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식] 혁신주의 성경적 상담, 상담소감
먼저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혁신주의 성경적 상담은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표적이자 선한 도구입니다. 이 하나님의 놀라우신 역사인, 혁신주의 성경적 상담을 저는 소개받자마자 받은 것이 아닙니다. 몇년 전 제가 저의 정신과적 질환과 그 끔찍한 고통, 괴로움을 한 목사님에게 털어놓게 되면서 이 한 목사님께서 소원상담센터 팜플렛을 주시면서 성경적 상담을 소개를 해주셨습니다. 처음으로 이 성경적 상담을 소개받고 나서 좀 놀랐습니다. “목회자가 전문 상담을 한다고? 목회하시기도 바쁘실 텐데 어떻게 상담을 전문적으로 하신다는 것이지?” 놀랐습니다. 팜플렛을 샅샅이 다 보았습니다. 보면서 “목회자가 이런 것들을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며 또 놀랐습니다. 팜플렛을 전해주시면서 “꼭 가보세요”하는 목사님을 말씀을 그렇게 귀담아 듣지는 않았습니다. 마치 이런 저의 몇 년 전의 모습을 지금 제가 표현하자면 ‘요한복음 1: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라고 마음 깊이 느낍니다. 왜 성경적 상담을 받아들이지 않았는가. 그것은 제가 현재 성경적 상담을 받고 있기에 배운 내용을 통해 언급하면 그것은 욕구를 충족시키는 삶을 살고 싶어서 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 그리고 성경적 상담을 받기 직전까지 저는 오랜 세월 동안 정신치료와 약물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정신치료와 약물치료를 통해 보통사람처럼 살던 때로 ‘절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명백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 치료들을 통해 보통사람처럼 살던 때의 30% 정도로만 살 수 있어도 그것은 제게 너무나도 다행이고 감사한 상황이었습니다. 정신치료와 약물치료의 한계를 명백하게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성경적 상담을 거부하고 정신치료와 약물치료를 선택했던 것이었습니다. 보통사람으로 살던 시절의 30% 이면 정말 너무 적은 수치 아닌가요? 네, 맞습니다. 그게 얼마나 적은 수치입니까. 그럼에도 정신치료와 약물치료를 받아 보통사람처럼 살던 때의 30%에 도달하여서 욕구를 충족시키며 사는 게 더 좋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대체 얼마나 더 무지한 것이겠습니까. 빛이 비추어졌으나 정말 어둠은 깨닫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 때의 거절을 통해 지금의 은혜를 통해 뼛속 깊이 경험합니다. 그렇게 몇 년을 살아왔습니다. 아무리 좋아져봐야 보통사람처럼 살던 때의 30% 정도까지만 누리면서 힘겹게 꾸역꾸역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저는 제가 보통사람처럼 살던 때의 30% 정도로 살았던 것이 아니라 죄 된 욕구로 인하여 제가 더 악화되고 있었음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정신과적 질환과 증상(불지옥과도 같은 정신적인 고통)과 신체문제는 정말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저를 괴롭게 했습니다. 이것을 끊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자살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무늬만이라도 그리스도인이었기에 자살을 하게 되면 어떠한 결과를 치르게 될지를 알고 있었기에 자살을 하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봤습니다. 그러다 먼지가 수북이 쌓인 소원상담센터 팜플렛을 생각하고 찾아내었습니다. “그래 이게 나의 마지막 살 수 있는 수단일지도 몰라”하며 크게 기대하지는 않고 사실상, 삶을 거의 포기한 채로 ‘자살 하겠는가 성경적 상담을 한 번 받아보겠는가’의 씨름을 하며 찾아갔습니다. 처음에 상담을 갔을 때에 목사님께서는 저의 사전질문들을 통해 여러 질문을 하시고 성경적 상담의 방향에 대해서 알려 주셨습니다. ‘욕구와 소원’을. 말씀하셨을 때에 저는 도무지 알아듣지를 못했습니다. “아니 욕구와 소원? 이게 대체 무슨 관점이고 말이지?” 이해의 첫 걸음마도 떼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전에 살아왔던 방식과 체계가 아닌 매우 새로운 것을 접한 것이라는 점은 깨달았습니다. 마음에 와닿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그 방법과 체계에 궁금증이 생겼고 그것이 저를 정말 낫게 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처음 상담을 받기 시작하면서 저는 제가 그동안 얼마나 심히 고통스럽게 살아왔는지를 또한 어떤 악순환의 삶을 살아왔는지를 지속했는지를 말하며 본격적인 상담을 시작하였습니다. 