담과 하와가 가졌다가 잃어버린 하나님과 대면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특권은 우리 인간 존재가 가지고 있는 자연적인 모습이다. 하나님과 끊임없이 교제하는 삶의 모습에 대해서 한번 상상해보라. 그러한 생각은 행복으로 가득 차게 하는 생각인가? 아니면 약간 두려운 마음이 들게 하는 것인가? 이러한 하나님과의 교제함을 계속 누린다면 당신의 삶에서 무엇이 변화되겠는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첫 번째 범죄를 저지르게 된 다음에 그들은 하나님을 피해 스스로 숨었다. 죄는 우리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가린다. 당신이 자신의 삶의 계획을 뒤바꿔놓았던 잘못된 선택을 했던 때를 생각해보라. 그 실수를 피하기 위해서 당신이 할 수 있었던 일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서 당신은 어떤 일을 해야만 했는가? 당신은 그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 말씀을 드렸었는가? 이 부분을 생각을 할 시간을 좀 더 오래 가져보라. 당신에게 지금 하나님과의 관계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 과거에 지었던 죄나 혹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죄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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