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왕하5;9-14 변화가 이루어지는 과정_2
2014.6.29.주.주일오후
*개요: 상담비전, 1적용, 2역사서, 7실천
9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10 엘리사가 사자를 저에게 보내어 가로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
11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12 다메섹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이켜 분한 모양으로 떠나니
13 그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 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14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
세살 버릇
여든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번 자리잡은 습관이나 패턴은 쉽게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단지 속담을 통해서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변화가 생기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할까요? 성경적인
관점은 변화는 가능하지만 그 변화는 순간적인 변화가 아니라 점진적인 변화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변화는 어느날 갑자기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일정기간의 과정을 거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변화의 과정에 대한 것입니다. 상담 속에서 [변화는 상담을 받으면서 일어나고 또한 과제를 수행하면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를 오늘 말씀속에서 함께 찾아보면서 변화에 대한 소망을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나아만 장군은 문둥병을 치료받기 위해서 아람나라에서 이스라엘로 왔습니다. 그는 많은 수행원들을 거느리고
자신의 병을 고쳐줄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오고 있었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처음 자신의 병을 이스라엘에서
나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이스라엘에서 잡아온 여자노예가 자기 집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 여자노예가 주인님의 문둥병이 이스라엘에 있는
선지자를 만나면 고침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말을 듣고 나아만 장군은
이스라엘에 오기는 했지만 그 여자노예가 말한 선지자가 엘리사 선지자라는 것을 모르고 무턱대고 이스라엘 왕에게 찾아가서 자신의 병을 고쳐달라고 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요구에 이스라엘 왕은 몹시 당황하면서 그런 요구는 이 나라를 공격하려는 빌미를 얻으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했지만 때마침 엘리사선지자가 왕에게 기별을 해서 나아만 장군을 자신에게로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아만 장군은 우여곡절끝에 제대로 목적지를 찾아서 엘리사선지자에게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 선지자는 나아만 장군을 만나지도 않고 다음과 같이 말을 전하게 할 뿐이었습니다. 9절입니다.
“9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10 엘리사가 사자를 저에게 보내어 가로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
이것은 나아만 장군을 대단히 분노하게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과정이 자신의 생각과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습니다.
“11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12 다메섹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이켜 분한 모양으로 떠나니”
그의 생각에
엘리사 선지자는 겸손하게 나아와서 자신은 앉거나 눕고 그는 서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문둥병이 있는 부위에 손을 흔들어서 문둥병을 고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전형적으로 기도를 통해서 혹은 안수를 통해서 문둥병을 고쳐주는 과정을 생각했습니다. 그러한 과정을 생각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도 이러한
일에 대해서 듣거나 보거나 혹은 생각한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도
이러한 상상을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엘리사 선지자는 그렇게 하지 않고 다만 요단강에서 일곱번 목욕을 하라고 했습니다. 나아만이 생각하기에
요단강도 문제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나라에 있는 아마나강이나 바르발강은 훨씬 더 깨끗하고 아름다운데
왜 꼭 이스라엘에 있는 요단강에서 목욕을 하라고 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과정과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상담의
변화를 생각해 볼 때에 이러한 일들이 동일하게 일어납니다. 사람마다 변화의 과정에 대해서 예상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러한 예상은 항상 자기 중심적입니다. 변화는
항상 자신의 편리에 따라 이루어져야 하고 변화는 항상 자신에게 유익을 가져다 주는 쪽으로 진행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모든 변화는 이전의 익숙한 것과 편안한
것과 유익한 것을 바꾸면서 시작됩니다. 그러면서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변화를 기대하면서 자기 중심적인 생각을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살을 빼는
것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가지 방법들이 살을 빼기 위해서 주어지는데 그 모든 것은 이전에 하지 않던
일들입니다. 운동을 하던, 식사량을 줄이던, 약을 먹던, 수술을 받던 그 어떤 것이든지 이전에 하지 않았던 일들이고
그일에 괴로움이 함께 동반됩니다. 그 괴로움을 극복하려고 하면서 비로소 변화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에
기타를 치기로 마음먹었던 때는 대학에 들어가서입니다.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엄두를 못내다가 비로소
대학에 들어간 다음부터 기타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신나게 쳤는데 그 다음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손가락에 물집이 잡히기 시작한 것입니다. 너무
힘들어서 포기할까를 생각했지만 기타치는 선배들의 모습이 너무 멋있게 보여서 다시 이를 악물고 노력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그 변화를 견뎌내지 못했다면 그 이후에 기타를 다시는 잡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늘
손가락에 물집이 생기는 것이 벽으로 느껴졌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벽을 넘으니까 그 다음부터는
그 물집은 굳은 살로 변했습니다. 굳은 살은 기타를 훨씬 더 잘 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나아만
장군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가 그 두가지를 극복하기만 한다면 그는 문둥병을 고칠 수 있었습니다. 엘리사가 자기 생각대로 병을 고쳐주지 않는다는 것과 많고 많은 강 중에서 하필 요단강에서 몸을 씻으라고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두가지를 극복하지 못해서 문둥병을 못고치고 그냥 돌아가느냐 아니면 그것을 극복하느냐의
기로에 서 있을 때에 그를 도와 준 사람은 그의 종들이었습니다.