이후로 본격적인 상담을 받으면서, 저의 심각한 문제가 속해있는 욕구에 대한 주제에 맞는 설교를 듣고, 읽은 후에 소감문을 적는 것으로써 상담과제를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에 이 상담과제를 받았을 때는 어안이 벙벙하였습니다. "나는 지금 정신과적 질환으로 글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운데, 어떻게 글을 읽고 거기서 끝나는 것도 아니라 소감문까지? 소감문을 쓰려면 글을 읽고 주제를 파악하고 군데군데 놓여진 핵심들을 파악해야 하는데 지금 내가 이것을 할 수가 없는데"하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였습니다. 소감문을 어떻게 써야할 지도 몰랐었구요. 그리하여 소감문을 어떻게 쓰는지부터 목사님께 기준 하나하나를 제시 받고 써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소감문을 마치 초등학생처럼 기준을 하나하나 잡고 열심히 상담과제인 설교 소감문 과제를 정말 성경에 하나님을 모시는 구절들처럼 마음을 다하고 뜻을 하다고 힘을 다하여 하였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이렇게 초등학생이 글 쓰듯이 글을 쓰는 이 기준들이 답답해지기 시작하면서 제가 한 편의 완성된 글로써 과제를 하게 되기까지 도달하였습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정말 오래 걸리지 않아 정신과적 질환을 심하게 앓던 저에게든 놀라운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치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표적과도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네가 믿고 따라가기만 하면 너는 반드시 낫게 되리라’하는 표적을 인한 약속을 받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한 편, 저는 여전히 정신과적 질환 또 그로 인한 불지옥과도 같은 정신적 고통 그것에 의해 생기는 신체반응에 대하여 여전히 예민하며 괴로움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놀라운, 제게 느껴지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표적을 한 가지 더 적고자 합니다. 오랜 세월 받아온 정신치료와 약물치료 그리고 성경적 상담에 대해 상대적인 비교로써 언급을 하자면, 혁신주의 성경적 상담으로 도달하는 선한 상태, 평안한 상태를 경험하게 되었고 이것은 오랜 세월 받아온 정신치료와 약물치료로 얻어낸 ‘살만한 상태’보다 더 나은 경험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적 상담을 통해 얻은 이와 같은 선한 경험, 평안한 경험은 정신치료와 약물치료로써 얻어낸 ‘살만한 상태’와는 본질적으로 또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향한 소원으로 얻은 것이며 다른 하나는 욕구를 충족하고자 하는 과정 속에서 정말 꾸역꾸역 어렵게 얻어낸 것입니다. 선한 경험, 평안한 경험은 결코 정신과적 질환, 또 그 증상을 어떻게든 밀어내고자 제거하고자 할 때에 생기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신과적 질환 그리고 끔찍한 증상들을 제거하고 밀어내고 박멸하고자 하면 할수록 그것이 더욱더 나의 삶을 지배하고 나의 상황을 더 악화시킨다는 것입니다. 저도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많이 답답합니다. “그냥 종양 떼어내듯이 떼어낼 수 있는 것이라면 얼마나 편하고 좋을까” 물론 외과수술의 과정과 경과 그리고 결과 또한 사람을 힘들게 하고 초조하게 만든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대체 그렇다면 어떻게 정신과적 질환과 증상에서 벗어날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것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채워서 그 채워짐으로 인해, 욕구에 의한 지금의 끔찍한 악순환의 결과를 내 삶의 여가 수준 정도로 여기는 부분으로 밀려나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아니, 그렇다면 대체 하나님의 것이 뭔데?’라는 의문을 가졌습니다. 제 수준에서 말하자면 하나님의 것은 먼저는 ‘계획, 용서, 희생, 동행, 충만, 능력’ 이 6가지입니다. 이 6가지 각각의 개념 속에서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은혜를 찾아내고 기억하고 그리하여 감사를 찾아내는 것이 제 자신을 하나님의 것으로 채워나가는 것이더군요. 그 감사를 느낄 때에 평안을 선한 상태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래서 앞으로 계속 하나님의 것으로 제 삶을 풍부하게 채워나갈 것이고 그렇게 하나님의 것을 받을 생각을 하니까 기대 됩니다. 저는 더 하나님의 편으로 선순환을 이루는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때마다 주시는 표적을 붙들고 변화된 하나님의 자녀로의 약속을 의지하고 이 정신과적 질환에 의한 고통과 괴로움을 잘 이겨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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