“13 그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 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종들은
자신의 주인을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더 큰 일을 하라고 해도 했을 판인데 너무 작은
일을 시킨다고 해서 못할 수가 있겠느냐고 설득했습니다. 또한 어차피 깨끗하게 되려고 하는 것인데 씻으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겠느냐고 했습니다. 이 말은 이전에 가지고 있던 잘못된 나아만의 생각을 바꿔놓는
내용이었습니다.
[엘리사가 내 생각대로 고치지 않는다 --> 씻어 깨끗하게 하라는 것을 거부할 필요가 없다]
[요단강에서 씻으라고 한다 --> 더 어려운 일도 할 수 있는데 이일은 작은 일이다]
이러한
논리적인 변화가 나아만의 생각을 바꿔놓았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그러한 생각의 변화가 나아만의 가는 방향을
바꾸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아만은 아람나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바꾸어서
요단강으로 갔던 것입니다.
상담은
이와같이 자신의 잘못된 생각을 바꾸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상담을 받는 동안에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그러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변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그냥 들어만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 속에 있는 잘못된 생각을 바꿀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올바른 결론이 나오고 올바른 방향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일반 심리학에서는
상담의 방법으로 경청, 공감, 동일시라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잘 들어주기만 해도 마음이 풀린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적극적인 권면이 그 죄악된 심성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합니다.
“히3: 12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이러한
적극적인 태도는 악심을 품고 하나님에게서 떨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고, 죄의 유혹으로 강퍅하게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상담시간을 통해서 변화가 이루어졌다면 그 나머지는 자동적으로 이루어진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다음은 그 변화의 방향을 향해 걸어갔을 때 이루어졌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14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
나아만은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그대로 했습니다. 요단강에 일곱번 몸을 잠갔습니다. 일곱번 몸을 씻었습니다. 그것은 시킨 그대로 한 것입니다. 그럴 때 그의 살은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된 것입니다. 상담속에도
상담과제가 있습니다. 그 과제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학교과제도
수업에 배운 것을 익히기 위해 주어지고 그런 과제를 잘 할 때 실력이 늘게 되는 것처럼 상담과제도 행할 때에 마음의 변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하지 않는다면 자연히 아무런 변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한 학교에서 어떤 학생이 크리스마스 전날 치루는 기말고사에서 답을 전혀 적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답안지에다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이 잘 아실 것입니다.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썼습니다. 새해가 되기 전에 교수님이 채점한
답안지가 학생에게 도착했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써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백점을 받고 당신은 빵점을 받았습니다. 해피 뉴 이어!”
나아만
장군도 마음만 변화되었지 실제로 요단강으로 가서 시키는 대로 목욕을 일곱번 하지 않았다면 아무런 변화가 없었을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그가 그 일을 실천했을 때 그 약속을 성취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변화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변화를 실감하게 됩니다. 기타를 치듯이 피아노를 치듯이 그 실력향상을 스스로 알게 됩니다.
이러한
변화의 원리를 기억하고 그 변화를 여러분의 삶속에서 이루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을 통해 깨닫고
그 말씀대로 살아서 삶의 놀라운 성숙과 성장을 하나님 안에서 성취하시는 여러분되시기를 바랍니다.